냉장고 파먹기

여울아
2023-08-0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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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진지 8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집 냉장고는 엄마가 아프기 전에 챙겨준 식재료들이 그대로다.

 

 

엄마가 더운 여름 아침 굶지 말고 시원하게 미숫가루 타먹으라고 줬지만... 다행히 올해는 팥빙수 고명으로 쓰임을 찾았다.

 

 

흑임자도 주셨다. 오랜 만에 흑임자샐러드소스를 만들어 먹었다. 

 

 

들깨가루도 찾아냈다. 들깨 수제비 먹고 싶지만 날이 너무 덥다. 대신 비빔밥 재료로 느타리버섯볶음에 들깨가루를 설렁설렁 섞어줬다. 

 

 

밤을 넣고 밥을 했다. 잘잘한 크기의 밤을 깍느라 엄마는 얼마나 손이 아팠을까. 

 

 

간장고추장된장.. 김치까지. 저장음식에 약한 우리 엄마. 한 5년 전쯤부터 고추장 된장 담그기는 포기했는데, 작년에 미리 사둔 김치재료는 결국 여기저기 나눔했다. 간장은 언제 받았던 건지 기억도 가물가물. 짜지는 않은데 너무 새까매서 이렇게 검게 색입힐 때 사용한다. 그나마 박카스병 크기에 손가락 한마디 정도 남아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는 않는다. 

 

 

깨를 살짝 찧어서 깨통을 채웠다. 

 

 

 

우와. 이 고춧가루도 몇년 됐다. 우리집은 매운 음식을 먹을 일이 없는데, 엄마는 어떻게 고춧가루도 안 먹고 사냐며 매년 조금씩 주셨다. 나중엔 묵은 고춧가루는 엄마한테 도로 가져다 주고  햇고춧가루를 받아오곤 했다. 게다가 몇년전부터 인디언표 매운찜요리 소스를 쓰니까 더 쓸일이 없다. 오늘 두부찜엔 한껏 고춧가루를 넣었다.  

 

작년에 냉장고를 교체하지 않았다면 냉동고 깊숙이 어떤 유물을 맞딱뜨렸을지 모른다. ㅎㅎ

 

엄마는 현재 건강하다. 다만 예전의 일상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을 뿐.  내 생애 마지막 엄마의 챙김이지 싶은 식재료들. 관심 갖고 끝까지 냉장고 파먹기 하자. 

댓글 8
  • 2023-08-06 18:00

    저는… 가끔 집냉장고 청소할 때마다 넘쳐나는 엄마의 저장본능때문에 막 막 뭐라 했었는데…ㅋㅋㅋㅋ
    여울아쌤의 요리들을 보니 뭔가 뭉클해서 살짝 반성이 되기도 하고.. 뭐라 하기 전에 파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근데 여울아쌤 요리 되게 잘하시는 것 같은데요…?! 못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건가?!
    되게 툭툭 만들었는데 맛있어보여요… 아 저녁시간이군 ㅋ

    • 2023-08-07 08:01

      나도 요알못이라고 잘못들은듯 ...;;

  • 2023-08-07 06:59

    이상하게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뒤로는 그날이 현재의 시간의 기원이 되더라고요.
    평생 돌봄을 받다가 돌보아 드려야 하는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어서 그런가봐요.
    여울아, 엄마가 준 식재료 알뜰히 잘 챙겨먹고 있네요. 동은이 말처럼 다 맛있어 보여요.ㅎ

  • 2023-08-07 07:59

    우리집 냉장고에는 주기적으로 봉양시즌에 오시는 엄마를 위해 사다놓은 식재료들이 엄마가 가신 뒤에도 남아있어, 저는 요 며칠 그걸 파먹으며 살았네요~

    엄마가 챙겨준 식재료라니ᆢ 언제적 이야기인가 싶어 새삼 울컥..........

  • 2023-08-07 08:58

    와우, 레베카 솔닛은 어디에나 있구나.
    이 이야기, 내가 찜했어. 나이듦연구소 돌봄말하기 프로젝트 할 건데, 그 때 이 이야기 꼭 써줘.

  • 2023-08-07 11:49

    그러네요…엄마가 챙겨준 식재료.
    이번에 친정 냉장고 열어보고 저희집 냉장고인줄.
    이젠 제가 해드린 보내드린 식재료로 가득한… 엄마의 냉장고.

    여울아쌤~ 알차게 맛있게 다 꺼내드시고 힘내셔요!^^
    저는 이와중에 사진 속
    팥빙수랑 갈비찜 보고 입맛 다시네요. ㅎ

  • 2023-08-08 23:40

    나도 엄마가 준 것 뒤져서 요리해야 겠네요. 내 냉장고 속 장류와 김치, 모두 엄마가 준 것. 그것도 1년 된 것부터 2년 3년 된 것까지ㅎㅎ
    조곤조곤 글 쓴 게 정겹다~ 화이팅! 여울아!!

  • 2023-08-10 09:59

    갑자기 엄마표 김치가 그립다...
    애들은 늘 그랬는데. 이거 할머니 김치지? ㅎ
    울 엄마는 요즘 김치를 거의 안드시네요 ㅠ
    여울아, 여울아 어머님, 화이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