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완이의 쿠바통신1]프롤로그 : 그는 나에게로 와서 텍스트가 되었다

관리자
2020-09-2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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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완

청소년 때 인문학 지식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 눌러앉아서 오 년간 읽는 법, 쓰는 법,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쭉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4년에는 남산강학원과 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이 함께 하는 MVQ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욕에 가서 살짝이나마 세계를 엿보았다.

2017년에는 공부와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쿠바로 넘어갔다가, 공부의 방향을 의학으로 틀게 되었다.

앞으로 신체와 생활이 결합되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

저서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2011),『리좀 나의 삶 나의 글』(2013),『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2015),  『뉴욕과 지성』(2018)이 있다.

 

 

 

토성의 위성들 사이에 술탄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 아주 추상적인 인간을 하나 떠올려 보자.

그러면 인간이 경이롭고 장엄하며 비통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서 인류 전체를 생각하면 당대의 사람들이거나 유전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대부분 쓸모없는 복제품 군상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미천한 신분이어서 고귀한 인간성의 모범 사례와는 거리가 멀지언정 피쿼드호의 목수는 결코 복제품이 아니었다.”

(허먼 멜빌, 강수정 역, <모비딕 하>, 열린문학, 107, 2013)

 

 

 

누군가의 존재감이 미치게 가슴을 파고들 때가 있다. 고귀함이나 미천함과는 상관없다. ‘인간 추상’의 성질 중 하나로 돌리기에는 너무 새로운데, 그 얼굴은 복제품처럼 늘어선 군중 속에 묻히지 않고 긴 여운을 남긴다. 달리 설명할 말이 없어서 결국 그 사람의 이름만 고유명사로, 하나의 개념으로서 남는다. 지난 7년 간 나는 “피쿼드호의 목수”를 찾아다녔다. <모비딕>의 주인공 이슈마엘처럼 광대한 바다를 항해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몸담았던 아메리카 대륙의 두 도시, 뉴욕과 아바나도 넓고 깊은 곳이었다. 그 장소를 가득 메운 것은 사람들이었다. 유학생의 신분으로 교육기관을 전전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장소가 바뀌어도 잊히지 않는 배움을 선사했던 것 역시 길바닥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아메리카인들을 항해하다

 

문탁의 <쿠바 통신>에서 전해드릴 소식은 바로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번 연재에서 아바네로 여덟 명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대단하지도 않고 서로 공통점도 없는 이 사람들을 선택한 기준은 하나다. 인생을 제멋대로 사는 모습으로 나를 감화시켜(?), 쿠바뿐만 아니라 인생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열어주었다는 것.

 

나는 이 글을 초상화라고 생각하고 쓸 참이다. 왜 우리는 미술관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얼굴을 감상할까? 초상화는 인물의 겉모습을 복제하는데 의의가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모르는 타자의 얼굴 속에서 만인을 관통하며 흐르는 감성을 표현해내는데 그 특별함이 있다. 내가 하려는 작업도 이와 비슷하다. 여덟 명의 ‘얼굴’은 낯선 나라 쿠바에 연결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아바네로들의 이야기를 통과해온 내 마음의 항해를 독자 분들도 공유할 수 있도록, 인물을 재구성하여 쿠바로 가는 길을 여는 열쇠를 제작해보려고 한다.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희한한 기획을 하게 된 것일까? 프롤로그로 지면도 얻었으니 썰을 좀 풀어볼까 한다. 2014년, 인문학 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나는 공부의 새 네트워크를 이루라는 임무와 함께 뉴욕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이타카하우스’를 열고 3년 반을 좌충우돌 살다가 2017년에 남미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꿈을 품고 쿠바 아바나로 거처를 옮겼다. (결국 인문대 대신 의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때 정신적 충격을 꽤 받았다. 500년 전 막강한 근대를 태동시킨 아메리카 대륙의 꽃이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엇갈린 운명의 길을 걷는 두 도시가 아닌가. 뉴요커에서 아바네로까지, 극과 극의 인간군상을 경험하자 ‘사람’이라는 한국어 단어가 얼마나 좁은지 깨달았다. 여러 피부색을 지닌 뉴요커 사이의 불친절한 긴장감과 삶에 찌든 냄새는 한국에서 상상하기 어렵다. 아바네로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끈끈하다 못해 끈적거리는 감성은 한국에서 1할도 실감하기 힘들다.

 

이처럼 넓은 스펙트럼의 인간을 만났음에도 내 결론은 하나였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 종은 다 똑같다!’ 신대륙의 인간들도 알고 보면 다 징글징글하다. 한국인 특유의 눈치 보기와 체면 세우기에서 자유로울지는 몰라도 뻔뻔함, 생존본능, 배신의 드라마, 희망과 절망과 망상의 강도는 결코 한국에 뒤지지 않는다. 하루 종일 페이스북 삼매경에 빠져 공무는 소홀히 하면서, 틈만 나면 나에게 ‘체 게바라 혁명의 위대함’을 거들먹거리던 아바나 대학교 사무실 직원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내 입가가 벌써부터 부들부들 떨려온다.

 

그렇지만 이 평범한 남북의 아메리카인들이 나에게 자유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방인으로서 그들과 맺은 관계가 특별했다는 말이 더 옳다. 나는 외부인이자 말더듬이였다. 사람들로부터 감정적으로 항상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그 속이 투명하게 보였다. 심신의 균열이었다.

 

 

 

 

 

 

 

균열을 껴안은 마음들

 

균열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인간이 앞뒤가 맞게 설명되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판단이 꼭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아바네로들과 국경을 뛰어넘어 ‘인류 보편’이라고 불릴 만한 감정과 몸짓을 주고받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반응이 나의 감정, 나의 몸짓과 동일하다 말할 수 없다. 행동들이 튀어나오는 맥락에 특수한 인과관계들이 두텁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가족관계, 어린 시절 기억, 시대적 사건, 공동체의 압력, 선천적인 성향과 욕망처럼 어느 층위에서든 인과는 시작될 수 있다. 이 인과관계들은 일관되게 종합되기는커녕 시간순서도 지키지 않고 꼬여 있는지라, 때때로 센 감정이 튀어나와도 타인의 눈에는 그냥 말도 안 되는 짓으로, ‘지랄하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뻔한 행동도 관심이 없으면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정합성을 따지다가는 개인의 범주를 뛰어넘어 형성되는 거대한 인과의 사슬을, 또 그 사슬들이 무의식의 심층에서 엉키고 접히는 모양새를 놓치게 된다.

 

존재와 자기 인식 사이에 균열은 그렇게 생긴다. 말과 행동이 계속 어긋나는 인지부조화, 병행될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가다가 엉키는 욕망들,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시대와 고향과 제 성깔의 불화들. 누구는 이를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정산건강을 지키고, 누구는 반항의 몸짓이나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누구는 자기가 어떤 균열을 안고 사는지도 모르는 채로,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가 불평을 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경험이 축적되면서, 나는 인간의 행동 방식이 어떤 일관된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성, 신앙, 국가, 자본, 이런 거시적인 힘들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강력한 압력이다. 하지만 같은 압력이 모든 인간의 마음에 같은 식으로 균열을 내지는 않는다. 게다가 외부의 압력과 내면의 경도(硬度)조차 시간 속에서 변해간다. 결국 변하지 않고 징글징글하게 반복되는 것은 사람 자체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관계의 유형, 그리고 사람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 속에서 ‘균열’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으로 인생이야기를 적어나간다. 핵심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앞뒤를 안 맞게 하는 모순 속에 있다. 그 틈새에 그 사람 존재의 차이와 반복이, 세상과의 접점이 숨어있다. 나는 언행불일치의 인간성에 홀딱 빠졌다. 위대하지도 않지만 시시하지도 않은 민낯의 사람들. 나 혹시 변태인가? 그렇더라도 건강한 변태이고 싶다. 사람들의 균열진 속내를 볼수록 내 마음도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마음 본연에는 겉멋이 없다. ‘특정 장소’와 ‘특정 시기’ 속에 조건 지어지는 세상사에서는 정상-비정상의 기준, 피아의 경계, 시비의 결론이 필히 생겨난다. 그러나 이야기의 맨 밑바닥에는 그런 게 없다. 건강한 마음, 병든 마음, 아니면 재생되는 마음만 있다. 그들의 마음이 내 마음과 다르지 않다.

 

 

쿠바, 언어도단의 세계

 

이러한 깨달음이 없었다면 나는 쿠바에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쿠바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뒤죽박죽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용감하게 맞서는 나라로서 명성을 날리면서, 정작 마이애미에서 쿠바로 건너오는 송금액이 없으면 나라 살림이 망한다. 나라는 농업 국가인데 젊은이들은 시골을 떠나 무상 교육을 실시하는 대학으로 몰리고, 병원 물자는 항상 부족한데 또 의사들이 인해전술로 주민들의 건강을 그럭저럭 지켜낸다. 사람들 입에서는 불평이 떠나질 않으나 또 대체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게 뭔가. 이 풍경을 대체 뭐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평등한 사회라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온 사람의 환상도 부수고, 사회주의를 비판하려고 칼 갈고 온 사람의 근거 역시 박살내버린다. 균열, 온 사방에 균열이다.

 

나는 쿠바 전문가가 되려고 쿠바에 간 게 아니었다. 공부 계획은 따로 있었고, 쿠바라는 공간과는 내 고유의 삶의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싶었다. 문제는 이토록 분열적인 공간에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는 것이다. 뉴욕에서는 도시를 관찰하기 위해 뉴욕 출신 지성인들의 개념을 ‘렌즈’로 차용했고, <뉴욕과 지성>을 출판하면서 만남을 갈무리했다. 아바나에서는 이조차도 불가능했다. 쿠바에 관한 책들은 어느 쪽으로든 정치적으로 경도되어 있었다. 어떤 언어를 붙들어도 쿠바의 ‘매직리얼리즘’은 거기서 빠져나갔다.

 

 

 롭 곤살브스(Rob Gonsalves)

 

 

현장과 연결될 수 없는 말들은 죄다 껍데기이고 눈가리개다. 한 쿠바 의사가 ‘나는 국가의 노예’라고 푸념할 때, 그와 함께 당직도 서고 수업도 듣는 의대생인 나는 그의 탄식을 100% 이해한다. 그가 말하는 ‘노예’가 과거 플랜테이션의 흑인 노예와도 다르고 현대 자본주의의 임금 노예와도 다르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이 한마디가 쿠바를 떠나는 순간, 쿠바의 현장과 괴리되는 순간 뒤틀려버린다. 조선일보나 폭스뉴스에 <쿠바 의사는 노예>라는 제목이 대문짝만하게 실린다. 이 언표를 부정해야 하는가, 수용해야 하는가?

 

결국 나는 책 대신 사람을 붙들었다. 고정된 글자 대신 사라지는 말을 택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쿠바를 더듬어보았고, 이야기의 모순을 통해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보았다. 어쩌다보니 현대 미시사를 수집하게 된 셈이다. 그것이 알맞은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든다. 쿠바, 이 작은 나라의 어깨에는 거대 서사들이 굴레처럼 무겁게 씌워져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랫동안 식민지를 겪은 나라, 냉전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나라, 해방의 출구로 혁명의 깃발을 들었다가 끝내 고립된 나라. 21세기에 관광업으로 재기를 도모해왔으나 코로나19가 판을 엎어버린 지금, ‘혁명 정신으로 극복하자’는 말도 그저 공허할 뿐이다.

 

쿠바인들은 이 공허를 끌어안지 않는다. 부침과 역설이 가득한 자국의 서사를 일괄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적 없는 시공간의 모순을 수용한 채, 당장의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길을 발견하는데 집중한다. 그들의 욕망은 제각기 다르다. 불가능한 탈출을 꿈꾸거나, 가족의 안녕에 목숨을 걸거나, 감각과 쾌락에 집중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은 같은 곳을 향한다. 행복을 바란다. 행복의 출구를 찾은 자도 있고 찾지 못한 자도 있으나, 모두 쿠바의 일부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내가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것은 언어를 버리는 법이었다. 이는 내 뉴욕 경험을 완벽히 뒤집는 과정이기도 했다. 언어가 자유롭지 못한 많은 뉴요커들은 공용어(영어)를 익히려 애쓰는 동시에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타인을 구명조끼처럼 붙든다. 말이 고프기 때문이다. 생계를 책임지는 생활 공동체만큼 필수적인 것이 마음의 말을 나누는 언어의 공동체다. 그렇지만 문법을 마스터한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가?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산다. 누구든지 속내를 털어놓을 때 말을 더듬거리고 이해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뉴욕에서 나는 언어의 힘을 확신하게 되었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경청하는 법을 훈련했다.

 

그러나 아바네로들은 언어조차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말해지는 것만큼이나 말해지지 않는 것 속에 진실이 있다. 언어는 정신의 보호막이기도 하지만 방어벽이기도 하다. 상대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기합리화와 인지부조화의 언어에 속지 않는 것이다. 눈짓, 몸짓, 목소리, 기운, 예감 같은 비언어적 세계에 훨씬 풍성한 정보가 숨어 있다. 어느 날 나보다 스페인어를 못하는 한 외국인 친구가 눈과 눈을 맞추며 쿠바인들의 심정을 읽어내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뒤통수 맞는 기분이었다. 나는 얼마나 오만했던가? 여러 언어를 익히고 글쓰기로 밥벌이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소통을 잘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언어에 의존하는 나의 소통은 반쪽짜리였다. 나보다 어린 의대 친구가 “나는 영어도 못하는 바보지만 언젠가 쿠바를 떠날 것”이라고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할 때, 그 말의 의미는 그의 손에서 떠날 줄 모르는 담배에, 혈액암으로 아버지를 여읜 후 유방암 3기인 어머니를 홀로 돌보느라 부르튼 그 손에 담겨있었다.

 

 

재생되는 텍스트

 

어떤 인생 이야기든 모두들 행복을 바란다. 구원을 바란다. 뉴요커나 아바네로나 마찬가지다. 뉴요커들은 돈키호테를 잃어버린 산초처럼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끝없이 배를 불리며, 아바나는 산초를 잃어버린 돈키호테처럼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진작 죽었어야 했을 공허한 말만 반복한다. 풍요로운 도시에서 인생역전의 꿈을 꿔도 불행이 따라오고, 자급자족이 안 되는 상황에서 혁명을 외쳐도 좌절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평화를 향한 마음의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중도를 찾는 길이 쉽지가 않다.

 

그 길을 찾기 위해 우리는 텍스트를 읽는다. 기사소설에 감화된 돈키호테는 기사도를 책 밖에서 실현하겠다며 모험을 떠나지만, 그가 길에서 만난 것은 타인의 인생사라는 또 다른 책이었다. 20대 초, 나 역시 내 세계를 떠나고 싶었다. 철학공부를 통해 사회의 고정관념에서 탈출함으로써 약간의 자유를 누렸으나, 다른 이들에게도 내가 배운 철학이 적용될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책을 덮고 세상으로 나갔더니 기다리고 있던 것은 끝없는 텍스트였다. 언어와 비언어로 적힌 사람들 마음의 텍스트 말이다. 이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타인의 이야기는 때때로 절망과 악의와 굶주림 같은 부조리를 포함한다. 내 얕은 통찰로는 그 속에 깔린 분노의 온도를 잠재우거나 원망의 이분법을 깨뜨리기 어렵다. 그렇다고 모른 척 할 수도 없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이미 읽어버리고 만 이상’ 어찌할 수가 없다. 이제는 내 일부가 된 그 마음들을 짊어지고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고 싶다. 그것은 치유의 차원,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시 살게 되는 재생(再生)의 힘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닐까 싶다.

 

 

이 사진은 감이당 mvq에서 퍼 왔습니다

 

 

내가 그 동안 길에서 맺은 인연과 그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문탁분들과 공유하고 싶다. 익명으로 소개될 아바네로를 통해서 지구 반대편 쿠바를 여행하는 풍요로운 시간을 누리셨으면 좋겠다. 한 명 한 명이 쿠바를 비추는 거울이다. 쿠바 미시사의 한 줄기이고, 쿠바인들의 머릿속을 널뛰는 기사소설이며, 치유되어야 할 상처와 재생되고 있는 흉터가 공존하는 인간의 마음바닥이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들은 우리에게로 와서 텍스트가 된다. 재생, 리플레이 버튼만 눌러주시면 된다. 다음 달에 찾아뵙겠다!

댓글 4
  • 2020-09-27 06:39

    여행이 힘든 시대, 멀리서 온 글이라 새롭네요^^해완샘의 글에서 바다냄새 사람냄새 느껴볼게요~

  • 2020-09-29 09:58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본 벽화 속의 쿠바노인들의 주름진, 그러나 자부심 가득했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노인이 된 아네스 바르다가 아니라 청춘 해완이 만난 아바네로들은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해완의 글로 만나게 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킬지, 기대됩니다.

  • 2020-10-05 15:51

    엠브이큐에서만 만났던 쿠바이야기를 여기에서~~~ 와~~~ 조아요~~

  • 2020-10-07 22:41

    누군가 나에게 텍스트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하겠죠. 고유명사를 가진 누군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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