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돌아왔다 11회] 폭군에 대하여, '안녕 주정뱅이'

새털
2019-06-04 04:42
646

[플라톤이 돌아왔다 11회]

폭군에 대하여, '안녕 주정뱅이'

-국가』 9

 

 

 

 

 

 

 

문탁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지 어느새 9년째다. 시간은 정말 자~알 간다. 정신없이 후딱 지나갔다

세미나에서 오고간 말들을 모아서 ‘10주년 자축이벤트를 준비중이다. 거기엔 분명 당신의 생각도

단팥빵의 앙꼬처럼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 연재를 통해 확인해보시라 

 

 

 

새털 프로필02.jpg

 

:  새 털

 

 

 

 

문탁샘도 아닌데 문탁에 왔더니 쪼는인간으로 살고 있다

요즘 먹고 사는 시름에 젖어 쪼는 각이 좀 둔탁해졌다

예리해져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옥수수수염차를 장복하고 있다

 

 

 

 

 

 

 

 

1. 음주의 법칙, 쉽게 끝나지 않는다

 

 

잠자코 앉아 있는 규 대신 훈이 소주 한병을 더 시켰다. 소주가 오자 주란이 턱을 받친 손을 내려 소주잔을 집었다. 나도 줘. 훈이 주란의 잔에 소주를 따르고 규와 자기 잔도 채웠다. 셋은 잔을 부딪치고 그대로 비워냈다. 다시 한순배가 돌았다. 이번에는 규가 잔을 채웠다.

눈은 내리고, 술은 들어가고, 이러고 앉아 있으니까 말야, 규가 초조하게 술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우리 다시는 서울로 못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지 않냐?

그들은 말없이 소주잣을 비우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굵어진 눈발이 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옅은 취기로도 그들은 위태했다.

-권여선, 삼인행, 안녕 주정뱅이, 72~73

 

 

해가 한낮의 쨍한 높이에서 서쪽으로 기우는 속도로 숲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들은 주종을 소주에서 맥주로 바꾸었고 안주로는 에스프레소에 가까운 진한 커피를 음미하듯 입에 물고 있다 마셨다. 아주 가까이에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중략) 그가 그녀에게 위스키를 마셔도 좋을 만큼 충분히 어두워진 것 같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변압기처럼 아주 적절한 순간에 술의 종류와 도수를 바꾸었고 그녀는 기꺼이 그의 제안에 따랐다.

      -권여선, 역광, 안녕 주정뱅이, 169~171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를 읽으며 나에게 가장 와닿는 장면은 소설 속 인물들이 주종을 바꿔가며 파장에 이른 술자리를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는 순간들이다. 그들은 웬만해서는 술자리를 끝내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한다. 술자리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가볍게 혹은 기분 좋게 시작된 술자리가 고성이 오가고 사람이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망각과 해방의 절정까지 치달아 오르려면 무수한 술병들이 쓰러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술꾼들이 해장술을 마시며 헤어지는 건 그러다보니 어느새 해가 떠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해장술이 낮술로 이어지는 무림의 고수들도 허다하다. 그러나 내공이 부족한 범인(凡人)들은 외부원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술자리를 종료한다. 나는 강제적으로 종료되지 않으면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게 음주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술은 술을 부르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가끔 술꾼들은 끝이 확실히 보이는 술자리를 이어가기 위해 연기를 한다. “! 니가 그러고 가면 내 마음이 편하겠어?”라고 회유책을 펴기도 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대지 마라!”로 강경책을 구사하기도 하다. 이 정치적 화법들과 제스처들은 어떻게든 술을 더 마시기 위한 . 감성코드를 이용할 수도 있다. ‘비가 오니…… 바람이 부니…… 꽃이 피니…… 꽃이 지니…….’ 나의 연기력은 명배우 수준은 못돼도, 중년에 이르러 주목 받는 조연배우급은 되지 않을까 싶다. 소주병을 기울이는 각도와 술잔을 바라보는 시선 하나로 모든 상황을 표현하는 생활연기가 묻어나는 배우쯤은 되리라 자부한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르겠다는 평판이 따라다니는 믿고 보는 음주연기의 리베로’. 그러려면 어떤 계기든 불씨를 잘 살려 술 마실 기회를 만들고 판을 벌이고 선수들을 모으는 기술을 숙련해야 한다. 혹은 이 모든 게 무산되었을 때, 편의점에서 들러 네 개에 만원하는 맥주를 사들고 귀가하는 마음수련또한 겸비하고 있어야 한다.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그날그날의 음주에 감사해야 한다.

 

 

안녕주정뱅이.jpg

 

권여선의 에세이집 오늘 뭐 먹지(한겨레, 2018)는 사실 오늘 안주 뭐 먹지?’이다. 나는 모든 음식을 안주화하는 배포에서 권여선의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확인한다. 권여선은 술꾼들의 이야기를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우회하는 수단이나 가공해야 할 재료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다루고 있다. 권여선이야말로 작가인지 술꾼이지 분간이 안가는 홀림의 경지를 보여준다. ‘=소설=인생권여선의 삼위일체는 모든 것이 연기이고 낭비이고 거짓이며 진실인, 하나의 삶의 형식을 뚝심 있게 보여준다. “매초 매초 알코올의 메시아가 들어오는 게 느껴집니다.”(역광)<span style="background: rgb(255, 255, 255); font-family:

댓글 8
  • 2019-06-04 08:56

    음주라는 윤리적 태도 - 공감됩니다 ㅋㅋ 우정과 지성의 공동체 알콜 윤리학을 탐사해보고 싶어지네요

  • 2019-06-04 21:36

    술주정꾼인 폭군에게는 우정도 지성도 자유도 없다고 단언 한 뒤에

    애주의 취향을 빌어 우정과 지성과 자유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그대의 글을 읽다보니

    애주가든 아니든 상관없이 어느 누군들 품격있는 예의를 접하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

    잠시나마 가면을 벗고 서로의 진실을 만나는 틈새를 어디선가 발견하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 싶구려.^^

    아무튼 새털의 음주 윤리학, 퍽이나 유쾌하게 읽었소이다. ㅋ

  • 2019-06-06 11:35

    술은 생존의 방편처럼 단련시킨 기만과 결별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 사실... 이런 철학으로 그렇게 말술을 마시지는 못했다




    꽉 조였던 나사가 돌돌 풀리면서 유쾌하고 나른한 생명감이 충만해졌다. 


    : 대부분... 이런 기분이 되고 싶어서 벌컥 벌컥 마신 적은 많았다




    그리고.... 새털의 글을 읽었다.

    술... 마시면서 살고 싶어졌다




    이런 글을 쓰는 새털과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내 삶은 훨씬 더 강팍할 것이다.



    새털^^ 간이 쫌만 회복되면 또 마십시다~



    혼자 마시면 뭔 재미겠수~ ㅋㅋㅋ

  • 2019-06-06 14:21

    이 글을 읽고 나니 쫌 슬퍼지는 군.

    술의 맛도 모르고, 그래서 술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새털과 기린, 뚜버기가  공감하는 그 세계, 그 묘미  혹은 그 윤리학을 영영 모를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어딘가 모르게 신비스러운 ,스스로 가면을 벗고 진실을 대면하는 그 순간, 그 틈새를 탐사해 보고 싶다면,  

    ..... 이제라도 술을 배워야 할까나?

  • 2019-06-06 21:59

    그냥 술꾼이 아닌...진정한 '술-되기'군요! ^^

    플라톤보다는, '안녕 주정뱅이'가 몹시도 궁금해지네요.

    건강도 잘 챙겨서...계속 즐거운 '술-되기' 철학 지속하시기를 바랍니다!! ㅋㅋ

  • 2019-06-08 17:36

    폭군을 술주정뱅이라고 하는 플라톤을 이용해서 술을 옹호하다니...

    플라톤이 이 글을 읽으면 기가 막힐지도...

    기가 막힌 글솜씨요!!!

    아니 사실 내가 이 글을 읽고 이 글을 쓴 새털에게 '졌다!'를 외치고 싶달까? ㅋㅋㅋ

    그나저나 

    술이 진짜 기만과 결별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소?

    믿음이 안가는구만... .

    나두 기린샘처럼 나사가 돌돌 풀리는 그 기분 땜에 마셨는데...

    참 그리고 숙취는 아직 대사가 되지 않은 알콜 때문이 아니라

    알콜의 대사체인 아세트알데하이드 때문이라오~

  • 2019-06-09 00:19

    저도 ‘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저의 음주에 대해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찾았는데 새털씨도 마찬가지시네요ㅎㅎ 역시 유전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앞으로도 아주 즐겁고 가끔은 좀 속상하기도한  윤리적인 술자리 꾸준히 이어나가봅시다~~ 집에 갈 때마다 아주 맛있는 와인을 양 손에 쥐고 가겠소~~ 허허허~~❤️

  • 2019-06-16 13:28

    예전에.... 술을 좋아하는 친구와 밤 늦게 까지 술을 먹고

    다시 아침에 만나 도서관에서 2프로를 마시며 "우린 왜 이럴까?"라고 푸념을 늘어놓다가...

    점심 먹으러 가서 다시 해장술로 시작해서 밤늦도록 들이키고 살던 그 때...

    하루는 그 친구가 물었죠. "야!!! 내가 만약에 알콜 중독이 되어 (손을 벌벌 떨며) 너한테 술 한잔만 사달라고 하면 넌 어떻할래?"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사줘야지!!"라고 대답했죠...

    그렇게 사랑했던 술을...

    이젠 떠나보내야지... 했는데

    글을 읽으면서 꼴깍꼴깍 침이 넘어간다.

    그런생각을 하다니... 미안하다

    정말 난 너를 사랑하나보다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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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2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57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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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4.04.09 | 조회 20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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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3.31 | 조회 196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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