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물론 이론의 전장] 3주차 후기 - 형이상학과 신유물론

가마솥
2024-01-20 00:01
405

‘헉! 이럴수가!’

 

이번 세미나에서 내가 후기 쓸 일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질문을 올렸다. 그것도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이다. 그런데에도 ‘이상하게!’ 정군님이 날 지적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지? 무슨 근거로? 혹~~시, 오늘 인디언이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서 지내기 때문에 세미나에 참석 못한 것으로? 에이~ 그럴 리가 없다. 정군님의 인격에 비추어 이성적으로 판단해 볼 때, 그런 이유로 징벌적 후기 작성을 요구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정군님이 떡하니 날 지목한다. 이 것은 이성과 오성, 충족이유율, 결정론을 뛰어 넘는 우발적 사건이 발생한 것인데, 어떤 이유에서 일까? 이 사태를 이해하려면 경덕님이 질문한 형이상학의 역사부터 공부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방대한 자연산물의 연구를 통해서 그 대상들을 체계적인 지식안에서 정리한다. 그 『자연학』에서 ‘자연인 한에서’ 그 현상들을 다룬다(정군). 모든 자연물에 대한 연구는 어떤 규칙이 포괄적으로 적용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자연 만물의 대상의 규칙을 파악하는 인간 정신의 어떤 규칙적인 능력이 있음을 확인한다. 그것을 '지혜'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지혜를' 배우는 학문을 “Metaphysics”라 명명하여 『자연학』의 뒤에 배치시킨다. 여기에서, ‘있음’이라는 ‘존재’인 개념은 그 대상이 보편적이다. 따라서 ‘존재인 한에서 존재’ 즉, 그 운동의 ‘제일원인’에 대한 Metaphysics를 ‘제일철학’이라고 불렀다.(p.280)

 

메타피직스(metaphysics)의 메타(meta)는 '이후'와 '초월적'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어떤 이들은 이 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책 다음에 엮여 있었기에 『형이후학』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메타피직스라는 용어로 줄여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초월적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것을 의도한 행위였다고 주장한다. 만약 메타피직스가 가진 두 가지 의미중 '초월적'을 강조한다면 '파타피직스(pataphysics)'라 부르는게 더 어울릴 수 있다. 이 파타피직스라는 단어는 사이비 철학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 후 일본의 학자들이 "Metaphysics"를 『주역』 「계사」에 나오는 표현("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을 빌려서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 번역했다. - 나무위키 -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여러 뜻으로 쓰이고 있다. 볼프는 철학을 표상력(表象力)에 의한 형이상학(이론)과 의욕력(意慾力)에 의한 실천철학(실천)으로 나누었다. 칸트가 형이상학이라 칭하는 것은 주로 볼프를 따르고 있으나 기존의 형이상학적 논의는 독단적이라 해서 배척했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논하는 기존의 형이상학과는 다르며 인식론에 기반을 둔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헤겔부터는 형이상학이 회복되어 사유(思惟)의 형식이 동시에 실재의 형식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논리가 주장되었다. 하이데거, 야스퍼스도 형이상학을 주장했으나 객체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자각존재의 의미이다. 변증법에서는 형이상학이 자기에게 대립하는 것을 고정시켜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 위키백과 -

 

     신유물론에서 형이상학(Metaphysics)은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나? 먼저 ‘물질’을 보자.

신유물론은 페미니즘, 철학적 존재론, 기술과학철학 등의 분야에서 ‘물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면서 등장한다. 즉, ‘물질’을 대립하는 것의 횡단성 개념으로써 보통 ‘물질적 전회’를말한다. 신유물론은 ‘물질’을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무비판적으로 통용된 수동성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물질은 자기조직화와 형태발생적 힘을 가진 능동적 ‘주체’이다. 유기적이든 무기적이든, 세포든 입자든 간에 흐름으로서의 강도적 생성의 과정(들뢰즈)이 물질의 핵심에 자리잡게 된다.

형태발생적이며 개체적인 과정은 자연과 인위의 이분법을 구분불가능하게 한다. 물질은 이 구분불가능성의 영역에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포스트휴먼의 가능성을 선취하는 것이다. 이때 포스트휴먼의 ‘포스트’는 인간 ‘이후’의 어떤 단일한 형상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포스트휴먼은 혼종성으로 발산하는 물질성 그 자체다. 그것은 단적으로 복수성이며 다양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인 한에서의 존재’는 해체된다. 그러므로 ‘물질적 전회’란 다른 말로 ‘존재론적 전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회를 의미하는 형이상학은 포스트-메타피직스, 들뢰즈의 용어로 ‘순수 형이상학’이다.(281)

 

      그렇다면, 경험하지도 않고 오성으로 인식하지 않는데, 형이상학적 어떻게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번 세미나에서 가장 많이 질문을 받은 퀑탱 메이야수에게 ‘사변적 실재론’을 물어 보자.

퀑탱 메이야수는 현대 '사변적 실재론'을 열어 보인 사람이다. 여기서 '사변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관찰'과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서 이성적 추론에 의해 사물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 이후의 관념론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실재론'이다. 실재론은 존재가 인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근대의 서양 철학은 소박실재론(직접적 실재론, 감각이 우리에게 물체가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알게끔 한다는 사상)에 빠지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사유와 존재의 상관관계에만 접근할 수 있다는 인식을 철저히 관철했다(상관주의). 칸트는 인간이 물자체에 접근하는 것은 절대 불가하며, 인식의 장을 통해서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존재를 분석하기 위해서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인식의 가능성 조건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물론 칸트는 물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덕 법칙을 위해서는 '높이'를 예감하게 하는 물자체와 같은 것이 필히 요청된다. 메이야수에 표현을 따르면 그것은 '약한 상관주의'이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사유로부터 절대자로 향하는 관계를 완전히 금지하고 있지 않다. 칸트 이후 상관주의는 두 개의 방향으로 나뉜다.

헤겔과 니체가 대표하는 '주체주의(subjectalism)'은 상관성 그 자체를 절대화한다. 그들은 사물 자체를 사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사물 자체는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만약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식될 수 없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삶에의 의지'이며 인식이란 '나'에게 있어서의 가치 평가의 결과이다. 진리 또한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나에게 있어 그것이 어떤 유용성을 지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존재는 언제나 특정한 삶의 장면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어떠한 의미에서도 사물 자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계 그 자체, 통일되고 거대한 무언가는 불합리하다.

비트겐슈타인으로 대표되는 '강한 상관주의'는 이성의 무능력을 내보인다. 사물 자체가 존재하는지 여부는 인간이 결코 알 수 없다. '신비란 세계가 어떻게 있는가가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우유성(偶有性, 사물이 일시적으로 우연히 가지게 된 성질)을 앞에 두고 멈춰 서서, 신비를 느끼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요컨대, 칸트는 현상과 사물 자체를 구별하고, 인간의 인식 장치의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사물 자체는 사유 가능하지만 인식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분리된 사물자체라는 사유방식을 해체하고, 어떠한 존재 의미도 삶의 관심에 상관하여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니체는 삶에의 의지 그 자체를 절대화함으로써 주관주의적 형이상학에 빠졌다. 비트겐슈타인은 상관주의를 더 철저하게 밀고 나가 세계의 논리 형식의 근거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제시하지만, 바로 거기서 이성의 한계에 직면했다.

 

      메이야수는 상관주의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만약 존재와 사유가 상관적이라면, 사유 이전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상관주의는 선조 이전적인 언명에 어떠한 해석을 부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상관주의자는 당연히 선조 이전적인 언명이 참이라는 것을 무전제로 긍정할 수 없다. 상관주의자는 선조 이전의 원화석으로부터 과학적 사실을 추론하여 정당화하는 것이 관찰자인 우리이기 때문에, 선조 이전적인,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부터의 바라봄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쨌거나 이러한 변명이 함의하는 바는 상관주의가 더 이상 선조 이전적인 언명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유물론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과학과 수학은 확실히 선조 이전적인 사건에 대한 객관적 앎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의 삶과 세계는 상관주의로 하여금 이유를 잃었고, 끊임없는 우연성에 노출되게 되었다. 우리는 실존 감각에 관련하여 세계와 삶에 절대적 근거가 있기를 바라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여기서 메이야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이유의 부재는 우리의 사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이유의 부재 그 자체가 존재자의 궁극적인 특성일 수 있다. 즉 우리의 한계로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이유가 없음을 통찰하는 것이다. (우발적 절대성이라는 본사실성)

 

정군님이 내게 후기를 제안한 것은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ㅎㅎ

댓글 10
  • 2024-01-21 11:00

    역시 가마솥님 후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이건 비이유율이 아니라 정군님의 빅픽처, 목적론적 기획이라 생각합니다.ㅋㅋ

    그 동안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존재론, 인식론, 윤리-정치학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왔다면
    신유물론을 통해서는 그것을 허물어뜨리면서 연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보니 오히려 존재론과 인식론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는 다른 사유의 강점과 장점을 더 잘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중국사유나 불교적 사유도 그렇고, 애니미즘적인 사유도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신유물론 공부를 통해 얻게 된 부수적 효과네요. 아니, 어쩌면 그게 더 중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중심주의나 인간예외주의, 자연-문화 이분법 그리고 서구(철학)중심주의나 서구보편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니까요.

    • 2024-01-22 09:44

      그렇죠? 뭔가 종합편같은....
      해서, 신유물론에서 논의되는 많은 철학자들을 알고 있으면 더욱 잼있을 것 같은 생각입니다.

      • 2024-01-22 09:59

        아, 글고 텍스트 상에서 오자가 있어요. 들뢰즈가 만든 조어인 미/분화 개념과 관련된 부분인데요. 268쪽에 분화(differentiation)라 되어 있는데 t가 c로 수정되어야 합니다.(지난번 unfold/fold에 이어서 교정이 충실하지 않은 것 같군요.ㅎㅎ)

        • 2024-01-22 10:47

          맞아요. 그 앞 페이지에서는 제대로 되어 있는데....

  • 2024-01-22 00:26

    신유물론을 두고 벌어지는 토론도 의미있지만, 저는 후기를 놓고 벌이는 필연성과 우발성의 전투가 더 흥미롭습니다.

  • 2024-01-22 09:33

    세미나를 빠지면서 '형이상학'에 대해 궁금했는데, 정리 감사드립니다.~ 정군샘의 빅피처 인듯 ^^

  • 2024-01-22 11:05

    징벌적 후기도 아니고 우발성에 의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깨알 재미도 잊지 않고 정리해주셨네요. ㅎㅇㅎ

  • 2024-01-22 19:11

    아니 이렇게 쓰시니까 자꾸 급할 때마다 '가마솥샘?' 하게 되지 않습니까 ㅎㅎㅎ.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번 주도 쓰시면 어떨까 싶지만, 또 그럴 수는 없겠죠? ㅎㅎ

    • 2024-01-24 09:32

      흥! 메이야수 시러!
      난 칸트 조아!

      올해 'ㅇㅇ이성비판' 공부할꺼야!
      이성의 끝이 어딘지 알아 볼꺼야...

  • 2024-01-24 17:56

    와..! 메타피직스에서 순수형이상학까지 쫘악 정리해주셔서 감사해요 가마솥샘!!!
    (오늘의 '이유 없는' 후기 담당은 과연...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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