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교 7주차 발제문과 질문 올려주세요

요요
2024-04-07 07:53
139

어제(토요일) 문탁에서는 밀양할매들을 모시고 탈탈 낭독회를 했습니다. 언젠가 송전탑이 뽑힐 날이 올거라고 말하는 밀양할매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우리는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뜨거운 정동으로 서로를 촉발시키는 어느 한 세계를 공동으로 산출하게 됩니다. 우리가 핵발전소로, 전기로, 기후정의로, 에너지 정의로 연루된 존재라는 것을 깊이 실감하게 되는거죠. <앎의 나무>도 10장에서 이 연결에 대해, 삶의 윤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앎의 앎은 확실성의 유혹에 대해 늘 깨어 있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또한 우리가 가진 확실성이 진리의 증거가 아님을, 누구나 아는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어느 한 세계임을 깨닫도록 우리를 얽어맨다.그것은 우리가 다르게 살 때만 이 세계가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우리 자신이나 타인 앞에서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275쪽)

 

이 책을 과연 생물학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마뚜라나/바렐라는 세포로 부터 시작해서 의식의 창발과 공동세계의 산출, 그리고 그 세계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 과정이 참으로 아름답군요!

 

8,9,10장은 결론적인 장입니다.

8장은 3차등급의 개체에 대해 논합니다. 그동안 서술해 온 1차등급과 2차등급인 유기체와는 논의가 달라집니다. 첫번째 세미나에서 포도나무님이 던진 질문에 대해 이제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9장은 언어에 대해, 그리고 정신과 자기의식의 창발과 공동세계의 산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 혹은 의식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마뚜라나는 정신은 내 머리 속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정신'은 무엇일까요?

10장은 앎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어떤 상호작용 때문에 정상상태가 깨질 때 우리는 성찰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성찰의 순간은 언제일까요? 우리의 공부가 우리의 앎을 돌아보는 그런 계기가 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누구나 인본주의를 비판하는 포스트 휴먼 시대에 '사람다움'이라는 말이 좀 어색하게 들리지요?(저만 그런가요?^^) 그런 어색함과 함께 저자들이 말하는 사람다움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봅시다.

 

발제는 월요일 12시까지, 질문은 오후 8시까지 올려주셔요.

댓글 14
  • 2024-04-08 09:02

    8 9 10장 발제입니다.

  • 2024-04-08 15:47

    239p. 인간은 오직 언어 안에서만 인간이다.
    262p. 정신이란 사회적‧언어적 접속의 그물에서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지, 내 머릿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263p. 우리의 언어적 접속이 우리의 삶에 형태를 부여한다.

    -> 저자는 '정신'을 영혼이나 마음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하기 보다는 언어로 '판단하고', '인지'하는 작용으로 정의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언어화된 생각을 인식하고, 그 생각에 대해 판단해서 다른 생각으로 기존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273페이지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인식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산출한다. ’로 표현한 것일까요?

  • 2024-04-08 16:55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어느 한 세계’이다. 우리가 다르게 살 때만 이 세계가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앎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우리 자신이나 타인 앞에서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275)

    마뚜라나 바렐라가 말하는 ‘성찰’이 새롭게 다가왔다.
    인간 삶의 재귀적 역동성의 일부인 성찰, 이 성찰에 힘입어 사람다운 존재로서 가질 수 있는 세계란 좋아하든 싫어하든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
    “타인과 공존하면서 만들어내는 이 세계는 우리가 사람다운 것이라 부르는 것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 행위는 윤리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세계를 산출하는데 이바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이 연결이야말로 궁극적으로 타인의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성찰인 모든 윤리의 바탕을 이룬다.”(276)
    우리의 세계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세계임을 알게 되면, 타인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공존하고자 하는 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그 다른 생각도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정당하고 타당함을 깨달아야 한다. 공존하려면 더 넓은 관점을 가져야 하고, 양쪽이 만나 공동의 한 세계를 내놓을 존재영역을 찾아야만 한다.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아가야 한다는데...

    일부러라도 세상일에 관심을 끄고 살지만 선거철이다 보니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나, 정치가 왜 이 모양인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한다.
    ‘내가 한 모든 일들이 다른 사람과 공존하면서 이런 세계를 만들어냈다’는데, 그러니 ‘내가 다르게 살 때만 이 세계가 변할 것’이라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사회적 현상을 유기체와 비슷하게 보면 안된다고 하면서(사회진화론 비판?) 사회적 현상들을 생물학적으로 보는 것도 재미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사랑(사람들 사이의 생물학적 일치 때문에 우리 곁에 타인이 있을 자리를 비워두는 행위?) 없이, 남을 받아들임 없이 사회적 과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 없이 함께 산다면 무관심한 위선자의 삶이거나 심지어 남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삶인 것이다.”(277)
    우리와 정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더 넓은 관점을 갖고 그들과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어가려면 어떻게 다르게 살아야하는 것인지... 고민스럽다.

  • 2024-04-08 17:42

    p. 270 이런 고찰 방식은 당연히 우리를 순환적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다. 아마 이것은 에셔의 <그림 그리는 손>처럼 어지러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 만약 관찰자인 우리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세계가 있고, 우리가 신경계에 바탕을 둔 인식활동을 통해 객관적 세계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신경계가 구조적 역동성을 가지고 어떻게 작업하며 또 독립한 세계의 표상을 어떻게 산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관찰자인 우리로부터 독립한 세계를 전제하지 않으면 법칙이란 없으므로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가능함을 인정해야만 할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우리의 경험이 곧 삶의 실천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어떻게 접속되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가득 찬 듯한 규칙성들은 모두 우리가 겪어온 생물학적,사회적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두 극단, 다시 말해 표상주의와 유아론에 빠지지 않도록 또다시 줄타기를 해야만 한다.

    위 문장을 보면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은 ‘우리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세계’와 ‘구조적 역동성을 가지고 작업하며 산출해 내는 세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두 세계는 에셔의 손처럼 알 수 없는 지점에서, 잘 인지되지 않는 방식으로 엮어 있다고 말하는 것 같구요. 마뚜라나가 에셔의 손을 언급한 건 두 세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유와 방식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려주기 위해서 인 것 같습니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것을 ‘아는’ 혹은 ‘모르는’ 자아가 남습니다. 이 ‘자아’가 ‘관찰자’로서 이 두 세계를 모두 기술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때로는 세상과 분리된 나로서, 때로는 세상과 하나(공동개체발생체)인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라’라고 마뚜라나가 제게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정말 마뚜라나가 이 책에서 이렇게 속삭인 것이 맞을까요?

  • 2024-04-08 18:15

    p.224) 집단과 관련해 이타적인 영양의 행동은 영양이 자신의 환경과 (이때 영양이 속한 집단은 이 환경의 일부를 이룬다) 구조적으로 접속된 결과로 실현된다. 이렇게 볼 때 이 행동은 또한 영양이 개체로서 적응을 보존한 결과다. 그러므로 영양이 자신의 특성을 집단 구성원으로 실현하는 한 그 행동에는 아무 모순도 없다. 자신과 집단의 구조접속을 바탕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이 영양은 이타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기주의자이자 이기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타주의자인 셈이다.

    - 생명체는 경쟁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만나 적응을 보존하는 개체가 살아남는 것으로 영양의 이타적 행동은 자신과 집단의 구조접속을 바탕으로 자신을 실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영양의 행동은 이기성과 이타성이 동시에 존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영역에도 적용된다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는 자리와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가 둘이 아니다라는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자리이타심 또는 자리이타행은 수행의 과제라고 생각했는데 생명체의 기본 베이스였다니! 새로운 걸 가져다 나에게 입히는 게 아니라 있었던 걸 회복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p.277) 사람들 사이의 생물학적 일치 때문에 우리는 타인을 볼 수 있고, 또 우리 곁에 타인이 있을 자리를 비워둔다. 이런 행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사랑이라 부르기도 하고, 좀 약하게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내 곁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현상들의 생물학적 기초다.

    - 저자들의 안내 끝에 사랑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어려운 생물학적 용어로 긴장하다가 결론부분에서 사랑으로 귀결되니 처음엔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이 도출해낸 사랑이 왠지 안심이 됩니다. 앎을 알아버렸으므로 다툼만 산출하는 상호부정에서 옮아가 사람다움의 본질인 성찰을 통해 곁을 내 줄 수 있는 사랑의 공간을 비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2024-04-08 18:16

    이렇게 볼 때 어떤 언어적 행동과 그것을 통해 조정된 활동이 서로 닮지 않았음은 결코 뜻밖의 일이 아니다.(‘탁자’란 낱말과 어떤 탁자를 말로 가리키면서하는 행동 사이에 무슨 닮은 점이 있겠는가?) 개체들 사이의 행동조정을 가져오는 재귀적 상호작용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생길 수 있다. 예컨대 ‘탁자’,‘table’,‘mesa’등과 같이. 이때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이 가져오는 활동조정이지, 상호작용의 형태가 아니다.

    →언어행동에서 낱말이(table) 낱말을 말로 가리키는 것이 행동과 닮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재귀적 상호작용이 가져오는 활동조정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상호적인 형태는 아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낱말과 낱말이 가리키는 행동의 연결성을(닮음)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되나요? ‘상호적인 형태’라는 말이 확 안 와닿습니다.

  • 2024-04-08 18:18

    9장에서 언어적 영역은 개체발생적이고 의사소통적인 행동(곧 유기체들 사이의 개체발생적 구조접속을 통해 생긴 행동)인데 관찰자는 이것을 의미론적으로 기술할지 모른다고 합니다.(236). 의미론적 기술이 무엇이 문제일까요? 문득 <사피엔스>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 에렉투스에서 사피엔스로의 진화가 언어 덕분이었다는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인간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은 개미나 벌들의 의사소통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아닌, 추상적인 것을 상상하고 전달할 수 있는 언어가 생김으로써 폭발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그것이 의미론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와 달리 저자는 언어 이전에 언어적 영역이 있었고 이 언어적 영역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언어행동도 사실상 (집단적인 공동개체발생을 통해 생기고 유지되는) 상호 개체발생적 구조접속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행동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언어가 생겨났기 때문에 비로소 사회적 상호작용과 사회적 체계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언어가 개체발생적 구조접속을 통해 확립된 행동조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언어가 상호 개체발생적 구조접속의 영역에서 생겨나는 행동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점은 그로부터 의식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출현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인간의 사회적 삶과 강력한 언어적 접속이 의식을 산출했다는 점은 폐쇄적 체계로부터 윤리로 이어지는 데 외부의 그 어떤 동력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세포로 출발, 의식과 윤리로 이어지는 저자의 논증이 마무리되었네요. 이제 이를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숙제로 남았네요.

  • 2024-04-08 19:03

    p249 언어적 행동이 언어적 행동 조정의 대상이 되었을 때 언어가 생겼다. 이것은 환경안의 객체가 재귀적인 언어적 조정을 가리키는 기호가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재귀적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개인들이 서로를 이름 같은 언어적 구분으로 개성화 할 만큼 친밀해졌을 때, 언어적 영역 안의 한 구분인 자기(self)가 생길 조건도 갖추어졌을 것이다.

    나self 라는 의식의 발생은 단지 언어와 함께 형성된 개념이라는 설명으로 불교의 무아가 더 친절하게 인식되는 군요^^

    이것은 언어가 생겨남에 따라 언어의 상호작용의 그물체안에서 움직이면서 새로운 차원을 갖게 되어진 의식, 정신, 나'로 경험하게 된다. 이는 개체발생적인 구조적 표류를 통해 재귀적 상호작용의 역사를 공유하지만 그러다 구조접속이 허물어지는 일들이 생기면 우리의 개체발생적인 구조적 표류가 방향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된다고도 합니다. (262)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책을 덮으면서 우리의 방향을 바꾸게 한 구조적 표류의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에 잠겨봅니다.

  • 2024-04-08 19:05

    224쪽. 뒤에 남는 영양의 행동은 집단의 보존과 관련된다. 다시 말해 이때 나타난 속성은 집단이 구성원들의 접속을 통해 개체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영양을 특징짓는다. 그런데 집단과 관련해 이타적인 영향의 행동은 영양이 자신의 환경과 (이때 영양이 속한 집단은 이 환경의 일부를 이룬다) 구조적으로 접속된 결과로 실현된다. 이렇게 볼 때 이 행동은 또한 영양이 개체(Individuum)로서 적응을 보존한 결과다. 그러므로 영양이 자신의 특성을 집단 구성원으로서 실현하는 한, 그 행동에는 아무 모순도 없다.

    >> 영양의 행동은 집단의 보존과 관련된 것으로, 동시에 개체로서 적응을 보전한 결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집단의 보존을 위한 영양의 행동은 '윤리적 의미가 담긴 인간 행동의 한 형태'로서 이타주의로 기술할 수 있습니다. 그럼 개체로서 적응을 보전한 영양의 행동은 어떤 면에서 이기적 행동이라고 기술할 수 있을까요?

  • 2024-04-08 19:47

    <9장 p.249>
    "이제까지 우리는 인류에게 언어가 생기기까지 인류가 거쳐온 구조적 표류의 큰 줄기들을 능력껏 재구성해 보았다. 새로운 관찰과 발견이 뒤따르면, 우리가 기술한 것 가운데 세부사항들은 바뀔지 모르지만 주된 내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 발달의 바탕을 이루는 생물학적 근본특성들은 비록 경쟁과 전쟁에 가려 있긴 해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생물학적 근본특성은 사회적이고 언어적인 삶은 아무런 화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인류의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 초기 인류의 뼈대의 해부학적 짜임새를 가지고 성생활을 추측하고 그로부터 사회적 결속과 협업의 가능성을 추론해나가는 방식이다(p.247). 그 결과 저자는 인류 발달의 바탕을 친밀감, 애정, 사랑, 사람다움 등에서 찾는다. 따뜻한 결론이지만 그 추론 방식이 약간 허술하게 읽힌다. 마치 인류애와 사랑으로 모든 역경을 극복하는 오래된 재난 영화를 본 것 같은 허전함 같은 것이 이 책의 끝에 남는다.

    <10장>
    마지막 대화의(p.280)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대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제가 책의 결론에서 약간 시큰둥, 갸우뚱~ 그런 것인지...

  • 2024-04-08 20:20

    이 책의 마무리가 마음에 들어요. 사랑이라니... (!!!) 뻔한 결론 일 수도 있지만 좋네요.
    '나는 실제하지 않지만, 어떻게 나를 인식하는가'에 대한 마뚜라나의 답변으로 사회적 언어를 드는데, 이 점도 공감이 되어서 좋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또다른 하나의 견해를 들은 거 같아서요.
    p263 우리의 언어적 접속이 우리의 삶에 형태를 부여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언어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결론에 도출하기 위한 예로 p259쪽의 뇌량을 자른 폴의 예가 와닿았는데, 내일은 무슨 요일이라는 질문에는 왼쪽, 오른쪽 뇌가 같은 답을 했지만, 당신은 커서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에 대한 질문에서는 자동차 경주자와 디자이너로 나뉘는데, 이렇듯 우리가 나로써 생각한다는 것이 언어가 없으면 나의 의식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예시인거 같다.

    마지막으로 좋은 구절을 적어봅니다.
    p272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어떤 상호작용 떄문에 정상 상태가 깨질 때, 이를테면 다른 문화적 환경속에 갑자기 놓이게 될 때 그리고 그것에 관해 성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형태의 관계들을 산출하면서 "전에는 그것들을 깨닫지 못했다."거나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고 설명한다.

    p277 사랑을 설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분명히 하려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사랑 없이, 남을 받아들임 없이 사회적 과정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2024-04-08 20:24

    질문모음입니다~~

  • 2024-04-08 23:40

    p275 앎의 앎은 확실성의 유혹에 대해 늘 깨어 있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누구나 다 아는 이 세계는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어느 한 세계임을 깨닫도록 우리를 얽어맨다.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이상 우리 자신이나 타인앞에서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한 모든것에는 피할수 없는 윤리가 담겨 있다.
    p279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데 앎을 모르는데 있다.우리를 얿어매는 것은 앎이아니라 앎의 앎이다.
    폭탄이 사람을 죽일수도 있다는 앎이 아니라.우리가 폭탄으로 무엇을 하려 하느냐가 그것을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우리는 흔히 이런 깨달음을 무시하거나 못 보게 억누르면서 우리의 일상행위에 대한 책임을 떠맡지 않으려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앎을 알려고 하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봤습니다.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에 대한 궁금함도 있겠지만 이기적인 마음이 더 크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내 일상을 흔들지 않을정도의 앎 내가 보고싶고 알고 싶은 정도의 앎에서 멈추려고 하는거 같단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타인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으로 변화하고 있으므로 앎을 알았다면 행동함으로 세계를 산출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까요?

  • 2024-04-09 07:19

    최종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362
N 불교학교 1학기 에세이 데이 후기 (7)
경덕 | 2024.04.28 | 조회 83
경덕 2024.04.28 83
361
최종에세이는 여기에 올려주셔요^^ (13)
요요 | 2024.04.22 | 조회 155
요요 2024.04.22 155
360
불교학교시즌1 에세이데이에 초대합니다 (3)
요요 | 2024.04.16 | 조회 144
요요 2024.04.16 144
359
불교학교 에세이 1차 초고 여기에 올려주세요 (10)
요요 | 2024.04.15 | 조회 131
요요 2024.04.15 131
358
[2024불교학교] 시즌2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알까? (8)
요요 | 2024.04.10 | 조회 253
요요 2024.04.10 253
357
불교학교7회차 후기입니다 (3)
미리내 | 2024.04.09 | 조회 86
미리내 2024.04.09 86
356
불교학교 7주차 발제문과 질문 올려주세요 (14)
요요 | 2024.04.07 | 조회 139
요요 2024.04.07 139
355
불교학교 6주차 후기 (5)
인디언 | 2024.04.04 | 조회 140
인디언 2024.04.04 140
354
불교학교 6주차 발제와 질문 올려주셔요~ (13)
요요 | 2024.03.31 | 조회 150
요요 2024.03.31 150
353
불교학교 5주차 후기 (5)
효주 | 2024.03.31 | 조회 147
효주 2024.03.31 147
352
불교학교5주차 발제와 질문 올려주세요 (10)
요요 | 2024.03.24 | 조회 175
요요 2024.03.24 175
351
[불교학교 1] 4주차 후기 (7)
포도나무 | 2024.03.19 | 조회 189
포도나무 2024.03.19 189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