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가족⑥] 감상문

무화
2020-09-2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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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년 전쯤엔 계몽주의적인 책을 참 좋아했던 거 같다. 내가 평생껏 의심치 않고 살았던 이데올로기의 표면을 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을 따를 것인지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기분이 참 좋았던 거 같다. 나에게 주도권이 돌아온다는 느낌. 착각이더라도!

지금은 글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게 좋다. 어떤 단어 중에서 이 단어를 골라냈을지, 문장과 문장이 다급하게 이어져 있는지, 그 다급함에 느껴지는 설렘과 두려움이 글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그렇게 글을 읽다보면 열일곱 늦은 밤에 한 명 한 명 손을 붙잡고 혼란스러운 자신의 얘기를 처음으로 꺼내서 내보였던 시간이 생각난다. 그래서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문장은 이거다.

샤먼대학의 작은 루쉰 박물관에서 "我可以 나도 사랑할 수 있소" 라는 글귀를 발견했을 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 이희경 저자님

나도 루쉰이 쓴 책이 궁금해지고, 루쉰의 감정이 궁금해질 정도로, 애정 넘치는 사랑이 있어서 책이 좋았던 거 같다.

2. 자유연애환상

나는 친구들에게, 연애 많이 하고 살자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만날 사람이 하나도 없어..'하는 절망적인 답변이 돌아오곤 하지만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이 사랑 많이 하고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어제 내가 문턱에 발을 찧어서, 너무 아파서 끙끙대다가, 결국에는 내가 우스워 웃었다" 와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들도 들어주고

이 사람이 올해 여름엔 가벼운 숏컷이었는데 어느새 동글동글한 단발이 되어간다 하는 것도 알고 있고

그래서 22살의 내가 20살을 기억할 때, 굳이 일기장이나 메모나 사진첩을 뒤지지 않아도 금세 행복해질 수 있는. 나는 그런 것이 연애의 맛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서-감정에 대해서는, 3년째 연애중이지만 아직도 확신하기가 힘든 거 같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우리가 하나의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드라마로 만들어진 사랑꾼, 영화에서 본 사랑의 결말, 책에서 읽은 사랑의 슬픔을 각자의 취향에 맞게 골라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취향에 맞는 선택을 하고 사랑을 꾸며나가는 것이 아닌가? 언젠가는 내가 '사회의 경쟁구조와 꿈'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만져본 것처럼,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실체도 만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때 나의 사랑은 어떻게 되는가.

하고 두려웠다. 책의 [스위트홈 - 잔혹동화]라는 파트를 읽을 때, 연인과 나의 관계가 언젠가 끝난다는 것이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파토스(책에서 콩깍지라는 말로 다시 한번 풀어 설명해준다)가 유지되는 것에 내 연애가 좌우된다면, 그건 간절한 사랑보다 맹목적인 믿음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나 좋아하는 것이, 이 사람을 사랑하여 연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3. 가족의 위기 어쩌면 연애의 위기

하지만 청년들의 위기는 아니다. 사실 나는 청년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서 연애 못한다는 말에 한번도 동의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절박하고 궁핍한 세상에서 사랑은 위태롭게 핀다. 사랑이 조성되기 좋은 환경이니까.

"내가 직접 하는 사랑이 투자효율이 떨어진다" 이 말이 더 직설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갈등이라는 걸 잘 못 다루는 것도 맞지만, 애초에 로맨스 넘치는 사랑 싸움을 할 정도로 긴밀한 연애를 하기 자체가 쉽지 않다. 본인의 삶에 본인이 너무 가득하다. 모든 게 '나'라는 키워드로 굴러가고 그렇게 해야만 능률적인 삶을 살 수가 있다. 내가 밥을 먹고 싶을 때 먹기 시작해서, 내가 원하는 속도에 맞춰 오늘 아침부터 땡겼던 김치나베를 먹고 다시 업무를 시작해야 업무 스트레스가 덜하다. 일이 끝나고 영화를 보고 싶을 때엔 충동적으로 영화를 보고, 늦은 버스를 타고 집에 오기도 해야 한다. 근데 연인과 밥을 먹으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일상적으로 생긴다. 자위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안해본 사람이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거지. 근데 섹스는 내가 진짜 더럽게 못해서 상대방 기분을 다 망쳐버리고, 누구의 성욕도 채우지 못한 채, 등을 돌려 누워 잠을 청해야 할 수도 있다. 다 리스크라고 봐야 한다.

그 리스크를 감수하고 누구를 사랑한다고 가정해도, 일반적으로 그 사람의 삶에도 본인이 가득하다. 이게 자기애의 측면이 아니라 생존의 측면에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연애라는 행위 자체가 도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2020년) 연애는 약간 철이 지난 것 처럼 보이지만, 10년 뒤에는 복고 풍의 무언가처럼 보일 수도 있다. 지금도 당신의 대한 나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보다, 나의 닿을 수 없는 외로움에 대해 고뇌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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