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4회] 무엇이 비린 것인가?

요요
2022-01-16 17:08
449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현실을 웅변한다.

 

새벽이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니 더더욱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집단 사육하고 그렇게 생산된 고기를 먹는 삶의 방식에 대해 회의가 커진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면서 고심 끝에 나름의 윤리적 결정으로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육식 권하는 사회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고기 권하는 사회이다. 육식문화는 튼튼한 몸과 강인한 체력을 강조하는 건강담론, 위생담론과 함께 사회 진보와 경제 성장의 상징이 되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의 길을 간 일본을 보자. 일본은 7세기 이후 1000년이 넘도록 이런 저런 이유로 네발달린 짐승을 먹는 것이 금지된 나라였다. 그런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의 정책으로 육식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몸집이 왜소한 것도 나라가 부강하지 않은 것도 육식을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와규가 맛있고 비싼 고급 쇠고기로 등극하고 쓰끼야끼와 같은 음식이 일본의 대표음식이 된 것은 채 150년이 되지 않는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불교문화마저 바꾸어버렸다. 그때부터 승려들의 육식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개화된 문명인으로 살려면 육식을 좋아해야 했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인도도 오랫동안 채식문화가 일반적이었다. 소년시절의 간디 역시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면 서양인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디의 부모는 경건한 힌두교도로 육식을 멀리했다. 간디는 부모 몰래 친구들과 육식을 한 것 때문에 양심의 고통을 느꼈던 경험을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근대문명은 고기를 전 세계의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공장식 축산과 도살은 근대문명에 필수적인 하나의 구성요소가 되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 건강해질 수 없고,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믿음이 지배한다. 채식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생각과 행위를 육식주의, 고기 중독이라고 부른다. 육식이 몸에 좋고 더 맛있다는 것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미각의 쾌락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관음증적 포르노에 가까운 먹방 마다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등장하고 그것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우리를 보면 육식주의가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육식은 비린 것, 채식은 향기로운 것?

그렇다면 붓다는 육식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불교는 육식을 금한다는 우리의 통념과 달리 붓다는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걸식으로 음식을 구한 고대 인도의 불교 수행승들은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붓다가 금지한 것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폭력과 살생이었지 육식이 아니었다. 세 가지 경우에 육식이 금지되었다.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거나, 자신을 위해 죽였다고 듣거나, 자신에게 먹이기 위해 죽인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는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주어진 음식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이런 불교 수행승들의 음식문화는 육식과 기름진 음식을 엄격하게 금지하던 수행자들로부터 의혹을 샀다. 『숫타니파타』에는 대놓고 붓다의 육식을 문제 삼는 대화가 등장한다. 히말라야산에서 야생수수, 풀씨, 야생 콩, 나무열매와 같은 수수하고 거친 음식만을 먹으며 금욕하던 아마간다라는 고행자가 있었다. 그는 육식을 비린 것,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간다는 붓다가 물고기나 동물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알고 붓다를 찾아가 비난 섞인 질문을 던진다.

 

하느님의 친척인 그대는 새의 고기를 훌륭하게 요리해서 쌀밥과 함께 즐기면서도, 나는 비린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뜻을 그대에게 묻건대 그대가 말한 비린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아마간다의 물음에 붓다는 무엇이라고 답했을까? 붓다의 대답은 명확했다.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말과 행위,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고 비천하게 행동하는 것이 비린 것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육식이냐 채식이냐를 가지고 비린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려 하지 말고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답이었다.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붓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무엇을 살펴야 하는 지 놓치고 있는 아마간다의 허를 찔렀다. 붓다는 매일같이 고행하고 경전을 외우고 철마다 수련하는 루틴에 철저하다고 하여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고 그 조건을 잘 살펴 의혹에서 떠나는 것이다. 청정한 삶은 어떤 금기나 계율을 묵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는 것, 즉 지혜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붓다는 식사초대를 받아 훌륭한 음식이 나오면 거절하지도 물리치지도 않았다. 어떤 음식이든 감사히 먹었다. 붓다의 위대함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붓다의 위대함은 음식의 맛에 탐닉하거나 매혹되지 않는 데 있었다. 식사 초대에 응하여 음식을 먹을 때 붓다는 다음에도 이렇게 좋은 음식을 대접받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미각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렸기 때문이다.(『맛지마니까야』 『지바까의 경』) 육식이냐, 채식이냐가 아니라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요구한 일상의 윤리이자 태도였다. 비린 것은 육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괴로움을 낳는 탐·진·치인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붓다는 당시의 고행주의자들과 달리 금욕과 고행을 절대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쾌락주의는 눈먼 욕망을 따르는 것이요, 고행주의는 욕망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붓다의 관심은 육식이냐 채식이냐, 쾌락이냐 고행이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붓다가 감각적 쾌락과 미식을 즐긴다고 오해받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한편 이와 반대로 붓다가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바라문 우다인은 제자들이 붓다를 존경하고 따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 했다. 그는 붓다가 ‘식사를 적게 하고, 어떠한 옷으로도 만족하고, 어떠한 음식으로도 만족하고, 어떠한 처소로도 만족하고, 고요한 숲속에서 멀리 여읨을 닦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붓다를 찾아가 그런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붓다는 그의 믿음에 어긋나는 대답을 했다. 자신은 때때로 양껏 배부르게 먹기도 하며, 좋은 옷감으로 만든 멋진 옷을 입기도 하고, 고급요리를 먹기도 하며, 럭셔리한 인테리어가 된 누각에서 지내기도 하고, 재가자, 대신들, 왕들, 이교도들과 어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제자들이 자신을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금욕 때문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지혜를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답한 것이다.(『맛지마니까야』 『훌륭한 가문의 우다인에 대한 큰 경』)

 

붓다의 대답은 ‘나의 가르침은 고행이나 금욕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반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간다의 물음에 대해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한 대답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붓다가 누구보다도 당시에 성행했던, 제사를 빙자한 무의미한 동물 살육에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고, 잔인하고, 공격적이고, 무례한 것이야말로 비린 것이다. 비린 것은 우리 자신을 괴로움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타자들 또한 괴로움에 빠뜨리는 말과 행동과 생각이다.

 

우리는 더 이상 붓다가 비판했던 동물희생제의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고기가 되기 위해 사육되고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수는 당시의 동물희생제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나라에서만 2020년 한 해에 도살된 전체 가축 수가 11억 마리가 넘는다.(이중 10억 마리가 닭이다.) 전 지구적인 범위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매년 100억 마리 이상의 가축이 도살되고 있다. 만일 지금 우리의 세상에 붓다가 함께 살고 있다면 아마간다의 질문에 대해 붓다는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

 

 

나는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니다’라는 붓다의 대답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는 붓다의 대답은 피비린내와 악취가 진동하는 육식의 현실에 대한 외면도 도피도 체념도 합리화도 아니다. 붓다의 대답은 육식은 나쁘고 채식은 좋다는 선악 판단이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나아가 그 대답은 비린 것의 근본을 탐색하게 한다. 더 맛있는 것을 원하고 미각의 쾌락을 좇고, 그리고 생명 보다 자본과 이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욕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마간다는 ‘당신이 생각하는 비린 것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붓다는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붓다의 대답을 듣고 아마간다는 그동안 자신이 옳다고 고수했던 고행과 금욕을 버리고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한편으로는 동물들을 오직 인간을 위한 고기로만 취급하는 공장식 축산의 현실에 분노하고, 다른 한편 종종 육식과 채식 사이에서 번뇌에 빠지곤 하는 우리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 사이 그리고 아마간다와 붓다 사이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일까? 나는 언제쯤이면 붓다를 따라 담담하게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까?

 

 

 

 

 

댓글 10
  • 2022-01-17 10:35

    미각의 쾌락~ 딱 요즘 맛집전성시대 문화네요. 전 어디선가 본 이 말을 자주 떠올리는데요, 맛을 탐닉할수록 멋을 상실한다는..멋을 찾고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 멋진 세상에 대한 성찰로 읽혔어요^^

  • 2022-01-17 10:40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ㅋㅋ... 요요님의 글을 읽으면서 예전에 동아시아 근대성 공부할 때 읽었던 <메이로쿠자시>(明六雜誌)가 떠올랐어요. 그 잡지는 메이지초기 계몽학술잡지였어요.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만들었던 최초의 근대잡지이죠. 그런데 그 잡지에 '소고기' 이야기가 엄청 나와요. '소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근대 일본 지식인들의 엄청난 이슈였죠. 단발이나 양복 못지 않게 소고기를 먹는 문제가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가, 아닌가의 바로미터였으니까요. 결국 1872년(메이지 5년) 천황은 고기반찬을 들이라 명합니다. 근대화가 공식적으로 천명된 것이지요.

    그런데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오랫동안 육식을 해왔지요.세종대왕이 엄청 육식을 즐겼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당뇨?! ㅋㅋㅋ)  왜 전근대 일본사회는 육식을 하지 않았는데 조선은 육식을 했을까? 자기수양-성리학적 주체인 조선 사대부들은 육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 이런 궁금증이 듭니다.

    갑자기 육식에 대한 문화적 해석, 고고학적 접근을 해보고 싶어졌어요^^ 

  • 2022-01-17 10:55

    최근 <Seaspiracy>와 <Cowspiracy>라는 다큐를 보고... 식구들과 먹거리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고민이 깊어졌더랬지요.

    부다의 가르침에 대한 선생님의 글이 참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무엇이 비린것이고, 탐진치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고민으로부터 해탈하는 지혜!

    탐나네요^^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 2022-01-17 11:20

     "육식이냐, 채식이냐가 아니라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요구한 일상의 윤리이자 태도였다. 비린 것은 육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괴로움을 낳는 탐·진·치인 것이다."

    요즘 여러가지 이유로 채식을 해야하나 고민중이었는데 샘 글을 읽으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오네요^^

    감사합니다~~

     

  • 2022-01-17 11:25

    너무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1-17 12:44

    무엇이 비린 것인가...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채식모임하면서 고민했던 부분이라 깊이 와닿았습니다

    요요샘,  감사합니다~~

     

  • 2022-01-17 18:23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일 수 있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1-18 09:54

    주말에 만난 아낫님은 비건이세요. 아낫님은 공장삭축산과 도살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위험성을 말씀하시더라구요. 사람다운 일을 하기 어려운 세상이네요....잘 읽었습니다.

  • 2022-01-19 18:11

    오랜 질문을 여러 결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2-06 11:23

    먹는 걸 좋아하는 자신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들어온 한 구절은 이거에요.

     “붓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무엇을 살펴야 하는 지 놓치고 있는 아마간다의 허를 찔렀다.”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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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128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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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8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8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6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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