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물론 이론의 전장] 강의 질문 모음

정군
2024-01-25 16:44
401

 

2024 겨울 세미나 강의 <신유물론 이론의 전장> 세미나가 모두 끝났습니다. 

한 주간 휴지기를 갖고, 2월7일, 14일 박준영 샘의 질의응답 강의를 듣습니다. 

하여, '질의응답 강의'에서 박준영 샘께 전달할 질문을 모읍니다.

세미나에 참여하셨던 분들, 강의만 들으시는 분들 모두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 게시물에 댓글로 올려주셔요.

(세미나 중에 했던 질문을 정리해서 다시 올려주셔도 괜찮습니다)

강의 진행팀에서 질문을 추리고 정돈하여 박준영샘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모든 질문을 전달하지는 않습니다. 진행팀의 논의에 따라 질문을 선정하는 과정을 거칠 예정입니다)

 

 

댓글 2
  • 2024-01-29 01:57

    ― ‘유물론’은 대개 ‘관념론’과의 대립 속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그러한 대립보다 오히려 ‘유물론’ 안의 대조점들이 부각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 ‘관념론’이 유의미한 영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될까요? 아니면, ‘신유물론’처럼 과거의 ‘관념론’을 계승한 철학적 흐름도 있을까요?

    ― ‘유물론’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정의로부터 ‘신유물론’의 새로움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더불어, ‘신유물론’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 ‘신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의 능동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유물론’을 철학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면 고대 원자론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선생님은 책에서 고대 원자론이 끝내 ‘물질의 수동성’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하셨는데요. 허공과 원자를 가장 기본적인 존재론적 원리로 파악하는 가운데, 원자가 허공 속에서 우발적(클리나멘)으로 운동한다고 본 에피쿠로스주의적 자연관에서의 ‘원자’는 언뜻 물질의 능동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원자론이 ‘물질의 수동성’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또, 이 문제를 해명하면서 ‘과정이 주체로서의 원자를 대체’하고 ‘우발적인 것들의 필연-되기’로 ‘클리나멘을 극단화’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이 ‘통상적인 에피쿠로스 해석’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 ‘신유물론적 시간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고대 스토아주의자들의 시간 개념이 크로노스, 아이온, 카이로스의 시간 개념이 등장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은데요. ‘사건의 시간성’이라는 ‘아이온의 시간’와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는 시간’으로서 ‘카이로스의 시간’은 조금 헷갈립니다. 이를테면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는 사건’으로 열리는 시간은 ‘아이온의 시간’이기도 하면서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나요?

    ― 서술해 주신 텍스트에 비춰볼 때 현대 이전 철학사에서 명시적으로 스스로를 유물론자로 자각하지 않은 인물 가운데 가장 신유물론적으로 읽을 수 있는 철학자가 경험론자인 흄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데카르트를 위시로 한 이른바 ‘대륙철학’의 전통은 유물론과는 거리가 먼 듯 보이고요. 신유물론적인 관점에서 근대철학을 구성하는 가장 큰 두 가지 전통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 선생님께서는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신유물론’으로 평가하지는 않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발성’ 개념의 발견이나, 에피쿠로스 주의의 재독해와 같은 지점들을 생각해 보면 알튀세르를 신유물론적 사유의 시초적 인물로 볼 수도 있지 않나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신유물론’ 담론 안에서 알튀세르가 차지하는 위치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 책에서 선생님은 제인 베넷을 ‘생기적 신유물론’으로 분류합니다. 목차 상에서도 본격적인 ‘신유물론자’들 사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알튀세르나 버틀러 같은 ‘신유물론’ 이전 철학자들을 다루는 절의 맨 끝에 위치하고요. 그리고 베넷의 ‘생기적 신유물론’을 ‘물질 외의 어떤 것을 힘과 생명이라고 간주하자마자 유물론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들뢰즈의 논의와도 멀어진다’(77쪽)고 평가합니다. 여기서 의문은 ‘물질=힘과 생명’이라고 하지 않고, ‘물질⊃힘과 생명’ 또는 ‘물질의 성질로서 힘과 생명’이라고 한다고 해서 베넷의 이론이 ‘유물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조금 과한 평가가 아닐까요?

    ― ‘신유물론’은 현대과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전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질의 능동성’을 긍정한다는 것부터 이미 ‘물질의 과학’으로서 ‘물리학’과 뗄 수 없는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요. 그런데 의문은 이런 식으로 논리를 구축하다보면 결국엔 물리학으로의 환원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를테면, 물질의 능동적 운동으로 ‘구성’된 거시세계를 확증하려면 미시세계의 운동을 관찰하여야 하고, 이는 ‘실험-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으로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초월적 환원’을 피하려다 ‘과학주의적 환원’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유물론이 비판하는 ‘문화와 자연의 구분’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 바라드는 원인-결과의 인과성을 ‘간-행(intra-action)하는 물질’ 개념으로 대체한다고 합니다. 풀어보자면 ‘사이에서 일어남’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신유물론이 특정한 ‘관계항’이 아니라 ‘관계’ 또는 ‘사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또, ‘관계’와 ‘사이’를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항’이 있기 때문에 ‘사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그게 아니라, 관계가 관계항에 선행하는 것이라면, 논리적으로 오로지 ‘관계’ 그 자체만이 있는, 어떤 의미에서는 초월적인 제3항이 있어야만 할 것처럼 보입니다.

    ― “멸종은 필연성에 머물러 있던 생물계의 한 종이 우발성 안으로 사라져 가는 역과정을 말한다. 만약 이 과정에서 물질적인 것들 간의 번역과 겨루기에서 무언가 다른 우발성이 발생한다면 발생과 멸종의 과정은 다른 방향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도 있다.”(167쪽)
    인류세-자본세에 우리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인류세-자본세라는 조건 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멸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다른 생명의 멸종을 안타까워하고 멸종을 경고하고 멸종을 늦추려고 하는 것 역시 인간중심주의적이고 자연/문화 이분법에 기반하며, 물질 혹은 비인간 존재를 대상화하는 사고방식일까요?
    “물질적인 것들 간의 번역과 겨루기에서 무언가 다른 우발성이 발생한다면”(167쪽), 이라고 말할 때 포스트 휴먼적인 주체는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요? 존재-인식론적으로 보면 위에 인용한 말에 동의할 수 있는데, 그 존재-인식론이 정치적 실천으로 나타날 때는 멸종을 문제 삼는 정치적 입장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지, 멸종과 관련하여 이분법을 횡단하는 실천에는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요?

    ― 선생님은 ‘재독해’의 한 예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재독해하면서, 데카르트식의 ‘이원론을 그저 거부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것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방식’(190쪽)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극단으로 밀어붙는 방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신유물론’과 ‘페미니즘’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언뜻 ‘신유물론’이 강조하는 ‘물질성’과 페미니즘이 강조하는 ‘젠더’는 이론적인 수준에서 완전히 상반되는 듯 보입니다. 이를테면 양자 사이에서 자연주의와 구성주의 사이의 대립이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신유물론 페미니즘’은 이론의 근거를 어떻게 ‘물질’로부터 찾고 있는 것인지요?

  • 2024-01-29 23:33

    ― ‘유목적 주체’를 설명하시면서 그 주요한 성질로 ‘소수자성/유목민성’을 이야기합니다. 이때 ‘소수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모터사이클을 타고 남미를 여행한 젊은 체 게바라의 신체’의 예는 어떤 점에서 ‘소수적’이고 ‘유목적’인지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책을 읽다 보면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신유물론자들의 이론이 공통적으로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귀결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브라이도티는 ‘세계에 대한 사랑’(302쪽), 라투르의 경우에는 ‘형제애’(350쪽), 메이야수는 ‘사랑, 우정, 예술, 사유’(393쪽)로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단순한 결론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그렇게 복잡한 사유의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은 신유물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현행성/잠재성, 현행성/가능성 개념은 언뜻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이 신유물론자들의 ‘물질’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메이야수는 ‘사변적 실재론’과 ‘사변적 유물론’을 구분하고, 자신은 ‘실재론’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맥락에서 ‘실재론’와 ‘유물론’이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원-화석’과 ‘본사실성의 원리’가 어떻게 ‘유물론’과 연관되는 것일까요?

    ― 선생님의 책을 보면 신유물론의 흐름 전체가 사실상 들뢰즈의 철학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브라이도티나 데란다 같은 경우 들뢰즈의 작업을 연장한 것 같고요. 신유물론과 들뢰즈 철학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또 ‘신유물론’이면서 들뢰즈적이지 않은 철학(가령 메이야수)이 있다면, 그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유물론’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 "메이야수는 들뢰즈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개방성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거대한 바깥'을 사유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375쪽)고 합니다. 이 문장을 보면 메이야수는 라투르나 바라드 등과 뭔가 결을 달리하는 듯이 보입니다. 위 문장에서처럼 들뢰즈를 비판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사실 라투르의 네트워크도, 바라드의 존재-인식론의 얽힘이나 간-행도 메이야수의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상관주의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때, 메이야수의 들뢰즈 비판의 핵심으로 기능하는 ‘거대한 바깥’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 메이야수는 ‘과학 밖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선조성을 통해 현존하지 않는 잔여적인 것’(354쪽)을 기술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발상을 통해 만들어진 허구적 세계는 그 실재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상상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은 사태는 역설적으로 ‘실재적인 것’은 오직 ‘과학’을 통해서만 확증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과학 밖 소설’은 ‘과학 안 소설’의 논리를 강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 선생님께서는 바라드를 해설하는 장에서 ‘다양체는 여러 얽힘들이기 때문에 개별적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윤리적 측면에서 결과, 책임 의무에 있어서 선형적 인과를 벗어난다’(420쪽)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언뜻 드는 생각은 ‘선형적 인과’에 따르지 않는다면 거기서 ‘책임의 윤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이론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형식의 윤리는 가능할까요?

    ― 신유물론자들은 존재론적으로는 들뢰즈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인식론적으로는 라투르의 생각에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유물론의 흐름에서 라투르의 영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 진리대응설에서 진리이동설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근대의 이분법은 허물어진다고 라투르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동설로 설명되는 물질을 팩티쉬(factish)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팩티쉬를 설명하는 다이아그램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네요. 이 두 그림(326-327쪽 그림5, 6)이 대응설에서 물질(사실)과 물신간의 이분법이 이동설에서 붕괴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조(fabrication)'이라고 하는데 도표를 한 번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책 말미에 사변적 실재론자 그레이엄 하먼을 철저하게 신유물론과 구분합니다. 그런데, 하먼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비유물론’이라 말하고, 자신은 ‘객체’를 ‘실재’라고 간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단순히 ‘물질’만을 이야기할 경우 수학적 객체, 음악적 객체 등과 같이 ‘물질성’에 기반하지 않은 실재들을 무시하게 된다고 말하고요.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하먼의 생각이 ‘신유물론’보다 더 큰 범주를 다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유물론자들은 하먼의 저러한 생각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요컨대 신유물론이 자연-문화를 일관적인 평면 위에서 설명하려는 기획이라면, ‘문화’ 또는 ‘담론’의 발생을 신유물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 선생님은 '정치적인 것'의 맹점이 우리로 하여금 인류세-자본세의 당면한 위기를 전경화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곧 정치적인 것이 참으로 인간중심적인 발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물질적인 것들의 정치로 유물론적 전회를 해야 새로운 정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들의 정치를 현실화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물질적인 것들의 정치에서 핵심문제는 어떻게 하면 인간이 해방을 향해 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물질적인 것 전체 안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구별정립하지 않고, 물질적인 것을 해방시킬 것인가다."(667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끊임없이 담론의 주제가 되어 왔던 인간의 해방은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물질적인 것의 해방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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