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미나 7회차 후기

은가비
2021-08-24 17:15
369

몇 주 전, 방장이신 여울아님은 마지막날 에세이 발표를 하지 말고 갑자기 시험을 보자고 하셨다.  !!!!!!

나와 우연님은 "그날 오지 않겠다". "싫다", "백지로 내겠다"며 거세게(?) 저항했지만.. 과학에 대한 학구열이 높으신 여울아님은 한 번 세우신 신념을 절대 굽히지 않으셨다. 정말 대쪽같으신 분....  옛날 조선시대 생육신 사육신의 지조와 절개가 이러할까 싶다. 

시험 보기 일주일 전, 여름 방학 내내 방콕만 했던 우리집 아이들의 입이 소파에 앉아 TV가 있는 곳까지 나올 기세라 개학 4일을 앞두고 캐리비안베이와 에버랜드, 캠핑까지 다녀왔고, 일요일에도 약 4시간 동안 다른 세미나의 에세이 발표와 1시간 가량의 뒤풀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날이 과학세미나의 마지막 날이자 시험날이다.  난 시험 당일 월요일 아침부터 카톡에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의 지난주 일정과 고단함에 대하여 강력히 피력했다. 그리고 시험 공부를 하지 않고 그냥 가겠다고 베짱을 부렸다. ㅋㅋ ㅋㅋ 그랬더니 여울아님은 주말에 고등학교 생명과학 교과서를 발견하셨다며 이것을 세미나를 할 때 함께 봤어야 했다고!! 매우 안타까워 하셨다. 헐... 난 저 세 권만으로도 벅찼는데.. 여울아님은 이미 공부한 세 권의 과학 책이 '우리에게' 어려웠기 때문에 개념과 원리가 쉽게 설명되어 있는 교과서를 봐야 했다고 생각하신 듯 하다. 우리가 함께 공부한 텍스트들의 저자들은 과학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고 서문에 썼지만, 과학 용어조차 생소하고 낯설었던 나는 영어 독해하듯이 매일 초록창에 개념을 찾아가며 책을 읽었다.

 

우연님도  수다를 원한다고 대놓고 카톡으로 말씀하셨고, 나 역시  우연님의 권력(?)을 믿고 그 권력에 빌붙어 공부를 하지 않고 갔다. 

문탁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니... !!!

여울아님은 A4 백지도 모자라 B4 백지까지  2장의 종이를 각 자리에 놓아 두셨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백지가 내 눈의 흰자를 더 하얗게 만들었다. 우연님은 이 종이들은 대체 뭐냐고, 뭘 그렇게 많이 적으라고 이 종이를 주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셨다. 내 마음을 다 발설해 주시니 너~~~~무 시원했다. ㅋㅋㅋㅋㅋㅋ

난 우연님의 답안지를 그대로 베껴 적겠다고 몇 주 전부터 선언했기에 우연님 옆에 착석했다. 수다가 고팠던 나와 우연님은 시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험지가 더 하얘지도록 계속 수다에 수다수다수다... ㅋㅋㅋㅋ

오픈북 문제의 답을 더 잘 찾아 적겠노라고 노트북까지 챙겨오신 여울아님과 반대편에서 정말 이 시험을 치르는건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나와 우연님.  그때 시험 시간을 언제까지로 할건지 여울아 님이 물으셨다. 속으로 한 '20분?'을 외치다가 노트북까지 챙겨오신 여울아님이 계시니 10분을 더 써서 "30분이요.."라고 말했다. 우연님도 30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우리의 방장 여울아님은 한 시간을 말씀하셨다. ㅋㅋㅋㅋㅋ 

"한 시간이요???!!!!"라며 외치는 우리에게 "다 쓰고 나가서 놀아"라고 말씀하셨다. 빵터진 우리들의 웃음소리에 여울아님의 한숨 소리를 듣고 그제서야 입을 다물고 책을 뒤적거리며 하이얀 백지를 그렇게 조금씩 채워가기 시작했다. 

옛날 생각이 났다.

대학 때 수업도 안 들어가고 시험 공부도 하나도 안 한 채 시험만 보러 가서 빈 답안지를 받았던 날. 

차마 옆에 있는 동기에게 보여달라고 하진 못하고 끄적끄적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을 답안지 한가득 적고 시험장을 나왔던 날. ㅋㅋㅋㅋㅋ

문제를 물어보는 척 수다를 걸었다. 나의 수다에 더 심화된 수다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우연 님과 떠들다가 둘이 낄낄거리다 눈치를 챙긴 후 우린 그렇게 꾸역꾸역  답안지를 적어갔다.

 

여울아 님이 천기누설해주신 시험 문제는 아래와 같이 총 7문제였다.

  1. <공감각> 출제자 : 재하 1)공감각자와 비공감각자의 차이를 결합 및 교차결합 문제를 사용하여 설명하시오..  2) 뇌가 주어진 감각을 해석하여 현실을 인지하는 방식(5장참조) 연관지어 움벨트(그 정의)와 공감각 간의 관계를 설명하시오. 
  2. <신경가소성>출제자 : 은가비 1) 인간의 뇌는 우주에서 알려진 가장 복잡한 물체이다. 신경가소성 매커니즘의 한 예는 미엘린 수초이다. 미엘린 수초에 대한 정의와 기능, 역할에 대해 서술하시오.(130~132p 참조)  2) 신경가소성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그리고 각자를 다른 누구와도 다르게 만드는 핵심에 자리한다. 삶의 단계별 뇌의 변화를 참조하여 신경가소성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서술하시오. 
  3. <열역학> 출제자 : 우연 1) 열역학 세가지 시스템의 종류와 차이를 설명하시오. 2) 열역학 세가지 법칙은? 3) 통계열역학에 중요한 사람과 그들이 끼친 영향은?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 책의 페이지와 초록창을 찾아가며 백지를 채웠다. 시험 시간 1시간을 달라고 하신 여울아님은 무려 1시간 15분이나 답안지를 쓰셨다. 분위기에 전혀 굴하지 않으시는 여울아님의 저 꿋꿋함과 카리스마!!  눈오는 겨울날의 독야청청한 소나무 같으신 분!!!   답안지를 모두 적은 우리는 각자가 맡은 문제에 대해 아주 성실히..... 너무 착실하게..... 설명하고 토론했다...........  아쉽게도..........ㅜㅜ

 

 

그동안 개념 이해만 하느라 급급해서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답안을 풀이하며 우리들만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식 가득한 책들이 상형문자처럼 보였는데 이제야 조금 눈에 들어온다. 

재하가 출제한 공감각의 두 번째 질문 움벨트(개체가 주관적인 입장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인식하는 세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주는 약 95%가 암흑에너지다. 우리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단 5%, 무한한 우주에서 우리은하계, 작은 지구에서 한국, 경기도 한 도시에서 내가 사는 집과 반경 몇 십킬로만 왔다갔다거리는 나는 대체 뭘 '보고' 사는걸까? 고작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폰, 인터넷, 책, 만나는 몇몇의 사람들로 세상의 많은 것들을 잘 알고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움벨트는 머릿속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는 가능성과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지식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 너무 많은 언어가 범람하는 시대지만 지각 너머의 것들이 너무 많다. <신경가소성>과 <열역학>도 문제를 풀고 설명하며 다시 한 번 내용을 정리했다. 열역학을 공부하며 거시적 공간과 미시적 공간의 운영원리는 완전 모순되고 확률로 평균치를 계산하여 상(phase)을 판단한다는 것을 배웠다. 미시적인 모든 것들을 아직 다 밝혀낼 순 없지만.. 그래도..   F=ma 로 짧게 귀결되는 고전역학의 수식은 아름답다.  우주의 원리를 저 짧은 수식안에 담고 싶었던 인간의 마음. 인간의 탐구와 지적 열망과 지치지 않는 호기심이  앞으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보게 하고 느끼게 할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를 더욱더 겸손케 하는 것도 과학이기에 나는 계속 과학을 공부할 것 같다.  과학에 열정이 많으신 여울아님은 두 달동안 물리를 가르쳐 주는 학원에 등록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하셨단다. 속성으로 개념정리는 확실하게 할 수 있을 듯 하다.  우리는 3시에 만나 무려 6시 30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시험 시간 포함해서) 과학 수다 밖의 수다를 원했으나 ㅋㅋ 아쉬움을 뒤로 하며 마지막 과학 세미나를 마쳤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우연님이 세미나 첫날 데면데면 앉아있는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과학 공부는 왜 하려고 해요?”

얼버무리는 대답을 했던 나에게 우연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철학공부 10년 정도 했어요. 많이 했어요. 근데 .... 다 말장난 같아.”

아…

지각하는 만큼의 언어. 인식하는 만큼의 언어만을 구사하는 인간.  인간에게 언어는 사실 전부이지만 언어 너머의 세계는 가히 인간이 다 담을 수 없다. 의미와 가치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 날것들이 그리워지는 요즘, 무언가 머리에 쿵 하며 부딪쳤다. 7주 동안 수박처럼 이 과학책 세 권을 읽어보자 하셨는데 우연님은 이게 진짜 수박이라 생각하냐고 하셨다. 과학적 지식은 생소하고 낯설었지만 함께 넷이 모여 만들었던 우리의 세미나는 '꿀수박'이었다. 브릭스 19.4543452… 즈음 되는 달콤한 수박. (브릭스 9-11 사이가 ‘달다'의 평균치라고 한다).  7차시의 세미나 동안 우연님은 열혈 과학 강사셨다. 컬러 프린트에 조목조목 설명을 써 오셔서 하나하나 개념을 다 짚어주시며 과학맹인 나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얼마나 꼼꼼하게 이해시켜 주셨는지.. (후기 댓글에 의하면 세미나를 하고 온 날 방전이 되어서 방바닥에 한 시간동안 누워계셨다고 한다 . 프린트들은 모두 잘 모아두고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하는 더운날 멀리서 와서 진지하게 세미나에 참여했다. 참고할 다른 과학 서적도 소개해 주며 생물학이나 뇌과학 등 과학에 애정이 많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우리의 방장이셨던 여울아님. 어려운 개념이 나올 때는 칠판에 그림을 그리시고 다른 자료까지 참고하여 책 내용을 재구성해서 쉽게 설명을 해 주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더웠던 여름날 이 세미나를 열어주셔서 수박처럼 시원하고 달콤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우연님은 마지막날 수다를 다 하지 못한 마음을 집에 돌아가셔서 문자로 남겨주셨다. 못내 많이 아쉬우셨던 것 같다. 과학 공부보다는 넷이서 함께 만들어냈던 케미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듯 하다. 세미나 공간에 있던 우리의 파동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매 순간 달랐을텐데...우리 공간을 구성하는 자기장은 어떠하였을까?  내가 시각 공감각자였다면 함께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었던 우리의 목소리는 노란색이었을 것 같다. 

 

덧말 : 헤어지는 자리, 못내 섭섭한 표정을 지으시며 우산 속으로 사라지셨던 우연님이 메세지로 주문하신 시 한 편.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시 한 편을 남긴다. 그 어떤 외재적 관점없이 ‘그냥' 좋아해서 두고두고 읽었던 시.  우연님 못다한 수다는 한 번 만나서 썰 푸는 걸로 해요~~^^ 제대로 뒤풀이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 생애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댓글 6
  • 2021-08-24 17:50

     

    드뎌, 우리의 여울아를 알게 되셨구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1-08-24 18:10

  • 2021-08-24 18:17

    엄살엄살 왕엄살... 그렇게 안하겠다 못하겠다 하더니만... 오픈북테스트가 무색하게 책 펼치는 인간은 나밖에 없었다. 한 시간 동안 발발거리며 문제를 푸느라 바쁜 건 나뿐. 다들 책 펼칠 시간없이 좔좔좔~ 암튼 셋 모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준비해온 게 분명했다... 난 당일 아침에야 책 뒤적이다 왔는데... 

  • 2021-08-24 20:19

    와!! 다들 대단하시네요!! 👍

    하버드의 공부벌레들이 생각나요..ㅎㅎ

  • 2021-08-24 22:03

    뜨거운 여름 햇살 내리쬐는 폭염 속에 정말이지 푸르른 시간들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접한 과학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잊고 지내던 순수 앎의 즐거움을 다시 만난 시간이었습니다. 

    은가비님과 여울아, 재하가 있었기에 더욱 풍성하고 맑게 빛나던 시간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구요.

    우리, ‘하버드의 공부벌레들’ 같이 진지하기도 했지요?^^

    후기를 읽으며 마지막까지 즐거웠던 세미나의 분위기가 떠올라 빙그레 미소 짓습니다. 

    글고 내 답안지는 자체 채점 결과 B는 되지 않을까 싶은데. ㅎㅎ

     

    마지막에 올려준 시 한 수, 아 ~~~

    서.정.주.

    (마지막까지 나에게 많은 에너지와 생각거리를 선물로 남기는군요. 감사합니다.)

     

  • 2021-08-24 22:17

    제가 이번 과학세미나를 하면서 생각한 것 두 가지.

    1. 기초 물리와 화학을 배워야겠다...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제들부터 우주의 원리들까지 모두 물리와 화학, 혹은 수학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응용과학(뇌과학/A/I/빅데이터 등)에 관심이 있으면서 기초를 쌓지 않으면 책을 읽는데 한계가 있더라구요... 
    2. 죽기전에 논어... 도 좋지만 과학공부도... 특히 동양고전을 오래 공부한 친구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다!! 고등학교 졸업한지 30년 넘었다면 그 사이 바뀐 과학 정보를 업데이트 하는 차원에서라도 시작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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