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을, 후기

모리스
2020-01-19 23:12
83

역사에 약합니다. 학교 시절 역사 공부 하기를 싫어해서, 아니 외우는 공부는 영 소질이 없어서 성적은 너무 낮고 그러다 보니 역사를 더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이과생 모드로만 살던 제가 역사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게 해 준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10여년 전에는 한국사 인증 시험까지 본 적도 있었습니다. 역사는 외워야 하는 사건들의 연속 배열만은 아니더라구요. 제 안에도 서사가 있듯이, 그 안에 있는 수 많은 이야기에서 그 시절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제법 재미가 있었습니다.

 

아직은 맥락 없이, 두서 없이 부분 부분 알아가고 채워지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것들이 구슬처럼 꿰어지면서 거기에 대한 해석들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이번 책도 사실 뻔할 거란 편견 속에서 혼자서는 절대 사서 읽지 않을 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계기가 저에게 또 하나의 사건성을 지닐 거란 생각에 감사하기까지 했습니다. 저자 하위징아는 중세가 암흑의 시대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왜 그렇게 후세에 여겨질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중세에 대한 해석은 역사학자마다 다를 것이고 이 책에서는 하위징아의 역사관도 어쩔 수 없이 들어 있을 겁니다. 이 책을 일부분이지만 읽다 보니 그전에 보았던 중세의 왕 이나 귀족에 관한 영화들과 별반 차이가 없게 느껴졌습니다. 영화를 통해서든 이와 같은 문화적 관점에 더 무게를 둔 책을 통해서든 중세의 역사는 귀족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까지도 깊숙이 들어 온 서양의 고급스러운 생활 양식들이 이 시절의 유럽 귀족 생활의 고급 형식들에 바탕을 둔 것임을 보면 그 시절 사람들이 그들의 형식에 얼마나 강하게 사로 잡혔었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전 이제까지의 부분을 읽어내면서 두 가지 생각이 좀 더 강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하나는 중세의 역사, 특히 문화적 역사는 귀족 문화의 역사이고 그래서 민중의 문화는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 것라는 겁니다. 문자를 가지지 못하는 계층은 지배당하는 계층이었고 그들의 문화는 분명 존재했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겠죠. 아름다운 귀족의 문화의 형식들은 그들의 오만함과 무절제한 탐욕이 근원을 이루는데 민중들은 이런 귀족 문화를 만들어가는데 없어선 안 될 부속품 역할이 더 컸을 것입니다. 아름답고 웅장한 피라미드를 위해 동원되고 수없이 죽어갔을 노예들의 삶이 그 속에서 소모되었듯이 말입니다. 자신의 삶이 어떤 거대 담론이나 사회적 형식을 만들어가는데 소모된다면 그 개인의 삶은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요? 아름다운 중세의 귀족 문화에 기여했다는데 그들의 삶의 가치가 있을까요? 그들을 추진시켰던 힘은 종교적인 것이 컸을까요 아님 군주와 귀족들이 자신들의 삶에 그래도 하나의 울타리가 되 주었을까요? 모두가 다 맞을 겁니다. 아무튼 그때나 지금이나 민중들은 참으로 순진naive합니다. 순진할 수 밖에 없는 여러 경제적 정치적 구조적인 문제들도 있겠고 결국은 무능력합니다.

 

다른 하나는 중세의 귀족 문화의 과시성입니다. 과시는 토너먼트 형식을 갖게 합니다. 사랑 조차도 보여지는 형식 속에 있고 경쟁을 통해 쟁취되는 것입니다. 요즘의 우리도 보여주기를 멈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줘야 하고 얼마나 좋은 것을 샀는지 보여줘야 하고 얼마나 친구가 많은지도 보여줘야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불행했는지, 장애로 얼마나 고통 받는지도 보여줘, ‘좋아요’ 를 받고 별 풍선을 받습니다. 지금은 모든 걸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타임 캡슐에 넣어져 절대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중세나 지금이나 그들의 과시들은 결국 이미지입니다. 형상입니다. 우리는 그 이미지를 숭배합니다. 그건 문화가 되기도 하고 종교가 되기도 합니다. 카프카는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에서 자신을 고립시켜야 된다고 말합니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롭게 죽기 위해서, 평화롭게 사라지기 위해서이다.”  멀어짐, 고독, 의도적 은둔은 자신을 뜻대로 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그것은 완전한 권능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궁정(풍) 연애, 기사도의 연애에 대해 욕망의 주체가 없는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중세의 민네, 궁정풍 연애는 자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쾌락을 추진하지 않고 환희(le joi),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때 그들의 강렬함[강도]들이 지나가서 더 이상 자아도 타자도 없게 되는 기관없는 몸체를 만든다고 말합니다.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읽을 때는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그러나 중세의 가을을 읽고 나니 더더욱 기사도의 사랑이 들뢰즈 생각처럼 기관없는 몸체를 이루는 건지, 욕망의 결핍이 없는 욕망 그 자체인지를 이해하진 못하겠습니다. 들뢰즈는 쾌락이 욕망 자체의 흐름, 즉 <내재성>의 흐름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쾌락은 내적 결핍, 우월한 초월성, 허울뿐인 외부성의 망상에 기대게 만드는 척도의 흐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궁정풍 사랑이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궁정 연애도 과시의 형식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적 생각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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