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2.세미나 후기 - 고문진보 후집을 읽기 시작하다

누룽지
2021-09-09 02:13
312

 

꿀같은 방학이 끝났다. 숨 깊게 들이마셔 뱃심을 돋우며(그래도 또 떨리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고문진보 후집을 읽기 시작했다. 재작년에 우리 세미나팀이 중국여행을 떠나며 여행길에 도움이 될거라 미리 읽은 앞 부분의 이소경 등은 맨 나중에 다시 읽기로 해 上秦皇逐客書부터 시작했다.

책장이 안 넘어간다.

탓할거라곤 나의 無知밖에 없어 한숨만 나왔다.

목공(繆公)- 백리해(百里奚), 유여(由余), 건숙(蹇叔), 비표(邳豹), 공손지(公孫支).

효공(孝公)- 상앙(商鞅)

혜왕(惠王)- 장의(張儀)

소왕(昭王)- 범저(范雎)

본문에 등장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백리해가 70세에 목공의 발탁으로 관직을 시작해 진나라를 서융을 재패한 최강국으로 키운 사람인 줄 전혀 몰랐다. 그가 건숙과 유여를 발탁한 것도 물론 몰랐다. 목공이 춘추시대 진나라 9대 왕인줄은 더더욱 몰랐고.

산너머 산이라고 춘추시대는 대학입시 이후엔 거의 보도 듣도 못했으니 그 얄팍한 지식조차도 내게 뭔가 남아있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곤륜산(崑崙山)의 옥(), 야광주(夜光珠), 태아검(太阿劍), 섬리마(纖離馬), 서촉(西蜀)의 단청(丹靑), ()과 위()나라의 상간(桑間), 소우(韶虞)와 상무(象武)처럼 역시 보도 듣도 못했으나 딴 때 같으면 호기심에 찾아보고 싶었을 것 같았던 이런 류의 것들도 어디를 뒤지고 싶지 않을만큼 의욕이 딱 떨어졌다.

그래도 이미 뗀 걸음 어찌어찌 가야지 별 수 없다. 든든한 우리팀 언니들을 믿을 수 밖에.

이상의 투덜거림은 나도 아는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에 깊이 관련된 이사(李斯)라는 사람이 쓴 글이기에 맥락을 따라가 보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는 간단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은 것이다.

그나마 이번 세미나는 이야기 덕에 의욕 0%는 면했다.

나는 SF나 환타지류의 글 읽기를 좋아한다. 사실 좀 많이.

당연히 신비로운 존재들에 관심이 많은데 그 중 제일 답답한 것이 용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이지만 누구나가 다양하게 꿈꾸고 그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공간으로만 봐도 내 발 아래에 있는 물에서 저 높은 하늘까지 제약 없는 자유로운 존재인데 정치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을 상징하며 형태와 능력 행동 범주까지 많이 고정되어 있다. 발톱이 몇 개냐로 누구를 상징하는지가 정해져 있는 그림과 의복 등에 갇혀 글자처럼 굳어 박제화되어 버린 불쌍하고 답답한 존재가 내겐 용이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시에서의 용은 달랐다.

고문진보 전집의 7권에 있는 장곡(張轂)行路難(인생행로의 어려움을 읊다)라는 시의 끝 부분에

龍蟠泥中未有雲 용도 진흙 속에 서려 있고 구름 없으면

不能生彼昇天翼 저 하늘에 오를 날개 생겨나지 못한다네.

(성백효 선생님 해석)

라고 써 있는 것이 아닌가

고대 동양의 용에 날개가 있다고? 서양의 드레곤도 아니고 중국의 유명한 고문진보라는 책에?

너무 통쾌했다. 그래, 옛날에도 좀 더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한 사람들이 있었겠지. 그래야 신비롭지.

문득 내가 너무 단편적으로 알고 있어 내 안에 용을 가두었었나 하는 의심이 불쑥 올라왔다. 이건 너무 합리적 의심이라 어느 분이 댓글로 용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 어느 자료를 찾아보라던지 혹은 친절하게 이러저러한 설명을 해주시던지.

갈 길이 먼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다. 별 탈없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지만 끝까지 가라고 나를 응원해주고 싶어지는 밤이다.

 

 

댓글 3
  • 2021-09-09 07:52

    누룽지님, 한문강독에서 그건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랍니다.

    한문을 읽을 때 어려운 점 중에 하나가 고유명사가 나올 때인데, 사전지식이 없으면 고유명사가 나오면 멘붕이죠.

    아는 사람은 아, 이건 사람이름이다. 이건 지명이다 하면서 읽고 넘어갈 테지만 모르면 글자 하나하나 찾아서 해석하고

    끼워 맞추는데 힘을 낭비하게 되니까요. 나중에 그게 고유명사인 걸 알면 정말 허탈하죠!

    그래서 참고서를 옆에 끼고 보면서 힘을 쏟을 데와 대충 넘어갈 곳을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한글 역사책 읽을 때 모든 사람이름과 지명에 대해 그 사람이 누군지 그 지역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아, 글고.. 틈나는 대로 고전관련 강좌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 고전원문읽는게 더 즐거워진답니다.

    근데.. 이 후기를 읽으며 생각한 건데.. 언젠가 동서양 신화관련 책읽기나 강좌도 한 번 해보고 싶네요.^^

  • 2021-09-09 17:55

    샘의 공부에 대한 열정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네요. 

    전 모르는 인명, 지명 나오면 대충 넘어갈 때가 많아요. 배째라 안물안궁식으로요. ㅎㅎ

    그러다보면 알게되는 날이 또 오더라구요.

    우선 사기를 읽으시면 도움이 많이 되실 것 같아요. 

    그리고 용이요, 실제 용에 날개가 있다기보다는 구름이 용의 날개가 된다는 것이 아닐런지요.

    • 2021-09-09 21:29

      힝~하지마요 팩폭

      그런 것 같아 제가 세미나 시간에 질문한거거든요

      적어도 오늘은 용에게 감히 '날개'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 그 분에게 좀 빠져 있을래요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28
지행합일, 앎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앎이다
요요 | 2024.04.24 | 조회 22
요요 2024.04.24 22
227
下終南山過斛斯山人宿置酒 후기 (2)
누룽지 | 2024.04.14 | 조회 30
누룽지 2024.04.14 30
226
[전습록]120조목-126조목 후기: 소혜야, 힘내! (2)
자작나무 | 2024.04.02 | 조회 46
자작나무 2024.04.02 46
225
<전습록 > 안자의 마음공부 (2)
울타리 | 2024.03.23 | 조회 51
울타리 2024.03.23 51
224
<전습록> 100조목에서 107조목 후기: 존덕성과 예민함 (1)
콩땅 | 2024.03.20 | 조회 55
콩땅 2024.03.20 55
223
<전습록> 93~99조목 후기-얼마나 간단하고 쉬운가! 정말? (1)
인디언 | 2024.03.06 | 조회 77
인디언 2024.03.06 77
222
다시 <당시삼백수>로
토용 | 2024.03.03 | 조회 71
토용 2024.03.03 71
221
<전습록> 없는 '전습록' 후기^^
자작나무 | 2024.02.27 | 조회 82
자작나무 2024.02.27 82
220
<전습록> 62조목: 비추는 공부와 닦는 공부에 대하여 (1)
요요 | 2024.02.16 | 조회 114
요요 2024.02.16 114
219
전습록 24.2.7.후기
누룽지 | 2024.02.14 | 조회 115
누룽지 2024.02.14 115
218
한문강독세미나 시간 변경 및 『맹자』성독
관리자 | 2024.02.11 | 조회 145
관리자 2024.02.11 145
217
『사대부의 시대』 번개 세미나 합니다(3주)
관리자 | 2023.12.26 | 조회 626
관리자 2023.12.26 626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