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교 2주차 발제문과 질문 올려주세요

요요
2024-03-03 18:35
166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3강에서 5강까지 잘 읽고 계시는지요?

발제는 월요일 낮12시까지 올려주시고, 질문은 오후8시까지 모두 올려주셔요.

지난 번보다 조금 더 까다로운 느낌인데 어떻게 읽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유식학의 기본 개념들이 4강에서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데요.

전오식, 의식(제6식), 말나식(제7식), 아뢰야식(제8식)의 정의와 각 식들의 역할과 특징,

각 식들간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며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는 텍스트의 3강 수행의 세계에 보면 마조 도일(709~788)의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초학자 마조선사가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을 본 남악 회양선사(677~744)가 묻습니다.

왜 좌선을 하느냐고요. 마조는 부처 되려고 한다고 답합니다.

그 답을 듣고 난 뒤, 회양선사는  옆에서 벽돌을 갈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마조가 벽돌을 왜 갈고 계시냐고 묻자, 회양선사는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고 답합니다.

마조가 '벽돌을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될 수는 없지 않냐'고 되묻자 회양선사가 답합니다.

앉아서 좌선만 한다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가르침이었을까요?

 

마조는 이 문답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장욱진의 목판화 <마전작경(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다)>은 이 에피소드를 표현한 것입니다.

마조가 좌선을 하고 앉아있고, 회양선사가 벽돌을 가는게 보이시지요?

벽돌가는 공부가 아니라 부처되는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절로 궁금해집니다.

잠시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댓글 12
  • 2024-03-04 08:53

    아.. 어렵지만 일단 올려봅니다.

  • 2024-03-04 10:15

    저도 일단 요약발제 올립니다. 3강입니다

  • 2024-03-04 11:15

    요약발제 올립니다

  • 2024-03-04 15:06

    4장에 해당합니다. 뭐가 헷갈리는지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색성향미촉을 대상으로 감각하는 다섯 개의 식이 있고 제 6식은 이 앞의 식들을 통해 얻은 다양한 감각자료를 종합하여 인식하는 사유능력, 사유기관으로 의(意)식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초기 불교와 같습니다. 그런데 유식학에서는 여기에 제 7식인 말나식과 제 8식인 아뢰야식을 더해 유식무경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한샘의 설명을 들으니 왜 제 7식과 제 8식이 있어야 하는지 논리상으로는 좀 납득이 갑니다. 모든 번뇌가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조금 더 잘 드러나면서 그것이 원죄가 아니라 존재와 인식의 순환 과정에서 빚어지는 착오나 오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P. 155 의식을 설명하는 중에 “의식은 의근이 대상을 아는 식이지, 대상을 하는 의 자신을 아는 식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5식들도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유식에서는 의식의 근이 되는 의가 자신을 아는 식”을 제 7식 말나식이라고 합니다. “제 7말나식은 의의 자기의식, 의가 자신을 자아로 여기는 식”이라고요.
    P. 177에서는 이 말나식을 아뢰야식의 견분(대상을 인식하는 주관)을 반연하여 자신을 아는 식이다 라고도 합니다. 저는 이 말나식에 대한 설명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고 괴로움을 겪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지만 제 6식과 아뢰야식 사이에 의도된 다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현상 세계에서 경험적 자아가 심층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매개체로 만들어진... 그를 통해 들여다보면 더 잘 드러나 보이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명쾌하지 않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네요^^

  • 2024-03-04 16:13

    113쪽 > 호흡은 신체의 경계선을 중심으로 안팎의 기운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소통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흡에 주목하는 것은 의식을 경계의 유동성에 맡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 관에서의 모든 알아차림은 육안으로 밖에서 보는 방식이 아니고 의식을 모아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의식의 집중과 주시를 통해 심안이 열리면, 내적으로 신체의 움직임이나 요소 등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1) 3장은 작년에 배운 내용을 요약 정리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고리를 끊기 위해 유전문에서 환멸문으로 가는 '알아차림'의 수행법은 호흡으로 시작합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마음이 기후와 연동되어 있다고 느끼는데요, 그러다보니 마음이 요동칠 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이미지가 그려지고, 호흡도 그에 따라 불안정해질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연상이 '심안'을 통한 내적 알아차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호흡을 주시하며 '경계의 유동성'이나 '몸의 작용', '부패 과정'을 보는 것이 유전문에서 환멸문으로,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상 너머 성'을 보기 위한 수행의 첫 걸음이라고 생각해봅니다.

    2) 137쪽에서 설명하는 비파사나와 사마타 수행은 초기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마타를 정의할 때 대승불교에서는 '견성', '지'로 설명하고, 아비달마 문헌에 근거한 남방불교에서는 '집중명상'으로 본다고 합니다. 저는 '의심을 끝까지 밀어붙여 인식회로 바깥으로 나가, 마음 자체를 보는' 간화선 수행법을 설명하는 부분이 새로웠어요. 감각적, 개념적 '대상화' 없는 마음 자리는 개체주의적 사고나 인간중심적 사고 또한 저절로 극복된 자리겠구나 싶었어요.

  • 2024-03-04 17:30

    4강 143)
    세계가 마음이 만든 가상이라는 것이 일체유심조입니다. ‘일체는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란 뜻이지요. 세계는 마음이 만든 것이고, 오직 그 세계를 감지하는 마음에 대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 의식은 반문할 것입니다. ‘우리가 실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 세계가 어떻게 마음이 만든 가상일 수 있단 있는가?’

    * 불교는 ‘이 세계는 누가 만들었나?’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 세계가 어떠한 구조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고 있는가를 정확히 이해하라고 한다. 이치를 정확히 알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 바깥에 객관적인 물질적인 세계가 있고, 우리 안에는 그 물질적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정신적인 실체가 있다고 기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는 일체는 오직 식, 즉 마음이 만든 것이라 한다. 이것이 ‘일체 유심조’다. 너무 익숙하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이, 이 책을 읽고 하나도 모르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마도 저자가 말한 대로, 내 개인적 마음만 인정하는 유아론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책을 몇 번 읽고도 여전히 알쏭달쏭하고 안개에 싸인 느낌이다.
    질문)
    '오직 식만 있고 (바깥)대상은 없다'에서 '없다'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보는 것이 내 마음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 바깥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4강 뒷부분에, 각각의 가진 근이 다르므로 세계는 각각의 근에 상응해 나타난다고 이야기하며 ‘일수사견’을 예로 든 것 보면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각자의 표상대로 착각하고 산다고 평소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본것처럼, 들은것처럼, 느낀것처럼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단지 연기에 의한 세계일 뿐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그런데 ‘세계는 마음 밖의 실재가 아니라, 마음이 만든 가상’이라니 저자 말대로 꽉 막혀버렸다. 실재가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가상이라니? 저자는 우리가 실재라고 믿는 이 세계는 영화 인셉션에서 로그아웃하면 사라지는 꿈의 세계라고 비유한다. 그러면 표층 세계에서 ' 대상은 마음 바깥에 없다'라는 것은 실제 아무것도 없고 그저 마음이 만들어 놓은 허깨비라는 것인가?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존재하는 모습이 단지 왜곡된 마음이 만들어 낸 표상에 불과하다는 소리인가? 꿈에서 깨면 모두 사라지니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가상세계 바깥에 나가 본적이 없어 잘 이해가 안된다.

  • 2024-03-04 18:01

    질문으로 이어지는 내용들의 발췌입니다.

    p.154 식은 일단 인식기관인 근이 그에 상응하는 대상인 경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 각각의 근은 그 각각에 상응하는 각각의 경인 색,성,향, 미,촉을 감각하지요. ... 이 식을 전오식이라고 부릅니다.
    다양한 감각기관을 통해 주어진 여러 감각자료를 한데 모아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소위 객관적 인식이 이루어집니다. ... 이 여섯 번째 근, 제6근을 불교는 뜻, 의라고 부릅니다.... 제6의식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의식은 의근이 대상을 아는 식이지, 대상을 아는 의 자신을 아는 식은 아닙니다. 유식에서는 의식의 근이 되는 의가 자신을 아는 식을 ... 제7식이라고하며,... 말나식이라고 부릅니다. ... 나는 나다의 자아의식입니다.
    감각, 의식, 말나식의 활동이 곧 경험인데, 그러한 경험을 통해 남겨지는 정보인 종자를 함장하고 있는 식이 바로 제8아뢰야식입니다.
    p.168 유식은 우리가 실유라고 생각하는 나와 세계가 사실은 아회야식이 만든 세계, 가유의 세계, 가상현실이라고 밝힙니다.
    p.177 말나식은 세계 전체를 형성해내는 아뢰야식의 시선을 붙잡아, 그것을 그렇게 형성된 세계 속 나(유근신)의 시선, 의식의 시선으로 착각하는 식입니다. 아뢰야식의 시선을 의 자신이 일으키는 제6의식의 시선으로 오인하는 것이지요. ... 아뢰야식의 시선을 유근신의 시선으로 오인하는 것은 의가 스스로를 실재하는 실체적 자아로 집착하여 자신을 시선의 주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식은 말나식을 ‘나는 나다’를 고집하는 아견과 아집의 식이라고 합니다. .... 탐,진,치의 번뇌는 바로 제7말나식의 번뇌인 것이지요.
    p 179 수행은 우리의 일상의식인 표층의식에서 우리 의식에 가려진 심층마음, 마음의 본래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아가 실재하는 아가 아니고, 내가 객관세계라고 집착하는 법이 법이 아니라는 것, 아와 법이 모두 내 마음이 만든 가상이고 가유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수행인 것입니다. ... 심층마음, 아뢰야식을 깨달아야 가능하지요. 자신을 표증 유근신이 아닌 심층 아뢰야식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p 198. 자기지는 .. 마음이 마음 자체를 스스로 자각하여 아는 것. ... 누구나 그냥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아는 것이지, 그것 이외의 다른 것을 통해 설명되거나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p 224. 자기지의 깨달음은 대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기기의 마음자리로 들어섬으로써 즉 계합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질문>
    1. 전오식, 제6의식, 제7말나식은 그것이 무엇인지 경험 중에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전오식도 제7말나식도 제6의식으로 알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가 바른 이해일까요?
    2.탐, 진, 치의 번뇌와 아견과 아집에서 벗어나려면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을 깨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8아뢰야식은 의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 같고, 책에서도 그렇게 대상화하여 인식하는 것은 불각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의식할 수 없는 마음에 다다르는 길이 ‘단박에 아는 마음’,‘스스로 자각하여 아는 것’이라고 하는데, 단박에 아는 마음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냥 그 때가 되면, 돈오에 이르면 ‘아~ 이게 아뢰야식이구나!’하게 되는 건가요? 그렇지만 그것이 아뢰야식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점은 의식할 수 없는 마음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 2024-03-04 19:08

    p.113) 4념처관은 무엇보다도 먼저 몸에 주시하여 몸의 구성요소나 사후의 부패과정까지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몸을 주시하여 알아차리는 것은 몸을 육안으로 대상화해서 외적으로 상세히 관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관에서의 모든 알아치림은 육안으로 밖에서 보는 방식이 아니고 의식을 모아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의식의 집중과 주시를 통해 심안이 열리면, 내적으로 신체의 움직이나 요소 등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Q) 심념처는 몸의 요소 및 사후 시체, 시체의 부패과정까지 관하여 육안이 아닌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모습을 의도적으로 상상하는 걸까요 아니면 심안이 열리면 저절로 보인다는 걸까요?

    p. 137) 현대의 명상연구자들은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각각 집중과 통찰로 풀이하여, 비파사나를 통찰명상이라고 부르고, 사마타를 집중명상이라고 부른다. 즉 비파사나를 사띠(마음챙김)을 통해 통찰을 얻는 것으로 해석하고, 사마타를 만트라나 니미타(표상)에 의식을 모으는 집중으로 해석한다. 대승 수행에서의 지는 일물도 세우지 않는 것인 데 반해 현대 명상연구자들이 논하는 집중명상은 표상 내지 40가지 집중할 대상을 세운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현대의 명상연구자들이 남방 상좌부계통의 아비달마 문헌에 근거하여 명상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Q) 대승 수행과 현대 명상은 많은 차이가 보입니다. 사마타는 같은 언어인데 거의 반대 개념으로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대 명상연구자들은 왜 남방 상좌부계통의 아비달마 문헌에 근거한 명상을 하는 걸까요? 이들도 불교라고 할 수 있나요?

    p.152) 유식(唯識)은 오직 마음뿐이라는 뜻이지요. 일체가 마음이 만든 것이기에 그 마음 바깥에 객관적 실재는 없다는 것이 유식무경(唯識無境)입니다. 즉 오직 식만 있고 식 바깥의 객관 대상은 없다는 것이지요. ‘유식’은 유식무경의 줄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오직 마음, 오직 식이라고 하는데 마음이란 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럼 전5식,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이 전부 마음인가요? 표층 의식과 심층 마음(아뢰야식)으로도 나누는데 이 심층 마음이 마음일까요?

  • 2024-03-04 19:31

    3장
    107p 잡아함경
    즐거운 느낌이 있어도 탐욕에 물들지 않고, 괴로운 느낌이 있어도 성내지 않으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도 어리석음의 부림을 당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 하고 있는데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 명상 선생님한테 여쭤보았던 말이 생각나면서 이제야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명상을 통해 고통도 즐거움도 사라지게 하는 거냐는 그렇다면 나의 고유한(?) 것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정말 초보적인 질문을 했던 거 같다. 그 때의 질문이 이제야 완전하게 소화되는 느낌.
    신수와 심수를 구분하여 즐거움이 욕망으로 불러오지 않기를, 고통이 분노를 불러오지 않기를, 이 말이 참 좋은 거같다.

  • 2024-03-04 19:32

    질문. 3강-수행의 세계

    1.
    (p.119)
    저자의 반야심경 설명에 의문이 든다. 저자는 '반야심경'에서 "무색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을 들어 5온, 6근, 6경...이 모두 무라고 설명한다고 적고있다. 그런데 그 앞에 是故 空中(無色無受想行識...)이라는 표현이 있다. 즉 공성 안에서 5온 6근 6경...이라는 실재는 없다는 뜻이다. 이 안에서 단순히 악취공의 위험만을 읽어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 아닐까?

    2.
    (p.122)
    "수행으로 지향하는 것은 단순한 공내지 적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탐진치가 사라진 적멸의 열반 내지 공을 마음의 경지로 갖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환멸문을 통해 수행자가 지향하는 목표를 말한다. 그런데 (p.123)에서 저자는 "이와 같이 대승은 상좌부와 달리 불교 수행이 지향하는 것이 단순한 적멸이 아니라 일체번뇌가 멸한 부처의 마음을 증득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라고 하면서 무명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생멸문 너머 진여문을 소개하고 있다. 상좌부 수행법(=단순한 적멸을 추구?)에 대해 저자가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읽히는 건 그냥 내 느낌인 건가...?

    3.
    남악회양과 마조도일의 대화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남악회양이 마조도일에게 권한 것은 어느 세월에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느냐!(벽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빠른 간화선, 즉 화두를 들어라~라고 권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마조도일이 좌선으로 정진하였어도 그는 견성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 2024-03-04 20:24

    1.p51 인간이든 물질적 사물이든 모두 자기자신안에 각각의 개별적 실체성 자기본질 자기자성 자아 아트만을 갖고 있는것이 아닙니다.그래서 '무아'이지요. 연기론은 곧 무아론입니다. 일체가 자기본질이 없는 무아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고 모두 자기 아닌 것을 통해 비로소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p123 모든 중생에게 본래 내재해 있는 청정한 마음인'자성청정심'이라고 보며 이를 본성 본심 본각 본래면목 불성 여래장 진여심 일심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릅니다.
    ==> 두 구절에서 말하는 자기본질과 본성은 다르게 해석해야 하는건가요?

    2.p107 즐거운 느낌이 있어도 탐욕에 물들지 않고 괴로운 느낌이 있어도 성내지 않으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도 어리석음의 부림을 당하지않는다
    p109 범부의 의식은 즐거운 느낌에서 좋아하는 감정으로 괴로운 느낌에서 싫어하는 감정으로 자동이행을 해가지만 수행자는 수에 머물고 애로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으려며 느낌과 감정 욕망과 번뇌등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를 있는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 신수에서 심수로 넘어가는 과정까지 멈춰야 하는걸까요?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건 인정을하고 그다음인 애로 넘어가지 않아야 하는게 아닐까요?
    심수라는건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이를 누른다는건 억압이 아닐까요?

    3.p189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번뇌에 물들어있어도 그 번뇌있음을 아는 그마음자체는 번뇌를 떠나있다는 말입니다.진짜마음 진심 또는 선한마음 양심이라고 부릅니다.아무리 나쁜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이라고해도 그마음 깊은곳 어딘가에는 분명 깨끗하고 선한 마음이 깨어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은 본디 악하나 외부로부터의 지식과 교육을 통해 선한마음을 갖게 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평상시에 도덕적인 인간도 절박한 상황앞에서 이기적인 본성이 나와 악해질수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그래서 때론 인간이 깊은 곳 어딘가에 선한마음이 깨어있다고 하는데 인간의 본성은 선한걸까요? 악한걸까요?

  • 2024-03-0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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