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죽음에서 삶의 의미 찾기 / 박정은

문탁
2023-12-11 10:47
78

 

 

 

1. 죽음을 탐구하고 싶었던 청년

 

나이듦과 자기서사의 세 번째 시즌, 마지막 교재인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서른 여섯 살의 신경외과 7년차 레지던트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면서 22개월 후인 2015년 3월 9일에 죽기 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어릴 때 뉴욕 북동부에 살다가 열 살에 사막도시인 애리조나의 킹맨으로 이사를 간다. 폴은 사막의 자유를 사랑했고 친구들과 사막을 탐험했다. 의사인 아버지가 늘 바쁜걸 보고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고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을 문학으로 여겼다. 폴은 문학을 전공하면서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월트 휘트먼의 작품을 연구했다. 하지만 학위논문을 마치면서 문학공부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들고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을 찾게 되었다. 폴은 의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의과 대학원에 입학한다.

 

폴은 의과 대학원에서 신경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한다. 신경외과의 특성상 완벽을 추구하고 “가장 도전적으로 또한 가장 직접적으로 의미, 정체성, 죽음과 대면”하게 해준다는 것이 폴이 신경외과를 선택한 이유였다. 이후에 폴은 암 진단을 받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죽음을 탐구하고 싶었던 청년이 죽음을 맞았으니 선물이 아닌가라고.

 

 

2. 사명감으로 신경외과의로 복직

 

신경외과의는 폴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 중에 중요한 하나다. 병으로 레지던트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 폴은 정체성을 잃었다. 환자복을 입은 폴은 주어에서 직접목적어가 된 기분이었다. 폴은 죽음을 이해하고 자신을 다시 정의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다시 문학을 읽기 시작한다. 문학을 읽으면서 자기 경험을 언어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글쓰기를 필요로 했다. 폴이 자기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이유였다.

 

폴은 신경외과의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신경외과의 일에 대해 누구보다도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다. 암 치료를 위해 일을 쉬고 체력이 떨어지면서 복직을 못 할거라고 생각하며 정체성을 잃고 혼란스러웠지만 어느 날 아침 마음 속에 할 수 없지만 계속 나아가겠다는 사뮈엘 베케트의 말이 떠오른다. 폴은 복직을 하겠다는 의지로 6주 동안 수술에 필요한 체력을 만드는 물리 치료 프로그램을 받는다. 그러고는 암 진단을 받고 18주 만에 복직을 한다. 폴은 이런 변화를 개종이라고 할 만한 변화라고 말한다.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던 일을 해냈다.

 

복직을 한 직후에는 수술실에서만 근무하던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수술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수술실 밖에서까지 환자를 대하는 업무를 하면서 하루 근무시간이 16시간까지 늘어났다. 폴의 몸은 혹사되면서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암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수술실로 복귀하고 7개월이 지나고 CT촬영기로 찍은 폐 사진은 예전에 찍은 사진에서 희미하게 있던 것이 “마치 지평선을 막 벗어난 보름달같이” 커다랗게 자라 있었다. 이미 그런 결과를 예상했는지 폴은 화가 나지도 겁먹지도 않았다. 그냥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일을 하면서 진통제를 한 움큼씩 먹으면서 폴도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폴은 이 때 문득 엘리엇의 <황무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등 뒤에서 찬바람이 몰아치는 중에도 나는 듣는다/ 뼈들이 덜거덕거리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웃는 소리를” 폴은 이 순간에 절망에 빠지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마치 할 일을 다 하고 집에 가는 사람처럼.

 

1차 약물치료가 실패임을 알고 레지던트로서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 폴은 7년 동안 병원을 다니면서 한 번도 의식하지 못한 정원에 있는 소나무를 알아보고 마지막 수술에서 손과 팔을 씻는 순간에도 장대함을 느낀다. 폴은 신경외과의로 마지막 출근 날임을 짐작하고 수술이 끝나는 순간까지 소명을 다한다.

 

 

 

3. 편안한 죽음이 최고의 죽음은 아니다

 

“아기가 생기면 우리가 제대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까?”, “아기와 헤어져야 한다면 죽음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암 진단을 받고 폴과 아내 루시는 보통의 부부처럼 이런 대화를 나눈다. 폴은 그럼에도 아기를 멋진 선물로 여기고 가지기로 한다. 폴이 신경외과의로 복직하는 모습과 겹친다. 죽음이 눈 앞에 있어도 아직 주어진, 살아있는 시간에 더 집중한다. 폴이 1차 약물요법이 실패하고 2차 화학치료도 실패로 끝나는 즈음에 루시는 딸을 출산한다. 이 때 폴의 상태는 독서를 하기도 힘들었다.

 

폴은 레지던트로 일하면서 수많은 죽음을 봐왔고 편안한 죽음이 반드시 최고의 죽음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폴 부부가 폴이 죽어가는 것보다 아직 살아있고 남아 있는 시간이 있는 것에 더 집중했기 때문에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부부는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죽음 앞에서 용기를 낸 부부는 딸 케이디를 얻었다. 딸이 태어나고 8개월을 더 살다간 폴에게 케이디는 기쁨과 충만함 그 자체였다. 딸 케이디에게 남긴 메시지를 보면 딸에 대한 깊은 사랑과 케이디로 인해 폴이 받았을 위안과 평안함이 느껴진다. 폴은 임종 순간에 딸을 찾는다. 루시는 폴이 가는 마지막 순간에 딸과 같이 누워있는 폴에게 늘 하던대로 자장가를 불러준다.

 

딸을 남겨두고 가는 것이 고통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편안한 죽음이라는 건 당사자가 아닌 주변 사람 입장에서 봤을 때 눈에 보이는 조건으로 판단되어 진다. 당사자가 아닌 주변사람이 보았을 때 폴의 죽음이 편안한 죽음이 아닐 수 있다. 안 편안한 죽음이지만 최고의 죽음이 될 수 있는 걸 폴은 보여주었다.

 

 

4. 폴과 함께 죽음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

 

암을 겪어 나가면서 신경외과의 겸 신경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폴의 계획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을 때 폴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찾으라고 했던 담당의 에마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인생의 삼분의 일을 야망을 이루기 위해 달려왔지만 병으로 좌절되었을 때 폴은 절망에 빠진다. 절망에 빠진 폴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한 건 담당의 에마였다.

 

폴은 에마로 인해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닌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는 때까지 돕는 것”임을 깨닫는다. “최대한의 책임감과 권한으로 환자를 돌보려 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책임이고 덧없는 권한”이었다는 것이다. 폴은 병원 밖에서 환자가 겪을 실존적 삶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신체적으로 병의 진행 상태를 보고 최선의 치료과정을 생각해내고 수술은 했지만 환자가 맞닥뜨리게 되는 병원 밖의 실제 삶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의사의 역할이 환자복을 벗고 병원 밖으로 나간 환자가 마주할 일상까지도 돕는 것임을 알고 지난 시절 의사로서 오만했음을 느낀다.

 

아내 루시로 인해 폴은 죽음 앞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순간이 왔을 때도 불필요한 연명치료는 받지 않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경외과의로 일하면서 신경계의 손상으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환자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폴에게 중요한건 생존이 아닌 관계 속에서 사람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루시는 폴이 투병했던 기간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충만한 시기”, “매일 삶과 죽음, 즐거움과 고통의 균형을 힘겹게 맞추며, 감사와 사랑의 새로운 깊이를 탐구한 시기”로 회상한다. 죽음이 바로 앞에까지 왔을 때 오히려 가장 아름답고 충만할 수 있었던 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즐거움과 고통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했던 노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병으로 인해 달라지는 신체로 실존적 삶이 계속해서 변하는 가운데 정신을 잃지 않고 새로운 정체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려고 애썼던 폴의 모습과 닮았다.

 

 

 

 

 

5. 출판으로 죽음까지 의미로 남긴 폴

 

완벽을 추구하는 신경외과를 선택했던 폴은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며 완벽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는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해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는 존재임을 말한다.

 

폴의 말처럼 <숨결이 바람이 될 때>는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는 모습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맑은 정신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깨어서 “난 준비됐어.”라며 연명치료를 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폴을 보면 경외감이 든다.

 

출판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죽음은 우리 앞에 당연히 있는 것이고 누구라도 죽음이 온다면 이런 과정들을 겪게 될 거라는 것을 알려준다. 마치 레지던트로 일하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병원 밖에서 환자가 마주할 실존적 상황에 대해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숙제를 다 마친 듯하다.

 

댓글 0
인문약방 에세이
    1. 잘사는 삶이란?   금천구 호암산 칼바위 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쭉 가난한 달동네에서 보낸 나에게 잘사는 삶이란 가난하지 않게 사는 삶이었다. 돈을 벌어 무조건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았다. 그러나 수많은 투자의 실패로 부자가 되는 것은 나와 인연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돈 벌기 위해 꾹꾹 참고 다녔던 권위적인 직장을 때려치웠다. 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잘살아보고 싶었다. 단순하게 살아보자 생각했다. 다양한 시도를 하던 중 그때 살고 있던 은평마을에 접속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은평은 소위 시민 모임으로 ‘핫(hot)한 동네’였기에 나의 첫 백수 생활은 풍성했다. 이 단체, 저 단체 얼굴을 비치며 활동하다 에너지협동조합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리고 백수인 내가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새롭게 시작하니만큼 의욕적으로 잘하고 싶었고, 또 일도 꽤 잘 해내 조합을 안착시키며 1기, 2기 태양광발전소 건설도 착착 진행하였다. 물론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1인 실무자와 무보수의 다인 이사 구조는 나에게 큰 중압감을 주었다. 유토피아주의자 같은 이사들은 매번 새로운 꿈에 부푼 사업들을 제안하며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이사들과의 의견 차이로 점점 늘어난 마찰에 겁이 났다. 그래서 서둘러 도망치듯 은평마을을 떠나 다시 예전의 임금노동을 하는 직업인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도망쳐온 나는 월급 많이 받는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몸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이상한 증상이 나에게 일어났다. 한동안 원인도 모르고 병명도 모른 체 아픈...
    1. 잘사는 삶이란?   금천구 호암산 칼바위 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쭉 가난한 달동네에서 보낸 나에게 잘사는 삶이란 가난하지 않게 사는 삶이었다. 돈을 벌어 무조건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았다. 그러나 수많은 투자의 실패로 부자가 되는 것은 나와 인연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돈 벌기 위해 꾹꾹 참고 다녔던 권위적인 직장을 때려치웠다. 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잘살아보고 싶었다. 단순하게 살아보자 생각했다. 다양한 시도를 하던 중 그때 살고 있던 은평마을에 접속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은평은 소위 시민 모임으로 ‘핫(hot)한 동네’였기에 나의 첫 백수 생활은 풍성했다. 이 단체, 저 단체 얼굴을 비치며 활동하다 에너지협동조합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리고 백수인 내가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새롭게 시작하니만큼 의욕적으로 잘하고 싶었고, 또 일도 꽤 잘 해내 조합을 안착시키며 1기, 2기 태양광발전소 건설도 착착 진행하였다. 물론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1인 실무자와 무보수의 다인 이사 구조는 나에게 큰 중압감을 주었다. 유토피아주의자 같은 이사들은 매번 새로운 꿈에 부푼 사업들을 제안하며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이사들과의 의견 차이로 점점 늘어난 마찰에 겁이 났다. 그래서 서둘러 도망치듯 은평마을을 떠나 다시 예전의 임금노동을 하는 직업인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도망쳐온 나는 월급 많이 받는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몸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이상한 증상이 나에게 일어났다. 한동안 원인도 모르고 병명도 모른 체 아픈...
문탁
2023.12.18 | 조회 117
인문약방 에세이
    1. 나에겐 너무나 무서운 개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이번에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정면에 몇 종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무심히 훑어보다 담배 냄새가 불쾌하니 실내 흡연을 삼가달라는 내용의 경고문에 눈길이 멎었다. 같은 종이에 누군가 갈겨쓴 손글씨 때문이었다. ‘개 짖는 소리도’. 종이를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급하게 흘려 쓴 글씨에서 짜증이 묻어난다. 시끄러우니 조용히 시키라는 거겠지. 근데, 살아있는 개의 입을 막아버리란 말인가? 성대 수술을 시키라는 것일까? 아무리 자기가 기르는 개가 아니라고 해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 도대체 얼마나 시끄러우면 저런 걸 썼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개 짖는 소리를 자제시켜 달라는 항의에 어이없어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세상에 무섭지 않은 게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나는 쫄보다. 유전자의 힘도 있고 안전한 길로만 걸어온 나의 삶의 행로도 겁 많은 나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단 유전자부터 살펴보자. 엄마와 동생들 모두 개를 무서워한다. 동생들과 함께 외출하러 밖으로 나와 몇 발짝 떼었을 때 어느 집에선가 나온 개를 보고 우리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거의 동시에 돌아서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마치 군인들이 사열할 때 일제히 ‘뒤로 돌아’ 자세를 취하듯. 저놈의 개새끼가 우리 뒤를 쫓아와 물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만들어낸, 언어 없이도 통하는 마법적 합일의 순간이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빨 때문이다. 사납게 짖고 으르렁대면 나에게 위해를 가할 것만...
    1. 나에겐 너무나 무서운 개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이번에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정면에 몇 종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무심히 훑어보다 담배 냄새가 불쾌하니 실내 흡연을 삼가달라는 내용의 경고문에 눈길이 멎었다. 같은 종이에 누군가 갈겨쓴 손글씨 때문이었다. ‘개 짖는 소리도’. 종이를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급하게 흘려 쓴 글씨에서 짜증이 묻어난다. 시끄러우니 조용히 시키라는 거겠지. 근데, 살아있는 개의 입을 막아버리란 말인가? 성대 수술을 시키라는 것일까? 아무리 자기가 기르는 개가 아니라고 해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 도대체 얼마나 시끄러우면 저런 걸 썼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개 짖는 소리를 자제시켜 달라는 항의에 어이없어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세상에 무섭지 않은 게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나는 쫄보다. 유전자의 힘도 있고 안전한 길로만 걸어온 나의 삶의 행로도 겁 많은 나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단 유전자부터 살펴보자. 엄마와 동생들 모두 개를 무서워한다. 동생들과 함께 외출하러 밖으로 나와 몇 발짝 떼었을 때 어느 집에선가 나온 개를 보고 우리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거의 동시에 돌아서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마치 군인들이 사열할 때 일제히 ‘뒤로 돌아’ 자세를 취하듯. 저놈의 개새끼가 우리 뒤를 쫓아와 물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만들어낸, 언어 없이도 통하는 마법적 합일의 순간이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빨 때문이다. 사납게 짖고 으르렁대면 나에게 위해를 가할 것만...
문탁
2023.12.18 | 조회 204
인문약방 에세이
    1.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저자는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예술가 수나우라 테일러이다. 수나우라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 닭들을 층층이 쌓아 싣고 빠르게 지나가는 거대한 트럭을 바라보며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한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참으며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 후 이 문제가 그를 사로잡은 것은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은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들이 불구가 되고, 그 산업에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는 이주노동자들이 동물들과 같이 갇혀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축산과 도축 노동자들은 과로,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심신의 장애를 입거나 장애를 입은 채 해고된다. 그 자리는 또 다른 저임금노동자들에 의해 쉽게 대체된다. 수나우라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전자레인지, 패스트푸드점, 조리 식품의 효율성이 장애인, 노인, 저소득층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실감한다. 동시에 산업화된 음식 시스템이 남용되는 현실과 그 부적절성에 대해 문제제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의식하고 있다. 식사때마다 반복되는 수나우라의 딜레마는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공장식 축산과 불안정한 노동과 건강불평등과 신자유주의는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수나우라는 이 책에서 장애와 동물을 교차시킨다. 종종 장애와 동물은 서로의 알리바이로 악용되어 왔다. 장애에 대한 폄하의 표현으로 ‘동물 같다’, ‘동물만 못하다’는 수사가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일부 동물권 활동가들은 ‘언어/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들보다 ‘쾌고감수능력’을 갖는 동물을 돌보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위계를 세우기도 한다. 수나우라는 우선, 우리가 장애와 동물에 대해...
    1.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저자는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예술가 수나우라 테일러이다. 수나우라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 닭들을 층층이 쌓아 싣고 빠르게 지나가는 거대한 트럭을 바라보며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한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참으며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 후 이 문제가 그를 사로잡은 것은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은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들이 불구가 되고, 그 산업에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는 이주노동자들이 동물들과 같이 갇혀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축산과 도축 노동자들은 과로,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심신의 장애를 입거나 장애를 입은 채 해고된다. 그 자리는 또 다른 저임금노동자들에 의해 쉽게 대체된다. 수나우라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전자레인지, 패스트푸드점, 조리 식품의 효율성이 장애인, 노인, 저소득층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실감한다. 동시에 산업화된 음식 시스템이 남용되는 현실과 그 부적절성에 대해 문제제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의식하고 있다. 식사때마다 반복되는 수나우라의 딜레마는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공장식 축산과 불안정한 노동과 건강불평등과 신자유주의는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수나우라는 이 책에서 장애와 동물을 교차시킨다. 종종 장애와 동물은 서로의 알리바이로 악용되어 왔다. 장애에 대한 폄하의 표현으로 ‘동물 같다’, ‘동물만 못하다’는 수사가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일부 동물권 활동가들은 ‘언어/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들보다 ‘쾌고감수능력’을 갖는 동물을 돌보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위계를 세우기도 한다. 수나우라는 우선, 우리가 장애와 동물에 대해...
문탁
2023.12.18 | 조회 104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삼살제왕이 이 땅에 내려 오실 제, ...(중략)..... 계백장군 백살신, 관우장군 백살신.....” 나의 할머니는 우리들 생일이 되면, 하얀 백설기 시루떡 앞에서 아래 아(·)자가 나오는 옛 한글로 쓰여 있는 백살기를 읽으신다. 대략 삼십여 분이 걸린다. 어릴 적에는 그 것이 마냥 싫었다. 어서 저 따뜻한 떡을 먹어야 하는데, 할머니 고사(?) 때문에 군침만 삼키고 있으니...... 그러다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다. 나에게 백설기 떡은 그저 그런 떡이 되었는데, 내 생일날 할머니가 그 백살기를 읽으신다. 연신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며 읽으시는 뒷모습에서 보며, ‘나는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귀신이 있어서 나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할머니의 정성이 나의 마음에 들어 온 것이다.    형제들만의 제사.       우리 집은 이제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하였다. 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큰 형님 댁에서 기제사(忌祭祀)로 일 년에 네 번, 조부모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다가, 어느 해인가 두 분이 성당에 나가신 뒤로는 연미사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무언가 섭섭하기도 또 죄스럽기도 하였다. 특히 성당에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신부님의 말씀에 앉았다가 일어 섰다를 반복하며 정해진 댓구를 따라해야 하는 미사는 매우 껄끄러웠다. 큰 형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큰 형수님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해 제사 날에, 우리는(우리집과 작은 형님네) 큰 형님네 아파트 문 앞에서 저녁이 다 될...
“삼살제왕이 이 땅에 내려 오실 제, ...(중략)..... 계백장군 백살신, 관우장군 백살신.....” 나의 할머니는 우리들 생일이 되면, 하얀 백설기 시루떡 앞에서 아래 아(·)자가 나오는 옛 한글로 쓰여 있는 백살기를 읽으신다. 대략 삼십여 분이 걸린다. 어릴 적에는 그 것이 마냥 싫었다. 어서 저 따뜻한 떡을 먹어야 하는데, 할머니 고사(?) 때문에 군침만 삼키고 있으니...... 그러다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다. 나에게 백설기 떡은 그저 그런 떡이 되었는데, 내 생일날 할머니가 그 백살기를 읽으신다. 연신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며 읽으시는 뒷모습에서 보며, ‘나는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귀신이 있어서 나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할머니의 정성이 나의 마음에 들어 온 것이다.    형제들만의 제사.       우리 집은 이제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하였다. 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큰 형님 댁에서 기제사(忌祭祀)로 일 년에 네 번, 조부모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다가, 어느 해인가 두 분이 성당에 나가신 뒤로는 연미사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무언가 섭섭하기도 또 죄스럽기도 하였다. 특히 성당에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신부님의 말씀에 앉았다가 일어 섰다를 반복하며 정해진 댓구를 따라해야 하는 미사는 매우 껄끄러웠다. 큰 형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큰 형수님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해 제사 날에, 우리는(우리집과 작은 형님네) 큰 형님네 아파트 문 앞에서 저녁이 다 될...
가마솥
2023.12.15 | 조회 341
인문약방 에세이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문탁
2023.12.11 | 조회 260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