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연대하는 마음으로 걷다보니

기린
2023-12-0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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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12월 4일 아침 6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사방이 컴컴할 때 집을 나섰다. 혜화역에서 열리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기자회견에 지지 방문을 가는 길이었다. 올해 다섯 번째 방문이다. 전장연에서는 2021년 12월 3일부터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시작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권리와 관련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라고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2월에는 경복궁역에서 치러진 삭발식에 참석했었다. 역 승강장안 출근인파가 뒤섞이는 현장에서 삭발하는 장애인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둘레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는 첫 단계는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 검색이다.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은 둘레길의 입구까지 지하철과 마을버스 등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 과정은 공기처럼 당연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이동권을 투쟁해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데다, 그마저도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지 않아 권리가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듣고 있자니 내가 누리고 있는 당연함이 특권으로 느껴졌다.

 

 

 

 

  이번 기자회견은 교통약자의 이동 편의를 위한 특별교통수단 예산과 관련 국토교통위원회가 증액한 금액(271억원)을 포함해서 내년 예산안에 반영해달라고 촉구하기 위해 열렸다. 아침 8시 혜화역 5-3번 승강장 앞에서 기자회견이 열린지 10여분 만에 교통공사와 경찰 등이 순식간에 에워싸더니 ‘소란행위’를 했다는 명목으로 강제 해산시켰다. 밀지 말라는 외침과 지하철 못 타게 하라는 고성 속에서 사람들의 몸이 뒤엉켰다. 그들의 압박에 밀려 혜화역 바깥으로 나와서야 겨우 기자회견을 진행할 수 있었다. 전장연은 이 요구가 수용된다면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멈추겠다고 선언했다. 다섯 번 지지연대참석 하는 동안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기습적으로 강제로 쫓겨난 경우는 처음이었다. 2021년부터 시작한 투쟁이 3년차가 넘어가고 있는데, 이들의 요구는 여전히 묵살 당하는데 탄압은 더 가혹해졌다.

 

 

  전장연의 투쟁을 응원하겠다는 생각으로 나섰던 길이 갑자기 막히는 순간 마음 저 밑에서 뭔가 불끈 치고 올라왔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강압적으로 제지당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나? 이 분들은 투쟁 내내 이런 폭력 앞에서 끈기 있게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고 있었구나. 대단하시다, 응원한다는 등의 말로는 그 불끈함을 설명할 수 없었다. 나도 언제라도 이런 처지로 내몰릴 수 있다는 어떤 두려움이었다. 동시에 함께 이 폭력에 맞서야겠다는 밀도 높은 연대감이기도 했다.

 

 

 

 

 버틀러는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에서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이란 언제나 사회적 삶으로서, 각자의 관점과 처지를 바탕으로 한 일인칭적 성질을 넘어서는 보다 큰 사회·경제 인프라의 세계”와 매개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혼자 집을 나서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둘레길의 초입에 도착하면 이 길은 어떤 모습을 내게 보여줄지 설레기도 한다. 이정표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헤매기도 하지만, 목표했던 지점까지 다 걷고 나면 해냈다는 성취감도 있다. 이런 시간들이 쌓이면 뭐든지 혼자서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는다. 하지만 이것이 교통수단의 인프라를 적극 활용한 결과라는 측면으로 보면 혼자서 해냈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사회적 인프라를 활용하여 이동할 권리를 누렸을 때야 얻을 수 있기도 한 성취감이다. 이러한 권리가 차별적으로 할당되어 있다는 사실을 온 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전장연의 투쟁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가다 보면 온 세상 사람들 다 만날 수 있겠다는 동요 가사가 있다. 집 앞의 탄천을 따라 걷다가 더 멀리 걸어 나가다 보니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길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에 감동하는 순간도 있었고, 친구들과 함께 걸으며 수다 떠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리고 연대하는 마음으로 나선 길에서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을 만났다. 그들이 겪고 있는 차별이 나와 동일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강압적으로 드러나는 순간 나는 그 차별에 연루되었다. 그리고 저항하는 그들이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도 더 절실하게 와 닿았다. 자꾸자꾸 걸어 가다보니 연결되는 온 세상은 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네 번째 연대 방문차 국회의사당 역으로 갔던 8월의 어느 날, 나는 마이크를 잡고 연대발언을 했다. 어색하고 쑥스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전장연에서 배포했던 구호를 외쳤다. 그 구호가 온 세상에 뿌려져 차별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다시 외쳐본다.

 

장애인에게 권리를!

차별은, 이제 그만!

동정은, 집어 치워!

혐오는, 쓰레기통에!

이윤보다, 생명을!

 

댓글 7
  • 2023-12-06 09:37

    마음으로 걸어들어오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2023-12-06 09:59

    길을 걷는 일이 이렇게도 연결될 수 있군요!
    너무 잘 읽고 갑니다!

  • 2023-12-06 10:03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불끈~함, 있지요. 인간답게에 대한 질문이 마구 올라오더군요. 연대, 확장되는 신체가 아니면 넘 좁은 인간이겠구나하는 마음이, 집회 내내 들었어요

  • 2023-12-06 10:52

    아버지 휠체어을 밀면서 장애가 생겼을 때 이동이란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실감했어요.
    서로의 차이에 대해 관심갖고 힘을 나누는 이들이 많은 세상, 저 동요 한구절처럼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이 인사 나누는 세상, 모두의 꿈일텐데요.
    현장에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3-12-06 17:02

    "이정표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헤매기도 하지만, 목표했던 지점까지 다 걷고 나면 해냈다는 성취감도 있다. 이런 시간들이 쌓이면 뭐든지 혼자서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는다. 하지만 이것이 교통수단의 인프라를 적극 활용한 결과라는 측면으로 보면 혼자서 해냈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사회적 인프라를 활용하여 이동할 권리를 누렸을 때야 얻을 수 있기도 한 성취감이다. 이러한 권리가 차별적으로 할당되어 있다는 사실을 온 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전장연의 투쟁이다." 이 단락이 와닿아서 두고 두고 읽습니다. 이번 주.. 마음은 혜화인데, 갈 수는 없는 상황이라.. 올라오는 소식들을 보면서 함께 합니다.

  • 2023-12-06 18:28

    걷기의 확장이 기린님을 어디로 데려갈지, 앞으로가 더 기대됩니다.^^
    멈추지 말고 계속 걷고 계속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해요~

  • 2023-12-07 18:09

    올해 한번도 참여를 못했어요ㅠ
    휴가를 내고 국회의사당을 향하던날 지하철에서 거의 쓰러질듯 급하게 집으로 발길을 돌렸고.. 광교중앙역으로 갔던 날은 시간 공지가 잘못돼서 발길을 돌렸었네요.
    기린샘이 말씀하신 저밑에서 불끈 올라오는 경험을 아직 못했지만,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연대의 마음을 내어봅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인문약방 에세이
    1. 잘사는 삶이란?   금천구 호암산 칼바위 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쭉 가난한 달동네에서 보낸 나에게 잘사는 삶이란 가난하지 않게 사는 삶이었다. 돈을 벌어 무조건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았다. 그러나 수많은 투자의 실패로 부자가 되는 것은 나와 인연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돈 벌기 위해 꾹꾹 참고 다녔던 권위적인 직장을 때려치웠다. 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잘살아보고 싶었다. 단순하게 살아보자 생각했다. 다양한 시도를 하던 중 그때 살고 있던 은평마을에 접속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은평은 소위 시민 모임으로 ‘핫(hot)한 동네’였기에 나의 첫 백수 생활은 풍성했다. 이 단체, 저 단체 얼굴을 비치며 활동하다 에너지협동조합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리고 백수인 내가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새롭게 시작하니만큼 의욕적으로 잘하고 싶었고, 또 일도 꽤 잘 해내 조합을 안착시키며 1기, 2기 태양광발전소 건설도 착착 진행하였다. 물론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1인 실무자와 무보수의 다인 이사 구조는 나에게 큰 중압감을 주었다. 유토피아주의자 같은 이사들은 매번 새로운 꿈에 부푼 사업들을 제안하며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이사들과의 의견 차이로 점점 늘어난 마찰에 겁이 났다. 그래서 서둘러 도망치듯 은평마을을 떠나 다시 예전의 임금노동을 하는 직업인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도망쳐온 나는 월급 많이 받는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몸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이상한 증상이 나에게 일어났다. 한동안 원인도 모르고 병명도 모른 체 아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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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18 | 조회 117
인문약방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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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18 | 조회 201
인문약방 에세이
    1.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저자는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예술가 수나우라 테일러이다. 수나우라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 닭들을 층층이 쌓아 싣고 빠르게 지나가는 거대한 트럭을 바라보며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한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참으며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 후 이 문제가 그를 사로잡은 것은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은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들이 불구가 되고, 그 산업에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는 이주노동자들이 동물들과 같이 갇혀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축산과 도축 노동자들은 과로,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심신의 장애를 입거나 장애를 입은 채 해고된다. 그 자리는 또 다른 저임금노동자들에 의해 쉽게 대체된다. 수나우라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전자레인지, 패스트푸드점, 조리 식품의 효율성이 장애인, 노인, 저소득층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실감한다. 동시에 산업화된 음식 시스템이 남용되는 현실과 그 부적절성에 대해 문제제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의식하고 있다. 식사때마다 반복되는 수나우라의 딜레마는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공장식 축산과 불안정한 노동과 건강불평등과 신자유주의는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수나우라는 이 책에서 장애와 동물을 교차시킨다. 종종 장애와 동물은 서로의 알리바이로 악용되어 왔다. 장애에 대한 폄하의 표현으로 ‘동물 같다’, ‘동물만 못하다’는 수사가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일부 동물권 활동가들은 ‘언어/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들보다 ‘쾌고감수능력’을 갖는 동물을 돌보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위계를 세우기도 한다. 수나우라는 우선, 우리가 장애와 동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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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18 | 조회 104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삼살제왕이 이 땅에 내려 오실 제, ...(중략)..... 계백장군 백살신, 관우장군 백살신.....” 나의 할머니는 우리들 생일이 되면, 하얀 백설기 시루떡 앞에서 아래 아(·)자가 나오는 옛 한글로 쓰여 있는 백살기를 읽으신다. 대략 삼십여 분이 걸린다. 어릴 적에는 그 것이 마냥 싫었다. 어서 저 따뜻한 떡을 먹어야 하는데, 할머니 고사(?) 때문에 군침만 삼키고 있으니...... 그러다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다. 나에게 백설기 떡은 그저 그런 떡이 되었는데, 내 생일날 할머니가 그 백살기를 읽으신다. 연신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며 읽으시는 뒷모습에서 보며, ‘나는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귀신이 있어서 나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할머니의 정성이 나의 마음에 들어 온 것이다.    형제들만의 제사.       우리 집은 이제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하였다. 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큰 형님 댁에서 기제사(忌祭祀)로 일 년에 네 번, 조부모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다가, 어느 해인가 두 분이 성당에 나가신 뒤로는 연미사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무언가 섭섭하기도 또 죄스럽기도 하였다. 특히 성당에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신부님의 말씀에 앉았다가 일어 섰다를 반복하며 정해진 댓구를 따라해야 하는 미사는 매우 껄끄러웠다. 큰 형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큰 형수님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해 제사 날에, 우리는(우리집과 작은 형님네) 큰 형님네 아파트 문 앞에서 저녁이 다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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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2023.12.15 | 조회 340
인문약방 에세이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문탁
2023.12.11 | 조회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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