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 이야기 / 스프링

문탁
2023-12-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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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에겐 너무나 무서운 개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이번에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정면에 몇 종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무심히 훑어보다 담배 냄새가 불쾌하니 실내 흡연을 삼가달라는 내용의 경고문에 눈길이 멎었다. 같은 종이에 누군가 갈겨쓴 손글씨 때문이었다. ‘개 짖는 소리도’. 종이를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급하게 흘려 쓴 글씨에서 짜증이 묻어난다. 시끄러우니 조용히 시키라는 거겠지. 근데, 살아있는 개의 입을 막아버리란 말인가? 성대 수술을 시키라는 것일까? 아무리 자기가 기르는 개가 아니라고 해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 도대체 얼마나 시끄러우면 저런 걸 썼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개 짖는 소리를 자제시켜 달라는 항의에 어이없어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세상에 무섭지 않은 게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나는 쫄보다. 유전자의 힘도 있고 안전한 길로만 걸어온 나의 삶의 행로도 겁 많은 나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단 유전자부터 살펴보자. 엄마와 동생들 모두 개를 무서워한다. 동생들과 함께 외출하러 밖으로 나와 몇 발짝 떼었을 때 어느 집에선가 나온 개를 보고 우리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거의 동시에 돌아서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마치 군인들이 사열할 때 일제히 ‘뒤로 돌아’ 자세를 취하듯. 저놈의 개새끼가 우리 뒤를 쫓아와 물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만들어낸, 언어 없이도 통하는 마법적 합일의 순간이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빨 때문이다. 사납게 짖고 으르렁대면 나에게 위해를 가할 것만 같다. 그래서 가급적 개를 만날 가능성이 적은 곳으로 다닌다. 동물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카페와 같은 곳은 아예 안 가고, 관리되지 않은 개들이 출몰할 만한 숲길이나 산길도 여간해서는 혼자 가지 않는다. 무서우니 피하는 건데, 개를 피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생활하는 곳곳에서 개들을 만나게 된다. 저녁 무렵 공원이라도 갈라치면 개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본다. 개와 만나는 접점이 늘어나니 개에게 사람이 물리는 사고도 종종 보도가 된다. 사고가 일어나면 대체로 견주에게 개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묻고 더 철저한 관리를 촉구한다. 개줄을 튼튼하게 매고, 크거나 사나운 개는 입마개를 하도록 해서 최대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런 대책들에는 “개가 감히 사람을 물다니, 개는 절대 사람을 물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는 지킬 수 없는 규칙이다. 이빨이 있는 동물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와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을 무는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공간을 함께 점유하는 동물로서 인간은 사고 방지를 위해 개를 단속하기 이전에 개가 안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무서움은 나의 감정일 뿐이지, 개가 갖고 있는 본성은 아니다. 개 자체가 두려움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 개만 나의 습성을 이해하고 거기에 일방적으로 맞춰야 하는 것일까? 개가 사람을 물었을 때는 개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안전을 추구하는 행위를 하듯이 개 역시 안전을 추구하는 행위로 사람을 공격했을 것이다. 나의 무서움이 스스로를 언제든지 개나 고양이에게 공격받을 수 있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포지셔닝한 데서 오는 감정이라면, 개의 무는 행위 역시 인간에게서 느끼는 위협으로 인한 방어일 가능성이 높다.

 

 

 

 

 

2. 너에겐 너무나 사랑스러운 개

 

개를 키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개가 다른 사람을 문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계속 일어난다. 주인에게 순한 동물도 위협을 느끼면 공격하는 게 당연하다. 가축 파수견의 브리더인 린다 와이저는 공격적인 구조견이나 아이를 문 적이 있는 개는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인간 아이는 물론이고 다른 개들의 목숨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개 전체란 종류임과 동시에 개체다. 종이 지속돼야 개체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종의 존속을 위해 말썽꾸러기는 해치워 버리자는 것 아닌가? 아무도 죽이면 안 된다. 자유를 억압하면 안 된다는 보편적 윤리에 위배되는 것 같다. 그러나 누구의 죽음, 누구의 자유인가? 절멸을 피하기 위해 현실에서는 인간과 개의 목숨, 자유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지구에서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최선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방안을 선택하는, 일종의 소화불량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현대 소비문화 속에서 개는 단순히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다. 개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자본주의의 세심한 그물망 속에서 관리된다. 품종 개량 및 번식, 개 사료, 미용, 놀이, 훈련, 유전병·감염 등을 포함한 각종 질병 관리, 장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돈이 든다. 그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펫보험에 가입한다. 사람이 살면서 겪는 자연적인 생노병사와 불의의 사고를 보험으로 관리하듯 개 역시 이 산업의 하나의 그물코로 엮여 들어왔다. 개와 함께 사는 데는 끊임없이 돌보는 손길이 필요하고 비용이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도 반려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천오백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가축이었던 동물들의 도축장이 도시 외곽으로 옮겨지면서 도시에는 작은 동물들만 남았다. 눈앞에서 사라진 가축들은 식탁에 고기로 올랐다.

 

도시에 남은 개들은 주로 애완동물로 기능한다. 개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물고 빨고, 추울까봐 옷을 입히고 양말을 신기고 각종 악세서리로 치장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왜 동물로서 개의 야생성을 존중하지 않고 사람의 아기처럼 대하는 거지? 아기로 만들며 차이의 존중을 거부하는 것이 거슬린다.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욕구를 투사하는 대상으로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외로운데, 사람보다는 덜 피곤하고 말을 잘 들으니까 개를 데려다가 인형놀이를 하는 것 같다. 인간의 욕구와 편의 중심인 이런 관계에서는 애정이 식거나 돌보는 게 여의치 않아지면 버려질 위험이 커진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도 나의 편견일 수 있다. 인간의 애정은 왜 우선적으로 인간에게 향해야 하나? 애정의 대상이 인간이 아니면 다 외로움의 투사 대상인가? 인간 역시 그렇지 않은가? 실제 동물과 함께 살며 그들을 가족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의 편협한 시선으로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제는 누구에게 애정을 쏟느냐, 누구와 살지를 선택하느냐가 아니다. 함께 살고 있는 이들과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나는 동물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1970년 이래로 야생동물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가축은 늘었다. 10억 마리의 양, 10억 마리의 돼지, 10억 마리 이상의 소, 250억 마리 이상의 닭이 존재한다. 현재 전 세계 대형 동물의 90퍼센트 이상이 인간 아니면 가축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미 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어느새 생활권을 공유하며 같이 살게 되었다. 이들과 어떤 자세로 함께 살 것인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3.개를 무서워하지만 잘 지내고 싶어

 

나는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中 반려종 선언, 178)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과 비인간으로 이루어진 다종의 생물들이 서로의 몸과 삶의 구성요소로서 함께 진화해왔다고 보고, 이들의 관계를 반려종이라고 부른다. 인간과 비인간의 몸과 삶은 다종의 생물이 모여 이루어나가는 일종의 배치이다(애나 칭, 세계 끝의 버섯, 해제, p.512). 해러웨이가 말하는 반려종은 반려동물보다는 범위가 더 넓고 다층적이다. 반려는 식사를 함께 하는 가까운 관계이자 성적인 파트너 즉 연인이나 배우자를 의미하는 용어로 많이 쓰였다. 둘도 없는 소중한 파트너, 중요한 타자를 의미한다. 해러웨이는 소중한 자가 동종이나 동류일 필요는 없다고 한다. ‘중요한 타자’는 서로 사랑하는 자들 사이의 윤리를 함축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기반으로 한다. 해러웨이에게 반려종이 소중한 타자라고 했을 때 여기에는 정서적인 친밀성이 깔려 있다. 나는 정서적으로 친밀하지 않아도 소중한 타자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상대 역시 인정과 존중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소통하기 어렵다. 오히려 무서움의 거리만큼 발견과 소통의 기쁨은 배가 될 수 있다.

 

소중한 타자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길들여 복종시키는 관계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 해러웨이는 ‘소중한 타자성’을 의도의 반영과는 다른 무엇으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사랑하는 구체적인 반려견이 없고 개 일반에 대한 두려움만 있는데 어떻게 ‘있음’이 아닌 ‘없음’으로부터 반려종과 함께 잘 살고 싶다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개를 무서워하지만 개와 잘 지내고 싶은 나에게 개는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러웨이의 ‘카옌’과 같은 구체적인 형상은 없지만, 그 작용력이 나에겐 존재감이다.

 

개에 대한 공포로 나의 마음이 쪼그라들고 활동 범위가 축소되는 것도 힘들고, 나의 공포로 개의 활동 반경이 좁아지는 것도 미안했다. 내가 개를 보고 흠칫 놀라거나 얼어버려 그 자리에 꼼짝 못하고 있으면 산책 나온 개 주인은 개의 목줄을 더 짧고 세게 쥐거나 개를 데리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난다. 나에게 개가 트러블이듯이 개에게는 내가 트러블이었다. 개를 편하게 해주고 싶은데 불편하게 해서 나도 마음이 불편하다. 집을 나서면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렇게 개가 나의 심신에 계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개는 나에게 중요한 타자인 셈이다. 중요한 타자와 소통을 잘 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무섭지만 개는 나에게 소중한 타자다.

 

스트래선은 다른 관념들을 사유하기 위해 어떤 관념들, 어떤 관계들을 관계시키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세계를 만들고 그런 세계를 이야기하기. 이렇게 ‘나의 이야기’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올해 돌봄을 주제로 공부하면서 동물, 장애, 비인간을 취약성, 트러블, 함께 살기, 애도, 오염, 번역, 공유지 등의 관념들로 만났다. 취약성이 연대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오염된 땅 폐허가 송이버섯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더 알고 싶은 이야기이다. 나도 삶을 통해 길어 올린 이야기를 이어 붙이면서 실뜨기를 이어가고 싶다.

 

 

 

 

 

‘나의 개’ 이야기는 무서움으로부터 시작한다. 상대에 대한 감정이 혐오나 두려움,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라 하더라도 뭔가를 느낀다면 그것이 새로운 관계의 시작일 수 있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때는 그냥 지나가버리고 만다. 만남으로 인해 일어난 감응을 징검다리 삼아 상대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고 접촉을 늘려 나가다보면 어느새 관계가 달라져 있을 때가 있다. 얼마 전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 집에 놀러 가서 고양이를 가두지도 않고 한 공간에 같이 있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않으니 안심하고 관찰할 수 있었다. 창가에서 햇볕을 쬐며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가 도도하고 우아하게 보였다. 징그럽게만 느껴지던 고양이 눈도 신비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두려움의 장막이 걷히니 감각도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자신감을 얻은 나는 고양이가 있는 다른 집을 방문하고 한순간에 자신감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너무나 활발한 고양이 세 마리가 뛰어다니는 그 집에서 나는 의연한 척 할 수 없었다. 다시 고양이들을 방 안에 가두었다.

 

그래도 나는 기가 완전히 꺾이지는 않았다.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개, 고양이와 함께 있었으므로 이전의 나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나를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들은 존재 자체의 본성이 그런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의 조건이 작용한 결과겠지만, 덕분에 나는 무섭고 싫은 상대에 대해 알아 나가면서 나의 자유를 확장해가고 있다. 동물뿐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의 경계가 옅어지면서 내가 편해지면 그들을 편하게 대할 것이고 그들 역시 더 편하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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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약방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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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31 | 조회 149
인문약방 에세이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난 가장 낯선 작가였다.   책을 읽기 전, 단톡방에 올라온 저자 일라이 클레어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자라고 들었는데, 두 귀가 다 드러난 반삭에 가까운 짧은 머리, 두툼한 안경을 낀 얼굴에 넓은 어깨, 지퍼 달린 낡은 녹색 점퍼... ‘남자같은 여자’ 내가 갖고 있는 단어의 수준에서 나는 이렇게밖에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글을 보니, 그는 ‘젠더 퀴어’란다. 무슨 뜻이지? 동성애자인가? 소수자 용어에 낯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퀴어는 동성애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퀴어란, 태어날 때 사회(의사)가 지정해준 생물학적 성과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성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을 통칭한다. 거기에는 여자지만 남자보다 여성에게 성적으로 더 끌리는 사람, 남녀 모두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사회에서 훈육되는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여자, 자신을 굳이 남녀이분법에 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 그러다 보니 나도 퀴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미디어와 문학의 일방적인 이성애적 세례가 없었다면, 혹은 대학 시절 다이크 공동체를 만났다면, 나도 지금과는 다른 젠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 대한 소개를 좀 더 해보자. 그는 1963년생, 미국 오리건주 시골 벌목 노동자 마을에서 백인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지정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자신이 소녀라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젠더 퀴어였고,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으로 어려서부터 지진아, 불구, 원숭이 같은 조롱과 비난을 들으며 자랐다. 그는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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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31 | 조회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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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1 | 조회 104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2015년, 난 유부남(有婦男)이 아닌 유부남(有夫男)이 되었다. 당시 4년 째 만나고 있었던 파트너와 결혼을 했다. 그 해 연방 대법원의 판결로 미국 전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덕분이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결혼은 인생의 선택지로 존재하지 않았다. 동성혼이 언제 현실화될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된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은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여전히 나의 베프가 되어주고 있는 파트너와의 합법적인 결혼으로 나는 (물질적 성공으로서가 아닌) 게이로서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셈이다. 동네에서, 직장에서 우리를 법적 커플로 존중해 주었다. 세금 감면, 의료 보험의 배우자 등록, 병원에서의 보호자 역할 등 이성애 커플과 똑같은 혜택들도 받게 되었다. 결혼 후 난 공공 영역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다.  드디어 내 인생에서 길운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의 성정체성이 받아들여지는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코로나 위기가 터지기 몇 달 전,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몇 달 동안 불면증이 지속 되었고 우울감과 무기력이 찾아왔다. 여러 모로 볼 때 삶의 통상적 지표들은 우상향하고 있는 중이 었다. 번아웃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여러 원인으로 인해 일어났을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이로 인해 나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생활이 12년 째였지만 난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한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아침엔 반드시 쌀밥에 나물 반찬을 먹어야 속이 편하고 든든했다. 내 혀와 위장은 어릴 적 먹고 자란 전라도 시골 음식들을 여전히 갈망했다.  미국 대통령의 혐오적 선동과 그칠 줄 모르는 거짓말에 혈압이 올라갔지만, 이보다는 차별 금지법 통과에 무관심한 한국 양대 정당의 정치인들을 볼 때 나의 분노 게이지는 더욱 높아졌다. 저녁마다 즐겨 보는  넷플릭스의 Watch list엔 미드보다 더 많은 한국 드라마로 채워졌다.          ‘한국’은 내게 모순 그 자체였다. 일 년 정도 휴직하고 한국 살이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파트너의 법적 지위 문제와 혹시라도 그가 겪을 차별이 염려되어 금세 마음을 접었다. 자발적으로 한국을 탈주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한국 사회에 의해 유배 당했다는 억울함이 자주 올라왔다. 한국의 친구와 지인들과 관계가 멀어진 데 대해 아쉬움도 컸다. 이들과 계속 인연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어느새 연락이 끊어져 있었다. 대부분 내가 한국을 떠났는지 잘 알지 못하는데, 원거리에서 관계를 어떻게 지속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들과 거리를 둔 건 나였지만,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가슴이 아려올 떄가 많았다. 가장 큰 모순은 내가 수치의 땅으로 기억되는 (그리고 가까이 하게 되면 이를 다시 경험하게 될) 한국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해석되지 않은 채 두려움과 상처로 남아 있는 한국에서의 경험들과 ‘한국’과 점점 멀어지면서 느끼는 상실감이 번아웃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공부가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불교와 노자 등을 공부할 수 있는 한국인 모임을 찾았다. 돌이켜 볼 때 당시 나에게 공부만큼 중요했던 것은 한국인들과의 연결이었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내 모습 드러내고 싶었다. 한국에서 신뢰할만한 몇몇의 이성애자들에게만 커밍 아웃을 했었다. 미국에서도 나처럼 한국에서 탈주한 게이 친구들 이외의 다른 한국인들과 연결되기 쉽지 않았다. 특정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인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고 소수자에 대한 배제가 정교하게 이뤄지는 공동체였다.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게 되면 차별과 소외를 다시 겪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계속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해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묻어두고 살았다.       마침 코로나의 여파로 한국의 몇몇 인문학 강의가 온라인으로 개설 되었다. 불교와 주역의 기초적인 것을 훑는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처음엔 나를 드러내기가 망설여졌다. 한국인 공부 모임에서의 커밍 아웃은  미국 생활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나를 드러내는 일과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을 숨기게 만들었던 한국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성이 고정된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었다. 기회가 생겼을 때 난 약간의 용기를 내어 내가 퀴어라는 것과 한국에서 살기 어려워 미국으로 이주한 사실을 털어 놓았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뤄진 최초의 커밍 아웃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은 다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 이후 난 보다 자유롭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몇몇 선생님들과는 학기가 끝난 이후에도 모임을 이어가는 관계가 되었다. 나에겐 자신을 오픈한 상태에서 ‘한국’과 다시, 새롭게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셈이었다.      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2022년 “나이듦과 자기 서사”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난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었다. 소수자 작가들이 쓴 다양한 서사들을 접하면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과 복잡하게 응어리진 감정들을 하나씩 해석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텍스트를 재해석하여 자기 성찰에 이르는 글쓰기는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해야하는 노동 집약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심을 갖고,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는 발심을 한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난 소수자로서의 위치로 인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갖고 살았다. 나에게 저항할 힘이 없다고 느꼈다.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삶의 경험들을 한쪽 구석에 계속 쌓아 두었다. 이를 곱씹거나 드러내면 자책만 늘어날 것 같아서였다. 세미나에서 미니 자서전을 쓰면서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난 생각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불확실함을 무릅 쓰고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여러 번 탈주를 했다. 내 여건에서 할 수 있는 나름의 저항이었다. 이로 인해 낯선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법을 배웠고 삶의 기예들을 익혔다. 다양한 소수성을 가진 사람들과 접속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두려움이 나의 취약함만은 아니었다. 이는 내 삶의 추동력으로 작동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두려움에 대한 재해석은 자신을 긍정하게 된 중요한 일이었다.      처음 ‘몸의 일기’ 연재를 권유받았을 때 망설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초보적 글쓰기 수준을 알고 요청한 것이라 생각해 용감하게 덥썩 받아들였다. 나름 많은 공을 들여 글을 썼지만 거칠고 성근 서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글을 연재하면서 개인의 서사는 유동적이고 모순적이며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사가 내게 생명력을 주는 삶의 비전으로 변용되기 위해선 꾸준한 공부가 우선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끝으로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만든 장을 마련해 주신 문탁샘과 매 회의 글에 꼼꼼한 피드백을 주신 겸목샘에게 감사드린다.              -------------------------------- 편집자 주 전 편을 다시 읽고 싶은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5&category1=%EB%AA%B8%EC%9D%98+%EC%9D%BC%EA%B8%B0&mod=list&pageid=1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2015년, 난 유부남(有婦男)이 아닌 유부남(有夫男)이 되었다. 당시 4년 째 만나고 있었던 파트너와 결혼을 했다. 그 해 연방 대법원의 판결로 미국 전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덕분이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결혼은 인생의 선택지로 존재하지 않았다. 동성혼이 언제 현실화될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된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은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여전히 나의 베프가 되어주고 있는 파트너와의 합법적인 결혼으로 나는 (물질적 성공으로서가 아닌) 게이로서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셈이다. 동네에서, 직장에서 우리를 법적 커플로 존중해 주었다. 세금 감면, 의료 보험의 배우자 등록, 병원에서의 보호자 역할 등 이성애 커플과 똑같은 혜택들도 받게 되었다. 결혼 후 난 공공 영역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다.  드디어 내 인생에서 길운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의 성정체성이 받아들여지는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코로나 위기가 터지기 몇 달 전,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몇 달 동안 불면증이 지속 되었고 우울감과 무기력이 찾아왔다. 여러 모로 볼 때 삶의 통상적 지표들은 우상향하고 있는 중이 었다. 번아웃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여러 원인으로 인해 일어났을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이로 인해 나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생활이 12년 째였지만 난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한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아침엔 반드시 쌀밥에 나물 반찬을 먹어야 속이 편하고 든든했다. 내 혀와 위장은 어릴 적 먹고 자란 전라도 시골 음식들을 여전히 갈망했다.  미국 대통령의 혐오적 선동과 그칠 줄 모르는 거짓말에 혈압이 올라갔지만, 이보다는 차별 금지법 통과에 무관심한 한국 양대 정당의 정치인들을 볼 때 나의 분노 게이지는 더욱 높아졌다. 저녁마다 즐겨 보는  넷플릭스의 Watch list엔 미드보다 더 많은 한국 드라마로 채워졌다.          ‘한국’은 내게 모순 그 자체였다. 일 년 정도 휴직하고 한국 살이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파트너의 법적 지위 문제와 혹시라도 그가 겪을 차별이 염려되어 금세 마음을 접었다. 자발적으로 한국을 탈주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한국 사회에 의해 유배 당했다는 억울함이 자주 올라왔다. 한국의 친구와 지인들과 관계가 멀어진 데 대해 아쉬움도 컸다. 이들과 계속 인연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어느새 연락이 끊어져 있었다. 대부분 내가 한국을 떠났는지 잘 알지 못하는데, 원거리에서 관계를 어떻게 지속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들과 거리를 둔 건 나였지만,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가슴이 아려올 떄가 많았다. 가장 큰 모순은 내가 수치의 땅으로 기억되는 (그리고 가까이 하게 되면 이를 다시 경험하게 될) 한국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해석되지 않은 채 두려움과 상처로 남아 있는 한국에서의 경험들과 ‘한국’과 점점 멀어지면서 느끼는 상실감이 번아웃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공부가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불교와 노자 등을 공부할 수 있는 한국인 모임을 찾았다. 돌이켜 볼 때 당시 나에게 공부만큼 중요했던 것은 한국인들과의 연결이었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내 모습 드러내고 싶었다. 한국에서 신뢰할만한 몇몇의 이성애자들에게만 커밍 아웃을 했었다. 미국에서도 나처럼 한국에서 탈주한 게이 친구들 이외의 다른 한국인들과 연결되기 쉽지 않았다. 특정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인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고 소수자에 대한 배제가 정교하게 이뤄지는 공동체였다.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게 되면 차별과 소외를 다시 겪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계속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해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묻어두고 살았다.       마침 코로나의 여파로 한국의 몇몇 인문학 강의가 온라인으로 개설 되었다. 불교와 주역의 기초적인 것을 훑는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처음엔 나를 드러내기가 망설여졌다. 한국인 공부 모임에서의 커밍 아웃은  미국 생활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나를 드러내는 일과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을 숨기게 만들었던 한국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성이 고정된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었다. 기회가 생겼을 때 난 약간의 용기를 내어 내가 퀴어라는 것과 한국에서 살기 어려워 미국으로 이주한 사실을 털어 놓았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뤄진 최초의 커밍 아웃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은 다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 이후 난 보다 자유롭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몇몇 선생님들과는 학기가 끝난 이후에도 모임을 이어가는 관계가 되었다. 나에겐 자신을 오픈한 상태에서 ‘한국’과 다시, 새롭게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셈이었다.      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2022년 “나이듦과 자기 서사”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난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었다. 소수자 작가들이 쓴 다양한 서사들을 접하면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과 복잡하게 응어리진 감정들을 하나씩 해석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텍스트를 재해석하여 자기 성찰에 이르는 글쓰기는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해야하는 노동 집약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심을 갖고,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는 발심을 한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난 소수자로서의 위치로 인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갖고 살았다. 나에게 저항할 힘이 없다고 느꼈다.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삶의 경험들을 한쪽 구석에 계속 쌓아 두었다. 이를 곱씹거나 드러내면 자책만 늘어날 것 같아서였다. 세미나에서 미니 자서전을 쓰면서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난 생각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불확실함을 무릅 쓰고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여러 번 탈주를 했다. 내 여건에서 할 수 있는 나름의 저항이었다. 이로 인해 낯선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법을 배웠고 삶의 기예들을 익혔다. 다양한 소수성을 가진 사람들과 접속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두려움이 나의 취약함만은 아니었다. 이는 내 삶의 추동력으로 작동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두려움에 대한 재해석은 자신을 긍정하게 된 중요한 일이었다.      처음 ‘몸의 일기’ 연재를 권유받았을 때 망설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초보적 글쓰기 수준을 알고 요청한 것이라 생각해 용감하게 덥썩 받아들였다. 나름 많은 공을 들여 글을 썼지만 거칠고 성근 서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글을 연재하면서 개인의 서사는 유동적이고 모순적이며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사가 내게 생명력을 주는 삶의 비전으로 변용되기 위해선 꾸준한 공부가 우선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끝으로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만든 장을 마련해 주신 문탁샘과 매 회의 글에 꼼꼼한 피드백을 주신 겸목샘에게 감사드린다.              -------------------------------- 편집자 주 전 편을 다시 읽고 싶은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5&category1=%EB%AA%B8%EC%9D%98+%EC%9D%BC%EA%B8%B0&mod=list&pageid=1
문탁
2023.12.21 | 조회 240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2022. 7~2023.12).     ** <2023 양생프로젝트 '취약한 몸들의 연대와 돌봄사회' - 파이널 에세이 데이(12.9)> 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난잡함 선언 - 새벽이생추어리 돌봄과 글쓰기     돌봄care에 연루되고 있다. 매주 돼지를 돌보면서, 돌봄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매월 돌봄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돌봄은 반복된 행위이자, 확장된 실천이었고, 이질적인 존재들과 함께하는 세계 만들기, 읽기와 쓰기였다. 돌봄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면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돌봄'과 '글쓰기'가 분리되지 않고 상호의존적일 때 어떤 실천으로 이어질까?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만드는 세계에 참여할 때 존재는 어떻게 변형될까? ‘난잡함promiscuousness과 함께하기’라는 다종multispecies간 돌봄 정치학을 구상해볼 수 있을까?   이 글은 돌봄 현장에서 난잡하게promiscuous 뒤얽히는 종들species의 자취를 더듬는다.     1. 돼지와 마주침   2022년 어느 여름날.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모집 공고를 읽고 있다.   “돌봄으로 새벽이와 잔디의 삶에 연대하는 보듬이를 모집합니다."   생추어리sanctuary란 동물이 가능한 평생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성된 안식처를 말한다.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돌봄 활동가)로 지원해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 그리고 실험동물로 태어나 안락사 직전에 구조된 돼지 잔디를 만났다. 나는 매주 그들을 돌보았다. 밥과 물을 주고, 설거지를 하고, 똥을 줍고, 땅을 정비하고, 약을 바르고, 잠자리를 정돈하며 그들과 밀접 접촉했다. 그러다 연말에 도착한 문탁 선생님의 메세지.   "내년에 생추어리 돌봄일지를 인문약방에 기록해보면...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2022. 7~2023.12).     ** <2023 양생프로젝트 '취약한 몸들의 연대와 돌봄사회' - 파이널 에세이 데이(12.9)> 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난잡함 선언 - 새벽이생추어리 돌봄과 글쓰기     돌봄care에 연루되고 있다. 매주 돼지를 돌보면서, 돌봄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매월 돌봄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돌봄은 반복된 행위이자, 확장된 실천이었고, 이질적인 존재들과 함께하는 세계 만들기, 읽기와 쓰기였다. 돌봄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면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돌봄'과 '글쓰기'가 분리되지 않고 상호의존적일 때 어떤 실천으로 이어질까?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만드는 세계에 참여할 때 존재는 어떻게 변형될까? ‘난잡함promiscuousness과 함께하기’라는 다종multispecies간 돌봄 정치학을 구상해볼 수 있을까?   이 글은 돌봄 현장에서 난잡하게promiscuous 뒤얽히는 종들species의 자취를 더듬는다.     1. 돼지와 마주침   2022년 어느 여름날.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모집 공고를 읽고 있다.   “돌봄으로 새벽이와 잔디의 삶에 연대하는 보듬이를 모집합니다."   생추어리sanctuary란 동물이 가능한 평생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성된 안식처를 말한다.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돌봄 활동가)로 지원해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 그리고 실험동물로 태어나 안락사 직전에 구조된 돼지 잔디를 만났다. 나는 매주 그들을 돌보았다. 밥과 물을 주고, 설거지를 하고, 똥을 줍고, 땅을 정비하고, 약을 바르고, 잠자리를 정돈하며 그들과 밀접 접촉했다. 그러다 연말에 도착한 문탁 선생님의 메세지.   "내년에 생추어리 돌봄일지를 인문약방에 기록해보면...
경덕
2023.12.21 | 조회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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