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에서 실뜨기를! / 윤경

문탁
2023-12-18 09:26
118

 

 

1. 잘사는 삶이란?

 

금천구 호암산 칼바위 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쭉 가난한 달동네에서 보낸 나에게 잘사는 삶이란 가난하지 않게 사는 삶이었다. 돈을 벌어 무조건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았다. 그러나 수많은 투자의 실패로 부자가 되는 것은 나와 인연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돈 벌기 위해 꾹꾹 참고 다녔던 권위적인 직장을 때려치웠다. 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잘살아보고 싶었다. 단순하게 살아보자 생각했다. 다양한 시도를 하던 중 그때 살고 있던 은평마을에 접속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은평은 소위 시민 모임으로 ‘핫(hot)한 동네’였기에 나의 첫 백수 생활은 풍성했다. 이 단체, 저 단체 얼굴을 비치며 활동하다 에너지협동조합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리고 백수인 내가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새롭게 시작하니만큼 의욕적으로 잘하고 싶었고, 또 일도 꽤 잘 해내 조합을 안착시키며 1기, 2기 태양광발전소 건설도 착착 진행하였다. 물론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1인 실무자와 무보수의 다인 이사 구조는 나에게 큰 중압감을 주었다. 유토피아주의자 같은 이사들은 매번 새로운 꿈에 부푼 사업들을 제안하며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이사들과의 의견 차이로 점점 늘어난 마찰에 겁이 났다. 그래서 서둘러 도망치듯 은평마을을 떠나 다시 예전의 임금노동을 하는 직업인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도망쳐온 나는 월급 많이 받는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몸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이상한 증상이 나에게 일어났다. 한동안 원인도 모르고 병명도 모른 체 아픈 몸으로 일하며 지냈다. 그러다 얼마 후 ‘류머티스 관절염’이라는 병명을 진단받게 되었다. 병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 나는 감이당 대중지성 1년 과정에 과감히 등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4년 동안 인문학을 공부했고 또 백수를 도전하였다. 공부를 통해 잘사는 삶이란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 모두 좋은 삶’이라고 새롭게 정의 내렸다. 앞으로는 그런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시 금천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나는 다 같이 잘살아보려고 마을로 들어갔다. 은평만큼 마을 활동이 핫(hot)한 금천이어서 다양한 모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은평에서 ‘인턴’활동을 했기에 금천 마을 활동은 더욱 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소셜다이닝 프로젝트, ‘노랑식탁’이라는 사업을 같이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노랑식탁은 1인 가구 청년들에게 ‘동네 이모’ 세 명이 장보고 요리하여 최대한 ‘집밥’처럼 밥상을 차려주는 컨셉이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화력이 약한 화기, 집구류의 부족, 익숙하지 않은 장소 등 요리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서로 다른 세 명이 합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문제들은 회차가 진행될수록 풀어나갈 수 있었다. 정작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 사업을 제안하신 분의 관료적으로 일하는 방식이었다. 이 사업을 제안하신 분과의 갈등으로 나는 다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은평에서도 사람들과의 마찰에 도망갔고, 지금 금천에서 만난 새로운 갈등에도 도망가려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트러블이 없는 곳으로 도망만 치려 하는 나를 보며, 2학기에 읽은 도나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말하는 트러블은 과연 무엇이고,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가능한 것인가 알고 싶어졌다.

 

 

 

 

2. 트러블과 함께 하기란?

 

해러웨이가 말하는 트러블은 ‘불러일으키다’,‘애매하게 하다’,‘방해하다’를 의미하는 13세기 프랑스어 동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트러블은 이 뒤죽박죽인 시대의 거친 파도를 잠재우고, 고요한 장소를 다시 구축할 방법들을 ‘불러 일으키는’ 꼭 필요한 부활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희망이나 절망을 말하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이 땅에서 수많은 장소와 시간, 수많은 문제가 무한히 얽혀 있는 지금현재를 사는 크리터로서 진실로 현재에 응답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나는 트러블을, 갈등이나 마찰처럼 엮이면 괴롭고 귀찮아지는 ‘방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해러웨이는 지금현재 부활과 관련된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꼭 필요한 부활은 무엇일까? 그것은 서로의 차이를 가로질러 완전할 수 없는 번역으로 곤란해진 반려종들이 더 이상 늦기 전에 아직은 가능한 회복을 위해 이야기를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복수종(multispecies)들의 협력이 필수이다. 협력은 파트너들이 어떻게 유능하게 되는가의 문제이다. 즉 이질적인 파트너들이 바로 지금 자신의 모습으로 누군가가 되고 무엇인가가 되는 감염의 문제인 것이다.

 

반려종들은 항상 서로를 감염시킨다. 반려종들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더 많은 것을 나른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라는 꼭 필요한 부활에 관련된 협력은 (파트너들이 나르는 감염이 좋든 싫든) 서로에게 감염되어 서로를 유능하게 만들며 함께-되는근본적인 실천들이다. 함께-되기는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해 서로의 능력을 향상시키며 호기심 어린 실천을 발명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예기치 않게 협력하고 결합하면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런 광범위한 협력으로 복수종들의 살기와 죽기의 방식들은 다시 만들어진다. 다시 만들어진 이야기가 더 많은 크리터들을 응답-가능하게 만든다.

 

해러웨이는 함께-되어 서로를 유능하게 만들며 응답-능력 키우기의 안내자로 캘리포니아 경주용 비둘기와 비둘기 애호가들을 소개한다. 2006년 8월 실시된 피전블로그 프로젝트는 적절한 통신 장비를 갖춘 경주용 비둘기들이 캘리포니아의 공기 질을 파악해 수집한 데이터를 실시간 대중에게 제공하는 풀뿌리 과학 프로젝트이다. 측정을 위한 장비, 비둘기‘백팩’을 개발하는 데 1년이 소요됐다. 이 백팩을 비둘기에게 적합하도록 작고 편하고 안전하게 만드는 데는 비둘기와 기술, 사람을 결합하는 ‘복수종의 신뢰와 지식’을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예술가-연구자들과 비둘기들은 비둘기 애호가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상호작용하고 훈련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그들은 살아 있는 공동생산자이고, 모든 플레이어들은 서로의 능력을 키워주었다. 이 데이터들은 공기 오염에 관한 여러 실천 영역에서 더욱더 창의적이고 빈틈없는 행동을 끌어낼 것이다.

 

내가 트러블과 함께하지 못하고 도망치려 한 것은 아마도 감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감염으로 인해 나의 면역체제가 망가질 것을 걱정했던 것 같다. 세계를 나와 남,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이분법적으로 나눠 바라보았다. 이분법적 틀 속에서 나만 옳다고 여기며 트러블을 일으키는 건 그들의 잘못이니 나는 도망쳐도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정치적 올바름이 제일이라 여겨 다른 반려종들의 실천 패턴에 대한 응답-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트러블이 없는 곳을 원했던 것 같다. 나의 감염에 대한 두려움은 나란 유기체가 단일체(the only one)라고 생각한데서 비롯되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3. 무구하지 않은 함께-세계 만들기

 

그러나 지구 생명체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이것이 공-산(共-産,sympoiesis)의 근본적인 함의이다. 공-산은 단순한 낱말이다. ‘함께-만들기’라는 뜻이다.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지는 못한다. 크리터들은 서로 깊숙이 침투하고, 서로를 빙 돌아 관통해서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서로를 먹고, 소화불량이 되고, 서로를 부분적으로 소화하고 부분적으로 동화시켜서 서로를 만든다. 린 마굴리스는 이 기본적이고 죽어야 할 운명의 생명 만들기 과정을 공생발생(symbiogenesis)이라고 불렀다. 박테리아와 고세균이 맨 처음 공생발생을 했다. 그 둘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방식으로 서로 융합함으로써 오늘날의 복잡한 세포를 발명했다. 생명은 주로 낯선 것들 사이에서 오래 지속되는 친밀성-대립하기보다 생성적 마찰 혹은 생성적 껴안기-을 통해 진화했다. 이것이 함께-세계 만들기(worlding-with)이다.

 

활기 넘치는 크리터들의 ‘복수종의 함께 만들기’에 맞춰진 접근법으로 우리는 땅 위에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공생은 ‘상호 이득이 되는’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결국에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 모두 좋’을 수만은 없다. 질서와 무질서의 세계-만들기 속에 있는 땅의 크리터들에게 무구한 관계란 없다. 공생발생은 선(善)과 동의어가 아니라, 응답-능력 안에서의 서로 ‘함께-되기’와 동의어인 것이다. 이런 발명에는 어떠한 보증도 없이, 자기 자신이 아닌 자들과의 조화에 대한 기대 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난소가 제거된 노령의 반려견 카옌과 폐경기를 맞이한 자신의 새어 나오는 오줌을 제어하려고 프레마린을 복용했다. 프레마린의 무구하지 않은 이야기에서 함께-세계 만들기 안의 책임에 대해 말한다. 암말의 반복된 임신과 장기간의 구금 그리고 그런 임신한 암말의 오줌에서 농축물을 얻어 합성한 에스트로겐 프레마린은 무구하지 않다. 프레마린을 먹었던 일은 먹지 않았을 때보다, 프레마린 생산과 관련된 반려종에 대해 더 책임감을 갖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개에게 약을 주는 일은 역사들과 진행 중인(ongoingness) 가능성에 대해 책임감을 갖게 만들고, 어쩌면 그녀의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응답-능력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라고 말이다. 이런 디테일들이 현실의 존재를 현실의 응답-능력과 연결시킨다. 우리는 모두 끔찍한 역사에, 때로는 즐거운 역사에 직면하여 복수종의 번영을 위한 조건을 형성하는데 책임이 있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함께-되어 유능하게 되기, 복수종의 함께-세계 만들기, 응답-능력 안에서 서로 함께-되기는 복수종의 번영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이야기이고, 무구하지 않은 실천이며 책임감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실천들이다. 도망가지 않고 트러블과 함께하기, 반려종들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방식으로 감염되어 가기, 또 낯선자들과 오래 지속하는 친밀성으로 생성적 마찰 혹은 생성적 껴안기를 실천하기. 내가 다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발명해내야 할 것 같다. 혼자가 아닌 같이, 또 꾸준히.

 

 

4. 진득하고 호들갑스러운 실뜨기

 

태양과바람에너지협동조합의 10주년 기념 문자가 왔다. 조합원 탈퇴는 안 했기에 그동안의 소식은 문자와 소식집으로 받고 있었다. 10주년이니만큼 초창기 사무국장이 참석해주면 좋겠다는 전화도 받았다. 나는 그 전화를 받고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유토피아주의자라고 고개를 흔들던 사람들은 트러블과 함께하며 새로운 실뜨기를 계속해 그 자리를 지키며 10기, 15기 태양광발전소를 공-산했다. 내가 겁나서 도망쳤던 그 자리에서 10년의 시간 동안 트러블과 함께해온 사람들을 보며 정작 갈등과 마찰을 피해 도망친 나야말로 어딘가에 있을 트러블 없는 무구한 유토피아를 꿈꾼 유토피아주의자였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SF는 이 책 곳곳에서 모습을 보인다. 해러웨이는 다양한 뜻의 SF를 책 전반에 걸쳐 되풀이하며 고리를 만들고, 독자들을 위기에 처한 존재자들과 패턴들 속으로 실뜨기해 넣는다. 그러면서 복수종의 번영을 위한 n-차원의 틈새 공간을 공-산하자고 우리에게 제안한다. 실뜨기 게임은 패턴을 주고받는 것이고, 실을 떨어뜨리고 실패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유효하게 작동하는 무엇을 발견하는 것이다. 실뜨기에서는 받고 건네주기 위해 가만히 들고 있는 순간이 필요하다. 내민 손이 보내는 신뢰에 대한 대답을 할 때, 특정 종류의 성실한 대답이 요구될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반려종이 보내는 신호에 새롭게 엮을 성실한 SF를. 엮고, 다시 엮고, 다르게 엮고.

 

1학기 에세이에서 나는 ‘시민적 돌봄’과 ‘난잡한 돌봄’을 계속하기 위해 ‘조증적 열광적 사랑’을 답으로 찾았고 그 답으로 ‘샤랄라’한 돌봄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해러웨이도 숨 막힐 듯한 무기력에 저항할 필요성을 “호들갑 떨기”라고 표현하며 그런 호들갑은 필요하다고 했으니 조증적 열광적 샤랄라한 에너지로 일을 시작하고 펼치는 것은 나의 장점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 펼쳐진 나의 현장을 오래 지속시키는 진득함이 부족했던 게 아니었을까. 파트너들에게 감염되어 트러블과 함께하는 것은 귀찮고 괴로운 마찰·갈등과 함께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랄랄한 사랑에 힘을 받아 부활과 관련된 응답을 해야 하고 그런 응답을 불러일으킬 활동을 해야 하는 것 같다. 마냥 좋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는 내가 생각하는 샤랄라한 사랑으로만 가득찬 곳이 아니다.

 

에세이 기간이 끝나가는 지금, 노랑식탁 시즌1도 끝났다. 그동안 노랑식탁에 참여한 친구들과 가진 뒷풀이 자리에서 노랑식탁같은 모임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독서 모임을 제안했고, ‘금천 사랑방’이라는 단톡방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이자고 결정했다. 과연 나는 새로운 응답에 호들갑 떨기와 머물면서 진득하게, 성실하게 사유하기를 함께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무구하지 않은 세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스토리텔러로서 SF적 가능성을 실뜨기해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댓글 2
  • 2023-12-19 09:30

    우왕~~~
    직접 찾아보시공 로고ci도 퍼오시공
    편집자님 영광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2023-12-22 08:50

    '조증적 열광적 샤랄랄라'한 사랑? 이게 뭔지 무척 궁금하네요. 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인문약방 에세이
    장애인활동지원사를 아시나요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그 사람의 목소리와 표정, 일상적인 습관, 스타일 같은 것에 민감한 편이다. 무의식적으로 주변사람들을 관찰하는 습성은 주로 내가 속한 모임에서 불편해 보이는 사람을 빨리 발견하는데서 자각되곤 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를 고민했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끙끙거렸다. 특히 나와 일면식이 없더라도 주변에 바로 식별이 가능한 지체장애인이 나타나면 오지라퍼적인 감각이 더 살아나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고 긴장이 되곤 한다. 그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거나 접촉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물론 그것은 실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성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회사를 그만두면 돌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올해 여름 재취업한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회가 왔다. 장애인활동지원사 교육을 신청했고 5일간의 교육을 통해 그 현장의 소리를 들으며 장애, 돌봄, 비장애중심주의, 상호의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정된 교육 기관에서 5일간 8시간씩 4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현장 실습 10시간까지 완료하면 정식 장애인활동지원사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장애의 유형은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합쳐 15가지이고 신체장애와 관련된 보조기기만 해도 수백 가지인데 50시간의 교육만으로 실무에 투입된다는 게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나에겐 이론 교육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장애인활동지원사의 역할은 신변처리, 가사지원, 이동지원, 커뮤니케이션 보조 등 네 가지이고 구체적으로는 장애에 대한 이해, 장애인의 인권, 활동지원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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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31 | 조회 154
인문약방 에세이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난 가장 낯선 작가였다.   책을 읽기 전, 단톡방에 올라온 저자 일라이 클레어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자라고 들었는데, 두 귀가 다 드러난 반삭에 가까운 짧은 머리, 두툼한 안경을 낀 얼굴에 넓은 어깨, 지퍼 달린 낡은 녹색 점퍼... ‘남자같은 여자’ 내가 갖고 있는 단어의 수준에서 나는 이렇게밖에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글을 보니, 그는 ‘젠더 퀴어’란다. 무슨 뜻이지? 동성애자인가? 소수자 용어에 낯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퀴어는 동성애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퀴어란, 태어날 때 사회(의사)가 지정해준 생물학적 성과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성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을 통칭한다. 거기에는 여자지만 남자보다 여성에게 성적으로 더 끌리는 사람, 남녀 모두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사회에서 훈육되는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여자, 자신을 굳이 남녀이분법에 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 그러다 보니 나도 퀴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미디어와 문학의 일방적인 이성애적 세례가 없었다면, 혹은 대학 시절 다이크 공동체를 만났다면, 나도 지금과는 다른 젠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 대한 소개를 좀 더 해보자. 그는 1963년생, 미국 오리건주 시골 벌목 노동자 마을에서 백인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지정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자신이 소녀라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젠더 퀴어였고,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으로 어려서부터 지진아, 불구, 원숭이 같은 조롱과 비난을 들으며 자랐다. 그는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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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31 | 조회 118
인문약방 에세이
    혼자 걷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본다. 나란히 걷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다가도, 혼자서 저 멀리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르다 싶다. 왼쪽이나 오른쪽, 한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는 갈지자로 왔다 갔다 걷는다. 갑자기 달려나갈 때도 있고, 갑자기 멈추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과 바짝 붙어서 걸어갈 때도 있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더 어릴 때는 그 모습을 보면 꼭 차에 치일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러다 대충 서겠지 싶어서 놔둔다. 저만큼 앞서서 달려가다가도 건널목이나 갈림길 사이에서는 멈춰서 기다리니까. 옆을 보면서 걷고, 심지어 하늘을 보면서 걸어도 아직은 누군가와 크게 부딪히거나 어디에 빠진 적은 없다. 이쯤 하면 눈이 뒤통수에도, 옆통수에도 달린 건 아닐까 싶다.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후로 나는 줄곧 되묻는다. 장애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과 뭔가가 다르단 의미일까. 그렇다면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과 만났다. 이 책은 강렬하게 나의 의식을 때렸다.   “저기요. 장애는 예술이거든요?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라고요!”     장애는 손상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하는 방식   장애인은 많다. 세계인구의 무려 15~20%나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장애인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장애인들은 격리된 시설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고, 고립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장애를 개인적인 비극으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장애인들은 사회로 나가는 대신 고립되는 편을 택한다. 하지만 장애를 보이는 부분 만이 아니라 만성적인 질병, 장거리 보행이...
    혼자 걷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본다. 나란히 걷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다가도, 혼자서 저 멀리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르다 싶다. 왼쪽이나 오른쪽, 한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는 갈지자로 왔다 갔다 걷는다. 갑자기 달려나갈 때도 있고, 갑자기 멈추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과 바짝 붙어서 걸어갈 때도 있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더 어릴 때는 그 모습을 보면 꼭 차에 치일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러다 대충 서겠지 싶어서 놔둔다. 저만큼 앞서서 달려가다가도 건널목이나 갈림길 사이에서는 멈춰서 기다리니까. 옆을 보면서 걷고, 심지어 하늘을 보면서 걸어도 아직은 누군가와 크게 부딪히거나 어디에 빠진 적은 없다. 이쯤 하면 눈이 뒤통수에도, 옆통수에도 달린 건 아닐까 싶다.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후로 나는 줄곧 되묻는다. 장애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과 뭔가가 다르단 의미일까. 그렇다면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과 만났다. 이 책은 강렬하게 나의 의식을 때렸다.   “저기요. 장애는 예술이거든요?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라고요!”     장애는 손상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하는 방식   장애인은 많다. 세계인구의 무려 15~20%나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장애인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장애인들은 격리된 시설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고, 고립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장애를 개인적인 비극으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장애인들은 사회로 나가는 대신 고립되는 편을 택한다. 하지만 장애를 보이는 부분 만이 아니라 만성적인 질병, 장거리 보행이...
문탁
2023.12.31 | 조회 107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2015년, 난 유부남(有婦男)이 아닌 유부남(有夫男)이 되었다. 당시 4년 째 만나고 있었던 파트너와 결혼을 했다. 그 해 연방 대법원의 판결로 미국 전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덕분이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결혼은 인생의 선택지로 존재하지 않았다. 동성혼이 언제 현실화될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된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은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여전히 나의 베프가 되어주고 있는 파트너와의 합법적인 결혼으로 나는 (물질적 성공으로서가 아닌) 게이로서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셈이다. 동네에서, 직장에서 우리를 법적 커플로 존중해 주었다. 세금 감면, 의료 보험의 배우자 등록, 병원에서의 보호자 역할 등 이성애 커플과 똑같은 혜택들도 받게 되었다. 결혼 후 난 공공 영역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다.  드디어 내 인생에서 길운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의 성정체성이 받아들여지는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코로나 위기가 터지기 몇 달 전,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몇 달 동안 불면증이 지속 되었고 우울감과 무기력이 찾아왔다. 여러 모로 볼 때 삶의 통상적 지표들은 우상향하고 있는 중이 었다. 번아웃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여러 원인으로 인해 일어났을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이로 인해 나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생활이 12년 째였지만 난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한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아침엔 반드시 쌀밥에 나물 반찬을 먹어야 속이 편하고 든든했다. 내 혀와 위장은 어릴 적 먹고 자란 전라도 시골 음식들을 여전히 갈망했다.  미국 대통령의 혐오적 선동과 그칠 줄 모르는 거짓말에 혈압이 올라갔지만, 이보다는 차별 금지법 통과에 무관심한 한국 양대 정당의 정치인들을 볼 때 나의 분노 게이지는 더욱 높아졌다. 저녁마다 즐겨 보는  넷플릭스의 Watch list엔 미드보다 더 많은 한국 드라마로 채워졌다.          ‘한국’은 내게 모순 그 자체였다. 일 년 정도 휴직하고 한국 살이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파트너의 법적 지위 문제와 혹시라도 그가 겪을 차별이 염려되어 금세 마음을 접었다. 자발적으로 한국을 탈주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한국 사회에 의해 유배 당했다는 억울함이 자주 올라왔다. 한국의 친구와 지인들과 관계가 멀어진 데 대해 아쉬움도 컸다. 이들과 계속 인연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어느새 연락이 끊어져 있었다. 대부분 내가 한국을 떠났는지 잘 알지 못하는데, 원거리에서 관계를 어떻게 지속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들과 거리를 둔 건 나였지만,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가슴이 아려올 떄가 많았다. 가장 큰 모순은 내가 수치의 땅으로 기억되는 (그리고 가까이 하게 되면 이를 다시 경험하게 될) 한국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해석되지 않은 채 두려움과 상처로 남아 있는 한국에서의 경험들과 ‘한국’과 점점 멀어지면서 느끼는 상실감이 번아웃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공부가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불교와 노자 등을 공부할 수 있는 한국인 모임을 찾았다. 돌이켜 볼 때 당시 나에게 공부만큼 중요했던 것은 한국인들과의 연결이었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내 모습 드러내고 싶었다. 한국에서 신뢰할만한 몇몇의 이성애자들에게만 커밍 아웃을 했었다. 미국에서도 나처럼 한국에서 탈주한 게이 친구들 이외의 다른 한국인들과 연결되기 쉽지 않았다. 특정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인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고 소수자에 대한 배제가 정교하게 이뤄지는 공동체였다.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게 되면 차별과 소외를 다시 겪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계속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해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묻어두고 살았다.       마침 코로나의 여파로 한국의 몇몇 인문학 강의가 온라인으로 개설 되었다. 불교와 주역의 기초적인 것을 훑는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처음엔 나를 드러내기가 망설여졌다. 한국인 공부 모임에서의 커밍 아웃은  미국 생활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나를 드러내는 일과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을 숨기게 만들었던 한국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성이 고정된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었다. 기회가 생겼을 때 난 약간의 용기를 내어 내가 퀴어라는 것과 한국에서 살기 어려워 미국으로 이주한 사실을 털어 놓았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뤄진 최초의 커밍 아웃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은 다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 이후 난 보다 자유롭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몇몇 선생님들과는 학기가 끝난 이후에도 모임을 이어가는 관계가 되었다. 나에겐 자신을 오픈한 상태에서 ‘한국’과 다시, 새롭게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셈이었다.      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2022년 “나이듦과 자기 서사”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난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었다. 소수자 작가들이 쓴 다양한 서사들을 접하면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과 복잡하게 응어리진 감정들을 하나씩 해석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텍스트를 재해석하여 자기 성찰에 이르는 글쓰기는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해야하는 노동 집약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심을 갖고,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는 발심을 한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난 소수자로서의 위치로 인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갖고 살았다. 나에게 저항할 힘이 없다고 느꼈다.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삶의 경험들을 한쪽 구석에 계속 쌓아 두었다. 이를 곱씹거나 드러내면 자책만 늘어날 것 같아서였다. 세미나에서 미니 자서전을 쓰면서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난 생각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불확실함을 무릅 쓰고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여러 번 탈주를 했다. 내 여건에서 할 수 있는 나름의 저항이었다. 이로 인해 낯선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법을 배웠고 삶의 기예들을 익혔다. 다양한 소수성을 가진 사람들과 접속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두려움이 나의 취약함만은 아니었다. 이는 내 삶의 추동력으로 작동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두려움에 대한 재해석은 자신을 긍정하게 된 중요한 일이었다.      처음 ‘몸의 일기’ 연재를 권유받았을 때 망설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초보적 글쓰기 수준을 알고 요청한 것이라 생각해 용감하게 덥썩 받아들였다. 나름 많은 공을 들여 글을 썼지만 거칠고 성근 서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글을 연재하면서 개인의 서사는 유동적이고 모순적이며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사가 내게 생명력을 주는 삶의 비전으로 변용되기 위해선 꾸준한 공부가 우선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끝으로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만든 장을 마련해 주신 문탁샘과 매 회의 글에 꼼꼼한 피드백을 주신 겸목샘에게 감사드린다.              -------------------------------- 편집자 주 전 편을 다시 읽고 싶은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5&category1=%EB%AA%B8%EC%9D%98+%EC%9D%BC%EA%B8%B0&mod=list&pageid=1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2015년, 난 유부남(有婦男)이 아닌 유부남(有夫男)이 되었다. 당시 4년 째 만나고 있었던 파트너와 결혼을 했다. 그 해 연방 대법원의 판결로 미국 전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덕분이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결혼은 인생의 선택지로 존재하지 않았다. 동성혼이 언제 현실화될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된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은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여전히 나의 베프가 되어주고 있는 파트너와의 합법적인 결혼으로 나는 (물질적 성공으로서가 아닌) 게이로서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셈이다. 동네에서, 직장에서 우리를 법적 커플로 존중해 주었다. 세금 감면, 의료 보험의 배우자 등록, 병원에서의 보호자 역할 등 이성애 커플과 똑같은 혜택들도 받게 되었다. 결혼 후 난 공공 영역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다.  드디어 내 인생에서 길운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의 성정체성이 받아들여지는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코로나 위기가 터지기 몇 달 전,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몇 달 동안 불면증이 지속 되었고 우울감과 무기력이 찾아왔다. 여러 모로 볼 때 삶의 통상적 지표들은 우상향하고 있는 중이 었다. 번아웃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여러 원인으로 인해 일어났을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이로 인해 나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생활이 12년 째였지만 난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한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아침엔 반드시 쌀밥에 나물 반찬을 먹어야 속이 편하고 든든했다. 내 혀와 위장은 어릴 적 먹고 자란 전라도 시골 음식들을 여전히 갈망했다.  미국 대통령의 혐오적 선동과 그칠 줄 모르는 거짓말에 혈압이 올라갔지만, 이보다는 차별 금지법 통과에 무관심한 한국 양대 정당의 정치인들을 볼 때 나의 분노 게이지는 더욱 높아졌다. 저녁마다 즐겨 보는  넷플릭스의 Watch list엔 미드보다 더 많은 한국 드라마로 채워졌다.          ‘한국’은 내게 모순 그 자체였다. 일 년 정도 휴직하고 한국 살이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파트너의 법적 지위 문제와 혹시라도 그가 겪을 차별이 염려되어 금세 마음을 접었다. 자발적으로 한국을 탈주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한국 사회에 의해 유배 당했다는 억울함이 자주 올라왔다. 한국의 친구와 지인들과 관계가 멀어진 데 대해 아쉬움도 컸다. 이들과 계속 인연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어느새 연락이 끊어져 있었다. 대부분 내가 한국을 떠났는지 잘 알지 못하는데, 원거리에서 관계를 어떻게 지속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들과 거리를 둔 건 나였지만,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가슴이 아려올 떄가 많았다. 가장 큰 모순은 내가 수치의 땅으로 기억되는 (그리고 가까이 하게 되면 이를 다시 경험하게 될) 한국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해석되지 않은 채 두려움과 상처로 남아 있는 한국에서의 경험들과 ‘한국’과 점점 멀어지면서 느끼는 상실감이 번아웃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공부가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불교와 노자 등을 공부할 수 있는 한국인 모임을 찾았다. 돌이켜 볼 때 당시 나에게 공부만큼 중요했던 것은 한국인들과의 연결이었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내 모습 드러내고 싶었다. 한국에서 신뢰할만한 몇몇의 이성애자들에게만 커밍 아웃을 했었다. 미국에서도 나처럼 한국에서 탈주한 게이 친구들 이외의 다른 한국인들과 연결되기 쉽지 않았다. 특정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인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고 소수자에 대한 배제가 정교하게 이뤄지는 공동체였다.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게 되면 차별과 소외를 다시 겪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계속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해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묻어두고 살았다.       마침 코로나의 여파로 한국의 몇몇 인문학 강의가 온라인으로 개설 되었다. 불교와 주역의 기초적인 것을 훑는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처음엔 나를 드러내기가 망설여졌다. 한국인 공부 모임에서의 커밍 아웃은  미국 생활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나를 드러내는 일과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을 숨기게 만들었던 한국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성이 고정된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었다. 기회가 생겼을 때 난 약간의 용기를 내어 내가 퀴어라는 것과 한국에서 살기 어려워 미국으로 이주한 사실을 털어 놓았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뤄진 최초의 커밍 아웃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은 다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 이후 난 보다 자유롭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몇몇 선생님들과는 학기가 끝난 이후에도 모임을 이어가는 관계가 되었다. 나에겐 자신을 오픈한 상태에서 ‘한국’과 다시, 새롭게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셈이었다.      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2022년 “나이듦과 자기 서사”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난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었다. 소수자 작가들이 쓴 다양한 서사들을 접하면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과 복잡하게 응어리진 감정들을 하나씩 해석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텍스트를 재해석하여 자기 성찰에 이르는 글쓰기는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해야하는 노동 집약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심을 갖고,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는 발심을 한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난 소수자로서의 위치로 인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갖고 살았다. 나에게 저항할 힘이 없다고 느꼈다.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삶의 경험들을 한쪽 구석에 계속 쌓아 두었다. 이를 곱씹거나 드러내면 자책만 늘어날 것 같아서였다. 세미나에서 미니 자서전을 쓰면서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난 생각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불확실함을 무릅 쓰고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여러 번 탈주를 했다. 내 여건에서 할 수 있는 나름의 저항이었다. 이로 인해 낯선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법을 배웠고 삶의 기예들을 익혔다. 다양한 소수성을 가진 사람들과 접속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두려움이 나의 취약함만은 아니었다. 이는 내 삶의 추동력으로 작동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두려움에 대한 재해석은 자신을 긍정하게 된 중요한 일이었다.      처음 ‘몸의 일기’ 연재를 권유받았을 때 망설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초보적 글쓰기 수준을 알고 요청한 것이라 생각해 용감하게 덥썩 받아들였다. 나름 많은 공을 들여 글을 썼지만 거칠고 성근 서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글을 연재하면서 개인의 서사는 유동적이고 모순적이며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사가 내게 생명력을 주는 삶의 비전으로 변용되기 위해선 꾸준한 공부가 우선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끝으로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만든 장을 마련해 주신 문탁샘과 매 회의 글에 꼼꼼한 피드백을 주신 겸목샘에게 감사드린다.              -------------------------------- 편집자 주 전 편을 다시 읽고 싶은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5&category1=%EB%AA%B8%EC%9D%98+%EC%9D%BC%EA%B8%B0&mod=list&pageid=1
문탁
2023.12.21 | 조회 245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2022. 7~2023.12).     ** <2023 양생프로젝트 '취약한 몸들의 연대와 돌봄사회' - 파이널 에세이 데이(12.9)> 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난잡함 선언 - 새벽이생추어리 돌봄과 글쓰기     돌봄care에 연루되고 있다. 매주 돼지를 돌보면서, 돌봄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매월 돌봄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돌봄은 반복된 행위이자, 확장된 실천이었고, 이질적인 존재들과 함께하는 세계 만들기, 읽기와 쓰기였다. 돌봄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면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돌봄'과 '글쓰기'가 분리되지 않고 상호의존적일 때 어떤 실천으로 이어질까?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만드는 세계에 참여할 때 존재는 어떻게 변형될까? ‘난잡함promiscuousness과 함께하기’라는 다종multispecies간 돌봄 정치학을 구상해볼 수 있을까?   이 글은 돌봄 현장에서 난잡하게promiscuous 뒤얽히는 종들species의 자취를 더듬는다.     1. 돼지와 마주침   2022년 어느 여름날.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모집 공고를 읽고 있다.   “돌봄으로 새벽이와 잔디의 삶에 연대하는 보듬이를 모집합니다."   생추어리sanctuary란 동물이 가능한 평생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성된 안식처를 말한다.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돌봄 활동가)로 지원해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 그리고 실험동물로 태어나 안락사 직전에 구조된 돼지 잔디를 만났다. 나는 매주 그들을 돌보았다. 밥과 물을 주고, 설거지를 하고, 똥을 줍고, 땅을 정비하고, 약을 바르고, 잠자리를 정돈하며 그들과 밀접 접촉했다. 그러다 연말에 도착한 문탁 선생님의 메세지.   "내년에 생추어리 돌봄일지를 인문약방에 기록해보면...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2022. 7~2023.12).     ** <2023 양생프로젝트 '취약한 몸들의 연대와 돌봄사회' - 파이널 에세이 데이(12.9)> 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난잡함 선언 - 새벽이생추어리 돌봄과 글쓰기     돌봄care에 연루되고 있다. 매주 돼지를 돌보면서, 돌봄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매월 돌봄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돌봄은 반복된 행위이자, 확장된 실천이었고, 이질적인 존재들과 함께하는 세계 만들기, 읽기와 쓰기였다. 돌봄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면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돌봄'과 '글쓰기'가 분리되지 않고 상호의존적일 때 어떤 실천으로 이어질까?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만드는 세계에 참여할 때 존재는 어떻게 변형될까? ‘난잡함promiscuousness과 함께하기’라는 다종multispecies간 돌봄 정치학을 구상해볼 수 있을까?   이 글은 돌봄 현장에서 난잡하게promiscuous 뒤얽히는 종들species의 자취를 더듬는다.     1. 돼지와 마주침   2022년 어느 여름날.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모집 공고를 읽고 있다.   “돌봄으로 새벽이와 잔디의 삶에 연대하는 보듬이를 모집합니다."   생추어리sanctuary란 동물이 가능한 평생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성된 안식처를 말한다.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돌봄 활동가)로 지원해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 그리고 실험동물로 태어나 안락사 직전에 구조된 돼지 잔디를 만났다. 나는 매주 그들을 돌보았다. 밥과 물을 주고, 설거지를 하고, 똥을 줍고, 땅을 정비하고, 약을 바르고, 잠자리를 정돈하며 그들과 밀접 접촉했다. 그러다 연말에 도착한 문탁 선생님의 메세지.   "내년에 생추어리 돌봄일지를 인문약방에 기록해보면...
경덕
2023.12.21 | 조회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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