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가마솥
2023-12-15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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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살제왕이 이 땅에 내려 오실 제, ...(중략)..... 계백장군 백살신, 관우장군 백살신.....”

나의 할머니는 우리들 생일이 되면, 하얀 백설기 시루떡 앞에서 아래 아(·)자가 나오는 옛 한글로 쓰여 있는 백살기를 읽으신다. 대략 삼십여 분이 걸린다. 어릴 적에는 그 것이 마냥 싫었다. 어서 저 따뜻한 떡을 먹어야 하는데, 할머니 고사(?) 때문에 군침만 삼키고 있으니......

그러다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다. 나에게 백설기 떡은 그저 그런 떡이 되었는데, 내 생일날 할머니가 그 백살기를 읽으신다. 연신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며 읽으시는 뒷모습에서 보며, ‘나는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귀신이 있어서 나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할머니의 정성이 나의 마음에 들어 온 것이다.

 

 형제들만의 제사.

 

    우리 집은 이제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하였다. 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큰 형님 댁에서 기제사(忌祭祀)로 일 년에 네 번, 조부모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다가, 어느 해인가 두 분이 성당에 나가신 뒤로는 연미사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무언가 섭섭하기도 또 죄스럽기도 하였다. 특히 성당에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신부님의 말씀에 앉았다가 일어 섰다를 반복하며 정해진 댓구를 따라해야 하는 미사는 매우 껄끄러웠다.

큰 형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큰 형수님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해 제사 날에, 우리는(우리집과 작은 형님네) 큰 형님네 아파트 문 앞에서 저녁이 다 될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큰 형님네는 그 날이 제사 날인 것을 까먹은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내는 제사이니, 항상 공기가 무겁고 답답한 날이었다. 그 날은 아이들도 숨죽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두 해, 연미사를 나가지 않았다. 당신도 동생들을 부르지 않으니 제사 날에 연미사라도 지내는 것인지 지내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기일(忌日)이 되면 항상 우울하였다. 어느 해인가 마눌님이 “섭섭하면 우리가 지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그래, 삼형제 중에 누구라도 지내면 되지, 꼭 큰 형님이 지내야 할 이유는 없잖아?’ 큰 형님 댁은 딸만 둘을 두었고, 나는 아들이 있으니 길게 보면 우리 집이 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막내인 내가 제사를 지내겠다고 두 형님께 말씀드렸다. 내가 처갓집에서 배운 전통방식으로 격식을 차려서, 그렇게 몇 해 동안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어느 해부터 작은 형님이 나섰다. 제사를 지내러 동생 집에 오시는 것이 부담이 되셨나 보다. 당신은 아들만 둘이 있으므로 제사가 끊길 염려가 적다는 이유를 들어 당신 집으로 제사를 옮겼다. 진즉에 그럴 일이지. 아들이 이제야 생겼나? 다만, 할머니와 할아버지 제사를 할머니 기일로 합제(合際)하였다. 할아버지는 뵌 적도 없지만 할머니는 내가 고1 때까지 함께 사셨으니 형제들끼리 회상할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해를 지냈다.

 

     그런데, 기일이 되면 큰 형님, 작은형님 내외 그리고 우리 집 내외만 참석하는 일이 잦아 졌다. 우리 집 아이들도 평일에 시간을 내어서 작은 형님 댁, 세종까지 가기 힘든 일이었고, 작은 집 조카들도 독립하여 서울과 헬싱키에 살고 있으니 제사에 못 오는 것이었다. 그것참! 제사에 모여 부모가 알고 있는 조상님들의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없으니 ‘의식’만 남은 제사가 되었다. 작은 형님이 동탄으로 이사를 왔지만, 우리 형제들만 참석하기는 매 마찬가지였다.

 

      작은 형님이 은퇴하여 형수님과 함께 성당에 나가시는데, 늦게나마 성당에 나가시는 게 아주 ‘좋다’며 나에게도 권한다. 불길한(?) 예상은 항상 적중한다. 작년에, 어머니 기일 때가 되자 형님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낸다. 우리 형제만 모이는 제사는 의미가 없으니, 기제사를 없애고 모두 연미사로 돌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다. 짐작하였기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내가 아직 무언가 정리되지 않는 상태였다. 먼저 느낌적으로 어머니 아버지께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제사보다도 어려운 것은 산소이다. 어머니는 안성 공원묘원에 계셔서 연간 관리비만 끊기지 않으면 되지만, 고향 땅,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산소를 관리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몇 해라도 가보았지만 형님네들은 전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으니, 우리 대(代)에서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윤달이 길게 들어 있던 그 해에, 모두 파묘(破墓)하여 화장한 후, 어머니 묘소 옆에 가족묘원을 만들어 안치하였다. 형님들과, 제사를 없애고 연미사를 하는 대신에 어머니 기일이 든 주말에 그 가족묘원에 가서 시제(時祭)처럼 합제를 지내는 것으로 의견을 맞췄다. 다른 집들은 어떻게 하나?

 

 

     친구들 얘기를 들어 보았다. 장남이 아닌 친구들은 큰 집에 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장남인 친구들은 다양한 방식을 지내고 있었다. 전통 방식 그대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고, 형제들이 모여서 1박 2일로 고향 주변을 여행하며 산소에 가기도 하고, 어떤 집은 콘도에 모여서 손주들이 돌아 가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억하는 이야기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 어떤 집은 참석하는 사람 수대로 새뱃돈처럼 용돈을 주는 집도 있다. 어떤 형식으로든 추모하고 있지만, 모두들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우리나라는 고려 말부터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 민간에 널리 장려되었다. 초기의 제사는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벼슬이 높을수록 더 윗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냈다. 조선 초기에는 1품 이상은 3대 증조(曾祖)까지, 7품 이상은 2대 조부(祖父), 일반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냈다.

 

조선 중기인 17세기 전반까지는, 돌아가신 어버이나 조상의 제사는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지낼 수 있었으며, 사위가 지낼 수도 있었다. 또한 외손자도 지낼 수도 있었다. 예컨대 율곡 이이(李珥)의 외가는 3대째 아들이 없어서 그 외손들이 외조부모의 제사를 맡기도 하였다. 제사를 전담하는 사람은 상속에서 우선권이 주어졌다. 이는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에게 권리·권한을 준다는 뜻이었다. 제사와 상속권에는 아들과 딸(또는 사위)의 구별이나 차별이 없었고, 친손과 외손의 구별하지도 않았다.

 

17세기 후반부터 제사에서 남녀의 차별이 생겨났다. 남자 집안 중심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제사에서 소외된 사위나 외손은 차츰 제사에 빠지는 일이 잦아지며, 제사는 남자, 그것도 장남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장남이 제사를 독점하는 것은 상속에서 상속 지분을 독점하게 된다는 뜻과 같다. 또한 이것은 제사의 모든 준비는 며느리 몫으로 남게 됨을 말하는 것이며, 여자들 입장에서는 남의 집 제사 준비를 하게 되는 폐단이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조선 말기에 오면 제사는 완전히 대중화되고, 그 절차가 복잡해진다. 이는 대부분의 백성이 양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 인구의 1%에 지나지 않던 양반이 철종 때 이르러서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되었고, 특히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모두가 성씨(姓氏)를 가지게 되면서, 그 동안 양반의 문화를 부러워하던 일반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제사를 지내게 된다. 그 것도 4대인 고조(高祖)까지 지냈으며, 송나라의 학자, 주희의 『가례』를 1759년에 8권 3책으로 묶어 간행한 예서인 『家禮』에 집착하면서 절차는 까다로워지고 제상의 음식은 복잡하게 되었다.

 

1969년 정부가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해 제사는 2대조까지로 하고, 성묘는 제수를 마련하지 않거나 간소하게 한다고 공표했으나, 지금까지도 고조부까지 4대봉사(四代奉祀)를 하는 집안이 더러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에게 제사는 예전만큼의 흐름이 유지되고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요즘 제사는......

 

     최근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지난 10월 30일 발표한 '제례 문화 관련 국민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는 응답률이 55.9%로 집계됐다. 반면 '계획이 있다'는 답변은 44.1%였다. '현재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응답률은 62.2%으로 나왔다.

      제사를 지내는 가장 큰 이유로 배운 것처럼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답한 비율은 39.6%로 가장 높게 나왔고, '부모님이 지내고 있어서'는 27.2%로 2위, '가족과 교류를 위해서'는 16.6%로 3위였다.

      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는 '종교적 이유나 신념 때문'이란 응답이 34.6%로 가장 높았다. '가족들이 모이는데 제약이 있어서'라는 이유와 '제사 과정에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고 느껴서'는 각각 13.7%와 12.5%로 2,3위를 차지했다.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응답자 중, 제사를 '간소화거나 가족 모임 같은 형태로 대체하겠다'는 응답이 41%로 가장 많았다. '시대 변화로 더는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응답자와 '종교적 이유나 신념 때문'이란 응답자가 각각 27.8%와 13.7%로 그 뒤를 이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엄마 아빠 결혼 기념일이어서 케잌을 사가지고 집에 온 줄 알았더니, 그냥 녀석의 조카 하빈이가 보고 싶어서 왔다며 딸네 부부가 집에 왔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다 모여서 ‘엄마표’ 맛난 점심을 먹고 케잌을 잘랐다. 딸, 아들, 사위에게 “너희들은 엄마/아빠 제사를 어떻게 지낼래?”하고 질문을 던졌다. ‘(아빠가 왜 또) 뜬금포?’하는 표정들이다. 먼저 은퇴 후 글쓰기를 소개하였다. 이어서 조상의 넋을 기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후손들이 마음을 다해 예를 올리는 전통문화라는 교과서 같은 제사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제사의 유래와 녀석들이 잘 알고 있는 우리 집 제사 이력을 발제형식으로 발표하고 토론을 제안하였다.

 

    아들은 제사를 지내겠다고 한다. 그 동안 제사에서 느낀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니었고, 제사는 우리 전통문화중 하나인데, 자기 아들/하빈이에게 그 뜻을 전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녀석은 아마도 외할아버지나 내가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는 모습에서, 나의 할머니의 백살기 속에서 내가 느낀 그 무언가를 보았을 지도 모른다. 감성적인 아들놈의 의견에 따르면 나는 죽어서 다행히(!) 젯밥을 얻어 먹을 수 있을 듯하다. 문제는 매사 깐깐한(?) 딸내미인데, 녀석은 문화인류학 전공자답게 의식과 의례의 중간쯤 되는 ‘리추얼(Ritual)’인 우리네 가정제사는 재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토론을 달군다.

 

     나는 제사의 의미는 씨족사회에서 공동체 결속의 의미가 있었다고 이야기를 꺼낸다. 예를 들면 조부모 제사를 지낸다고 하면, 아버지 항렬과 사촌들까지 모두 모여서 지내니, 그 기회에 서로 가족의 정서를 나누는 자리로써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과거의 조상과 현재의 친척들을 아우르는 공동체 속에서 나의 존재를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물론 요즘처럼 그 것을 제사에서(특히 기제사에서) 유지하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힘들다고 없애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자칫 잊히기 쉬운 나의 시원(始原)을 반복적으로 되돌아보고, 내가 나아갈 곳을 바라다보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가족의 공동체성을 기르는 방식으로는 함께 놀러 가도 되는 등 많은 재미있는 방법이 있다. 평소에 서로 교류하고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제사라는 어려운 제도를 ‘가족 공동체성’을 위하여 유지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살아 생전에 뵙지도 않아서 아무런 정서도 없는 분들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별다른 공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힘든 것은 현실적인 문제이고. 하기야 많아 보아야 두 명인 자식들이 조상들의 제사를 일일이 챙기기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가정이 줄어들고 있으니 제사 준비는 앞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도 나름대로 제사의 의미에 대해서 공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무작정 없애고 싶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정해진 기일(忌日), 갖춰야 하는 음식, 절차 등 그 형식에 있어서는 개선이 필요하다는 곳까지 결론에 다다랐다. 조상을 기리는 것은 기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문득 문득 어떤 계기에서 생각 날 때 기릴 수 있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후손들에게 조상의 내력을 말해 주는 것도 꼭 기일에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방법이 인정되어야 할 듯하다. 그렇게 진행되려면 당사자인 내가 먼저 제안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한 줌 재로써 가족묘원에 묻고, 기일에는 형편이 되는대로 하는데, 당일 아침 식사 자리에서 꽃 한 송이 올려놓아 그 날을 기억해 주어도 감사한다고 정리했다. “당신, 많이 변했네요!” 마눌님이 칭찬인지 힐난인지 모를 멘트를 날린다. 속으로 응답한다. ‘문탁 글쓰기 덕분이죠. 네네.’

 

 

     나의 처가는 금성 나씨 계은공파 종손(宗孫)집이어서 현조(玄祖)까지 5대봉사(五代奉祀)를 한다. 결혼 후 처갓집 제사에 참여하기 시작한 첫 해에는 거의 격 달로 기제사가 있었던 듯하였다. 그 전에는 매달 있었다고 했다. 매번 제사 때마다 종부(宗婦)이신 장모님의 강력한 주장으로 그 횟수가 점점 줄었는데, 마지막에는 일 년에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는 두 번, 산소에 가는 시제는 한 번으로 제사를 줄였다.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는 장인의 부모님 합제와 조부에서 현조까지의 합제 두 번이다. 장인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돌아가신 장인의 일기에서 당신의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가슴 찌릿한 한 문장을 남겼다.

 

     “조상들에게는 법도가 아닌 줄 알지만, 살아 있는 집사람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종손(宗孫)의 자격을 물려받은 유일한 아들, 처조카 녀석은 제사에 대해서 별 다른 생각이 없는 듯하다. 아직 장가들지 않아서, 아니면 모든 제사 준비를 엄마와 고모가 다 해주어서 그럴 지도 모른다. 그도 언젠가 결정해야 할 날이 오겠지.

 

그의 몫으로 남긴다.

댓글 4
  • 2023-12-19 14:16

    기제사는 저희집도 비슷하게 서사가 흘러가네요. 시제는 저희는 봄에 동구능부터 합니다 돈은 문체부에서 지원받아서 ㅎㅎㅎ 저는 제사문화와 세시풍속을 즐기는 편이라서 힘들지만 심리적 부담없이 하는데(집에서 손하나 까딱안하는 남편도 부담감 없이 즐김ㅋㅋㅋ) 명절 차례는 어떻게 하시나요? 아 그러고보니 남편은 밤치고 지방쓰고 병풍치는 일은 하네요^^

    • 2023-12-21 17:22

      저는 처가에 식구가 없어서 처가에 갑니다. 장모님을 모신 이후로는 우리 집에서 명절을 지내고요.

  • 2023-12-19 20:24

    시댁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제사를 합쳐서 1년에 한 번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 날짜도 형제들 모이기 쉬운 8월 둘째주 토요일, 이렇게 정합니다.
    친정집에서도 오랫동안 따로 지내던 할머니 제사와 할아버지 제사를 어머니 돌아가신 뒤에 합쳐서 한번 지내자고 했습니다.
    저희 형제는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던 터라 아직은 제사를 올립니다.
    올해 어머니 돌아가시고 첫 기제사를 지냈는데, 역시 모두가 모이기 쉬운 일요일을 잡아 제사를 지냈습니다.
    날짜도 양력으로 했고요. 제가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옛 법도대로 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함께 나누며 어머니를 애도하고, 아직도 남은 상실감을 보듬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 2023-12-21 17:26

      맞아요. 정서를 함께한 조상님들의 제사를 지내는 집이 꽤 있더군요.
      다만, 기제사 날짜를 지키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성균관에서도 기제사가 아니면 안된다는 입장에서 후퇴하는 듯합니다.

인문약방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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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31 | 조회 153
인문약방 에세이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난 가장 낯선 작가였다.   책을 읽기 전, 단톡방에 올라온 저자 일라이 클레어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자라고 들었는데, 두 귀가 다 드러난 반삭에 가까운 짧은 머리, 두툼한 안경을 낀 얼굴에 넓은 어깨, 지퍼 달린 낡은 녹색 점퍼... ‘남자같은 여자’ 내가 갖고 있는 단어의 수준에서 나는 이렇게밖에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글을 보니, 그는 ‘젠더 퀴어’란다. 무슨 뜻이지? 동성애자인가? 소수자 용어에 낯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퀴어는 동성애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퀴어란, 태어날 때 사회(의사)가 지정해준 생물학적 성과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성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을 통칭한다. 거기에는 여자지만 남자보다 여성에게 성적으로 더 끌리는 사람, 남녀 모두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사회에서 훈육되는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여자, 자신을 굳이 남녀이분법에 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 그러다 보니 나도 퀴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미디어와 문학의 일방적인 이성애적 세례가 없었다면, 혹은 대학 시절 다이크 공동체를 만났다면, 나도 지금과는 다른 젠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 대한 소개를 좀 더 해보자. 그는 1963년생, 미국 오리건주 시골 벌목 노동자 마을에서 백인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지정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자신이 소녀라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젠더 퀴어였고,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으로 어려서부터 지진아, 불구, 원숭이 같은 조롱과 비난을 들으며 자랐다. 그는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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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1 | 조회 117
인문약방 에세이
    혼자 걷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본다. 나란히 걷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다가도, 혼자서 저 멀리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르다 싶다. 왼쪽이나 오른쪽, 한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는 갈지자로 왔다 갔다 걷는다. 갑자기 달려나갈 때도 있고, 갑자기 멈추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과 바짝 붙어서 걸어갈 때도 있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더 어릴 때는 그 모습을 보면 꼭 차에 치일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러다 대충 서겠지 싶어서 놔둔다. 저만큼 앞서서 달려가다가도 건널목이나 갈림길 사이에서는 멈춰서 기다리니까. 옆을 보면서 걷고, 심지어 하늘을 보면서 걸어도 아직은 누군가와 크게 부딪히거나 어디에 빠진 적은 없다. 이쯤 하면 눈이 뒤통수에도, 옆통수에도 달린 건 아닐까 싶다.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후로 나는 줄곧 되묻는다. 장애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과 뭔가가 다르단 의미일까. 그렇다면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과 만났다. 이 책은 강렬하게 나의 의식을 때렸다.   “저기요. 장애는 예술이거든요?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라고요!”     장애는 손상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하는 방식   장애인은 많다. 세계인구의 무려 15~20%나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장애인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장애인들은 격리된 시설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고, 고립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장애를 개인적인 비극으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장애인들은 사회로 나가는 대신 고립되는 편을 택한다. 하지만 장애를 보이는 부분 만이 아니라 만성적인 질병, 장거리 보행이...
    혼자 걷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본다. 나란히 걷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다가도, 혼자서 저 멀리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르다 싶다. 왼쪽이나 오른쪽, 한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는 갈지자로 왔다 갔다 걷는다. 갑자기 달려나갈 때도 있고, 갑자기 멈추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과 바짝 붙어서 걸어갈 때도 있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더 어릴 때는 그 모습을 보면 꼭 차에 치일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러다 대충 서겠지 싶어서 놔둔다. 저만큼 앞서서 달려가다가도 건널목이나 갈림길 사이에서는 멈춰서 기다리니까. 옆을 보면서 걷고, 심지어 하늘을 보면서 걸어도 아직은 누군가와 크게 부딪히거나 어디에 빠진 적은 없다. 이쯤 하면 눈이 뒤통수에도, 옆통수에도 달린 건 아닐까 싶다.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후로 나는 줄곧 되묻는다. 장애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과 뭔가가 다르단 의미일까. 그렇다면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과 만났다. 이 책은 강렬하게 나의 의식을 때렸다.   “저기요. 장애는 예술이거든요?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라고요!”     장애는 손상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하는 방식   장애인은 많다. 세계인구의 무려 15~20%나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장애인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장애인들은 격리된 시설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고, 고립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장애를 개인적인 비극으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장애인들은 사회로 나가는 대신 고립되는 편을 택한다. 하지만 장애를 보이는 부분 만이 아니라 만성적인 질병, 장거리 보행이...
문탁
2023.12.31 | 조회 106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2015년, 난 유부남(有婦男)이 아닌 유부남(有夫男)이 되었다. 당시 4년 째 만나고 있었던 파트너와 결혼을 했다. 그 해 연방 대법원의 판결로 미국 전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덕분이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결혼은 인생의 선택지로 존재하지 않았다. 동성혼이 언제 현실화될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된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은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여전히 나의 베프가 되어주고 있는 파트너와의 합법적인 결혼으로 나는 (물질적 성공으로서가 아닌) 게이로서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셈이다. 동네에서, 직장에서 우리를 법적 커플로 존중해 주었다. 세금 감면, 의료 보험의 배우자 등록, 병원에서의 보호자 역할 등 이성애 커플과 똑같은 혜택들도 받게 되었다. 결혼 후 난 공공 영역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다.  드디어 내 인생에서 길운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의 성정체성이 받아들여지는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코로나 위기가 터지기 몇 달 전,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몇 달 동안 불면증이 지속 되었고 우울감과 무기력이 찾아왔다. 여러 모로 볼 때 삶의 통상적 지표들은 우상향하고 있는 중이 었다. 번아웃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여러 원인으로 인해 일어났을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이로 인해 나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생활이 12년 째였지만 난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한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아침엔 반드시 쌀밥에 나물 반찬을 먹어야 속이 편하고 든든했다. 내 혀와 위장은 어릴 적 먹고 자란 전라도 시골 음식들을 여전히 갈망했다.  미국 대통령의 혐오적 선동과 그칠 줄 모르는 거짓말에 혈압이 올라갔지만, 이보다는 차별 금지법 통과에 무관심한 한국 양대 정당의 정치인들을 볼 때 나의 분노 게이지는 더욱 높아졌다. 저녁마다 즐겨 보는  넷플릭스의 Watch list엔 미드보다 더 많은 한국 드라마로 채워졌다.          ‘한국’은 내게 모순 그 자체였다. 일 년 정도 휴직하고 한국 살이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파트너의 법적 지위 문제와 혹시라도 그가 겪을 차별이 염려되어 금세 마음을 접었다. 자발적으로 한국을 탈주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한국 사회에 의해 유배 당했다는 억울함이 자주 올라왔다. 한국의 친구와 지인들과 관계가 멀어진 데 대해 아쉬움도 컸다. 이들과 계속 인연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어느새 연락이 끊어져 있었다. 대부분 내가 한국을 떠났는지 잘 알지 못하는데, 원거리에서 관계를 어떻게 지속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들과 거리를 둔 건 나였지만,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가슴이 아려올 떄가 많았다. 가장 큰 모순은 내가 수치의 땅으로 기억되는 (그리고 가까이 하게 되면 이를 다시 경험하게 될) 한국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해석되지 않은 채 두려움과 상처로 남아 있는 한국에서의 경험들과 ‘한국’과 점점 멀어지면서 느끼는 상실감이 번아웃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공부가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불교와 노자 등을 공부할 수 있는 한국인 모임을 찾았다. 돌이켜 볼 때 당시 나에게 공부만큼 중요했던 것은 한국인들과의 연결이었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내 모습 드러내고 싶었다. 한국에서 신뢰할만한 몇몇의 이성애자들에게만 커밍 아웃을 했었다. 미국에서도 나처럼 한국에서 탈주한 게이 친구들 이외의 다른 한국인들과 연결되기 쉽지 않았다. 특정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인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고 소수자에 대한 배제가 정교하게 이뤄지는 공동체였다.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게 되면 차별과 소외를 다시 겪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계속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해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묻어두고 살았다.       마침 코로나의 여파로 한국의 몇몇 인문학 강의가 온라인으로 개설 되었다. 불교와 주역의 기초적인 것을 훑는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처음엔 나를 드러내기가 망설여졌다. 한국인 공부 모임에서의 커밍 아웃은  미국 생활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나를 드러내는 일과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을 숨기게 만들었던 한국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성이 고정된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었다. 기회가 생겼을 때 난 약간의 용기를 내어 내가 퀴어라는 것과 한국에서 살기 어려워 미국으로 이주한 사실을 털어 놓았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뤄진 최초의 커밍 아웃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은 다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 이후 난 보다 자유롭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몇몇 선생님들과는 학기가 끝난 이후에도 모임을 이어가는 관계가 되었다. 나에겐 자신을 오픈한 상태에서 ‘한국’과 다시, 새롭게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셈이었다.      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2022년 “나이듦과 자기 서사”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난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었다. 소수자 작가들이 쓴 다양한 서사들을 접하면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과 복잡하게 응어리진 감정들을 하나씩 해석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텍스트를 재해석하여 자기 성찰에 이르는 글쓰기는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해야하는 노동 집약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심을 갖고,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는 발심을 한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난 소수자로서의 위치로 인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갖고 살았다. 나에게 저항할 힘이 없다고 느꼈다.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삶의 경험들을 한쪽 구석에 계속 쌓아 두었다. 이를 곱씹거나 드러내면 자책만 늘어날 것 같아서였다. 세미나에서 미니 자서전을 쓰면서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난 생각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불확실함을 무릅 쓰고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여러 번 탈주를 했다. 내 여건에서 할 수 있는 나름의 저항이었다. 이로 인해 낯선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법을 배웠고 삶의 기예들을 익혔다. 다양한 소수성을 가진 사람들과 접속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두려움이 나의 취약함만은 아니었다. 이는 내 삶의 추동력으로 작동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두려움에 대한 재해석은 자신을 긍정하게 된 중요한 일이었다.      처음 ‘몸의 일기’ 연재를 권유받았을 때 망설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초보적 글쓰기 수준을 알고 요청한 것이라 생각해 용감하게 덥썩 받아들였다. 나름 많은 공을 들여 글을 썼지만 거칠고 성근 서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글을 연재하면서 개인의 서사는 유동적이고 모순적이며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사가 내게 생명력을 주는 삶의 비전으로 변용되기 위해선 꾸준한 공부가 우선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끝으로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만든 장을 마련해 주신 문탁샘과 매 회의 글에 꼼꼼한 피드백을 주신 겸목샘에게 감사드린다.              -------------------------------- 편집자 주 전 편을 다시 읽고 싶은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5&category1=%EB%AA%B8%EC%9D%98+%EC%9D%BC%EA%B8%B0&mod=list&pageid=1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2015년, 난 유부남(有婦男)이 아닌 유부남(有夫男)이 되었다. 당시 4년 째 만나고 있었던 파트너와 결혼을 했다. 그 해 연방 대법원의 판결로 미국 전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덕분이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결혼은 인생의 선택지로 존재하지 않았다. 동성혼이 언제 현실화될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된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은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여전히 나의 베프가 되어주고 있는 파트너와의 합법적인 결혼으로 나는 (물질적 성공으로서가 아닌) 게이로서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셈이다. 동네에서, 직장에서 우리를 법적 커플로 존중해 주었다. 세금 감면, 의료 보험의 배우자 등록, 병원에서의 보호자 역할 등 이성애 커플과 똑같은 혜택들도 받게 되었다. 결혼 후 난 공공 영역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다.  드디어 내 인생에서 길운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의 성정체성이 받아들여지는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코로나 위기가 터지기 몇 달 전,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몇 달 동안 불면증이 지속 되었고 우울감과 무기력이 찾아왔다. 여러 모로 볼 때 삶의 통상적 지표들은 우상향하고 있는 중이 었다. 번아웃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여러 원인으로 인해 일어났을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이로 인해 나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생활이 12년 째였지만 난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한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아침엔 반드시 쌀밥에 나물 반찬을 먹어야 속이 편하고 든든했다. 내 혀와 위장은 어릴 적 먹고 자란 전라도 시골 음식들을 여전히 갈망했다.  미국 대통령의 혐오적 선동과 그칠 줄 모르는 거짓말에 혈압이 올라갔지만, 이보다는 차별 금지법 통과에 무관심한 한국 양대 정당의 정치인들을 볼 때 나의 분노 게이지는 더욱 높아졌다. 저녁마다 즐겨 보는  넷플릭스의 Watch list엔 미드보다 더 많은 한국 드라마로 채워졌다.          ‘한국’은 내게 모순 그 자체였다. 일 년 정도 휴직하고 한국 살이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파트너의 법적 지위 문제와 혹시라도 그가 겪을 차별이 염려되어 금세 마음을 접었다. 자발적으로 한국을 탈주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한국 사회에 의해 유배 당했다는 억울함이 자주 올라왔다. 한국의 친구와 지인들과 관계가 멀어진 데 대해 아쉬움도 컸다. 이들과 계속 인연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어느새 연락이 끊어져 있었다. 대부분 내가 한국을 떠났는지 잘 알지 못하는데, 원거리에서 관계를 어떻게 지속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들과 거리를 둔 건 나였지만,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가슴이 아려올 떄가 많았다. 가장 큰 모순은 내가 수치의 땅으로 기억되는 (그리고 가까이 하게 되면 이를 다시 경험하게 될) 한국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해석되지 않은 채 두려움과 상처로 남아 있는 한국에서의 경험들과 ‘한국’과 점점 멀어지면서 느끼는 상실감이 번아웃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공부가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불교와 노자 등을 공부할 수 있는 한국인 모임을 찾았다. 돌이켜 볼 때 당시 나에게 공부만큼 중요했던 것은 한국인들과의 연결이었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내 모습 드러내고 싶었다. 한국에서 신뢰할만한 몇몇의 이성애자들에게만 커밍 아웃을 했었다. 미국에서도 나처럼 한국에서 탈주한 게이 친구들 이외의 다른 한국인들과 연결되기 쉽지 않았다. 특정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인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고 소수자에 대한 배제가 정교하게 이뤄지는 공동체였다.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게 되면 차별과 소외를 다시 겪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계속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해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묻어두고 살았다.       마침 코로나의 여파로 한국의 몇몇 인문학 강의가 온라인으로 개설 되었다. 불교와 주역의 기초적인 것을 훑는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처음엔 나를 드러내기가 망설여졌다. 한국인 공부 모임에서의 커밍 아웃은  미국 생활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나를 드러내는 일과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을 숨기게 만들었던 한국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성이 고정된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었다. 기회가 생겼을 때 난 약간의 용기를 내어 내가 퀴어라는 것과 한국에서 살기 어려워 미국으로 이주한 사실을 털어 놓았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뤄진 최초의 커밍 아웃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은 다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 이후 난 보다 자유롭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몇몇 선생님들과는 학기가 끝난 이후에도 모임을 이어가는 관계가 되었다. 나에겐 자신을 오픈한 상태에서 ‘한국’과 다시, 새롭게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셈이었다.      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2022년 “나이듦과 자기 서사”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난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었다. 소수자 작가들이 쓴 다양한 서사들을 접하면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과 복잡하게 응어리진 감정들을 하나씩 해석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텍스트를 재해석하여 자기 성찰에 이르는 글쓰기는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해야하는 노동 집약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심을 갖고,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는 발심을 한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난 소수자로서의 위치로 인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갖고 살았다. 나에게 저항할 힘이 없다고 느꼈다.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삶의 경험들을 한쪽 구석에 계속 쌓아 두었다. 이를 곱씹거나 드러내면 자책만 늘어날 것 같아서였다. 세미나에서 미니 자서전을 쓰면서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난 생각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불확실함을 무릅 쓰고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여러 번 탈주를 했다. 내 여건에서 할 수 있는 나름의 저항이었다. 이로 인해 낯선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법을 배웠고 삶의 기예들을 익혔다. 다양한 소수성을 가진 사람들과 접속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두려움이 나의 취약함만은 아니었다. 이는 내 삶의 추동력으로 작동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두려움에 대한 재해석은 자신을 긍정하게 된 중요한 일이었다.      처음 ‘몸의 일기’ 연재를 권유받았을 때 망설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초보적 글쓰기 수준을 알고 요청한 것이라 생각해 용감하게 덥썩 받아들였다. 나름 많은 공을 들여 글을 썼지만 거칠고 성근 서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글을 연재하면서 개인의 서사는 유동적이고 모순적이며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사가 내게 생명력을 주는 삶의 비전으로 변용되기 위해선 꾸준한 공부가 우선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끝으로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만든 장을 마련해 주신 문탁샘과 매 회의 글에 꼼꼼한 피드백을 주신 겸목샘에게 감사드린다.              -------------------------------- 편집자 주 전 편을 다시 읽고 싶은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5&category1=%EB%AA%B8%EC%9D%98+%EC%9D%BC%EA%B8%B0&mod=list&pageid=1
문탁
2023.12.21 | 조회 244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2022. 7~2023.12).     ** <2023 양생프로젝트 '취약한 몸들의 연대와 돌봄사회' - 파이널 에세이 데이(12.9)> 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난잡함 선언 - 새벽이생추어리 돌봄과 글쓰기     돌봄care에 연루되고 있다. 매주 돼지를 돌보면서, 돌봄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매월 돌봄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돌봄은 반복된 행위이자, 확장된 실천이었고, 이질적인 존재들과 함께하는 세계 만들기, 읽기와 쓰기였다. 돌봄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면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돌봄'과 '글쓰기'가 분리되지 않고 상호의존적일 때 어떤 실천으로 이어질까?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만드는 세계에 참여할 때 존재는 어떻게 변형될까? ‘난잡함promiscuousness과 함께하기’라는 다종multispecies간 돌봄 정치학을 구상해볼 수 있을까?   이 글은 돌봄 현장에서 난잡하게promiscuous 뒤얽히는 종들species의 자취를 더듬는다.     1. 돼지와 마주침   2022년 어느 여름날.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모집 공고를 읽고 있다.   “돌봄으로 새벽이와 잔디의 삶에 연대하는 보듬이를 모집합니다."   생추어리sanctuary란 동물이 가능한 평생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성된 안식처를 말한다.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돌봄 활동가)로 지원해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 그리고 실험동물로 태어나 안락사 직전에 구조된 돼지 잔디를 만났다. 나는 매주 그들을 돌보았다. 밥과 물을 주고, 설거지를 하고, 똥을 줍고, 땅을 정비하고, 약을 바르고, 잠자리를 정돈하며 그들과 밀접 접촉했다. 그러다 연말에 도착한 문탁 선생님의 메세지.   "내년에 생추어리 돌봄일지를 인문약방에 기록해보면...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2022. 7~2023.12).     ** <2023 양생프로젝트 '취약한 몸들의 연대와 돌봄사회' - 파이널 에세이 데이(12.9)> 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난잡함 선언 - 새벽이생추어리 돌봄과 글쓰기     돌봄care에 연루되고 있다. 매주 돼지를 돌보면서, 돌봄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매월 돌봄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돌봄은 반복된 행위이자, 확장된 실천이었고, 이질적인 존재들과 함께하는 세계 만들기, 읽기와 쓰기였다. 돌봄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면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돌봄'과 '글쓰기'가 분리되지 않고 상호의존적일 때 어떤 실천으로 이어질까?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만드는 세계에 참여할 때 존재는 어떻게 변형될까? ‘난잡함promiscuousness과 함께하기’라는 다종multispecies간 돌봄 정치학을 구상해볼 수 있을까?   이 글은 돌봄 현장에서 난잡하게promiscuous 뒤얽히는 종들species의 자취를 더듬는다.     1. 돼지와 마주침   2022년 어느 여름날.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모집 공고를 읽고 있다.   “돌봄으로 새벽이와 잔디의 삶에 연대하는 보듬이를 모집합니다."   생추어리sanctuary란 동물이 가능한 평생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성된 안식처를 말한다.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돌봄 활동가)로 지원해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 그리고 실험동물로 태어나 안락사 직전에 구조된 돼지 잔디를 만났다. 나는 매주 그들을 돌보았다. 밥과 물을 주고, 설거지를 하고, 똥을 줍고, 땅을 정비하고, 약을 바르고, 잠자리를 정돈하며 그들과 밀접 접촉했다. 그러다 연말에 도착한 문탁 선생님의 메세지.   "내년에 생추어리 돌봄일지를 인문약방에 기록해보면...
경덕
2023.12.21 | 조회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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