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 / 모로

문탁
2023-12-31 10:03
104

 

 

혼자 걷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본다. 나란히 걷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다가도, 혼자서 저 멀리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르다 싶다. 왼쪽이나 오른쪽, 한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는 갈지자로 왔다 갔다 걷는다. 갑자기 달려나갈 때도 있고, 갑자기 멈추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과 바짝 붙어서 걸어갈 때도 있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더 어릴 때는 그 모습을 보면 꼭 차에 치일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러다 대충 서겠지 싶어서 놔둔다. 저만큼 앞서서 달려가다가도 건널목이나 갈림길 사이에서는 멈춰서 기다리니까. 옆을 보면서 걷고, 심지어 하늘을 보면서 걸어도 아직은 누군가와 크게 부딪히거나 어디에 빠진 적은 없다. 이쯤 하면 눈이 뒤통수에도, 옆통수에도 달린 건 아닐까 싶다.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후로 나는 줄곧 되묻는다. 장애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과 뭔가가 다르단 의미일까. 그렇다면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과 만났다. 이 책은 강렬하게 나의 의식을 때렸다.

 

“저기요. 장애는 예술이거든요?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라고요!”

 

 

장애는 손상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하는 방식

 

장애인은 많다. 세계인구의 무려 15~20%나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장애인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장애인들은 격리된 시설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고, 고립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장애를 개인적인 비극으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장애인들은 사회로 나가는 대신 고립되는 편을 택한다. 하지만 장애를 보이는 부분 만이 아니라 만성적인 질병, 장거리 보행이 어려운 경우, 체중의 부적합함의 문제 등까지 포함한다면 어떨까. 장애는 각종 기관의 내부 규정에 따라 달라짐으로 사회적 요인에 따라 계속 변한다. 그러므로 장애는 의료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이며, 손상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건물을 출입하거나 거리의 낮은 보도블럭을 넘지 못하는 사소한 문제들이 장애를 만든다. 사회의 많은 부분이 비장애중심주의로 설계되어 장애인들을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비장애중심주의적 관점은 우리가 동물을 대할 때 명확하게 드러난다. 동물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개량되고, 효용성이 없어졌다고 생각되면 도축된다. 성장 위주의 사회에서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폐기되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변형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인간중심주의의 생각에서 나온 결과다. 특히 지능은 인간이 만든 지표다. 하지만 이를 이용해 동물을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로 만든다. 동물은 말하고 싶은 것을 ‘언어’로 말하지 않을 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이는 장애의 경우에서도 비슷하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돌보거나 변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애는 고통이며,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 너머에는 다양한 세상이 있는데, 인간중심적인 세계관 탓에 그 너머의 것들을 놓친다. 저자는 계속해서 타자의 삶을 이해하고 무언가를 배우려는 시도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장애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불구의 시간(crip time)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서로 다른 속도로 살고 있고 우리의 시간 감각이 경험과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중략) 옷을 입거나, 식사를 준비하거나,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과업을 수행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우리에게 시간이 온전히 달라질 수 있다면, 극심한 지적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나 매우 다양한 동물들의 시간은 어떻게 다시 개념화될 수 있을까? (중략) 싱어의 시간 개념은 진보와 미래 지향적인 목적이라는 서구의 통념에 기초하는 반면, 불구의 시간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이란 가변적이며 실제로 우리의 신체 형태와 함께 바뀌고 있다고 문제제기 하도록 한다. (『짐을 끄는 짐승들』, 232p)

 

피터 싱어는 공리주의 철학자로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동물 해방』이다. 그는 동물 권리문제를 철학의 주요 담론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을 ‘문제적인 방식’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많은 장애인의 비판도 받는다. 장애를 부정적인 것으로, 비극으로, 결여로 생각한다. 이는 미국은 물론 다른 많은 곳의 지배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공리주의 관점에서 왜 장애가 바람직하지 않고 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지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테일러는 2012년 버클리를 방문했을 때 피터 싱어를 직접 만났다. 둘은 서로 만나 장애가 사회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소통의 한계에 부딪힌다. 테일러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보기에는 우리가 그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가요? 우리는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가요?” 싱어는 이렇게 답한다. “저는 사람들이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물어요. 모든 장애를 치유할 수 있고, 그 비용도 겨우 2달러에 부작용도 전혀 없는 알약을 준다면, 그 알약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알약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테일러는 대부분의 장애인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대답한다.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 자기가 가진 창조성에 대해 언급한다. “장애는 이 세계와 소통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알려줍니다.” 장애가 단순히 결핍이 아니라는 것, 반드시 효율성, 진보, 자립. 이성을 중심에 두지 않는 삶의 방식들에서 가치를 찾도록 추구한다고. 장애는 해방적일 수도, 신나는 일일 수도, ‘정상적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장소일 수도 있다고 답한다. 대게 장애는 장애인들의 삶에 스며들어 그 일부가 된다. 이것이 장애를 항상 꼭 즐긴다는 뜻은 아니다. 장애는 삶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며, 단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익숙한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

 

나는 내 형상 속에서 동물을 느낀다. 이 느낌은 교감의 일종이지 수치심이 아니다. 나의 동물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내 몸이나 다른 비규범적이고 상처 입기 쉬운 몸들이 자신의 주변 세계를 움직이고, 보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존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동물화된 부위와 움직임에 대한 주장이고, 내 동물성이 내 인간성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는 우리가 동물 같다거나 동물이라는 관념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두 주장 모두 맞지만 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바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루할 정도로 당연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잊어버리는 사실이다. (『짐을 끄는 짐승들』, 208p)

 

 

 

 

 

테일러의 작품 중 ‘해우로서의 자화상’이 있다. 뭉툭한 두 손과 굽은 관절을 가진 여성이 바다 동물과 함께 허공에 떠 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듯한 두 생명체는 모습이 서로 닮았다. 바다인 듯 보이나 물결도 거품도 없이 잔잔하다. 불편하기보다는 편안한 모습이다. 테일러에게 있어 ‘불구’란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자신을 동물로 표현함으로써 그림에 상상력을 부여한다. 또 다른 작품을 보면 굽은 손이 그려져 있다. 아주 익숙하면서도 어디인지가 낯선 이 손은 이상하기보다는 단단해 보인다. 테일러의 작품은 익숙한 우리들의 사고에 균열을 낸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언제 어디쯤에서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언제나 인간으로만 식별되고 싶은가.”라고.

 

생각해본다. 나는 아이에게 모든 장애를 치료할 수 있는 알약을 먹일 것인가. 아이의 장애가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을까. 수도 없이 학교 적응에 문제가 있었던 나날들, 익숙한 발달 단계에서 벗어난 아이를 키우는 일, 아직도 친구와의 생활이 매끄럽지 않은 아이다. 하지만 종종, 아니 자주 나는 아이의 번뜩임과 사랑스러움에 빠졌다. 늘 ‘왜’라고 묻는 말 속에서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고,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일상들에 틈을 내고 잠시 생각하게 했다. 여행을 가더라도 아이는 풍경 대신 그 나라의 신호등이나 표지판의 차이점부터 본다. 각기 다른 언어와 문자, 기호체계를 신기해하고 관찰한다. 새로운 가전제품이나 장난감을 사더라도 설정을 가장 먼저 살펴본다. 그리곤 만든 사람 빼고 아무도 모를 거 같은 정말로 낯선 기능들을 찾아낸다. 또한 언어가 가진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는 것도 좋아한다. 어제는 뉴스에서 폐렴이 유행이라는 기사가 나왔는데 그걸 보더니 아이가 말했다. “엄마, 폐렴은 왜 폐염이 아니고 폐렴이에요? 다른 건 다 간염, 피부염 다 ‘염’인데요. 두음법칙의 파괴라면 폐암도 폐람이 되어야 하지 않나요?” 폐렴이라는 단어를 40년간 들으면서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폐 스펙트럼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인, 사회성을 생각해본다. 이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소통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므로 아이의 케이스마다 개개별로 다른 소통의 창구를 찾아내야 한다. 장애를 다른 시선으로 보기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다. 엄마들을 아이의 장애를 인지한 순간부터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이었을까. 내가 생각하는 ‘정상’의 범위로 아이를 만들고 싶어 했던 욕망 아니었을까.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서 겨우 다른 아이들이 평범하게 해 나가는 것 (젓가락질하기, 학교 책상에 잘 앉아있기, 질문하고 대답하기)를 습득하는 것은 비장애중심주의인가. 아니다. 이건 아이를 이해하고, 함께 살기 위한 나의 노력이었다. 그렇게라도 타인과의 소통을 배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테일러의 말대로 우리가 문제시해야 하는 것은 장애를 치료하나 마냐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가 객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뿌리 깊고 만연한 전제 자체다.

 

우리는 서로에게 얽혀있는 존재

 

테일러는 활동 보조견이자 반려견으로 보호소의 개를 입양한다. 입양한 개 베일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보조견이 아니다. 신체를 보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일리는 함께 세상 속을 헤쳐갈 때 사회적 윤활 작용을 해준다. 불편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시선을 부드럽게 만든다. 하지만 베일리는 곧 짧은 다리와 긴 몸통 탓에 신체적 장애를 가지게 된다. 베일리는 소중한 존재지만 동시에 아이러니함을 함께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삶을 편안하게 해줄 개를 원했지만 결국에는 장애견과 함께 있게 된 것이다. 테일러 역시 가끔은 베일리의 척추 몇 마디를 제거해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치료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깨닫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효율적이고 능력 없는 인간이 비효율적이고 불구인 개를 돕고 서로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우리 가족도 반려묘와 함께 산다. 아름답고도 비싼 품종묘인 이 고양이는 러시아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 동안 펫샵에 전시돼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주인에게 팔린 뒤 새끼를 낳아 팔고자 했던 욕망이 좌절되자 버려졌다. 그 뒤로 두 번째, 세 번째 주인을 거쳐 우리 가족이 되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일은 ‘쓸모’가 있는 일일까. 반짝이는 금빛 눈과 풍성한 털을 가진 이 고양이도 내년에는 10살이 된다. 이제는 아름다운 시절이 지나가고 늙고 병드는 일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한가. 고양이에게는 과거도, 미래의 관념도 없다고 한다. 단지 현재만을 사는 동물. 나는 고양이의 나른한 그루밍을 보고 있으면 편안함을 느낀다. 산책을 하지도, 새로운 곳을 가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즐긴다. 그리곤 집의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바쁜 남편과 아스퍼거 아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집에 돌아오면 가장 반갑게 뒤집어져서 반기고, 털을 뿜으며 존재를 각인시키고, 잠자는 내 옆구리를 파고들기 위해 번번이 잠을 깨운다. 늦게 일어나면 ‘앙앙’거리면서 잔소리하고, 화장실이 더러우면 똥 한 덩이를 내가 다니는 길목에 놓아둔다. 우리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도 우리를 길들였다. 함께 지내면서 천천히 ‘언어’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서로 다른 우리 가족이 어울려서 살아가는 데는 무엇이 가장 필요했을까. 그건 서로 다른 방식으로라도 소통하고 싶어하는 관심이 아닐까 싶다.

댓글 1
  • 2024-01-19 10:08

    글이 너무 좋아요 모로샘 🙂
    삶을 대하는 독창적인 방식의 예술
    이라는 말이 참 와닿네요

일상명상
          요요 문탁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화두다     <일상 명상> 연재를 시작하며   작년 1월에 ‘요요의 월간명상’을 시작했는데, 6개월을 쉬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셋이다. 지난해에 불교 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번갈아 가며 새로 리뉴얼한 <일상명상>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요요의 월간명상’ 3회차 글에서 나는 문탁에서 함께 명상하는 친구들을 만들고 싶다는 바램을 밝혔다. 그런데 정말로 명상 친구가 만들어졌다.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코너는 이제 요요, 오영, 도라지, 세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쓴다. 아마 3인 3색의 명상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이 글은 우리가 어떻게 명상 친구가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사띠 수행을 공부하다   지난해 가을 불교학교에서 우리가 공부한 것은 사띠(sati) 수행이다. 팔정도 중 여섯 번째가 정념(正念)인데, 정념은 ‘바른 사띠’를 말한다. 그만큼 불교 수행에서 사띠가 중요한 개념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띠에는 ‘기억한다’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핀다’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순수한 주의집중(bare attention), 알아차림(awareness, noting) 등을 쓰기도 한다.   우리말 번역어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최초로 니까야를 한글로 완역한 전재성님은 사띠를 ‘새김’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에 새긴다고 할 때의 새김이다. 새김은 사띠의 첫 번째 의미인 ‘기억한다’, ‘잊지 않는다’의 뉘앙스가 좀...
          요요 문탁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화두다     <일상 명상> 연재를 시작하며   작년 1월에 ‘요요의 월간명상’을 시작했는데, 6개월을 쉬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셋이다. 지난해에 불교 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번갈아 가며 새로 리뉴얼한 <일상명상>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요요의 월간명상’ 3회차 글에서 나는 문탁에서 함께 명상하는 친구들을 만들고 싶다는 바램을 밝혔다. 그런데 정말로 명상 친구가 만들어졌다.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코너는 이제 요요, 오영, 도라지, 세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쓴다. 아마 3인 3색의 명상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이 글은 우리가 어떻게 명상 친구가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사띠 수행을 공부하다   지난해 가을 불교학교에서 우리가 공부한 것은 사띠(sati) 수행이다. 팔정도 중 여섯 번째가 정념(正念)인데, 정념은 ‘바른 사띠’를 말한다. 그만큼 불교 수행에서 사띠가 중요한 개념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띠에는 ‘기억한다’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핀다’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순수한 주의집중(bare attention), 알아차림(awareness, noting) 등을 쓰기도 한다.   우리말 번역어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최초로 니까야를 한글로 완역한 전재성님은 사띠를 ‘새김’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에 새긴다고 할 때의 새김이다. 새김은 사띠의 첫 번째 의미인 ‘기억한다’, ‘잊지 않는다’의 뉘앙스가 좀...
요요
2024.01.10 | 조회 438
로이의 근사한 양생
        건달바와 둥글레를 거쳐 로이로 인문약방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있다. 양생은 가장 가까운 일상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를 빼놓지 않은 近思하고 近似한 양생 이야기를 하고 싶다.        새해는 매번 다르다   2024 갑진년은 청룡의 해다. 갑(甲)은 목화토금수의 오행 중 목(木, 나무)이고 목의 색은 청색이다. 진(辰)이 십이지지에서 용이니 갑진을 청룡이라고 한다. 보통 여기까지 알아보고 청룡 이상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다들 재물복, 건강, 마음의 평화를 빈다거나 운동, 금연, 공부 등 비슷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육십갑자로 이루어진 동양의 역법은 매해, 매달, 매일, 매시 달라지는 하늘과 땅의 기운을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라는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 시간의 단위이지만 시간뿐 아닌 공간을 채우는 전체적 기운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매번 오는 새해는 같은 새해가 아니다. 뻔한 새해 계획에서 벗어나 보자.        이렇게 매년 달라지는 간지(천간과 지지)가 의미하는 기운은 운기학과 명리학에서 중요하게 쓰인다. 운기학에서는 간지의 관계성에서 파생되는 기운이 그해의 기후와 몸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요즘처럼 이상 기후가 자주 나타나고 안정적인 주거 환경에서는 운기를 안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약국에 있다 보면 기후와 관련해서 비슷한 증상으로 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예컨대 갑자기 추워지면 비위가 약한 사람들이 줄줄이 찾아온다. 추위에 대비할 에너지 비축이 평소에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져 몸에 이상이 온 다. 그러니 운기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 <동의보감>을 찾아보니 갑진년 운기는...
        건달바와 둥글레를 거쳐 로이로 인문약방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있다. 양생은 가장 가까운 일상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를 빼놓지 않은 近思하고 近似한 양생 이야기를 하고 싶다.        새해는 매번 다르다   2024 갑진년은 청룡의 해다. 갑(甲)은 목화토금수의 오행 중 목(木, 나무)이고 목의 색은 청색이다. 진(辰)이 십이지지에서 용이니 갑진을 청룡이라고 한다. 보통 여기까지 알아보고 청룡 이상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다들 재물복, 건강, 마음의 평화를 빈다거나 운동, 금연, 공부 등 비슷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육십갑자로 이루어진 동양의 역법은 매해, 매달, 매일, 매시 달라지는 하늘과 땅의 기운을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라는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 시간의 단위이지만 시간뿐 아닌 공간을 채우는 전체적 기운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매번 오는 새해는 같은 새해가 아니다. 뻔한 새해 계획에서 벗어나 보자.        이렇게 매년 달라지는 간지(천간과 지지)가 의미하는 기운은 운기학과 명리학에서 중요하게 쓰인다. 운기학에서는 간지의 관계성에서 파생되는 기운이 그해의 기후와 몸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요즘처럼 이상 기후가 자주 나타나고 안정적인 주거 환경에서는 운기를 안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약국에 있다 보면 기후와 관련해서 비슷한 증상으로 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예컨대 갑자기 추워지면 비위가 약한 사람들이 줄줄이 찾아온다. 추위에 대비할 에너지 비축이 평소에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져 몸에 이상이 온 다. 그러니 운기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 <동의보감>을 찾아보니 갑진년 운기는...
로이
2024.01.08 | 조회 354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생업의 기회를 잡아 3년간 일리치약국 정규직으로 지냈다. 2024년 나이듦연구소로 적을 옮겨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를 꿈꾼다.         12월은 분주한 달이다. 공동체에서 1년간 공부한 내용을 갈무리한 에세이 발표도 가야하고 드문드문 송년회 일정도 있다. 주일에 이런 일정이 잡히면 휴일 걷기는 자연스럽게 미루어졌다. 그 사이 흐린 날까지 겹치며 걷기가 점점 더 귀찮아졌다. 12월 중순을 넘기니 몸놀림이 둔해졌지만 모른 척 하던 어느 날, 공동체와 연결되어 알게 된 지인이 공간을 새로 열었다고 해서 축하방문을 하게 되었다. 미리 와있던 분들과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걷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 분은 걷기강좌를 연다고 했고, 지인은 23년 한 해 동안 줄기차게 걸어서 남산 주변으로 열 가지가 넘은 자신만의 코스도 있다고 했다. 그 효과를 간증하는데, 다 아는 얘기도 더 실감나게 들렸다. 지인은 최근 새로운 책을 냈는데 그만큼 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했다. 게을러지던 마음에 조금씩 탱탱한 기운이 서려졌다.    집에 돌아와서 지인이 알려준 유튜브를 검색했다. 걷기혁명이라고 적힌 썸네일을 비롯 기적의 걷기라느니 등등 제목도 현란했다. 그 중에 지인이 알려준 걷기 전문가로 소개된 영상을 찾아서 바르게 걷는 방법을 보았다. 영상에서 알려준 바로는, 발뒤꿈치부터 착지하면서 앞으로 내딛으며 걷는데, 이 때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면서 평소 보폭보다 10센티 정도 더 크게 걷는다는 기분으로 걸으라고 했다....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생업의 기회를 잡아 3년간 일리치약국 정규직으로 지냈다. 2024년 나이듦연구소로 적을 옮겨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를 꿈꾼다.         12월은 분주한 달이다. 공동체에서 1년간 공부한 내용을 갈무리한 에세이 발표도 가야하고 드문드문 송년회 일정도 있다. 주일에 이런 일정이 잡히면 휴일 걷기는 자연스럽게 미루어졌다. 그 사이 흐린 날까지 겹치며 걷기가 점점 더 귀찮아졌다. 12월 중순을 넘기니 몸놀림이 둔해졌지만 모른 척 하던 어느 날, 공동체와 연결되어 알게 된 지인이 공간을 새로 열었다고 해서 축하방문을 하게 되었다. 미리 와있던 분들과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걷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 분은 걷기강좌를 연다고 했고, 지인은 23년 한 해 동안 줄기차게 걸어서 남산 주변으로 열 가지가 넘은 자신만의 코스도 있다고 했다. 그 효과를 간증하는데, 다 아는 얘기도 더 실감나게 들렸다. 지인은 최근 새로운 책을 냈는데 그만큼 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했다. 게을러지던 마음에 조금씩 탱탱한 기운이 서려졌다.    집에 돌아와서 지인이 알려준 유튜브를 검색했다. 걷기혁명이라고 적힌 썸네일을 비롯 기적의 걷기라느니 등등 제목도 현란했다. 그 중에 지인이 알려준 걷기 전문가로 소개된 영상을 찾아서 바르게 걷는 방법을 보았다. 영상에서 알려준 바로는, 발뒤꿈치부터 착지하면서 앞으로 내딛으며 걷는데, 이 때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면서 평소 보폭보다 10센티 정도 더 크게 걷는다는 기분으로 걸으라고 했다....
기린
2024.01.06 | 조회 306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세계 끝의 가족 2023.12.31. 정화편 Designed by Cho-hui (앞으로 꽃길만 걷고 싶은) 백수 꿈나무 살림의료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희망법/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던 임수를 꼬드겨 '쫌 다른 가족-되기' 실험 중 소박하게 꾸린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서 앎과 삶에 관해 질문하며 살고 있다.     어릴 적 집에 오신 손님들(대부분 친지들)은 내 작은 손에 용돈을 쥐어주시곤 했다. 적게는 만원에서 많게는 3만원. 퍼런 지폐는 어린 내가 봤을 때도 꽤나 듬직해 보였다. 그 용돈은 넉넉치 않은 살림을 사느라 늘 고단해보였던 해피님의 고민거리를 아주 조금이지만 덜어 주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100원, 200원 정도는 남는 이벤트였다. 취학 전 아동 시절이었다. ​ 그 때 배웠다. 어른이 염려하는 마음으로 주시는 용돈은 적당히 공손하게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그 용돈은 단지 '용돈'만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과한 거절은 '선물 경제'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퇴색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시절 나는 나름 증여와 순환의 정신을 잠시 엿본게 아닐까? 체면을 상하지 않게 선물하는 예절, 받는 사람의 태도 등 '돈과 관계의 철학'을 조금 익힌 셈인지도 모르겠다. ​ ​ 고릿적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연재의 발단과도 조금은 연결되기 때문이다.  ​ 작년 가을. 우리는 그동안 각자 모은 돈에 대출금을 좀 보태 집을 사고 이사를 했다. 문탁에서 공부하다 만난 동학 둘이 '쫌 다른' 가족으로 살아보겠다는 포부를 밝힌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모셔 조촐하나마 집들이를 계획했었는데,...
  세계 끝의 가족 2023.12.31. 정화편 Designed by Cho-hui (앞으로 꽃길만 걷고 싶은) 백수 꿈나무 살림의료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희망법/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던 임수를 꼬드겨 '쫌 다른 가족-되기' 실험 중 소박하게 꾸린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서 앎과 삶에 관해 질문하며 살고 있다.     어릴 적 집에 오신 손님들(대부분 친지들)은 내 작은 손에 용돈을 쥐어주시곤 했다. 적게는 만원에서 많게는 3만원. 퍼런 지폐는 어린 내가 봤을 때도 꽤나 듬직해 보였다. 그 용돈은 넉넉치 않은 살림을 사느라 늘 고단해보였던 해피님의 고민거리를 아주 조금이지만 덜어 주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100원, 200원 정도는 남는 이벤트였다. 취학 전 아동 시절이었다. ​ 그 때 배웠다. 어른이 염려하는 마음으로 주시는 용돈은 적당히 공손하게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그 용돈은 단지 '용돈'만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과한 거절은 '선물 경제'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퇴색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시절 나는 나름 증여와 순환의 정신을 잠시 엿본게 아닐까? 체면을 상하지 않게 선물하는 예절, 받는 사람의 태도 등 '돈과 관계의 철학'을 조금 익힌 셈인지도 모르겠다. ​ ​ 고릿적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연재의 발단과도 조금은 연결되기 때문이다.  ​ 작년 가을. 우리는 그동안 각자 모은 돈에 대출금을 좀 보태 집을 사고 이사를 했다. 문탁에서 공부하다 만난 동학 둘이 '쫌 다른' 가족으로 살아보겠다는 포부를 밝힌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모셔 조촐하나마 집들이를 계획했었는데,...
무사
2023.12.31 | 조회 385
인문약방 에세이
      2학기 공부는 유독 일상과 교차되었다. 길을 걷다 장애를 가진 동물과 마주친다든가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어져 농인인 상인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 등으로 말이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것과 장애를 나와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없어 보였던 군대와 장애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혹은 경험이 많지 않아 헛발질을 일삼고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어 ‘장애인 00’이라고 불렀다. 병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장애인이냐? 고문관이냐?”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군대야말로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 정책’의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한국의 징병제도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만을 전쟁에 필요한 자원으로 호명해왔다. 군에서 장애인은 철저하게 비가시화되어 있었지만, 비하할 만한 상황이나 대상이 필요하면 여지없이 소환되었다. ‘군인되기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 누구도 장애인되기를 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에이블리즘의 원형, 군대    군에는 장애인이 ‘없다’. ‘신체의 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조직인 군은 입영단계에서 법령(국방부령 병역판정신체검사등검사규칙)에 근거하여 ‘그냥 인간’을 ‘등급내 인간’과 ‘등급외 인간’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군내 진입은 ‘원천’ 차단된다.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 편의시설도 필요없다. 장애인 화장실은 고사하고 휠체어 픽토그램조차 보지 못했다. 군 복무 중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어떨까? 장애의 원인이...
      2학기 공부는 유독 일상과 교차되었다. 길을 걷다 장애를 가진 동물과 마주친다든가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어져 농인인 상인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 등으로 말이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것과 장애를 나와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없어 보였던 군대와 장애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혹은 경험이 많지 않아 헛발질을 일삼고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어 ‘장애인 00’이라고 불렀다. 병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장애인이냐? 고문관이냐?”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군대야말로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 정책’의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한국의 징병제도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만을 전쟁에 필요한 자원으로 호명해왔다. 군에서 장애인은 철저하게 비가시화되어 있었지만, 비하할 만한 상황이나 대상이 필요하면 여지없이 소환되었다. ‘군인되기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 누구도 장애인되기를 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에이블리즘의 원형, 군대    군에는 장애인이 ‘없다’. ‘신체의 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조직인 군은 입영단계에서 법령(국방부령 병역판정신체검사등검사규칙)에 근거하여 ‘그냥 인간’을 ‘등급내 인간’과 ‘등급외 인간’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군내 진입은 ‘원천’ 차단된다.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 편의시설도 필요없다. 장애인 화장실은 고사하고 휠체어 픽토그램조차 보지 못했다. 군 복무 중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어떨까? 장애의 원인이...
문탁
2023.12.31 | 조회 228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