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창

꿈틀이
2023-10-21 19:08
104

고등학교 1,2학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제 시간보다 일찍 정류장에 도착해서 서성이고 있었다. 당시의 계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자 아이 몇 명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아이는 장애가 있어 보였는데 놀이의 규칙을 완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머지 아이들은 그 아이의 순서를 잘 지켜주었고 놀이는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도 초등학교 때 고무줄 놀이에 일가견이 있었기에 그들이 놀이를 재미있게 즐기면서도 장애 친구를 최대한 존중하며 이끌어가고 있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저런 것이겠구나. 아이들은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구나. 나는 이때의 일을 주제로 ‘이해의 창’이라는 제목으로 글짓기를 했었고 우리반 교실의 게시판에 그 글을 붙여 놓았었다.

‘이해’라는 단어가 며칠 내내 나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바턴 루시’의 회고록이 자신을 이해했다고 ‘패티’는 말했다<풍차中>.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쿠루지 역을 맡았던 연극배우 링크 매캔지가 “하지만 나는 외로웠어요”라고 말하자 에이블은 “이해합니다”라고 말한다<선물中> 이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에이블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패티가 말한 ‘책이 나를 이해했다’는 표현은 어떨 때 가능한 것일까? 성인이 된 후 줄곧 내가 불행하다고 또는 우울하다고 느꼈다면 그건 아마 특정한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했다는 패배감과 외로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때론 체념하고, 분노하며 이 근원적 외로움을 줄곧 마음속 화두로 간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풍차>의 패티는 유복한 집안에서 어려움 없이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고등학교때 그녀의 엄마가 자신의 가정교사와 불륜을 저지르는 일을 목격했고, 수치심과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되어버린다. 그녀는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성관계를 허락하고 그것이 끔찍한 일임을 자신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 넣는다.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패티처럼 상처 투성이었던 남편과는 사별했다. 학교 상담교사가 직업이었던 그녀는 진로 상담을 하던 학생에게 ‘뚱보 패티는 숫처녀’라는 치욕스러운 말까지 듣는다.

<선물>의 에이블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할 정도였고, 한 벌 뿐인 바지를 다시 늘여서 입고 다녀야 했다. 어린 나이에 일했던 극장 입구만 가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그랬던 에이블은 부유한 여성과 결혼했고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일과 가정 모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이블이 겪었던 비참한 유년 시절은 발설하면 안되는 금기어였다. 그의 가정은 어두운 불행이 드리우면 안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해맑은 아내와 딸에게 그의 기억은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삶은 완벽하지 않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누구에게나 자잘한 상처나 또는 트라우마로 몸과 마음을 긴장하게 하는 무언가들이 있을 것이다. 나의 유년은 가난했고 외로웠다. 그것들이 나의 몸과 마음에 남긴 흔적들은 대체로 눈치보기. 자신없음, 경직되어 있기. 등등이 아니었을가 싶다. 잠을 잘 집은 어딘가에 항상 있었지만 내 몸과 마음이 온전히 따뜻한 온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이완되는 집은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경직되어 있던 나의 신체가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곳에 정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늘 결혼생활이 탐탁지 않았고 몸과 마음은 항상 긴장되어 있었다. 때때로 “너는 시골 출신이라서 센스가 없어”. “너는 성격이 모가 너무 많이 나 있어” 이런 말들을 들어야 했고 나는 영원히 이해 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체념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이해받고 싶은 사람에게 가장 센 비수의 말을 들었을 때의 감정은 거대한 파도가 몸을 덮쳐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성은 온데간데 없고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나를 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나도 똑같이 상대를 냉소하고 비수를 던지고 침묵하는 방법들이었다. 물론 즐겁고 좋은 일들도 그와 함께 하는 순간순간 있었을 것이다. 충만함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수치심을 안아주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기억과 상처는 일정부분 나를 불행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했다. 그리고 늘 외로웠다. 그렇지만 나는 이 세계를 파괴하지 않았고 아직도 굳어있는 내 몸을 이곳에 누이고 싶은 희망을 놓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패티는 『루시 바턴의 회고록』을 읽고 ‘혼자라는 느낌이 훨씬 덜’해 졌다고 말한다. 그 책으로부터 그녀는 이해받았다고 생각했다. 밤이 오는 것은 어두움이 아니라 밝은 달이 동행하는 따뜻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자신에게 막말을 했던 학생의 수치심을 안아주기로 결심한다. 가난하지만 영민한 그 학생의 대학자금을 대주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루시 바턴이 자신의 수치심을 뚫어내고 담담히 글을 써 내려간 용기와 비슷한 일이었을 것이다.

에이블은 연극이 끝난 후 손녀의 물건을 찾으러 갔다가 스쿠리지 역의 링크 매킨지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된다. 링크 매킨지는 외로웠고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에이블은 처음에는 불편하고 황당했지만 상대가 고백한 수치심과 외로움을 들으며 자신도 똑같이 가난의 기억으로부터 몸이 늘 긴장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해합니다’라는 말을 하며 에이블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에 링크 매킨지는 “이봐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라는 말로 화답한다. 에이블은 이것을 자신의 인생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로 기억한다. 이해 받기 위해, 또는 너무 외로워서 말을 해야 했던 어떤 남자의 고백이 에이블의 그 촘촘히 엮여있던 긴장과 수치심을 가볍게 허물어뜨렸다.

나는 최근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의 상처나 기억을 늘어놓지 않았고 가사일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나에게 전가 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집은 공동의 공간이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노동을 ‘나’의 일로 낙인 찍거나, 책임으로 연결짓지 말라는 취지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의도한 대로 대화가 잘 된 건 아니었지만 이후 남편은 옛날처럼 냉장고가 더럽거나 반찬이 없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따위가 있어도 나에게 타박을 놓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유튜브를 보고 반찬과 국을 만들기도하고 부엌 청소를 군말 없이 해놓기도 했다. 이에 어색한 칭찬과 함께 내가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하지 않았던 노력은 양념을 조금씩 쳐서 상대를 추켜세워주는 말, 곧이곧대로 냉소적으로 던지는 말투 대신, 상대를 이해하려는 미소를 부드럽게 넣어주는 말의 기술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패티는 수치심을 뚫어내는 방법을 ‘바턴 루시’의 그것처럼 우월한 자신을 갖는 것으로 선택한다. 에이블은 상대의 이야기를 받아주고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동안 나는 수치심과 이해받지 못한 패배감에 갇혀, 어떤 것도 시도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은 그녀와 그처럼 나 자신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누군가로부터 이해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감옥,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던 사람에 대한 미움의 감옥, 그래서 외롭고 불행했다고 믿는 감옥. 그 감옥 속에서 시야를 집중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더 경직되어 있었다.

장애 친구를 이해하며 고무줄 놀이를 재미나게 이끌고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던 그들처럼 ‘이해의 창’은 그 너머 펼쳐진 자유로운 무언가들의 생존과 이야기들 속에 있다. 밖의 아름다운 풍경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생동감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꽉 잠겨있는 창문에 걸터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그것은 우월한 나 자신을 갖는 기회를 놓치는 일이며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어떤 사람, 내가 이해해 주었던 어떤 사람들을 놓치는 일이다. 창문 너머 분명히 있었지만 나는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운 살아있는 것들이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댓글 1
  • 2023-10-29 14:08

    음....
    죄책감은 옆에서 편들어주고 그 상황을 이해해주고 등등...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찾아보며 대화를 할 수 있지만
    수치심이라는 건 좀 더 복잡한 감정 같습니다.
    그건 좀 더 내밀하고, 개인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라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공감해주고, 그 사람의 인생 자체를 인정하며 받아주고 북돋아주는,
    난이도가 높은 길만 있는 듯.
    그거 같이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고
    특히 같이 사는 사람은 더 힘들지 않을까요?
    시험과 증명의 연속인 거 같아서...

    저도 남편에게 꿈틀이 님이 배우자에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걸 품고 살았습니다.
    (저는 비수는 안 맞았지만 무관심을 맞았습니다. ㅠㅠ)
    그런데 시간이 오래오래 지나며 보니까,,,,
    순간의 이해와 공감으로 수치심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건 그야말로 <선물> 이고
    보통은 가까운 사이일 수록 힘들지도 모르겠구나, 싶어요.

    꿈틀이님,
    걸터앉은 창틀에서 일어나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나가
    생동감 있는 사람들과 자유롭게 놀겠다는 멋진 마무리를 읽으며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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