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걷고 싶은 거리는

천유상
2023-10-08 14:10
76

내가 걷고 싶은 거리는

 

1.
지금은 잘 보지 않지만 예전에 내가 애정했던 프로그램 중 하나가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였다. 골목 구석구석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김영철(배우)의 입담과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했다. 프로그램을 보며 무심히 지나쳤던 어느 골목의 상가 주인,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도 저마다의 삶의 이야기가 있음을 느꼈고, 때론 예기치 못한 곳에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거리를 걷는 것이 주는 매력이 이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와는 다른 삶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 그것으로부터 내가 잠시나마 확장되고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홀로 자기 방에 있다가 나와서 그들과 어울리면 아주 유쾌하다. 자기 방에서는 기묘한 자기 기질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과거 경험을 억지로 떠올리는 물건들에 둘러 싸여 있기 때문이다’ (「런던 거리 헤매기: 버지니아 울프 산문집」, 버지니아 울프, 8쪽)

 

 

  그러나 정작 나는 잘 걷지 않는다.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주중의 일상이 핑계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나도 선뜻 밖을 나가 걸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대형 아파트촌 사이에 위치한 나의 거주지는 큰 도로와 상가들, 대형 쇼핑몰에 둘러쌓여 있다. 조금 나아가보면 탄천에 닿거나 한적한 단독주택가 단지에 닿을 수 있지만 ‘걷고 싶다’는 나의 욕구를 자극하지는 않는다. 잘 걷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걸까 아니면 익숙함을 핑계삼은 상상력 부족일까.

  ‘걷는다’를 생각하며 내게 ‘걷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 거리가 어디일까 생각해보았다. 혹은 ‘걷는다’는 느낌을 줬던 거리는 어디였을까? 스무살 무렵 가끔 종로와 서울역 근처를 걷곤 했다. 지금처럼 번듯한 새 역사가 들어서기 전 서울역을 지나 남산과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거리와 그 근방을 걷곤 했었다. 어느 오후 서울역 앞에서 길가에 앉은 한 노숙인 여성이 날카로운 유리조각으로 자신의 팔목을 긋고 있던 모습을 보며 경찰에 신고해야하나 말아야하는 고민을 했던 나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길을 걷다 마주친 호암아트홀에서 어떤 연주회가 있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빌딩들이 있지만 남산과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거리에는 나지막한 층수의 오래된 낡은 건물들 사이로 조그만 가게들이 이어져있고, 나와 친구는 그 골목 어딘가 조그만 밥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었다. 남대문 시장 앞 포장마차에서 혹은 갈치조림이 맛있다며 시장 안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었던 기억, 날씨 좋던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남산으로 천천히 오르던 모습들이 기억에 남아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광화문과 인사동을 지나 정독도서관 쪽으로 걷곤 했다. 상업화된 거리긴 하지만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주는 활력들, 나지막한 집들이 주는 아기자기함이 주는 즐거움이 있었다. 오래됨과 새로움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거리의 분위기가 좋았다.

 

 

2.
‘흰 팔이 내려가면 퍼즐은 다시 줄지어 지나다가 한껏 속도를 높여 쉼 없는 속도 경쟁과 무질서 속에 뒤죽박죽 배배 꼬인다.’ ( 「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 36쪽)
  어쩌면 내가 나의 집 근처의 길목들에서 걷는 즐거움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삶과 너무 밀접해서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반대로 나의 삶이 주변과 너무 단절되어 있는 것일까? 버지니아 울프는 집 밖으로 나오면 방 안의 자신을 벗어던지고 유쾌해진다고 했지만 나는 집 근처에서는 ‘나 자신’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하고 여전히 ‘속도’와 ‘경쟁’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 삶과는 조금 떨어진 먼 ‘서울’의 어느 거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라면 젊음의 동요나 노년의 서글픔을 절절해하지 않고 그저 앉아 이른 봄날이나 늦은 가을날을 꾸벅꾸벅 졸며 보낼 만하다. 여기는 망자들이 아무것도 증명하거나 증언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평온히 잠든 곳이니 말이다’ (「런던을 걷는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 69쪽)

   속도와 경쟁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것도 증명하거나 주장하지 않아도’ 되는 곳을 내 가까이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내가 ‘없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내가 주변을 잘 살피지 않아서일까?

 

 

3.
‘옥스퍼드 거리에서 오래된 것, 견고한 것, 영구한 것은 생각만으로도 혐오스런 존재다.’ (「런던을 걷는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 38쪽)

 

 

  변명하자면 내가 나의 근처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사는 이곳이 ‘오래되고 견고하다’고 느끼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품 가치에 따라 언제든 옮길 수 있는 곳, 오래된 것들이 잘 보존되기 보다는 새 것으로 쉽게 대체되는 곳에서 ‘곧 사라질 수 있는 것’에 대한 허무한 감정일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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