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날 재래시장 산책기

윤아
2023-10-08 01:26
59

 

명절날 재래시장 산책기

 

빨래 바구니를 사러 집을 나섰다. 사실을 말하자면 빨래 바구니는 핑계에 불과했다. 시부모의 시야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컸다. 명절은 먹고 치우는 일이 끝이 없다. 게다가 노부부가 사는 집은 보이는 곳마다 묵은 때가 쌓여 있다. 씽크대 수납장의 접시들은 만지면 대체로 끈끈하다. 대충 눈을 감아야지 눈을 크게 뜨면 몸이 심하게 고달파진다. 잠시 전에 바닥 일부가 깨진, 내가 기억하기로도 20년이 훨씬 넘은 빨래 바구니를 플라스틱 재활용 쓰레기로 버린 참이기도 했다.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빨래 바구니, 화장실 신발, 쓰레기통 같은 것들은 낡아도 계속 쓴다. 부모님은 더하지만 나도 그렇다. 요즘 젊은이들은 해마다 욕실 수건을 보송보송 새수건으로 교체한다는데……. 우리가 돈을 쓰는 기준은 도대체 뭘까?

 

시부모님은 재래시장 상가 건물 3층에 산다. 1층으로 내려가 열 발자국을 내딛으면 바로 신창시장이다. 나라에서 재래시장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시장 골목에 지붕까지 씌워주었다. 이전에는 비가 오면 물건들 갈무리하느라 상인들이 분주해졌었는데, 이제 상인들은 소방통행로를 제외하고는 마음껏 물건을 진열해 놓는다. 장을 보는 사람들도 비가와도 우산없이 장을 본다. 좀 아쉬운 부분도 있다. 이제 시장 골목에서 하늘을 볼 수 없다는 것. 인공조명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햇볕을 따라 갈 수는 없다. 게다가 천정에 환풍시설이 있지만, 상가들 대부분이 먹거리들이므로 뒤섞인 냄새들이 어느 정도 정체되어 있다.

 

어제 부딪히지 않고 걷기 힘들 정도로 골목을 채우던 인파는 사라지고 한적하다. 그래도 명절이라지만 오후가 되니 3분의 1정도의 가게가 문을 열었다. 떡집 좌판에 매끈한 송편들이 보이지만 어제에 비해 윤기가 퇴색한 느낌이다. 저 떡들은 어제 팔지 못한 것들일까? 오늘 새로 져낸 것일까? 한산한 시장 통이지만 명절날 오후면 거의 모든 과일가게들이 문을 연다. 아마도 인사를 드려야 한 곳에 방문하기 위해 과일 상자를 사는 모양이다.

 

건어물 가게 입구에는 밤 까는 기계가 있다. 선물을 들어온 밤들을 여기 와서 기계로 까야겠다. 집에서 밤 한 바가지를 까려면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노동을 해야 한다. 삶아서 식탁 위에 놓아두어도 두어 개 맛보고는 뻣뻣해질 때까지 아무도 손대지 않는다. 결국 일일이 껍질을 벗겨 통에 담아두면 그제야 오며가며 먹는다. 다들 먹기 어려운 것은 사양한다. 밤 한 톨 먹는데 들이는 에너지가 만만치 않다.

 

어묵 가게 앞에 30대로 보이는 남, 녀가 무표정하게 어묵을 먹고 서 있다. 그들은 남매일까? 부부일까? 차림새로 보아 골목 주택가 어딘가에서 슬리퍼를 신고 어슬렁거리며 나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들은 어떤 사정으로 이 시간에 어묵으로 시장기를 달래고 있는 걸까? 아침에 차례를 지냈을 성 싶지도 않다. 족발 가게도 문을 열었다. 갈비와 불고기, 전 등 기름진 음식이 많은 명절 날 누가 족발을 먹는 걸까? 궁금해 하다가 천편일률적인 명절음식이 식상하기도 한데, 족발을 사먹을 수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날 점심으로 어묵을 사 먹는 사람들과 족발을 사도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쓸쓸할까? 홀가분할까?

 

시장 골목은 여러 사거리를 경유해 있는데 첫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30미터만 가면 주택가 골목에 작은 카페가 있다. 어제도 오전에 음식을 하고, 오후에 슬그머니 책을 들고 나와 카페에 갔었다. 큰길가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는 장보러 나왔다가 커피마시는 사람이 많은 건지 콩나물 시루마냥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그 작은 카페는 나 혼자였다. 에스프레소를 한잔 시켜 앙증맞은 작은 잔과 가지고 나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오! 윌리엄』을 나란히 놓으니, 명절 전날 이게 웬 호사인가 싶었다. 작년부터 송편과 전을 사서 먹으면서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오늘은 카페는 문이 닫혀 있고, 그 앞에 한 남성이 세운 무릎에 손을 올리고 골목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다. 얼굴색으로 보아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로 보인다. 그들은 이 긴 연휴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이국의 낯선 명절에 고국의 가족과 친구를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혹은 같은 나라에서 온 동료들을 만나 같이 자신들의 나라 음식을 해 먹으며 향수를 달랠 수도 있겠다. 내가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외국인을 보며 그가 떠나온 나라를, 가족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일까?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곳에서 자유롭게 낯선 풍경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해도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있을 것이다. 가족은 같이 있으면 버겁고, 떨어져 있으면 그리운 것인가? 이 모든 관계들을 청산하고 우리가 살 수 있을까? 우리는 고립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연결되기를 사랑을 주고받기를 갈망한다. 연령과 성별의 제도화된 가족 관계 속에서, 자발성이 발휘되기 어려운 관계에 숨 막혀 하는 것이다.

 

어제 차례상에 올릴 삼색 나물을 볶아내고 있는데, 거실의 텔레비전에서 예능프로그램 MC인지 출연자인지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깐도라지에 왕소금을 넣고 바득바득 문지르며, 나는 ‘한가위만 같으라고?’를 되뇌었다. 한가위가 즐거웠던 때가 언제였던가? 지금의 한가위는 누가 즐기고 있나? 부모님은 며느리들 눈치를 보시고, 아들들도 하던 대로 차례지내고, 성묘가고 하지만 그걸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다 자란 아이들도 제각기 개인 미디어를 끼고, 설거지를 눈치껏 도우며, 시간을 보낸다. 며느리에게도 시댁 잠자리는 늘 불편하다. 지금 한가위를 누가 즐긴다고 철지난 구호를 외치는가? 농경사회의 유산을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이토록 지겹게 지속한다는 것이 도리어 해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갈비를 재면서 우리는 모두 먹어야 하고, 먹고 사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매일 시장 골목의 족발이나 어묵, 떡볶이를 사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부모님과 직장생활하며 인스턴트 혼 밥에 익숙할 아이들에게 겉절이를 담고, 사골을 고아 토란국을 끓이고, 갈비를 해서 제대로 된 음식을 해서 먹이고 싶다.

 

이제 푸른 하늘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동네의 풍경이 바뀌었다. 29년 전 갓 결혼해 이곳에 살 때는 주택들이 많았다. 지금은 그 시절의 주택들이 사라지고 아파트와 빌라가 들어섰다. 깔끔한 빌라가 줄지어 늘어서 있기에 검색을 해보았더니 2룸 오피스텔이라고 나온다. 재래시장이 끝나는 지점이라 반찬가게며 장보기는 쉽겠다고 생각하다가 그들이 집에서 얼마나 밥을 먹을까? 하는 생각에 미친다. 주말이나 시장을 가 볼까? 한 달에 한 번 갈까? 명절에나 한 번 들을까? 그들은 직장에서 또는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고, 어쩌다 요리를 해 먹는 사람도 새벽배송 같은 걸 이용할 것이다.

 

시장 통을 모두 통과했지만 빨래 바구니를 살 만한 곳은 없었다. 몇 군데 팔만한 곳을 찾았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 다이소를 검색하니 쌍문역 쪽으로 5분만 가면 있다고 나온다. 그곳은 명절인데도 열려있다. 다이소는 명절이 없다. 그곳에서 적당한 빨래바구니를 하나 사서 돌아섰다.

댓글 1
  • 2023-10-21 16:11

    제게 낯설지 않은 동네네요.
    고등학생 때 수유역 뒷편 번1동에 살았어요.
    화재로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신창시장과 쌍문역이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댓글 달아요.
    가본 지는 오래됐지만, 이 동네는 변하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많이 변했겠지요.
    윤아샘의 글로 그 시절이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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