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목소리

비료자
2023-10-07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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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천 호수공원이 시작되는 개울 건너 산책로 입구엔 커다란 소나무들이 한쪽에 길게 군락을 이루며 따라온다. 저수지 시절부터 있던 소나무들 가운데 크고 잘생긴 소나무들을 골라 옮겨 심으며 군락을 만든 듯. 이 공원의 조경은 걸을 때마다 디자인을 누가 했을까 궁금해진다. 어디를 봐도 눕거나, 앉거나, 서서 걷기 좋은 공간들이 편안하고 부드럽게 이어진다. 호수를 둘러싼 빌딩들과 조경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게 연결되며 자연스러워 몇 십년 전만 해도 오리배와 모터보트가 떠 다니던 촌구석 저수지였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여긴 처음부터 이렇게 사람과 도시와 자연이 어울리는 공원이었고, 앞으로도 이 사람들, 이 건물들이 영원할 것 같다. 호수 여기 저기에 잔디와 작은 규모의 화단들, 몇몇이 모여 앉을 만한 평상들, 혼자 혹은 여럿이 앉기 좋은 의자들이 풍경과 어우러지며 나무처럼, 풀처럼 놓여있다.

 

 공원 입구의 갈림길은 세 방향이다. 제일 아래 쪽을 택하면 물 높이에 맞추려 애쓴, 데크로 만든 길로 걷게 된다. 물에는 수련이 떠있고 길다랗게 자란 물풀들 아래에서 맹꽁이 소리도 들린다. 밤이면 데크의 양쪽 난간에 미색, 붉은 색, 푸른 색 조명들이 시차를 두고 색이 변하며 이 조명들은 물에 비춰져 화려하지만 지나치게 밝지는 않다. 상대적으로 폭이 좁은 이 길은 혼자 걷기 좋은 길이다. 오리, 달, 맹꽁이, 물풀, 수련, 가끔은 늘어진 나무들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혼자 걷지만 사람의 기척이 늘 느껴지며 적당히 외롭고 적당히 안전한 산책길이다.

 

 중간 길을 택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넓은 길이 나온다. 예쁘게 꾸미고 예의를 가르친 개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부, 젊거나 나이든 친구 무리들, 일정한 속도로 달리기를 하며 몸을 단련하는 사람들,,,, 모두 자신의 속도와 이야기 속에서 혼자 또는 여럿이 있다. 몇 명이든, 나이가 어떻든, 어떤 속도로 걷거나 뛰거나 혹은 앉거나 산책길은 이들을 부드럽게 받아준다. 대체 누굴까? 이렇게 모두를 받아주는 공간을 설계한 사람은? 

 

 갈림길에서 제일 높은 경사로를 택해 조금만 걸으면 차들이 오가는 도로가 나온다. 그 도로 건너편엔 엘리웨이라는 상가가 있다.  아이파크 아파트를 뒤로 한 이 복합 상가는 3층의 길다란 건물로, 호수를 내려다보는 300보 정도 폭의 광장을 반원으로 둘러 싸고 있다. 광장은 가운데를 비우고 아이들이 맨발로 놀기 좋은 바닥 분수와 적당히 낡은 자동차, 버스, 의자들이 놓였고 한쪽 구석에는 작지만 자연이 느껴지는 화단 위로 유원지 시절의 오리배가 하나 앉아있다. 모든 세대가 만족할 카페와 식당, 옷 가게 등이 그리 크지 않게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각자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색을 조용히 보여준다. 1층 가운데 있는 서점이 제일 큰 공간인데,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커피와 간단한 간식을 주문할 수 있는 카운터 데스크가 보인다. 서너 명의 직원들이 서있는 이 데스크 뒤에는 천정까지 부드럽고 밝은 나무색으로 곡선을 그린 벽 이 서있다. 직원들이 책을 진열한 책장이나 커피 테이블을 등지고 입구를 바라보게 만든 것은 벽 뒤의 테이블에서 커피 등을 주문한 손님이든 아니든, 책을 사는 사람이든 아니든, 편하게 책을 고르고 앉아 읽으시라, 는 주인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3층 옥상 양쪽엔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정원이 있다. 야외 테이블 세트 열 댓개를 가운데 둔 이 정원은 호수공원이 보이는 쪽의 바닥을 50센티미터 정도 높이고 기르기 쉬운, 잡풀처럼 보이는 긴 풀들과 그리 귀하게 보이지 않는 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 풀과 나무들 너머 호수를 바라보며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소중하다. 이 공간을 공짜로 누리게 된 현실이 꿈만 같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곳곳에 이렇게 멋진 공간들이 크거나 작게 자리잡았더라? 동네마다 조금만 걸으면 사람들은 규모나 디자인은 달라도 배려가 담긴 산책로를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도 그랬고, 아이를 기를 때도 그랬고, 그땐 특히 공간이 참 가난했다. 동네 놀이터는 손바닥만했고, 친구들과 만나서 앉아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들이 없었다. 예쁜 공간은, 더구나 공짜로 앉을 수 있는 공간은 드물었다. 모두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특히 도시는 공간이 좁고 각박했다. 여기를 오가며 자라는 아이들은 술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도, 좁아 터진 부엌에서 팔자 한탄을 하는 엄마도 없겠지. 예전에 진짜 엘리웨이에서 봤던 사람들의 악다구니와 밑바닥 사연들은 모르고 자랄 거야. 가정을 소중히 하는 부모가 당연하게 보이는 이 공간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무엇에 상처받고 고민을 하며 자라게 될까. 사람마다 자기 몫의 행 불행을 지나며 사는 건데,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그저 행복하고 영원해 보이는 것은 엘리웨이 상가를 설계한 사람의 능력일까?

 

 광장을 지나 길을 건너면 다시 호수공원 산책로가 이어진다. 아파트와 컨벤션센터, 갤러리아 백화점과 연결되는 지점부터 이런 저런 상가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원하는 건 뭐든 즐기시라, 고 말하는듯 하지만 그리 화려하거나 과하게 꾸미지는 않은 것도 매력이다. 상가와 작은 콘서트를 열수 있게 만든 공간들을 지나 언덕 쪽으로 가면 공들여 세워진 도서실이 나온다. 여기를 지나 8자로 이어지는 신대호수는 화장실을 빼고는 인공건물이 없는, 자연을 강조한 조경이다. 갈때마다 공원에서 못 봤던 것들을 보게 된다. 여자 화장실 벽에 있는,  호수를 바라보게 놓인 의자에서, 플랜트 박스의 적절한 높이와 탁월한 수종의 선택에서, 비 오는 하늘과 호수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든 자그마한 투명 아크릴 휴게실에서, 신대호수와 낮은 산이 만나는 지점의 둠벙에서,…  나는 설계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설계자는 나에게 편안하고 안전하다는 느낌, 주머니와 상관없이 풍요하다는 느낌, 존중을 받는다는 느낌을 주려고 고민했구나.    

댓글 1
  • 2023-10-07 23:23

    사실은, 진짜 쓰고 싶은 이야기, 써야 할 이야기가 있었어요.
    호수에서 21개월 된 손주와 둘이 한나절을 보냈는데,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나중에 손주에게 선물할 육아일기에 한장 추가할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현실적으로 필요한 글이라 재미있게 썼는데
    다른 사람이 읽을만한 글은 아닌거죠.

    남에게 읽을만한 글이 되려면
    그 시간과 지면이 아깝지 않은 글이어야 하는데
    이게 진짜 어려운 일이네요...

    글쓰는, 책을 내는 모든 작가들을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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