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버지니아 울프

겸목
2023-10-07 21:42
78

  버지니아 울프의 회고록 『지난날의 스케치』는 1939년 4월 18일부터 11월 15일까지의 파편적인 스케치 모음이다. 1941년 3월 8일에 버지니아 울프는 60세의 나이로 자살한다. “네가 회고록을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너무 늙어서 쓰지 못할 거야.”라는 언니 바네사의 말로 시작된 회고록은 일정한 형식이 없다. 이 시기 버지니아 울프는 <로저 프라이 전기>를 집필중에 있었는데, 집필 사이사이 자신의 회고록을 파편적으로 남겼다.

 

  회고록은 최초의 기억에 대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검은 바탕 위의 붉은 꽃과 자주색 꽃”이 그려진 어머니의 드레스가 최초의 기억인데, 이것은 런던이 아닌 교외 세인트아이브스의 아이 방 침대에 누워 들었던 파도소리와 바람이 창문의 블라인드를 날리며 바닥의 작은 도토리를 끌어가는 소리로 연결된다.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한 순간의 기억 같다. 버지나아 울프는 아이의 기억은 경험이 단순하기 때문에 강렬하고, 나이가 들면 감정에 많은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복잡해지고 강렬함이 줄어든다고 본다. 그러니 선명하고 강렬한 기억이 중요한 기억이라고 볼 수 없다. “이 기억들은 내 인생의 기록으로서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도 중요할 수 있고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중략) 불행히도 사람은 예외적인 것만 기억한다. (중략)바닷가로 내려갈 때 정원에서 벌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는 기억하면서 아버지가 벌거벗은 나를 바다에 던지는 일은 왜 까맣게 잊었을까?”(16쪽) 기억의 선명함과 중요도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엔 복잡한 함수관계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수치스럽거나 두렵거나 중요하지만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기억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레너드[남편]와 점심을 먹을 때나 차를 마실 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이미 잊었다. 좋은 날이었지만 그 좋음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종의 목화솜에 묻혔다. 늘 그렇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며 많은 부분을 의식하지 않는다. (16쪽)

 

   아직도 나는 갑자기 충격을 받는 특이한 습성이 있지만 지금은 그런 충격을 늘 환영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놀라고 나면 곧바로 그것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충격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나를 작가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충격을 받으면 내 경우에는 당장 그것을 설명하려는 욕구가 일어난다고 과감하게 설명해본다.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느끼지만, 그것은 어렸을 때 생각했듯이 일상생활의 목화솜 뒤에 숨어 있던 적의 습격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차원의 계시이거나 계시가 될 수 있을 일이다. 현상 이면에 존재할 어떤 실체의 증거다. 나는 그것을 말로 옮김으로써 실재로 만든다. 그저 말로 옮김으로써 완전하게 만든다. 이 완전함은 그것이 내게 상처를 줄 힘을 상실했음을 뜻한다. 말로 옮김으로써 고통을 없앴으므로 나는 단절된 부분들을 결합하면서 큰 기쁨을 얻는다. 이것이 내게 가장 큰 기쁨일 터다. 그것은 글을 쓰면서 내가 무언가의 속성을 발견하고 어떤 장면을 제대로 살려 내고 어떤 인물을 결합할 때 느끼는 환희다. 여기서 이른바 나의 철학이랄까, 어떻든 한결 같은 생각에 이른다. 즉 목화솜 뒤에 어떤 패턴이 숨어 있고, 우리 즉 모든 인간은 그 패턴에 연결되어 있으며, 온 세계는 한 편의 예술 작품이고, 우리는 그 예술 작품의 일부라는 생각이다. (19쪽)

 

 

  기억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가 아니라 중요한 건 ‘목화솜 뒤의 패턴을 읽어내는 일’이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글쓰기론’을 피력한다. 충격을 받으면 그것을 설명하려는 욕구가 발동되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일상 속의 패턴을 찾고, 그것을 찾아내게 되었을 때, 그 충격은 더 이상 그녀에게 고통이 되지 못한다. “상처를 줄 힘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상 이면의 실체를 탐구하고 그것을 글로 쓸 때 기쁨을 느낀다.

 

  버지니아 울프가 탐구하려 했던 현상 이면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 매우 지적이고 비세속적인 인물이나 집안의 여자(어머니/누이/아내/딸)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분노를 터트리는 아버지, 지적이고 신경질적인 남편과 여덟 자식을 건사하기 위해 소박하고 직선적인 성격과 회의적이고 진지한 성격이 결합된 어머니, 딸들에게는 가정교사를 아들들에게는 이튼스쿨과 옥스퍼드 진학을 당연시하는 빅토리아시대의 관습들. 그런 것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선구적인 페미니스트 작가이니까.

 

 

  두 번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사실 토비는 내색은 안 했어도 그토록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와 묶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가족의 절단에 좋은 점이 (의심스럽지만) 있다면, 우리를 민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삶의 불안정성을 의식하고, 사라진 무언가를 기억하고, 아버지가 요구하지 않았을 때 내가 느꼈듯이 어쩌다 열렬하고 어설픈 유대감에 압도된다면, 이 모든 감정을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의 나이에 발작적으로 느끼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만일 그렇다면......그런데 과연 좋은 일이었을까? (중략) (토비가 죽은 후) 나는 (고든 광장 주위를 돌다가) 거대한 맷돌 두 개와 그 사이에 끼인 나를 보곤 했다. 그러고는 나 자신과 그것들과의 충돌을 연출하곤 했다. 만일 인생이 발광한 말처럼 뒷다리로 서서 제멋대로 발길질을 해 대는 것이라면 시달릴 수밖에 없겠다고 나는 추론하곤 했다. 그것들이 내게 삶이라는 그 귀중한 질료의 미약하고 작고 무력한 조각을 하나 주어서 내 입을 막았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를 통해 나는 인생을 극한적 실체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물론 나 자신이 중요하다는 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맷돌 사이에서 갈린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줄 만큼 나를 충분히 존중한 그 힘을 통해서. (117~118쪽)

 

 

  『지난날의 스케치』를 읽으며 내가 여러 번 확인했던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연보이다. 60년(1882~1941)의 짧은 인생 가운데, ‘1895년(13살) 어머니 사망-1897년(15살) 큰언니 스텔라 신혼여행 후 맹장염 사망-1904년(22살) 아버지 암 사망-1906년(24살) 오빠 토비 이태리 여행 후 장티푸스 사망’ 이 십여 년 동안 일어난 가족들의 죽음은 버지니아 울프의 예민함과 민감함을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애 가운데 1차 세계대전(1914~1918년)과 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이 포함되어 있다. 참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매우 예민하고 민감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의식의 흐름’과 내면탐구에 몰두한 모더니스트로서 글쓰기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왜 페미니즘과 모더니즘의 ‘전설’이 되었는가는 그녀 생애 가운데 ‘비극’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놀랍고 부끄러웠다. 그간 나는 버지니아 울프를 ‘전설’로 생각하고 있었지, 그녀의 삶을 살펴보지 않았다.

 

  1990년대 대학에 입학했을 때 교양영어 시간에 <자기만의 방>을 원서로 읽었다. 당시 젊은 소장학파 여자 강사샘은 이걸 대학 강의실에서 공부한다는 일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우리에게 일깨워주려 했지만, 우리에게 큰 감흥은 없었다. ‘집안의 천사를 없애야 한다’는 문장만 기억에 남는다. ‘집안의 천사’ 쉽게 없애질 줄 알았다. 그리고 여성이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해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경제적 자립을 강조한 부분은 당위처럼 느껴졌고, 그것이 내가 해결해야 할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경제적 자립을 쉽게 생각했다. 많은 여자들이 버지니아 울프에 열광해서, 나는 다른 콘텐츠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울증을 호소하는 친구 때문에 영화 <The hours>를 봤다. 친구는 이 영화를 울컥하면서 봤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우울과 절망감이 짐작되었지만, 감정이입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아니구나, 스스로 진단하며 영화 감상을 마쳤다. 몇 년 전에 <3기니>를 읽고는 버지니아 울프의 냉철한 논리력에 놀랐다. 좀 더 일찍 버지니아 울프를 읽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아쉬움이 길게 가지는 않았다.

 

  『지난날의 스케치』를 읽으며, 비로소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살펴봤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무엇이었나 짐작해보며 뜨끔하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발광한 말의 발길질에 시달리면서도 맷돌 사이에서 갈리는 자신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석하는 방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글쓰기는 절대적이다. ‘삶의 불안정성을 의식하고, 사라진 무언가를 기억하는 예민함’. 그녀에게 글쓰기는 이런 거였다. 이제 과제가 남는다. 나에게 글쓰기는 무엇인가?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것이 내게 있는가?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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