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크라시 과제-행복하게 보이기 달인

새봄
2023-09-16 22:49
119

‘행복하게 보이기’ 달인

 

  올 봄 문탁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에코프로젝트에서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을 샘들과 함께 읽었다. 나카자와 신이치를 처음 접했는데 그의 행복과 관련된 설명이 내게는 의미심장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행복에는 한결같이 시간적 또는 공간적인 반복에 의한 순조롭고 평범한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함으로써, 무한에 관련된 힘이 인간세계로 흘러든다는 감각이 포함되어 (나카자와 신이치, 대칭성인류학, 2020, p234)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무한에 관련된 힘이란 교환과 증여가 아닌 신적인 순수증여의 힘이라고 설명한다. 순수증여는 주었다는 사실도 받았다는 사실도 망각하여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는 것으로 신이치가 제안한 개념이다. 이 개념을 접하니, 문탁에 대한 내 애정이 설명되어지는 것 같았다. 난 막연히 홀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내 일상의 루틴이 자연스레 변했고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지 않았다. 평범하게 흘러가던 내 일상세계의 시간에서 문탁네크워크에 접속한 후, 느닷없이 희열과 벅찬 충만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기분 등이 샘솟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런 감정 상태가 성령 충만함 같기도 하고 가스라이팅(동생의 표현) 같아 보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이런 감정상태로 만들다니, 이게 행복이구나라고 나름 정의했다. 지금의 난 타인과 연결되며 돈이 되지 않는,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무용해 보이는 활동들을 하며 희열을 느꼈구나. 그러다 보니, 『해피크라시』를 읽으며 도통 감흥이 일지 않았다. 난 이미 세속적인 행복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자부심이랄까. 지난 시간 수업을 마치며 던진 질문도 이런 맥락에서 섣불리 나왔다. 하지만,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내겐 정말 그런가라는 질문이 생겼고 일주일동안 천천히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겸목샘이 추천한 『행복의 약속』을 도서관에서 빌리고 아직 읽고 있는 중인데 인상적인 구절이 눈에 띄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여성 해방 운동을 위해 꿈꾸는 행동미소 거부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미소 거부를 선언하면 모든 여성들은 즉각 남을 즐겁게 하는미소를 버릴 것이고, 그 후로는 자신들이 즐거울 때만 웃으려 할 것이다. 행복의 약속을 거부한다는 것은 행복의 기호를 보이라는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2021, p127) 40평대 아파트, 고급차, 단란한 이성가족, 건강한 몸 등을 행복의 표상으로 설정하지 않았지만, ‘행복하게 보이기’에서는 자유롭지 않다.

  몇 년 전 일본 세무사들과의 학술 겸 친목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대형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4시간여의 학술 세미나를 하는데, 끝나고 맞은편에 앉았던 젊은 세무사가 인사를 하며 어떻게 회의시간 내내 웃는 얼굴이세요? 라는 말을 건냈다. 재미없고 지루하고 통역도 필요한 회의였는데 어찌 계속 웃을 수 있었을까?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칭찬으로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행복하게 보이기’의 달인이다. 짜증날 때 지어지는 미간 주름이 싫어 정기적으로 보톡스를 맞았고 짜증나는 순간조차도 조절되어지는 표정을 짓고 싶었던 것 같다.

  남편의 퇴직과 관련해서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남편의 워라벨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심으로 퇴직을 줄곧 종용했지만, 막상 내년 6월로 확정되어 가니 ‘잡다하고 양가적인 감정들’이 든다. 우편으로 배달되는 사보와 뉴스에 등장하는 회사 소식을 접하며 저런 안정적인 직장을 퇴사하는 게 맞는 가라는 불안이 올라오기도 하고 경기북부지사(의정부)에 자리가 났으니 오라는 소식에는 반색하게 되기도 한다. 남편의 무직이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이기’에 반대되는 것은 아닌가? 여전히 주중은 없고 주말에는 자기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남편과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내 의견이 맞선다. 남편이 퇴사하면 우리 가족은 더 행복할 거야라는 것 또한 행복의 약속이다. 반대로 남편이 공기업에 근무한다는 것은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이기’라는 행복의 기호일 수도 있다. 삶은 잡다하고 양가적인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p220

 

  행복을 무엇이라 생각하냐는 내 질문에 50대 동료는 불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답했다. 그럼 불행은 무엇이냐에 행복하지 않는 것이라는 끝없이 이어지는 답을 했다. 어이없지만, 그만큼이나 행복은 정의내리기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다. 또 다른 동료는 무탈한 것, 가족이 건강한 것이라 말해서 내 마음 속에선 가족이 건강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은 건가라는 반감이 들었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질병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불운(사회적 재난 등)이 나만 비켜간다면 되는 걸까하는 생각도 꼬리를 이었다.

  이런 내 태도는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고차원적 형태의 행복은 정신과 연결돼 있으며 더 낮은 차원의 행복은 신체와 연결돼 있다는 주장과도 통한다. 만약 고차원적 행복이 당신이 어떤 종류의 존재이기 때문에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행복함은 분명 부르주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2021, p31) 해피 크라시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나 또한 행복을 규범화시키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차의 배기량을 늘리면서 행복을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아파트 평수를 늘리며, 누군가는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권력)하며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 모습에 반감을 품고 일일이 지적하기 보다는 400페이지에 달하는 행복의 약속을 마저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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