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처방전>3회 알코올 의존증편

겸목
2020-05-30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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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ody or Somebody,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다

-김영하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문학동네, 2019년)을 처방합니다

 

 

  진단의 어려움, 무엇이 문제인가

   코로나19의 여파로 감자탕집에는 사람이 미어터졌다.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과 재택근무를 실시하는 직장인들이 많아지면서, 각 가정에서는 매끼니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고난도 미션이 주어졌다. 가족들이 돌아가며 집밥을 해먹기도 하고, 편의점이나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간편식이나 반조리 식품으로 때우기도 했다. 또는 오늘은 짜장, 내일은 치킨을 주문하는 ‘배달의 민족’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주말이 아니라도 가족끼리 외식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가정이 늘어났다. 적어도 5월 첫 번째 월요일 점심시간에 우리가 들어간 감자탕집은 외식 나온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코로나로 수업이 줄어든 재수학원 강사 자룡과 그의 초등학생 아들, 자룡의 지병에 대한 처방을 의뢰받은 나와 내가 끌고 나온 친구, 흡사 가족처럼 보이는 우리 네 사람은 그날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 감자탕중자 냄비를 올려놓고 마주앉았다. 테이블에는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 그리고 학교에 가지 못 하는 동안 게임, 마술, 인형 뽑기 등등 소일거리 찾기에 매진하고 있는 초등학생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주문한 사이다 캔이 정답게 올라와 있었다. 자룡이 의뢰한 지병은 ‘알코올 의존증’이었는데, 그날의 상황을 보라. 이건 알코올 의존증을 해결하고자 모인 사람들의 자세가 아니다. 이건 누가 봐도 한 번 제대로 마셔보자는 의욕으로 넘치는 ‘낮술’의 현장이었다. 나는 알코올 의존증은 ‘페이크’이고 자룡이 해결하고 싶은 다른 고민, 갈등, 번뇌 등등의 애로사항이 따로 있으리라 짐작했다. 무엇이 자룡을 괴롭게 하고 병나발을 불게 만드는 것인가? 그러니까 알코올 의존증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 봐야 한다.(이렇게 쓰고 나니 명의가 다 된 느낌이다^^)

 

 

“따로 학원을 차릴 생각이라며…… 지금 다니고 있는 학원은 그만둘거야?”

“지금 학원에서 나보다 더 오래된 강사가 없어요. 나한테 맞게 세팅해놨는데 왜 그만둬요? 학원 문 닫을 때까지 있어야지. 월급 따박따박 나오고 좋은데.”

 

경력 15년이 넘어선 베테랑강사 자룡이 최근 학원일로 괴로워한다는 풍문이 나에게 들려왔다. 그쯤 되면 자기 학원을 운영하고 싶다는 포부를 가질 만한데, 경영자가 된다는 건 또 리스크가 따라오는 일이니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으리라 나는 예측했었다. 그런데 아니란다. 고정수입이 보장되는 지금의 학원을 유지하며,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자신들이 해보고 싶은 방향으로 학원을 하나 따로 차리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새로 차릴 학원에 대한 계획을 얘기할 때 자룡의 눈빛은 빛났다. 학생들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앱을 개발하고 통계 분석에 기반한 합리적인 로드맵을 학생들에게 제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만으로도 그는 자신감이 ‘뿜뿜’ 넘쳤다. 야구선수들의 타율과 팀별 승률을 달달 외우며 야구에 대한 지식을 뽐낼 때,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는 그의 초등학생 아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소주잔을 한 사람은 사이다잔을 들고 있다는 차이 정도.

 

“저는 지금도 강의할 때 땀을 뻘뻘 흘려요. 학생들은 그런 저를 보고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긴장해서 그런 거예요. 강사일이 잘 안 맞아요. 처음 시작할 때 3년만 하자 생각했는데, 3년……3년 연장돼서 지금까지 왔죠.”

 

이때쯤 초등학생은 문방구에 다녀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자신의 아버지가 곤혹스러워한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어른들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알아서 자리를 피해줬다. 밤톨만한 녀석이 기특하다. 어디선 이런 매너를 배운 걸까? 자룡이 강사로서 자신의 자질 없음을 토로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아들을 신통방통해하며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질이 없는데 한 직업을 15년 이상 유지할 수는 없다. 어떤 직업이든 그것에 맞는 직업의식과 재량이 필요하고, 15년 이상 그 일을 유지해오고 있다면 그에게 그것이 없을 수가 없다. 학생들 앞에서 ‘떠는’ 일은 그가 불안하고 초조해서가 아니라 ‘열의’를 갖고 수업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준비해서 보여주려 할 때 우리는 긴장되고 떨린다. 그게 설렘이고 ‘살 떨리는’ 재미이다. 이런 긴장과 설렘이 없어질 때, 그때야말로 그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러니 강사로서의 자질 없음이 그의 스트레스의 원인은 아니다. 그럼 뭐가 문제일까? 진단의 어려움으로 우리는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이제 더 이상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잖아요. 지금 시작하려는 학원 일도 패배자의 자기합리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멋있고 훌륭한 일이 뭔데?”

“누구는 교수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폼 나잖아요.”

자룡이 말하는 ‘폼’ 나는 일에는 정당 정책연구소의 노동문제 연구원도 있을 것이고, 대안적 삶을 실천하는 비판적 지식인도 있을 것이고, 척하니 기부금을 쾌척하는 금수저도 있을 것이다. 작품성이 뛰어난데 흥행에도 성공하는,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영화감독이 되는 일과 같은 것. 나도 그런 꿈을 꿨던 사람이라 덩달아 심란해졌다. 감자탕 국물은 냄비바닥까지 졸아붙어 있고, 술병은 빠른 속도로 비워졌다. 문방구에 갔던 초등학생이 돌아오자 우리는 불콰해진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떻게 이렇게 시간을 딱 맞춰 왔어!”

우리도 그날 우리를 따라왔던 초등학생처럼 매일 ‘칭찬’ 받는 날들이 있었다. 밥을 잘 먹어서, 떼를 안 써서, 학교에 잘 가서, 친구랑 잘 놀아서, 대학에 척 붙어서……. 그런 ‘좋은’ 날들이 다 지나갔다.

 

 

 

  인정욕망, Somebody or Nobody

아무것도 아쉬울 것이 없는 무인도에 도착했지만 오디세우스의 마음은 어딘가 허전했던 것이다. 말 못하는 염소떼 뿐이었던 것. 배가 채워지자 그의 마음속에 다른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인정의 욕구. 낯선 땅에 사는 존재로부터 찬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고향 이타카에서는 왕이었고, 트로이에선 영웅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언제나 썸바디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측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바다는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나뭇잎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의 자아는 쪼그라들었다. (중략)

 

나 역시 국내에서 여러 권의 책을 내고 작가로서 자리를 잡은 후에는 여행을 떠나는 마음이 습작생이었던 시절과는 달라졌다. 서점에 가면 좋은 자리에 내 책이 놓여 있고, 꾸준히 내 책을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해외에 나가면 여전히 나는 노바디였다. 2003년에 아이오와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 나는 서른다섯이었고 작가가 된 지 구 년째였지만 해외에서 나온 책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프랑스어판밖에 없었다. 그 후로 세월이 십 년쯤 더 지났을 때는 상황이 더 나아졌다. 이제 영어판으로 나온 책도 여러 권이 되었고, 그 밖에도 여러 언어로 소설이 번역되어 여행지의 서점 외진 구석에서라도 내 책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노바디라는 느낌은 여전했다. (중략) 국내에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데, 해외에 나가면 내가 누구인지를 나만 아는 것 같았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자기만 아는 상태가 지속되면 키클롭스의 섬으로 쳐들어가는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심리 상태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163~165쪽)

 

“가끔은 주목받고 싶은 생이고 싶다”는 시집의 제목처럼, 나는 ‘인정욕망’은 우리 모두를 살아가게 하는 기본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인정욕망이 자신을 과도한 경쟁심과 성취욕으로 몰아가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정욕망이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니냐 조언하려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이건 아마도 자신은 성공에 눈이 멀거나, 과시욕에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눈에 띄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노바디’의 삶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누구나 알아봐주는 스페셜한 ‘썸바디’가 되고 싶을 때가 없을까? 가끔은 자신을 성별, 나이, 직업이 아닌 자신만의 ‘고유함’으로 구별지어지기를 욕망하지 않는가? 나는 ‘실패자의 자기합리화’라는 말에서 진단하기 어려웠던 자룡의 ‘아킬레스건’을 발견했다. 가끔은 썸바디가 되고 싶은 노바디의 우울함이 느껴졌다.

 

김영하는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자가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을 ‘노바디’와 ‘썸바디’라는 표현을 통해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우리는 때로 지금의 정체성에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낯선 곳에서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여행이 인생에 대한 오래된 ‘비유’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노바디와 썸바디를 오고가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타케의 왕이고 트로이의 영웅인 오디세우스도 바다 위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자’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순간순간 자신의 존재감을 낯선 이방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했고, 그 허영과 자만심이 위기를 가져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십 년이나 지연시켰다. 김영하는 말한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허영과 자만심이 가져온 위험을 겪으며 신중해지고 겸손해지는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라고. 허영과 자만심이 아니라 신중함과 겸손함이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찾아주었다. 그러니 썸바디가 되고 싶으면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는 노바디로 움직여야 한다고. 혹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시간들을 꿋꿋하게 보내야 한다고.

 

돌아보면 내 인생은 온갖 중독과의 싸움이었다. 십오년을 피우던 담배를 끊는 데 겨우 성공한 것은 서른세 살 때였다. 그전까지 침대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골초였다. <빛의 제국>을 쓰던 2006년 무렵에는 매일 밤 위스키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만들어 마셨다. 그래야 잠이 들었다. 이 버릇을 고치는 데에도 또 몇 년이 걸렸다. 컴퓨터 게임들에도 쉽게 중독되었다.(중략)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그 시기에 내가 겪은 것이 단순한 게임 과몰입이 아니라 가벼운 우울증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이면 나는 무엇에든 쉽게 중독되어 자신을 잊기를 바랐다. (위의 책, 178쪽)

 

이제 자룡의(그리고 나의) 알코올 의존증은 조금 설명이 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 자신이 규정되는 것을 잊기 위해 도피처를 만는다. 술/담배/게임/쇼핑/여행 기타 등등 우리가 빠져드는 아름다운 것들. 내가 어려운 철학책 속으로 파고들어갔다면, 자룡은 멕시코, 쿠바,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등 지구 반대편의 남미로 날아갔다.

 

 

 

 

  자룡의 세계 테마 기행’-남미편

자룡은 최근 몇 년 사이 두 번이나 남미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 그것도 한 달씩이나 장기여행으로. 여행을 준비하며 라틴댄스학원을 다녔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가 여행준비와 계획을 철저히 짜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란다. 몇몇 일정과 숙소 예약을 제외하곤 대부분 비워진 채로 그냥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일정과 코스가 바뀌는 게 재미있고, 일정이 안 맞아 하루 이틀 할 일 없이 빈둥대거나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자신이 즐긴다는 사실도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그는 기뻐했다.

 

“한 번은 저녁에 도미토리에서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저는 다음날 가볼 관광지의 차편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나는 뭔가 극적인 전개를 기대하며 자룡을 쳐다봤다. 지구 반대편까지 갔으니 아즈텍의 신비, 삼바의 정열, 안데스의 별빛, 이과수폭포의 장엄함 같은 경이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저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너 뭐하니?” 그래서 내일 차시간을 알아본다고 했더니, 소리를 빽 지르는 거예요. “왜 내일 걱정을 해? 맥주 마셔! 지금 맥주 마시는 시간이잖아.””

 

이 한 마디가 자룡에게 각성을 가져왔단다. 아마도 짧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더 강한 임팩트가 전달되지 않았나 싶다. 자룡의 ‘세계 테마 기행-남미편’은 천연조미료를 넣어 요리한 음식처럼 ‘건강한’ 심심한 맛이 났다. 유명 관광지를 굳이 가보려 하지 않았고, 시장을 구경하며 뭐든 사먹는 게 재미있었고, 남미 사람들의 여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그들에게 자신이 가지지 못한 ‘낙관’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그날그날을 사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그날그날 그냥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오니, 학원에서 만나는 학생들도 조금은 달리 보였다고 한다. 왜 저렇게 공부를 하지 않을까……예전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말을 거니 학생들도 선선히 자신에게 마음을 보여주었단다. 이 무슨 ‘EBS'스러운 전개인가?

 

 

아르헨티나의 쇠고기와 와인이 싸고 맛있었다는 자룡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왜 알코올 의존증을 걱정해? 사회생활에 지장을 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닌데?”

“나쁘지 않은데, 내가 술을 안 마시면 이야기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술이 있어야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자유롭지 않다는 거잖아?”

 

도대체 왜 자룡은 나에게 알코올 의존증에 대한 처방을 의뢰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 알코올 의존증을 염려하고 치료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다. 나는 아직 알코올 의존증을 치료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만성질환 수준인데, 그는 이미 자신의 음주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자기 객관화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나도 철학책 속으로 파고들어갈 것이 아니라 집 밖으로 여행을 떠나야 했을까? 술은 ‘해방’의 상징인데, 그는 해방이 아니라 ‘자유’를 말한다. 왠지 그는 ‘썸바디’고 나는 ‘노바디’로 밀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그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인생을 자동차라고 비유해보자. 자동차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어’를 변속해야 한다. 잘 나가고 싶다고, 기어를 주행(D)에만 놓고 운전할 수는 없다. 후진(R)도 해야 하고 평행(N)에도 놓아야 하고 운전을 마칠 때는 항상 주차(P)에 기어를 위치시켜야 한다. 기어가 주행에만 가있는 자동차는 쓸 데가 없다. 그러니 인생에는 썸바디의 날도, 노바디의 날도, 음주의 날도, 여행의 날도, 그리고 그 밖에 ‘한 눈 팔 것’들이 모두 필요하다. 적절하게 변속할 수 있는 재량과 함께.

 

나보다 더 잘 기어를 변속하는 자룡이지만, 문학처방전답게 앞으로도 그의 여행이 순조롭기를 기원하며 김영하의 문장들을 옮겨 적어본다. 아마도 그는 노바디의 우울이 심해질 때 다시 가방을 싸서 보다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길로 걸어가리라.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중략)

 

그러니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의 신은 대접받기 원하는 자, 고향에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자,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 낮추는 자, 환대에 감사하는 자를 돌본다. 2800여 년 전에 호메로스는 여행자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오디세우스의 변화를 통해 암시했다. 그것은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일 것이다. (앞의 책, 180~185쪽)

 

 

댓글 12
  • 2020-05-30 10:38

    명의세요!!!!

  • 2020-05-30 11:22

    아! 자룡에게 오래전 예약해 둔 치아파스-사파티스타 여행담을 잊고 있었네요.
    자룡님, 언제로 할까요? 날짜 잡읍시다~~

    • 2020-06-10 11:04

      흑 기억이 점점 흐려져가고 있습니다

  • 2020-05-30 14:33

    새털의 글에 점점 빠져들고 있습니다~~
    좋은 중독!!!

    자룡 술 안마셔도 말 잘하고 자유로와 보이던데
    얼마나 더 자유로와지고 얼마나 더 말을 잘 하려고??? ㅋㅋㅋ

  • 2020-05-30 15:51

    제가 [다른 아빠] 모임을 지난 1년간 하면서 본 자룡샘은 참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평소 저지르시는 온갖 악행들(써오기로 한 글을 안 써오신다거나, 지각을 하시고도 사과를 한 건지 안 한 건지 모를 자기반성으로 넘어 가신다거나, 뭐 그런 것들이요) 에도 불구하고
    뭐랄까요, 매력이 터진달까요, 그런 분이었습니다.
    함께 수다를 떨면 어쨌거나 재미있고, 진짜 맛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시고(이게 참 생각보다 드문 재능입니다),
    논리적이고, 술도 잘 마시시시시고, 피지컬도 좋으시고, 맛집도 많이 아시고, 매너남 우찬결과 닮으셨고, 돈도 잘 버시고, 많이 드시고, 웃기고, 등등등.
    그런데 이 모든 탁월함들에도 불구하고, 안 훌륭하시려고 애를 쓰시는 것 같아요....
    그게 어떤 느낌이냐하면 '난 안 훌륭하니까 훌륭하지 않을거야' 같달까요?
    그래서 애써 훌륭함을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난 훌륭하지 않으니까'
    계속 그러시면 결국, '안 훌륭해서 괴롭다. 술마셔야지, 난 안 훌륭하니까, 술마셔야지, 난 안 훌륭하니까, 술마셔어야쥐이... 난 안 후울류하니꽈알라.'가 되고 말겁니다. ㅠㅠ 흑.
    부디 이미 가지고 계신 훌륭함을 업수이 여기지 말아주셔욥.

    - 우훌룡님께 정군 드림.

    • 2020-05-31 01:01

      와! 정군의 자룡을 향한 애정! 기억해둘게요^^

    • 2020-06-02 21:04

      아 감사한 마음! 새겨듣겠습니다! 이런게 브로맨스인가?

    • 2020-06-05 14:00

      난 안 후울류하니꽈알라~~ 꼭 음성이 들리는~한참을 웃었네요~~^^ 정군님의 담백한 글을 받아서~

      저도 4년쯤 함께한 주정뱅이로써^^
      엉덩이를 슬렁슬렁 흔들며 그 멋진 목소리로 현진영, 육각수부터해서 이승철까지 어떤 장르든 불러 재끼시는 매력등어리인 자룡을 좋아라 하는 1인으로서!
      이병은 안고침이...^^;;; 으쩌실랑가요!~

      • 2020-06-05 14:49

        앗! 낮술에 가무가 빠졌구나...
        하는 깨달음이!! 주도의 길은 멀고도 험해요. 차근차근 서둘지 말고 늘 첫잔을 제끼는 심정으로 마음을 담읍시다...

      • 2020-06-10 11:05

        돠안푸웅이다다!!! 멋진 술친구 단풍! 자네 덕분에 소주 10박스 정도는 더 먹은 것 같소!

  • 2020-06-10 10:31

    어찌보면 자룡과 나는 꽤 많은 부분에서 서로 반대되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 덕분에 동네친구로 만났고
    아빠라는 정체성(?) 덕분에 함께 술을 마시고 책을 읽는다.
    아마도 이 부분은 정군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이미 그렇게 서로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만남이 있는 그 자리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동네에서 계속
    술을 마시고 함께 놀러를 가고 같이 책을 읽는 건 아닐까?
    자룡은 두 번의 남미 여행 이후 한동안 여행을 안 가도 되겠다는 말을 했던 거 같다.
    김영하의 말처럼 '내가 누구인지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여행'을
    그렇게 멀리까지 안 가도 된다고 느끼게 된 걸까?
    아, 자룡의 음주의존증에 대한 새털샘의 글을 읽으니 갑자기 술이 땡기는 건 좋은 처방 덕분이겠지?
    오늘 점심으로는 공복에 맥주다!!!!!!!!

    • 2020-06-23 23:29

      공복에 맥주 마시다간 곧 청량리도 처방전 의뢰하는 날이 오겠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기가 막히게 잘 듣는 처방전으로 준비해놓고^^

문탁의 간병블루스
1. 아이고, 내 팔자야....   동영상은 효과가 컸다. 섬망으로 인한 어머니의 욕과 매를 마치 액받이 무녀처럼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한 후, 동생 한 명은 밤새 울었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새벽까지 손발을 덜덜 떨었다고 했다. 근처에 사는 남동생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밤늦게까지 스탠바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하룻밤이 지나자 모든 상황은 급변했다. 어머니는 전날 밤 일을, 사건 전후의 맥락은 상실한 채 어떤 장면들만 스냅사진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제 밤의 “아비 잡아먹은 년”은 오늘 아침엔 “세상에 불쌍한 년”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하다”며 울었고, 집에 오는 사람 모두에게 “내가 000를 때렸는데 말이야..”는 말부터 먼저 했고, 아무나 붙들고 나에게 밥을 차려주라고 채근을 해댔다. 얼마나 나를 챙기는지 이번에 나는 어머니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착된 감정을 재생산시키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를 슬슬 피해 다녀야 했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간병이 무엇까지를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를 실감한 동생들은 비로소 ‘말’이 아니라 ‘액션’을 취하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호캉스라도 다녀오라며 당장이라도 호텔방을 끊어줄 기세였고 여동생들은 나의 휴가에 대비해 자신들이 담당할 간병 스케줄을 짜기 시작했다. 등 떠미는 동생들 덕분에 나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운 나쁘게도 딱 그 타임에 ‘하이난’이 상륙한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집과 엄마를 잠시라도 떠날 수만 있다면 태풍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강원도 바다가 보이는...
1. 아이고, 내 팔자야....   동영상은 효과가 컸다. 섬망으로 인한 어머니의 욕과 매를 마치 액받이 무녀처럼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한 후, 동생 한 명은 밤새 울었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새벽까지 손발을 덜덜 떨었다고 했다. 근처에 사는 남동생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밤늦게까지 스탠바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하룻밤이 지나자 모든 상황은 급변했다. 어머니는 전날 밤 일을, 사건 전후의 맥락은 상실한 채 어떤 장면들만 스냅사진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제 밤의 “아비 잡아먹은 년”은 오늘 아침엔 “세상에 불쌍한 년”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하다”며 울었고, 집에 오는 사람 모두에게 “내가 000를 때렸는데 말이야..”는 말부터 먼저 했고, 아무나 붙들고 나에게 밥을 차려주라고 채근을 해댔다. 얼마나 나를 챙기는지 이번에 나는 어머니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착된 감정을 재생산시키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를 슬슬 피해 다녀야 했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간병이 무엇까지를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를 실감한 동생들은 비로소 ‘말’이 아니라 ‘액션’을 취하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호캉스라도 다녀오라며 당장이라도 호텔방을 끊어줄 기세였고 여동생들은 나의 휴가에 대비해 자신들이 담당할 간병 스케줄을 짜기 시작했다. 등 떠미는 동생들 덕분에 나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운 나쁘게도 딱 그 타임에 ‘하이난’이 상륙한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집과 엄마를 잠시라도 떠날 수만 있다면 태풍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강원도 바다가 보이는...
문탁
2020.10.10 | 조회 1674
겸목의 문학처방전
나의 '장인'에게 보내는 마음의 소리 -김초엽의 단편소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를 처방합니다     ‘감정의 물성’을 읽다가   2002년에 개봉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50년 후인 2054년의 미래를 보여준다. 5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개봉 당시 가히 판타스틱 했던 미래기술들이 오늘날에는 많이 상용화되었다. 생체인식기술, 멀티터치인터페이스, 홀로그램, 증강현실, AI안경,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등 영화적 재미를 가져왔던 미래기술들을 오늘날에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물론 일상이 된 첨단기술들은 영화 속에서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2019년에 출판된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년)에서도 조만간에 출시되거나 상용화될 것 같은 미래기술들을 엿볼 수 있다. 인간배아 디자인, 냉동수면기술, 웜홀 터널, ‘기쁨/슬픔/우울’ 같은 감정을 담고 있는 팬시상품,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 도서관 등, 비교적 ‘현실적인’ SF판타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 중 가장 빨리 상용화 되는 것은 ‘마인드’ 도서관이라고 생각한다. 매장에서 화장으로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는 우리의 장례문화를 떠올려볼 때, 곧 납골당과 추모공원은 사이버상의 홀로그램과 가상현실로 대체될 것 같다. 이것을 관리해주는 플랫폼이 등장하고 우리는 넷플릭스나 왓챠처럼 정액제로 사용요금을 결제하게 될 것이다.   “감정의 물성?” “그러니까 자기들 말로는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이래요. 종류도 꽤 많아요.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공포체’, ‘우울체’ 하는 식으로 이름이 붙고, 파생되는 제품으로 비누나 향초, 손목에 붙이는 패치도 있고요. 지금 유진 씨가 구해 온 건 침착의 비누라는 건데, 진짜 비누처럼 써도 되지만 그냥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나의 '장인'에게 보내는 마음의 소리 -김초엽의 단편소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를 처방합니다     ‘감정의 물성’을 읽다가   2002년에 개봉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50년 후인 2054년의 미래를 보여준다. 5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개봉 당시 가히 판타스틱 했던 미래기술들이 오늘날에는 많이 상용화되었다. 생체인식기술, 멀티터치인터페이스, 홀로그램, 증강현실, AI안경,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등 영화적 재미를 가져왔던 미래기술들을 오늘날에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물론 일상이 된 첨단기술들은 영화 속에서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2019년에 출판된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년)에서도 조만간에 출시되거나 상용화될 것 같은 미래기술들을 엿볼 수 있다. 인간배아 디자인, 냉동수면기술, 웜홀 터널, ‘기쁨/슬픔/우울’ 같은 감정을 담고 있는 팬시상품,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 도서관 등, 비교적 ‘현실적인’ SF판타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 중 가장 빨리 상용화 되는 것은 ‘마인드’ 도서관이라고 생각한다. 매장에서 화장으로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는 우리의 장례문화를 떠올려볼 때, 곧 납골당과 추모공원은 사이버상의 홀로그램과 가상현실로 대체될 것 같다. 이것을 관리해주는 플랫폼이 등장하고 우리는 넷플릭스나 왓챠처럼 정액제로 사용요금을 결제하게 될 것이다.   “감정의 물성?” “그러니까 자기들 말로는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이래요. 종류도 꽤 많아요.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공포체’, ‘우울체’ 하는 식으로 이름이 붙고, 파생되는 제품으로 비누나 향초, 손목에 붙이는 패치도 있고요. 지금 유진 씨가 구해 온 건 침착의 비누라는 건데, 진짜 비누처럼 써도 되지만 그냥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겸목
2020.09.13 | 조회 433
문탁의 간병블루스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니체, 「구제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엄마가 이..상..해   4월 13일 : 벌써 1년이 되었구나   1년 전 오늘, 엄마가 아파트 안에서 쓰러졌다. 지난한 '간병블루스'가 시작되었다.   4월 15일 : 왜 이를 갈지?    간만에 형제 단톡방에 엄마 소식을 전했다.    하나. 엄마가 몇 주 전부터 이를 조금씩 가셨는데 점점 심하게 가셔. 나의 치과주치의와 의논을 해봤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고 하네. 치매를 의심하는 듯. ㅠ    둘. 지난 번에 허리 통증 주사를 맞았는데도 여전히 아프신가봐.. 점점 더 “힘들다, 힘들다” 소리가 늘어나네...    셋. 소화를 잘 못 시키심. 아무래도 운동량은 없는 상태에서 약은 계속 드시니까... 일단 일체의 간식을 중단. 그랬더니 변비가...ㅠㅠ    넷. 그동안은 기저귀사용이 좀 줄었는데 요 며칠 기저귀 사용이 다시 늘고 있어. 다시 말해 변기에 앉기 전에 이미 대소변을 보신다는 거지. 왜 그럴까? 인지문제일까? 기능문제일까?   4월 23일 : “이 가는 건 치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문제입니다”    <00치과> 원장과 전화 상담을 했다. 의사에 따르면 이를 가는 것은 치의학적 원인이 아니라 심리적 문제라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란다. 치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갈지 않도록 어떤 장치를 끼우는 것인데, 그것은 원인을 제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익숙해지면 장치를 낀 상태에서도 이를 간다고 한다. 어머니가 정신의학과 치료를 받는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쪽에서 상담을...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니체, 「구제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엄마가 이..상..해   4월 13일 : 벌써 1년이 되었구나   1년 전 오늘, 엄마가 아파트 안에서 쓰러졌다. 지난한 '간병블루스'가 시작되었다.   4월 15일 : 왜 이를 갈지?    간만에 형제 단톡방에 엄마 소식을 전했다.    하나. 엄마가 몇 주 전부터 이를 조금씩 가셨는데 점점 심하게 가셔. 나의 치과주치의와 의논을 해봤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고 하네. 치매를 의심하는 듯. ㅠ    둘. 지난 번에 허리 통증 주사를 맞았는데도 여전히 아프신가봐.. 점점 더 “힘들다, 힘들다” 소리가 늘어나네...    셋. 소화를 잘 못 시키심. 아무래도 운동량은 없는 상태에서 약은 계속 드시니까... 일단 일체의 간식을 중단. 그랬더니 변비가...ㅠㅠ    넷. 그동안은 기저귀사용이 좀 줄었는데 요 며칠 기저귀 사용이 다시 늘고 있어. 다시 말해 변기에 앉기 전에 이미 대소변을 보신다는 거지. 왜 그럴까? 인지문제일까? 기능문제일까?   4월 23일 : “이 가는 건 치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문제입니다”    <00치과> 원장과 전화 상담을 했다. 의사에 따르면 이를 가는 것은 치의학적 원인이 아니라 심리적 문제라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란다. 치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갈지 않도록 어떤 장치를 끼우는 것인데, 그것은 원인을 제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익숙해지면 장치를 낀 상태에서도 이를 간다고 한다. 어머니가 정신의학과 치료를 받는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쪽에서 상담을...
문탁
2020.08.31 | 조회 1242
겸목의 문학처방전
장르를 바꿔보자 -정세랑의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민음사, 2015년)을 처방합니다       워킹맘의 만성피로, SF 판타지 아니면 답이 없다   만성피로와 어깨 결림에 대한 처방전을 의뢰한 곰도리(닉네임)는 대안학교 과학교사이고, 아직은 엄마의 손이 많이 가는 초등학생 남매를 기르고 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거나, 육아도우미 AI가 개발되어 상용화되거나, 슈퍼 히어로급 초능력을 장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조건에 놓인 사람이 만성피로를 호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SF 판타지가 아니면 현실에서는 답이 없다. 그래서일까? 곰도리와의 만남은 주객이 전도되어 그의 고충에 대한 의논보다 내 흑역사에 대한 하소연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곰도리는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선생님이라는 소문대로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날 나는 아이 둘을 낳고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했던 삼십대의 날들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석사과정생은 ‘과정’에 있는 사람이니,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고는 자료검토든 글쓰기든 잘해낼 수가 없다. 그런데 교수님들은 가르쳐주는 것 없이 야단만 쳤고, 강의시간은 단체로 기합을 받는 시간 같았다. 석사과정 동안에는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준비해도, 공부에 대한 안목과 요령이 없기 때문에 ‘뻘짓’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무수한 헛발질을 거쳐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인데, 나는 자책과 자학 없이 이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은 엄마가 바쁜 때를 귀신 같이 알고 다치거나 아팠다. 그 시절 나는 조금만 삐끗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긴장감 넘치는 일상을 감당하지 못해 허덕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깨가...
장르를 바꿔보자 -정세랑의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민음사, 2015년)을 처방합니다       워킹맘의 만성피로, SF 판타지 아니면 답이 없다   만성피로와 어깨 결림에 대한 처방전을 의뢰한 곰도리(닉네임)는 대안학교 과학교사이고, 아직은 엄마의 손이 많이 가는 초등학생 남매를 기르고 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거나, 육아도우미 AI가 개발되어 상용화되거나, 슈퍼 히어로급 초능력을 장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조건에 놓인 사람이 만성피로를 호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SF 판타지가 아니면 현실에서는 답이 없다. 그래서일까? 곰도리와의 만남은 주객이 전도되어 그의 고충에 대한 의논보다 내 흑역사에 대한 하소연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곰도리는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선생님이라는 소문대로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날 나는 아이 둘을 낳고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했던 삼십대의 날들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석사과정생은 ‘과정’에 있는 사람이니,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고는 자료검토든 글쓰기든 잘해낼 수가 없다. 그런데 교수님들은 가르쳐주는 것 없이 야단만 쳤고, 강의시간은 단체로 기합을 받는 시간 같았다. 석사과정 동안에는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준비해도, 공부에 대한 안목과 요령이 없기 때문에 ‘뻘짓’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무수한 헛발질을 거쳐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인데, 나는 자책과 자학 없이 이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은 엄마가 바쁜 때를 귀신 같이 알고 다치거나 아팠다. 그 시절 나는 조금만 삐끗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긴장감 넘치는 일상을 감당하지 못해 허덕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깨가...
겸목
2020.08.17 | 조회 538
겸목의 문학처방전
루틴의 ‘힘’ -나수경의 단편소설 「구르기 클럽」을 처방합니다     바닥을 칠 때, 알레르기가 찾아왔다 알레르기성 피부 발진에 대한 처방을 의뢰한 ‘루틴’(닉네임)은 6년차 직장인으로, 식물학 박사이고 관련 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루틴은 삼십대 후반의 싱글이며 회사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투룸에 살고 있다. 아침 6시쯤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걸어서 출근한다. 예전에는 회사 아래 음식점에서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귀가했으나, 자극적인 식당음식이 몸에 좋지 않은 것 같아 최근에는 집에서 저녁밥을 지어 먹는다고 한다. 퇴근 후 밥상을 차리고 치우고 정리하다보면, 노곤함이 밀려와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된다. 그러니까 현재 루틴은 안정된 직장이 있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일상생활이 가능한, 비교적 ‘건강한’ 직장인이다. 루틴의 라이프스타일은 커리어의 면에서나 워라밸의 면에서나 나쁘지 않다.   그러나 학위를 마치고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는 지금과 달랐다. 1년차 직장인의 연봉은 높지 않았고, 학위를 따느라 보내는 기간 동안 모아둔 돈도 없어 집을 구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형편에 맞는 집(방?)을 보러 돌아다닐 때, 루틴의 눈에는 일찍 결혼해서 평수를 늘려가고 인테리어를 바꿔가는 친구들의 아파트가 아른거렸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개인공간으로 기숙사 방이면 충분했고, 일이 안 풀릴 때는 옆방의 친구들과 고민상담하며 동료의식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학교 기숙사의 인프라와 커뮤니티가 빠진 루틴의 현실은 박봉의 일인가구였다. 결혼한 친구들은 각자 나이에 맞게 인생의 규모를 키워가는(남편이든 자식이든 아파트 평수든)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자신만 하향곡선을 타고 있는 것 같아...
루틴의 ‘힘’ -나수경의 단편소설 「구르기 클럽」을 처방합니다     바닥을 칠 때, 알레르기가 찾아왔다 알레르기성 피부 발진에 대한 처방을 의뢰한 ‘루틴’(닉네임)은 6년차 직장인으로, 식물학 박사이고 관련 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루틴은 삼십대 후반의 싱글이며 회사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투룸에 살고 있다. 아침 6시쯤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걸어서 출근한다. 예전에는 회사 아래 음식점에서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귀가했으나, 자극적인 식당음식이 몸에 좋지 않은 것 같아 최근에는 집에서 저녁밥을 지어 먹는다고 한다. 퇴근 후 밥상을 차리고 치우고 정리하다보면, 노곤함이 밀려와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된다. 그러니까 현재 루틴은 안정된 직장이 있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일상생활이 가능한, 비교적 ‘건강한’ 직장인이다. 루틴의 라이프스타일은 커리어의 면에서나 워라밸의 면에서나 나쁘지 않다.   그러나 학위를 마치고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는 지금과 달랐다. 1년차 직장인의 연봉은 높지 않았고, 학위를 따느라 보내는 기간 동안 모아둔 돈도 없어 집을 구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형편에 맞는 집(방?)을 보러 돌아다닐 때, 루틴의 눈에는 일찍 결혼해서 평수를 늘려가고 인테리어를 바꿔가는 친구들의 아파트가 아른거렸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개인공간으로 기숙사 방이면 충분했고, 일이 안 풀릴 때는 옆방의 친구들과 고민상담하며 동료의식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학교 기숙사의 인프라와 커뮤니티가 빠진 루틴의 현실은 박봉의 일인가구였다. 결혼한 친구들은 각자 나이에 맞게 인생의 규모를 키워가는(남편이든 자식이든 아파트 평수든)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자신만 하향곡선을 타고 있는 것 같아...
겸목
2020.07.09 | 조회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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