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3 에세이 수정

비료자
2023-11-15 18:58
120

비밀

 

//지난번 올렸던 글에서 책 인용을 줄이고 내가 찾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고쳐 써 봤습니다. 고쳐 쓰는 재미도 좋네요~ ^^ 해주신 조언,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 올린 에세이도 생각해야 할 다른 방향이 있으면 댓글로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비밀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품고 있다. 죄책감은 수치심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 상대적으로 다루기 쉽다. 죄책감은 사회 규범을 어겨서 발생한 것이고,  그 정도에 따라 처벌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든 죄책감이 생길 일을 했다면 처벌이나 비난을 감내할 각오 여하에 따라 공개할 수 있기 때문에 비밀의 관리가 (상대적으로) 쉽다. 모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죄의 값이 있고,  ‘용서’ 도 가능하다. 털어놓는 사람도 그걸 듣고 조언하는 사람도 어쨌든 계산 가능한 범위가 있다. 하지만 수치심은 좀 더 미묘하다.  수치심은 죄책감보다 좀 더 깊은, 자신의 본질을 건드리는 감정이다. 수치심은 안게 되는 그 순간부터 처벌을 받기 시작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용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구원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죄책감을 고백한다면  현실적인, 방법론적인 조언을 구하는 것이고, 수치심을 고백한다면 조언이 아니라 사랑과 구원을 바란다는 뜻이다. 수치심의 비밀고백은 상대가 그의 수치심을 같이 안아주며 그의 자아가 건강하게 회복되도록 지원을 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인데, 그걸 해 주기가 사실 굉장히 어렵다.  그걸 해 줄 수 없는, 고백을 들은 사람의 마음도 불편하다. 수치심의 고백은 관계가 가까울 수록 기대와 불편함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밀을 자주 말하지 않으며 그래서 모두들 가십, 뒷담화를 좋아한다. 그 주인공의 수치심을 인간관계의 부담없이, 안전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그래서 읽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는 각 에피소드마다 등장인물들이 어떤 비밀을 갖는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잘 보여준다.

<계시> 에서 토미를 80 평생 반듯하게 살게 한 비밀도 일종의 수치심으로 생긴 것 같다. 자신의 실수로 전재산을 날린 화재에서 ‘괜찮아, 토미’ 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 왜 비밀인가? 전재산을 날린 토미는 평생 성실하게, 뼈빠지게 일하며 사랑으로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챙겼다. 화재를 일으킨 건 죄책감이지만 그때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건 수치심이 아닐까? 괜찮다, 가족에 가장 소중하다, 는 신의 계시는 자신의 가족이 무사하다는 사실에서 온 것이다. 가족이 무사하지 않았다면 토미에게 그 계시가 과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선량한 이웃, 좋은 가장으로 살게 할 비밀이, 힘이 되었을까 의문이다. 그렇지 않다는 걸 토미 스스로 알기 때문에 사실은 수치심이 깔린 비밀이 된 것은 아닐까? 비밀을 들은 피터가 자신의 삶을 개선해 나가는 첫 걸음을 떼었기 때문에 토미의 고백은 구원을 받은 쪽에 가깝다. 하지만 그 비밀을 말한 토미가 ‘다시는 피터를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던 것도 그래서 이해가 간다.

 

대부분 수치의 비밀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들은 사람이 시간과 정성과 배려,  때로는 ‘살인적인 인내심’을 쏟아부어도 쉽지 않다.  털어 놓은 사람의 환경이나 성향에 따라 그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는데 투입되야 할 에너지가 다르고, 같은 에너지를 써도 결과가 달라서 '수치심의 값'을 추측하기 어렵다. 가까운 사람일 수록 상대를 사랑하고 구원하고 싶은 마음과 의무가 무거울 것이다. <도티의 민박집>에서 자신의 인생을 건 업적(은퇴 후 거주 별장)이 사실은 허접한 것으로 평가받았다는 셸리의 비밀은 도티에게 ‘그래서 어쩌라고?’ 의 반응 이외에는 나올 게 없었다. 도티는 별장도 애니도 상관이 없고 셸리에게 한 줌의 애정도 없으니까. 그딴 비밀은 가까운 이웃의 가십 정도로나 가치가 있을까? (애니가 그 흉물을 ‘셸리의 페니스’ 라고 했다네요. 깔깔깔) 교훈도, 재미도 없는 셸리의 비밀을 도티가 며칠간 들어준 건 혹시나 다른 이야기가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극빈한 유년시절을 겪은 도티가 들을만한 비밀은 드물지만, 비밀에 객관적인 등급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셸리의 비밀은 충족되지 않은 허영심 때문에 생긴 것이라 건질 내용이 없었다. 울면서 그 비밀을 말한, 모자라긴 하지만 촉이 좋은 셸리가 눈치를 챌 만큼 비웃은 도티도 잘 한 건 없다. 하지만 도티는 비웃은 게 아니라 화를 냈던 것이라 셸리가 눈치를 챌 수 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고 끝까지 들었던 자신과 제공할 서비스를 넘어서 이 따위 너절한 이야기를 듣게 한 셸리에게 화가 났는데 화를 낼 수가 없으니 비웃은 거다.

 

적절한 상대와 수치의 비밀을 나눈다는 건 누구에게도 어려운 일이긴 하다. 혹시 내 수치의 비밀을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은 경험이 있는지? 나는 실생활에서 남편과 딸에게, 친구에게 세번 털어놓았다. 당연히 기대를 하고 말을 했었지만 결과는 기대 밖이었다. 그들은 내가 그 (어려운) 이야기를 울고 불고 말할 때 우는 사람 앞에서 취해야 할 인간의 기본도리 대로 조용히, 다독다독 들어줬지만 대하 드라마를 읽는 것도 아니고, 그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독다독의 시간은 짧았다. 그 후 일상은 여전히 일상이고, 각자 자기 살던 대로 살았으며 관계의 변화는 없었다. 좀 더 나를 이해, 배려, 존중하는 그런 건 없었다. 결국 현실에서 내가 나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존중하는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통보할 때 그들이 참조는 하는 것 같았다. 참조를 안 한다고 내가 선택을 바꿀 일은 없으니 나와 싸워 내 결정을 바꾸기 보다는 나를 이해하는 편이 쉬우니까 나를 이해하는 회로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여기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러고 났더니 내 비밀은 꼭 지켜야 할 비밀도 아니고 꼭 말 해야 할 비밀도 아니게 되었다. 혹시나 누군가가 ‘너,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라고 묻는다면 ‘응. 정말 괴로웠지’ 라고 끝내고 ‘근데 누구한테 들었어?’ 라고 물을 정도라고 할까.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내 비밀이 상대에게 부담이 되기도, 가십이 되기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말할 당시는 나도 어려서 아마  상대에게 ‘공감, 치유, 사랑’의 부담을 줬을 것이다. 같이 사는 가족에게 그건 특히 어렵다. 그래서 가족일수록 밝고 강하고 현명하고 부지런하고 행복한 모습만 보고 싶어한다. 잠시의 공감, 치유, 사랑을 보여주긴 쉬워도 일상에서? 언제까지? 비밀은 최소한, 그걸 가십으로 떠들지 않을 만한, 혹은 상대의 약점으로 잡고 가스라이팅을 하지 않을 정도는 되는 상대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본인이 아무리 괴로워도 그걸 무기로 상대를 괴롭히지도 말아야 한다.

 

친구의 배우자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평생 고통을 받았다. 그게 어린시절 기억으로 끝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가족 스토리다. 어린 시절 자신과 가족의 수치심, 비밀을 배우자에게 털어 놓는 건 괜찮다. 하지만 무려 수십년, 평생을 술 마시고, 마셨다 하면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면 어쩌란 말인가. 내 주변에서 가장 인내심과 이해심이 강한 그 친구는 이혼을 못하고 지금껏 살고 있는데 그 비밀과 수치심은 자녀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선물>에서 에이블이 아내에게 성장시절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내가 기급을 하며 입을 다물게 한 것도 이해가 된다. 에이블 같이 훌륭하게 그걸 극복해 낸 사람의 이야기도 그런데 하물며 그 자리에서 맴돌며 질퍽대는 배우자의 비밀 따위를 평생 반복해 들으면서 일상에서 늘 치유와 공감을 해 주는 가족이 있다면 보살이다. 보살을 현실세계에서 만나는 건 선물을 넘어 기적이지. 친구는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에이블의 아내처럼 냉정하지 잘라야 했는지도 모른다. 부녀가장이 되어 자녀들의 원망을 들으며 도를 닦고 또 닦아 신선의 경지 입문, 이제 구름만 오면 되는 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친구를 보면 <금 간>에서의 린다가 옳거나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해는 된다. 린다는 어린 시절, 불륜으로 가출한 엄마의 가난한 노후를 보며 결혼생활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지, 그걸 위해 무엇을 참아야 하는지를 알았다. 손님방 관음증에 드디어는 강간미수까지 저지른 남편이지만 부유하다. 아이들은 이미 관음증 단계에서 아빠가 혐오스럽고, 그걸 알면서도 살고 있는 엄마는 더 혐오스럽다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떠나버렸다. 린다도 물론 남편이 혐오스러워 결혼생활은 금이 간 접시와 같다. 이 접시는 남편의 범죄- 손님 방 관음증, 강간미수- 가 들켜서 남편이 빵으로 가는 외부충격으로 깨지거나, 자기 손으로 던져야 깨질텐데 린다는 어쨌든 깨지는 건 싫다. 그래서 남편의 범죄행위를 고발, 증언은 하지 않되 더 이상은 그 짓을 못하게 만드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수치스럽다는 건 안다. 린다에게 뭐라고 충고를 할 수 있을까? 컨테이너에서 가난한 노인으로 살게 될까 두려운 린다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린다의 엄마는 불륜으로 가출, 동네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가족에게 수치를 안겼다. 엄마는 고작 2주만에 상대에게 버림을 받았고, 다시 가족에게, 남편에게 돌아오려 했으나 거부당하여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내내 가십을 생산하고 있다. 이런 엄마를 지켜보며 자란 린다에게는 엄마의 불륜보다 가난이 더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풍차>에서 같은 자매인 패티에게는 그로 인한 이웃들의 소문이 트라우마였으나 <금 간> 에서 린다는 그보다 무서운 게 빈곤이었다. 아마 패티는 교사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린다는 돈이 그렇게 무서운 주제에 주체적으로 돈을 벌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같은 사실에 대한 비밀이라도 그 비밀의 어떤 점에서 트라우마가 발생하느냐, 는 사람마다 다르고 인생도 달라지는 것 같다.

 

나의 수치와 관련된 비밀은 어떤 것이고, 그게 어떤 지점에서 트라우마를 주었는가를 아는 건 좋은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명한 친구를 찾고, 일기를 쓰며, 예술작품들과 간접 대화를 나누고, 정신과 상담실과 대화를 나누기 좋은 술집, 카페들이 늘 바쁜 것이다. (경험상, 잦은 술자리와 충동적인 대화는 다소 효율이 떨어지는, 디자인 적으로 실패 확률이 높은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실패도 하면서 길을 찾으려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걷다 보면 어딘가 가서 무엇인가를 보게 되겠지. 길을 찾을 수 있고 볼 수도 있다면, 그게 진짜 길이 아니면 어떤가. 다시 또 찾으면 되지.

댓글 1
  • 2023-11-16 09:27

    비료자님! 뭔가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일단 칭찬해드리고 싶어요!! 바뀐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요. 비료자님의 만연체 문장이 깔끔하게 바뀌어가고 있는 것도 좋고요, 비밀, 죄책감, 수치심에 대한 비료자님의 생각과 텍스트를 엮고 있는 점도 좋아다. 이제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은 이 글에는 나의 생각과 주변사람들의 이야기, 텍스트에 대한 분석, 정리가 들어 있어요. 이걸 소제목이나 번호로 구분해봤으면 좋겠어요. 1-2-3-4-5, 이런 식도 좋고, 1. 나의 생각 2. <계시>의 토미와 <선물>의 에이블 3. 내 친구의 비밀..... 이런 식으로 소제목을 붙여도 좋고요, 이건 제가 임의로 구분한 거예요. 이렇게 단락을 구분해보시면, 이 글을 통해 비료자님이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좀 더 분명해지고, 그러기 위해서 들어가거나 빼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될 거예요. 이 글의 분량이 적지 않아요. A4 1~2장이라면 소단락 구분 없이 쓰윽 내용을 파악할 수 있지만, 그걸 넘어가게 되면 파악이 어려워요. 이제 글의 '구조'를 생각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초고를 바탕으로 구조를 만들어봅시다. 이 건축물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축물인가 생각해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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