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림지 산책

윤아
2023-11-04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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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여자들의 비범한 글쓰기3/ 4번째 에세이 /20231105 /윤아

 

의림지 산책

 

뭔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을 때에도 걷는다. 걷다 보면 머리가 정리되는 것 같다. 솔비투르 암불란도(Solvitur ambulando) ‘걷다보면 해결이 된다고들 말한다.

나는 또 장소성(placeness)’의 감각을 얻거나 회복하려고 걷는다. 지리학자 이푸 퇀은 움직임을 통해 공간에 의미를 부여할 때, 공간이 파악하고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될 때, 공간이 장소가 된다고 말한다.

<로런 엘킨, 『도시를 걷는 여자들』, 반비, 2020년, 42쪽>

 

집을 나와 초등학교 담장을 끼고 걷는다. 학교 안의 은행나무가 이것이 노랑이라고 웅변하듯 순도 높은 노란 광채를 발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학교 앞에는 연노랑에서 녹색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노란빛으로 물든 이팝나무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다. 쌀알을 닮은 작고 하얀 꽃들이 나무를 뒤덮던 5월의 이팝나무가 머리에 떠오른다.

바로 이어진 비행장 가장자리 잔디밭에 들어선다. 상시적으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곳은 아니고 유사시 사용할 목적으로 군이 소유한 활주로다. 정말 특별한 때에 사용하기도 해서 어쩌다 인근 종합병원에서 긴급환자를 대학병원으로 이송할 때 사용하기도 하고, 몇 년 전 제천 화재 당시 대통령을 태운 헬기가 착륙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시에서 소유권을 가져왔다는 말이 있는데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다. 사실 별 관심이 없다. 그 곳에 그렇게 넓은 공터가 있다는 것이 그대로 좋다. 이곳은 그저 이전에도 현재에도 시민들이 애용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너른 활주로에서 걷거나 뛰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배우고, 킥보드를 탄다. 반려견 산책 시키는 사람들도 많다. 인근에 아파트가 많아지면서 이용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는 거 같다.

오늘은 날씨도 추워지고, 흐린 날이어서인지 주말인데도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집 앞이어서 오가며 보면 강추위나 여름 한 낮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그러다 날이 따듯해지거나, 더운 여름밤이면 사람들이 집밖으로 그야말로 쏟아져 나온다. 지난여름 어느 날인가는 오랜만에 밤 산책을 나갔더니, 그 넓은 활주로에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어서 놀란 적이 있다. 아스팔트 포장이 된 활주로와 그보다 더 넓은 가장자리 잔디밭, 그리고 시에서 조성한 너른 꽃밭까지 도시에 트인 공간이 드물다보니 그 자체로도 이채롭다.

활주로의 한쪽 끄트머리에서 4차선 도로를 건너면 ‘삼한의 초록길’ 진입로다. 사과 수확을 끝낸 과수원과 콩밭을 지나 백 미터쯤 걸어 들어가면 논들이 펼쳐진 삼한 뜰에 들어서고, 왕복 6차선 너비로 그 너른 들을 남 북으로 가로지르는 삼한의 초록길에 당도하게 된다. 전 시장이 시내에서부터 삼한 뜰을 가로질러 이 너른 들녘에 농수를 공급하는 의림지에 가 닿는 산책로를 내려고 할 때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갑을 논박을 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시민들이 애용하는 산책길이 되었다.

처음에는 횡하던 논들 사이의 이 대로는 가로수를 심고, 화초를 가꾸면서 해마다 풍성해졌다. 무엇보다 양쪽으로 펼쳐진 논에 벼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왠지 흐뭇하다. 삼한의 초록길은 길 한가운데에 사람이 다니는 흙길이 펼쳐지고 가로수와 화단을 넘어 일반 차도라면 인도가 있는 양쪽으로 시멘트 농로가 설치되어 있다. 그야말로 사람 중심의 길이다. 남녀가 흙길을 걷는데 여성은 맨발로 걷는다. 지난여름엔 거의 절반 이상이 맨발로 걷었다. 이에 걸맞게 시에서는 새 흙을 깔아 다져 놓았고, 길이 끝나는 지점에 보건소에서 파상풍 주사를 맞으라는 내건 현수막을 내 걸었다.

의림지가 가까워지자 늘씬한 소나무 아래 울긋불긋 단풍나무가 자리를 잡았다. 붉을 단(丹)을 써서 단풍나무일 테지만 각각의 단풍나무는 각양각색을 빛깔을 뽐내고 있다. 가을이 깊었건만 아직 물들지 않은 녹색 잎부터 노랑, 주황, 빨강, 그야말로 검붉은 빨강까지 언어로는 포획되지 않는 다양한 색채를 자랑한다. 한 나무에도 햇살이 닿는 부분과 그늘의 빛깔이 다르다. 순도 높은 노랑의 은행나무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 위의 소나무도 사철 푸르다지만 ‘나도 계절을 탄다오’라고 말이라도 하듯 올해 새로 태어난 잎들이 아닌 바늘잎들은 갈색으로 물들어 떨어트리고 있다.

갑자기 꽥꽥꽥꽥 시끄러운 오리 소리가 들린다. 논 가장자리의 꽤 넓은 펜스 안에 이삼십 마리는 됨직한 오리들이 흙탕물의 작은 물웅덩이를 중심으로 부리로 물을 휘젓거나 흙을 뒤적이고 있다. 삼한 뜰의 친환경 오리농법에 사용된 오리들을 한 곳에 몰아둔 모양이다. 논다랑이마다 가장자리에 작은 오리 장에서 살며 여름동안 벼들 사이를 누비던 오리들이다. 벼들이 베어지도 나니 삭막한 곳, 지저분한 물웅덩이 하나에 모여서 흰털들을 더럽히며 있는 것이 여름에 부려먹고 쓸모없을 때 홀대하는 것만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먹이는 누가 주고 있는 것일까? 시골마을에서 대접받던 소들에 비하면……. 허긴 오리나 닭들은 집안의 남은 음식찌꺼기와 땅 속의 굼벵이들을 찾아 먹다가 때가 되면 잡아먹히는 것이 저들의 운명이었다. 깃털이 뽑히고 손질된 닭과 오리를 사서 요리를 하면서도 살아있는 오리들이 열악한 환경에 있는 것에 기분이 영 좋지 않다.

삼한의 초록길을 낸 것이나, 친환경 농법을 하고, 농경 축제까지 열고 하는 것들이 누굴 위한 것일까? 이제 저 너른 논들은 모두 기계로 경작된다. 그리고 경작지마저 점점 줄어든다. 삼한 뜰을 유지하기 위한 법규가 있을 테지만, 사람들은 밭으로 전환하거나 최신 시설의 하우스를 짓는다. 쌀 수확량만을 생각했다면 이 넓은 대로를 논 한 가운데로 뚫는 일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을 걷는 사람 대부분이 농사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모든 행사는 기획된 것이고,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행사인 것이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려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입구에 소달구지까지 있어서 타본 적이 있다. 얼마후 관리의 어려움 때문인지 소가 사라지고 말았지만. 2025년에는 인구가 없어서 사라질 지방도시들이 많은데, 그 중 제천도 앞 순위를 다툰다고 한다. 시에서는 어떻게든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도록 애쓰고, 관광객이라도 끌어들이려 애쓰는 것이다. 이 삼한뜰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직 의림지의 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저수지가 만들어 진 것을 삼한 시대로 본다니, 2000년간 변하지 않고 의림지의 물들이 수로를 타고 내려와 논에 벼들을 키워왔다.

의림지 둑에 올라섰다. 제림(堤林)으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언제 봐도 의젓하다. 이 저수지는 산과 산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골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고대 수리시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골짜기가 둥글게 에워싸고 입구는 좁아 한 눈에 보기에도 제방을 쌓기에 적당한 곳이다. 충청도의 별칭인 ‘호서(湖西)’지방이 이 저수지를 기준으로 라고 일컬어 졌다. 호수의 서쪽이 충청도라는 말이다. 옛사람들이 보기에도 의림지는 기억에 남는 장소였던 모양이다. 또 큰 둑이나 제방을 의미하는 ‘내토(奈吐)’, 내제(奈堤)라는 제천의 옛 이름도 의림지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제천(堤川)도 마찬가지로 둑제(堤)자를 쓴다. 오래된 만큼 누각과 정자도 있고, 가야에서 신라로 귀순한 가야금의 명인 우륵과 관련한 샘도 있다.

오늘은 가을을 만끽하려는 행락객들로 붐빈다. 단체 관광객에게 저수지의 유래를 설명하는 해설사의 마이크 소리를 뒤로하고 천천히 한 바퀴를 돈다. 물오리 가족이 물살로 학익진을 펼치며 호수 위를 미끄러져 간다. 좀 전에 흙탕물에서 본 오리들에 비해 깨끗하기가 비교할 바가 아니다. 빛나는 깃털로 보아 먹이도 풍족한 모양이다. 제방의 소나무보다 몇 아름은 더 되어 보이는 늙은 버드나무가 위용을 자랑한다. 가을바람이 수면에 파문을 일으킨다. 반짝이는 윤슬 속에 가을빛을 품은 호수 한 가운데 섬이 천공의 성처럼 허공에 떠 있는 듯하다.

돌아오는 길에 들여다본 오리무리들은 단체로 쉬는 시간인지 머리를 등 뒤 깃털에 파묻고 벌흙에 동그마니 않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삼한의 초록길에서 비행장으로 방향을 틀려는데 논둑에서 중년의 여성 둘이 밀레의 그림 속 이삭 줍는 여인들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뭔가를 찾고 있다. 네잎크로버? 그들은 행운을 찾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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