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과 자긍심> 2부 후기-자기혐오를 자긍심으로 바꾸기 위해

기린
2023-08-12 15:20
381

 

 

1.당사자

 

『망명과 자긍심』의 저자 일라이 클레어는 태어날 때부터 남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뇌병변 장애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자신이 소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는 여자아이. 도시 안에선 변두리 오지의 촌놈. 이성애자 세상에서의 다이크. 비장애인 세상에서의 절름발이. 두 분 다 교사였고, 운과 백인이라는 특권을 이용하여 자수성가하려 애쓰던 가난한 아버지와 노동계급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85) 라고 소개한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내내 아버지와 다른 여러 어른들로부터 성적으로 물리적으로 심하게 학대를 당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기 위해 도시로 온 후 퀴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친 후 이 글을 썼다고 했다.

이 책 2부 몸과 관련된 세 개의 에세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글이었다. 작가의 경험과 문제의식이 날카롭게 버려진 문장들은 읽는 내내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런 경험은 당사자나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세미나에서도 그와 연관해서 질문을 했을 때, 무사님이 김도현의 『장애학의 도전』을 인용해 주면서, 장애인이 겪는 차별과 삶의 어려움을 당사자가 제일 잘 알 것이라던지, 어떤 정책이 실제로 장애인의 삶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당사자가 제일 잘 판단할 것이라는 등의 ‘유사당사자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알려 주었다. 그런 면에서 당사자만 쓸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은 어떤 지점에서 편협한 당사자주의적인 관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라이 클레이는 당사자이면서도 당사자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프릭’(기형, 변종, 진기한 구경거리, 괴물)으로 명명된 역사를 풀어나간다. “수많은 사회변혁 운동에서 자긍심과 권력을 창출하기 위해 특히 언어와 명명이 사용되었다. 프릭이란 단어에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해선, 나는 프릭의 범주화에 관련된 내 개인사를 통과해, 프릭 쇼라는 더 큰 집단적 역사로 발을 들여놓아야 할 것이다.”

 

 

2. 프릭쇼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프릭으로 범주화한 역사는 먼 옛날 서구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00년대 중반에서 1900년대 중반 사이 프릭은 커다란 오락거리였고 거대 산업으로 정점을 찍는다. 프릭쇼는 미국으로 건너왔고, 사람들은 서커스, 카니발, 그리고 상점 앞에 딸린 공간에서 펼쳐지는 싸구려 구경거리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프릭’ ‘야만인’ ‘괴짜’를 얼빠진 듯 쳐다봤다. 그들은 정상과 비정상, 우월함과 열등함에 대해 갖고 있던 자신의 생각, 자신의 자아 감각을 확인 받고 강화하기 위해 왔다.

프릭쇼를 둘러싼 다중 쟁점에서 느끼는 클레어의 곤경은 퀴어나 불구라는 단어를 전복적으로 쓸 수 있는 반면, 프릭이라는 단어는 그렇지 못한 점이다. 클레어는 “무엇이 우리가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인정받을 만하다는 우리의 자긍심을, 그 기쁘고 단단한 주장을 자라나게 해줄까?” 라고 질문하면서 프릭이 프릭쇼를 통해 장애를 과시했던 시기에서 이행해 장애가 의료화 모델이 되는 과정에서 프릭의 범주화 틀이 바뀌었을 뿐임을 비판한다. 우리는 항상 전시중이다. 그래서 그에게 프릭이라는 단어를 퀴어나 불구처럼 전복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고, 그 역사 중 어느 조각을 우리 것으로 만들길 원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고, 자긍심으로 가득한 자아 이미지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프릭 쇼에서 일했던 사람들, 자신의 장애를 과시할 줄 알았던 프릭들은 분명 우리에게 정체성과 자긍심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러나 장애 자긍심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장애는 수치심에 흠뻑 적셔져 침묵을 뒤집어쓰고 고립에 뿌리박혀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자긍심

 

프릭과 관련하는 이렇게 충돌하는 역사는 글레어로 하여금 ‘증언’ 이라는 행위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증언과 자긍심 둘 다 정체성을 강화하고, 저항을 길러내고, 전복을 일궈낸다.” 그렇지만 증언과 자긍심은 때로 협력하여 작동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클레어는 이 둘을 혼동하거나 합치거나 경계를 흐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 부분은 좀 까다로웠다. 클레어의 맥락에서 프릭의 범주화는 지진아, 원숭이, 별종이라고 놀림받던 그 모든 순간에 일어나 뼈에 새겨져 자동적으로 자기혐오와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했다. 그것을 넘어 자긍심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설령 당사자라 하더라도 처한 조건에 따라 다 다른 그 통과를 어떻게 가늠해야 할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혐오를 자긍심으로 바꿈이 지향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 새겨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레즈비언과 게이 부모들이 결혼을 통해 가족으로 인정받도록 투쟁하는 대신, 너무도 많은 가족과 공동체를 갈가리 찢어놓은 인종차별적이고 계급 차별적이고 비장애 중심적이고 동성애 혐오적이고 트랜스 혐오적인 아동복지와 가족법 제도를 끝장내기 위해 투쟁”하기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결을 가로질러 읽기> <주머니 속의 돌, 심장 속의 돌> 에세이는 장애와 섹슈얼리티까지 나아가 몸이 경험하고 사유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의 범주에 대해 “범주화에 저항하고, 범주의 폭력을 폭로하고, 서로를 상처 입히면서 고립되어온 투쟁들 사이에 무수한 다리”를 놓기 위해 수많은 다중 쟁점들이 너무나 복잡하게 엉켜있는 엄청 매력적인 글이다. 세미나에서 충분히 논의하지 못한 점들까지 포함하여, 그 복잡성에 머리를 싸매게 되지만, 저자의 질문을 따라 더 깊이 더 깊이 사유하기를 종용하는, 그래서 우리가 빠져 있는 수많은 이분법의 세상에서 지난하게 벗어나기 위한 고투를 응원하는 책이었다.

댓글 3
  • 2023-08-13 07:20

    발제요약도 잘 하셨는데, 후기도 좋네요.
    무엇보다 이 책이 기린님을 관통했다는 게 느껴져요^^

    내가 여러번 이야기했잖아...그대는 '몸'을 화두로 삼아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니까......ㅋㅋㅋㅋ (걷기조차^^)

  • 2023-08-14 18:37

    - <망명과 자긍심>에서 하나의 질문이 또 다른 질문으로 미끌어지고, 시종일관 양가적 태도를 드러내는 저자의 문체는 그 자체로 언어(퀴어,불구자,크립...)와 감각이 교차하는 둘쑥날쑥한 가장자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혐오와 자긍심을 이분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유하기? 다중쟁점정치의 글쓰기?)

    - 신체에 각인된 기억이 개인의 역사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쟁점과 광범위한 역사를 가로질러 재구성될 때 언어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위치를 점유하는 것 같다. 글을 쓰는 당시에 '프릭'이 저자에게 자긍심의 언어가 되지 못한 이유는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다양한 신체적, 역사적 맥락과 얽혀 있다. 저자에게 '양가감정', '들쑥날쑥한 가장자리'는 글쓰기의 조건이자 교차성 정치가 시작되는 자리이지 않을까? ("퀴어와 불구자는 나의 언어지만, 프릭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고자 한다.")

    - 올 해 퀴퍼 대신 노프라이드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많았다. 익숙한 얼굴들과 낯선 얼굴들이 섞여 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단일한 정체성으로 소개할 수 없고 법 바깥에서 불안정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노프라이드'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현수막에는 "'프라이드'가 부끄럽게 여기는 불법 존재들의 노프라이 파티"라고 적혀있었다. "퀴어 망명자들의 반-자긍심"이라는 표어로 기존의 프라이드 정치에 가려졌던 증언을 이어갔다. 망명과 반-자긍심이랄까? 새벽이생추어리 활동가도 파티에 참가하여 "훔친 돼지" 새벽이의 이야기를 전했다. (사실 1학기 에세이를 쓸 때 노프라이드 행사의 선언문들과 망명과 자긍심의 형식을 참고했는데 어쩌다 보니 결과물은 요상한 콩트-에세이가 되어버렸...)

    - 개별 신체에 중첩되어 있는 소수성(일라이 클레어)과 복수의 신체들이 연합할 때 연결되는 취약성(주디스 버틀러)을 같이 고려할 때 '정체성 정치'와 '당사자주의'를 다르게 사유할 수 있을까? 당사자 말하기로 언어화될 수 없는 비인간 동물의 '증언'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해러웨이는 '반려종', '함께 되기'를 통해 인간-비인간 동물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전복하고 있을까? (앞으로 5주 동안 해러웨이를 만나보자!)

  • 2023-08-15 12:46

    저는 겨울방학에 먼저 읽을때는 멀미가 날것 같았어요.
    수많은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성에요. 뭐가 그리 복잡하지 하면서요. 하지만 이번에 읽을때는 맞아 우리는 다 다른데 그 다름에 각자의 이름을 명명하는것은 중요하다란 생각을 했습니다.
    N개의 정체성에 각자 이름을 달때까지 범주를 다양하게 해나가야 된다라고 느꼈거든요.
    그것이 자긍심을 찾아가는 여정 같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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