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백에 가다 _ 양생 프로젝트 1박 2일 워크샵 후기

모로
2023-06-14 17:03
365

 매주 토요일 인문약방 프로그램으로 양생 수업을 한다. 1학기 주제는 ‘돌봄’인데 학기가 마무리된 지금 모두 ‘주디스 버틀러’ 함께 읽기 수업을 하는 듯하다. 버틀러 좋지.. 아주 멋있지.. 어렵지만 글도 좋아.. 책을 읽다 보면 안 쓰던 외장메모리까지 탈탈 털어 쓰는 기분이야.. 문탁쌤이 두 장 정도의 에세이 개요 및 내용 및 발췌 등등등을 추려서 오라고 했지만, 전날까지 감감무소식인 나의 글쓰기 능력은 결국 발휘되지 못한 채 워크숍 당일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랑 같이 공부하면서 ‘놀려고’이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1박 2일로 예정되어있는 에세이 개요 워크숍에 더 목을 빼고 기대하고 있었다. 아~ 얼마 만에 혼자 가는 여행인가!

 

워크샵은 함백에 간다고 했다. 함백.. 함백은 어디인가. 강원도에 있다는데 처음 들어본 지명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고미숙 선생님의 생가(?)라고 하니 더욱더 기대되었다. 양생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14명. 그중에서 3분이 여차여차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출발하면서부터 시무룩해진 건 사실이다. 아무도 안 믿지만 나는 정말 i (내향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랑 어색하면 어떡하지.. 많이 친해지긴 한 걸까.. 라는 걱정을 하고 출발했다.

 

내가 탄 차는 양생 프로젝트의 기혼자 3인방으로 추려졌는데 어머나 처음부터 둠칫둠칫 분위기가 즐거웠다. 아무래도 수업 구성원이 미혼이 많으시고, 수업 내용상(?) 아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게 좀 부담스러웠다. 아이 친구 엄마들이랑도 그렇게 친하지 않고 해서 어디 가서 아이 이야기를 맘껏(?) 할 일이 별로 없는데 문탁 안에서 유자녀 기혼자들과 만나서 맘 놓고 이야기하니 즐거웠다. 게다가 휴게소에 들렀는데 갑자기 묘쌤이 선물이라며 에스닉풍(?)의 바지를 선물하는 게 아닌가! 너무 예뻐~ 바지 하나에 기분 업업! (청소년 남아를 키우는) 기혼자 클럽이 이렇게 결성되었다.

 

 

 

 12시쯤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 먹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걸어 다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조용하고, 작고, 아기자기한 동네였다. 작은 성당을 지나가다 종교도 없는 나는 기도를 했다. “에세이를 잘 쓸 수 있게 해주세요.” 이 정도면 함백에 워크숍을 온 마음가짐은 된 것이 아닌가!

 

 돌아가선 1시부터 6시 반 정도까지 각자가 써온 에세이 초고를 다듬는 시간을 가졌다. 오랜만에 오래 앉아있으려니 궁뎅이가 근질근질했으나, 다들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마음을 나누었다. 참석하지 못한 3명도 줌으로 접속해 함께 했다. 저녁은 근처 진미식당에서 정식을 먹었는데, 반찬도 다 정갈하고 맛있어서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찾아온 대망의 저녁 술자리 타임! (꺅~) 술에 진심이신 윤경쌤의 추천으로 오는 길에 아리랑 부르어리에 들러 맥주를 한가득 사 온 터였다. 마치 테이스팅을 하는 듯 여러 가지 맥주를 시음했다. 쌉싸름하면서도 진한 맛, 구수한 맛, 꽃향기가 나는 맛, 맥주들은 저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마시는 재미가 있었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던 분위기가 술이 들어가자 한 층 더 무르익었다. 여기에 다 담을 순 없겠지만 9시면 졸리시는 문탁쌤이 11시 30분까지 술자리에 남아있었다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가늠이 되실런가? 특히나 나(모로)는 너무나 신나서 주책바가지를 떨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원을 해서 후기를 쓴다. (양심적)

 

 다음날. 우리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도 (놀랍게도) 6시 반에 일어났다. 왜냐하면 문탁쌤이 해가 중천에 떴는데 무얼 하냐며 방문을 벌컥 여셨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자 숙취가 느껴졌다. 아.. 얼마 만에 느껴보는 숙취인가. 술을 좋아하지만 마실 일도, 마실 사람도 없는 나로서는 아주 뿌듯한 기분이었다. 누룽지를 끓여 밑반찬과 나눠 먹고, 일사천리로 정리를 착착 시작했다. 쓰레기까지 한데 모으니 놀랍게도 8시. 기린 쌤이 미리 나눠주었던 워크샵 계획과 일치했다. 소오름. 어제부터 시간별로 딱딱 떨어지는 계획에 평생 p인 나로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술 마셨다고 해서 다음날 일정에 차질 따위는 1도 없다!

 

 

 

 

 차를 타고 10분 정도 올라가자 타임 캡슐 공원이 나왔다. ‘운탄고도’라는 단어 자체도 처음 들어보는 터라 도대체 어떤 길인지 가늠하기도 힘든 데다 전날 비 예보가 있어서 쫄았는데, 어라 정말로 좋은 날씨였다. 간밤에 내린 비로 대지가 촉촉해져서 풀냄새가 코를 찔렀다. 상쾌하고도 청량한 날씨! 아 이토록 좋은 날이 또 있던가. (감동) 그리고 고랭지 채소들을 심기 위해 산을 비스듬하게 깎아내린 풍경은 이국적이었고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에 나올듯한 풍경이었다. 아니 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이런 거 본 적 있어!

 

 3시간 반을 걸어서 (왕복 두 시간이라고 했잖아요!) 출발지에 다시 돌아오자 다리가 약간 후들거렸지만 (운동 부족) 중간에 돗자리 펴놓고 먹은 슴슴한 김밥, 걸으면서 나누었던 이야기, 그 온도, 습도, 채도.. 명도.. (그..만..ㅎㅎ) 완벽한 걷기였다. 가을에도 또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9월 2일 앞뒤로 인문약방에서 운탄고도 걷기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니 많관부~ (갑분 홍보^^)

 

 

 기린쌤이 술자리에서 이야기한 ‘안심’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서로에게 안심해서 걱정 없이 자기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관계. 내가 이렇게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겠지라는 마음. 그런 것들이 발휘된 이틀이었던 거 같다. 사실 내가 감정 기복이 심한 것도, 목소리가 큰 것도, 신나면 오바하는 거도 안다. 때때로는 사람들이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느끼고, 때때로는 너무 시끄럽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나의 높은 텐션을 숨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자리에서는 그런 버튼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이날 모인 사람들은 진심으로 나를 예뻐라 해주고, 시끄럽게 떠들어도 즐거워 해주셨다. 20대를 지나고부터는 어디 가서 예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같이 공부하는 문탁 사람들은 항상 예쁘다고 해주시고, 잘하고 있다고 해주신다. 얼마나 좋은 집단인가. 서로 시샘하는 마음 없이 같이 성장하는 자존감 지킴이들. 함께 책을 읽고, 그 당시의 비슷한 감각을 공유한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한다는 것. 공부를 통해 만나는 관계가 또 어떻게 따뜻해지는 거를 듬뿍 느끼게 된 하루였다. 공부를 싫어하는데 왜 늘 공부를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텍스트를 통해 다른 식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너무 즐겁다. 이틀간 즐겁게 놀았으니, 이제 다시 에세이 쓰는 모드로 돌아가야겠지? 그렇다면 이제 책을 다시 읽...겠습니다.. (훌쩍)

 

댓글 6
  • 2023-06-14 17:40

    "버튼이 사라지는 느낌!" 요 표현 너무 맘에 든다!! 이거 진짜 요즘 느끼기 힘든 것 같은데.....모로가 그렇게 느꼈다니 덩달아 기쁘네~
    내 느낌엔 양생프로젝트에 오신 분들의 "친화력"이 짱인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다니? 이것도 신기하다. 이게 공부에는 어떤 시너지가 될지? 궁금해진다.

  • 2023-06-14 18:04

    저도 오랜만에~~~ 신나게 보낸 워크샵~~~모모님의 활약, 윤경님의 준비, 스프링님의 '아재개그', 소나무님의 눈웃음, 묘선주님의 센스, 루틴님의 호기심, 경덕님의 청일점, 스티핑거님의 반전으로 아주 유쾌한 시간이었어요~~~

  • 2023-06-14 18:37

    그날의 '온도, 습도, 채도.. 명도..' 아낌없이 담아주셨네요!
    후기 잘 읽었어요~~ ㅁㄹㄴㄴ! ㅋㅋ

  • 2023-06-14 23:03

    좋았다!!
    또 갑시다^^

  • 2023-06-15 09:07

    우왕 후기가 감동적일 수 있다뉘..눈물이 핑구르룽 도는 후기입니다.
    '안심'과 '버튼이 사라지는 느낌' '성장하는 자존감 지킴이들' 표현들 조으다.
    같이 공부한다는 감각, 서로가 서로를 예뻐하고 위한다는 느낌, 제가 이래서 문탁네트워크 근처로 이사가 노후를 보낸다고 그러는거예요.^^
    흐미 증말 좋은 후기입니당.
    수고하셨어용. 모로님. 😘

  • 2023-06-15 12:48

    모로님의 음성지원 TTS(Text to Speech)가 되는 것 마냥 그 억양까지 다 느껴지는 기분 좋은 후기였습니다. ㅋㅋ
    어떤 일을 끝내면 습관적으로 그 때 그럴 걸 그랬나. 반성하는 1인으로서,
    1박2일 워크숍 동안 너무 오바했나 싶지만
    저 역시 간만에 어떤 페르소나를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시공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워크숍 가고 싶어서 엄마제사도 당겨 지냈는데 참 후회없이 놀았네요.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367
[6주차 공지]-해러웨이 - 트러블과 함께하기(#1)-가이아여신 대신 테라포밍을 (10)
문탁 | 2023.09.07 | 조회 275
문탁 2023.09.07 275
366
<5주차 후기> 종과 종이 만날 때 8장~12장 (8)
스프링 | 2023.09.04 | 조회 269
스프링 2023.09.04 269
365
[5주차 공지]- 해러웨이 <종과 종이 만날 때> (#3) -끝까지 입니다 (5)
문탁 | 2023.08.31 | 조회 284
문탁 2023.08.31 284
364
<4주차> 종과 종이 만날 때 #2 필멸의 얽힘, 환원불가능한 얽힘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 (4)
김윤경 | 2023.08.27 | 조회 254
김윤경 2023.08.27 254
363
[4주차 공지]- 해러웨이 <종과 종이 만날 때> (#2) -7장까지 입니다 (7)
문탁 | 2023.08.23 | 조회 252
문탁 2023.08.23 252
362
<2023 양생프로젝트> 2학기 3주차 ‘종과 종이 만날때’ 1~3장 후기 (4)
서해 | 2023.08.20 | 조회 250
서해 2023.08.20 250
361
[3주차 공지]- 해러웨이 <종과 종이 만날 때> (#1) - 우리 이거 세 번에 끝낼 수 있을까요? ㅠㅠ (7)
문탁 | 2023.08.16 | 조회 354
문탁 2023.08.16 354
360
<망명과 자긍심> 2부 후기-자기혐오를 자긍심으로 바꾸기 위해 (3)
기린 | 2023.08.12 | 조회 380
기린 2023.08.12 380
359
[2주차 공지]- 은근히 까다로운 <망명과 자긍심> - 대충읽지맙시다!! (5)
문탁 | 2023.08.09 | 조회 308
문탁 2023.08.09 308
358
[2023 양생프로젝트 2학기] 1주차 <망명과 자긍심> 1부 후기 (5)
무사 | 2023.08.08 | 조회 399
무사 2023.08.08 399
357
오매, <세상 끝의 버섯>(애나 칭, 2015)이 번역되었다네요. 그럼 우리 커리도? ㅋ
문탁 | 2023.08.01 | 조회 254
문탁 2023.08.01 254
356
[1주차 개강 공지]- 엘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부터 할게요 (6)
문탁 | 2023.07.23 | 조회 359
문탁 2023.07.23 359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