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6월 18일 <평범한 여자들의 비범한 글쓰기> 개강 공지

겸목
2023-06-0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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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평범한 여자들의 비범한 글쓰기> 시즌2 6월 18일 일요일에 개강합니다.

 

첫 시간에는 정희진의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읽습니다. 정희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영화를 볼 때 특정 부분에 깊게 '꽂힌다'. 그리고 그 이유와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그 '꽂힌' 부분을 통해 나 자신을 알 수 있고, 그 부분에 나의 세계관이 압축되어 있다고 믿는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의 경험, 위치, 동일시한 부분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하면 영화보다 더한 나의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정희진의 글을 읽으면 그처럼 쓰고 싶은 야망이 마구 샘솟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야망 이글이글거리며 써봅시다.

 

이 책 속에는 '우울증' 치유 영화 <그래비티>, '정신을 차리자'는 슬픈 주문을 거는 <비밀은 없다>, 기차 밖의 타자는 희망인가 질문하는 <부산행>, 나이 듦을 중심으로 본 <우리들의 블루스> 등 우리가 좋아한 영화와 드라마들의 리뷰를 볼 수 있습니다.

 

6월 18일 일요일 세미나 하루 전인, 6월 17일 토요일 오후 10시까지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을 다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부분 2군데 표시해오세요. 그냥 표시만 하지 마시고, 이 공지글에 댓글로 함께 읽고 싶은 부분 옮겨 써주시고, 그 부분이 왜 좋은가? 또는 왜 문제적인가에 대한 간단한 메모 남겨주세요. 그리고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에 대해서도 메모 남겨주시면, 그 메모들을 중심으로 세미나 진행하겠습니다. 

 

밑줄 친 부분이 시즌1과 달라진 운영방식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개강일에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책 읽고, 마음에 드는 부분 2군데 정하시고, 그에 대한 메모 댓글로 토요일 오후 10시까지 남겨주세요. 

 

그럼! 6월 18일 일요일 문탁네트워크 2층에서 뵙겠습니다. 이렇게 11주의 글쓰기 대장정 시작합니다! 두둥~

 

 

 

 

 

댓글 12
  • 2023-06-16 20:52

    1.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력도 없고, 말해봤자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 모녀를 합친 몸만큼 상처도 두 배로 커질 것이다.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어차피 인생에 해결은 없으므로, 그저 들어주며,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걱정을 하지 않을 사람. 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안 할 사람. 내 말을 잊어버릴 사람.(137쪽)

    내 생각에 <화양연화>의 주제는 인생의 본질인 ‘어쩔 수 없음’이다. 영화 속의 두 사람, 어쩌겠는가. <피고인>에서 조디 포스터는 타인과 다름없는 엄마에게, <화양연화>에서 량차오웨이(양조위)는 벽에다 대고 말한다. 민폐도 없고, 누구에게도 부담주지 않으면서 말하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앙코르와트에서, ‘들어 달라’가 아니라 ‘나는 말했다’가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아는 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또 있다. 모든 영화 감상은 자의적이고,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감동도 크게 다르다. 둘 다 외롭고 아플 때 보면 더 많이 보이는 영화다. 작품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좋다’. 난 동일시했다. <피고인>, <화양연화>를 보고 나는 머리가 흔들리도록 울었다. 인생에는 ‘안 되는 일’이 천지다. (어떤 말은) 말해서 무엇하리. 지금 나는 말할 사람을 찾기 전에 숨을 고르고 글을 쓴다. (141쪽)

    --> 이 부분을 읽으며 눈물이 울컥 나올 뻔했다. 아마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아주 순간적으로 지나갔을 수도 있다. 그 감정이 서러워 빨리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울컥 치솟는 눈물을 떠올리게 한 글에서 나는 저자에 대한 신뢰를 느낀다. 그도 이런 감정을 아는 사람이구나. ‘벽’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나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밖에 토로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겪어서 아는 사람이구나! 하는 신뢰감이다. 벽에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는 글쓰기를 선택했다. 인생이 ‘어쩔 수 없음’이라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 고통을 적절히 말하기이다. 말이 잘 안 나오고, 생각에 진전이 없지만, 그래도 말해보기, 써보기. 그리고 그 쓰기로 나는 변화가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럴까? 이건 미련일까? 인생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2. 그리하여 자칫, ‘자기만족적’ 텍스트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사실 <기억의 전쟁>은 누구도 쉽게 비판하기 어렵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장애 문제를 다루어 온 페미니스트 여성 감독’이라는 정치적 올바른 ‘이길보라’의 위치 때문이다. 흠잡을 데 없지만 논쟁적이지도 않은 이유다. (242쪽)

    문이 열리고 내면의 모순이 드러나면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충돌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을 하기는커녕 나 자신에게조차 말이 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이랬다저랬다 하고 뭉개버리고 만다. 상황에 개입된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 보호하고자 진심을 말하지 않는 한편, 누가 자기 진심을 읽으려고 하면 상대가 마음에 드는 가장 위쪽 상태만 드러내고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 의식의 수풀 안에 감춘다. (248)

    거듭 말하지만 나는 <기억의 전쟁>이 ‘착한 작품’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도전하는 텍스트가 되기를 바란다.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보고 자기 위치성에 근거하여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작품이 한국인의 양심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폭발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가 무엇을 몰랐던가. 무엇을 숨겼는가를 아는 실마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전쟁>이 그 실마리다. 두려운 실마리다. (248~249쪽)

    --->‘정치적 올바름’이란 것이 논쟁을 가로막을 때가 많다. 힘들게 싸우고 있는데 도움을 못 줄망정 기운은 빼지 말아야 한다는 눈치로, 입을 다물게 되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관행’처럼 되어버리는 일들도 많다. 피해자와 사과와 금전적 보상과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들의 난맥상은 토론의 의지를 주저앉혀 버린다. 그 복잡함을 정희진은 뭉개지 않고 예각화시키기 위해 욕먹을 작정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태도가 그의 글의 설득력을 가져온다. 입장 자체가 아니라 공부가 설득력을 가져온다는 그의 태도를 나도 견지하고 싶다.

    *토욜 장터에 나가야 해서 미리 올립니다. 요런 형식으로 올려주시면 됩니다. 파일 첨부하지 마시고 그냥 올려주세요. 일욜에 봬요~

  • 2023-06-17 09:15

    1.내가 쓴 글이 나를 만드는 과정을 넘어 내가 내글로 재귀함으로써 새로운 내가 탄생하기를 희망한다.(35)
    ; 초고 쓰기는 여전히 힘든데, 코멘트를 듣고 수정하는 과정을 즐기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 내가 원하는 건 새로운 나로의 탄생인 듯.

    2.여성에게 유일한 무기는 언어밖에 없다. 우리가 총칼로 싸우겠는가.’미러링’이라는 이름의 욕설로 싸우겠는가.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한 해방은 없다. 여기서 공부의 첫단계는 이론을 적용하지 말고 ‘지금 여기 자신’의 위치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다.(49)
    여성끼리 작은 공부 모임을 만들어 공부’만’ 해도 지구의 반을 구할 수 있다. 지역 도서관에 여성주의 책을 희망 도서로 신청하고, 온라인에 성의 있는 댓글을 달자. 잔물결이면 충분하다. (52)
    ; 이론을 현실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지금 여기 나의 현실을 그대로 머물러 보기를 잘 안 해왔던 듯. 그래도 글을 쓸 때 지금 나의 현실을 돌아보게 됨.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을 넘어 왜 공부해야하는지를 확인한 부분.

    3.사랑은 상대(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다.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나의’ 사건이다. 흔히 말하는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행위,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결혼, 이성애주의, 로맨스 문화, 헌신, 희생 따위를 포함하는 제도와 문화적 각본(cultural, 이데올로기)이 있다.(중략)바람직한 사랑은 없다. 사랑은 정의하고 합의를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추앙(존중)하는 사랑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사랑은 있다.(125) 좋은 관계도 지속되려면 상호 노력이 필수다(128)
    ; 사랑은 존재와 존재가 만나 섞이고 싸우면서 많은 변화가 있기도 하고, 제도와 문화적 각본이 펼쳐지는 현장이기도 하니, 이 부분을 잘 우려낸다는 심정으로 사유해보면 좋겠다. 이번 에세이는 이 작업을 해보기로!

  • 2023-06-17 14:15

    시즌2 계획서 올립니다.

  • 2023-06-17 15:49

    안녕하십니까?
    오랫만입니다. 이제보니 시즌2에서는 스터디 스타일이 약간 바뀌는 것 같습니다.
    시즌 1처럼 생각하고,
    준비안된 상태에서 끄적거림을 한 것을 파일로 그냥 올려보겠습니다.

  • 2023-06-17 20:43

    1)부분적 관점은 모두를 똑같이 '여럿중 하나'로 보는 탈정치가 아니다. 자기 입장의 사회성과 정치학을 분명히 하면서 인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실천이다. 인식 대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말하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 신원,위치 채현을 밝혀야 한다.다시 강조하면 본디 말하기,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쓰는 것이다.<24>

    부분적 관점의 의미를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어떤 영화가 히트하면 아류작이 나오는 것이 대표적이다. 구체성, 스토리텔링, 몸에 닿는 감동은 어느 순간에만 성취될 뿐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지 않는다.맥락 안에서만 가능하다.부분적 관점은 내 입장(젠더,성별,나이..)에서 기존의 보편성에 문제제기 하는 변혁적 관점이다. 독창적 사유와 글쓰기는 덤이다. 이 세상에 적응하면서 '착하고 그럭저럭한 아름다운? 글로 사랑받으려는' 삶(몸)에서 어떻게 독창성이 나오겠는가.글은 사람의 결과다.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26>

    --> 부분적 관점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급진적이면서 실천적인 ..인간의 삶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들 그건 너의 피셜이라는? 말을 자주 하거나 듣곤 하는데, 매순간 형성되는 객관성을 확보하며 피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부분적 관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부분적 관점의 태도가 글이 그 사람의 결과라는 말과 어떻게 부합되는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이번 시즌 글쓰기는' 글이 사람의 결과'라는 말을 자주 떠올릴 것 같습니다.

    2)프랭키는 매기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 그 행위가 죽을때까지 잊히지 않을 고통으로 프랭키 자신을 파괴하리라는 사실을 알지만, 오로지 상대방 매기를 위해서 행동한다. 자기의 고통보다 상대방의 고통을 더 존중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이처럼 쉽지 않기에 사랑할 줄 아는 이도 드물고 사랑받을 줄 아는 이도 드물다. 사랑은 대신 죽어주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매기에 대한 프랭키의 사랑의 기반은 아낌과 존중이다. 상대에 대한 전적인 수용, 응원과 지지, 기도, 개입하지 않고 바라봄, 상대가 필요한 것을 보이지 않게 행하는 것, 아픈 사람을 살게 하는 마음씀.. 이는 자신의 에고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자신을 비워야 가능한 일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많지만 나는 그 중 최고가 '밀당'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밀당이 최고로 싫다. <128>

    --> '자기의 고통보다 상대방의 고통을 더 존중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어떤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상대방의 의견, 안전, 생각을 존중한다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고통을 존중한다는 말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고통을 존중한다는 것이 프랭키의 선택과 같은 그런 것이라면.. 저는 사랑을 해본적도 받아본적도 없는 사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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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17 20:48

    1.불안이 정상이다. 불안은 몸의 외부와 자신의 몸이 불일치 할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성의 반응이다. "안정돼 보인다" 나는 이말,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안정을 욕하는 현실이 싫다. 안정만큼 계급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넉넉하고 아쉬움이 없고 모든것이 자기 뜻대로 되며 사랑 받고 아프지 않은 상태. 어떤 부정의에도 분노하지 않는 우아한 세계, 불일치와의 투쟁이 필요 없는 삶, 이런 인생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동시에 피억압자를 '비정상'으로 내모는 말이다. (p63)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우리가 끼고 있는 렌즈의 색깔에 달려있다(p67)
    : 안정적인 삶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작가의 이 문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안정이라는 단어에는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인 생활의 안정도 있지만 마음의 안정도 있다. 이런 마음조차 계급적인 단어라고 애기하는 것일까? 영화비밀은 없다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주인공에 대한 애기이다 보니 그렇게 표현된것일까?

    2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력도 없고 말해봤자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 모녀를 합친 몸만큼 상처도 두배로 커질것 이다.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어짜피 인생에 해결은 없으므로. 그저 들어주며,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걱정을 하지 않을 사람. 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안 할 사람. 내말을 잊어버릴 사람. (p138)
    :누군가에게 애기를 한다는 것은 해결을 바라는게 아닐때가 많다. 자기 애기를 들어 달라고 하는 마음을 알면서도 판단하고 해결하려고 할때가 많다. 내가 조금 더 살았다고. 내가 조금더 아는게 많다는 이유로. 남을 판단하고 남의 인생을 가위질 할때가 있었다.(아마 지금도 순간순간 하고있지만.) 나에게도 내 말을 잊어버릴 사람이 필요 한것 같다.

  • 2023-06-17 22:33

    1.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에서 ' your' 는 나(흑인)는 당신(백인)이라는 주체(one)가 규정한 타자( the others)가 아니라는 뜻이다. 흑인은 흑인이지 백인과의 관계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 아니다"가 아니라 "나는 흑인일 뿐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백인 사회의 신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누가 인간이고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를 되묻는 일이다. (100p): 나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어떠한 기준(서구문명, 백인,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구분'되어지는 것, 그것이 '차별'로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 반복하여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나 혹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타자화'함으로써 배제하게 만드는 '기준'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 '그리고 사람(여성)들은 그를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사람들이 먼저 그를 찾지, 그가 먼저 원하는 경우는 없다. 만일 그가 먼저 사람들을 원한하면, 관계의 법칙은 깨질 것이다. ~ 마을 사람들이 핀을 편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신과 같을 수는 없는 사람, 자기 기준에서 '차이'가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외이며 편안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타자라고 부른다' : 만약 장애인인 '핀'이 적극적으로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했다면 사람들은 핀을 예전처럼 좋아해줄 수 있을까? 사회적 약자로 지칭되는 이들(예: 장애인)이 동정이나 배려의 대상일 때 사회는 보통 너그러운 시선을 보내지만 핀으로 대변되는 이들이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처럼.

    3. '하지만 장애인으로 규정당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느 정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다': 내가 좁게 해석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문장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에 의해 '타자'로 규정된 이상 삶의 선택권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은 굉장히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 2023-06-17 22:34

      2,3번: 218~219 페이지입니다.

  • 2023-06-17 23:05

    1. 나는 언제나 나만의 부분적 시각이 독창적 글쓰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부분적 시각은 당파성을 전제한다. 당파성은 글의 필수 요건이다. 아니, 당파성이 없는 글은 없다. 흔히 말하는 무당파도 당파니까. 주장이 없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 주장은 선언이 될 것이 아니라 설명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영화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나의 글쓰기 레시피 공개서다. (14-15쪽)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 영화에 대한 내 '비평'은 이랬다. "내 인생을 돌려주세요." 솔직히 영화 속 주인공, 배경 등이 너무 아름다워서 짜증이 났다. (151쪽)

    --> 정희진의 글쓰기 레시피는 솔직함이었다. 모든 글들은 당파성을 전제한다는 말은 자신만의 솔직함을 설명해 내는 글이 독창적이라는 말일 것이다.

    2. 세상에는 진실도 객관도 없다. 그것으로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보이는 세계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만이 위험하다. 나는 영화나 책을 집중해서 보지만, 완전히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노력하는 편이다. 본 것이 지식으로 자리 잡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앎은 기존의 앎을 비워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148쪽)

    앎이 내가 본 것과 안 본 것 사이에서 정해지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자신이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싸우기 쉽다. 전체도 부분도 없다. 앎의 범위를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상이 앎이요, 삶이어야 한다. (150쪽)

    -->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똑 같은 사안도 달라보인다. 우리가 내가 봤으므로, 겪었음으로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이 될 수 있는지 항상 자각해야 할 것이다. 고정된 것은 없다.

    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이제까지 근대의 주체가 아니었던 여자, 아이, 장애인, 자연을 기차 밖에 살게 하거나 생존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타자들은 진정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여성과 아이, 동물은 오염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들도 순수하지 않다. 이들이 순수하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내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감독 자신이,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주체이고,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대상조차 지정할 수 있는 조물주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새로운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스스로 '꺼지면' 안 되는가. 자리에서 내려오라. 인류와 지구를 해방하려 하지 말고 그냥 하방하라. (221쪽)

    --> 감독들의 시선에 대한 불편함에 대해 예리하게 지적했다. 또다시 네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냐?를 묻는다. 타자의 위치를 받아들이라고.

  • 2023-06-17 23:10

    1.
    (44쪽) 지금 한국 남성 문화는 극소수 여성 인구가 과잉 재현된 ‘서울 강남에 고학력 전문직 중산층 이성애자 금수저 여성’을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하며 분노하고 있다.

    (56쪽)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 해야 한다’. 여성을 위한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63쪽) 이 영화에서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는 할 일이 많을 때 나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본 것과 남(편)이 말하는 것이 불일치할 때 나온다. 삶에서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때다. 그럴 때 세계는 혼돈(dis/order)의 연속이다. 질서(order)는 ‘저들의 것’이다. 저들의 질서가 나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나만의 삶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 그러니 우리는 오로지 자신만의 판단을 믿고 마법을 걸 수밖에 없다.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외롭고 서러운 일이다.

    - 나는 ‘여성’이라는 취약성을 어떻게 ‘극복’해 왔는가. 고학력이 됨으로써 원가족에서 발언권을 얻었고, ‘뛰어난’ 남성이 선택하지 않는, 꽤 ‘괜찮은’ 여성들이 선택하는 교사라는 ‘전문직’이 됨으로써 사회적 인정을 받았고, 가부장제에 염증을 느끼는 남자와 결혼하여 룸메이트식 동거를 함으로써 아내의 ‘역할’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를 하며 나는 어쩔 수 없이 ‘여성’이구나를 느낀다. 그리고 (의지와 능력의 부족으로) 이를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다고 느낀다. 나는 요새 아이를 키우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복잡함에 대해 생각하는 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내가 느끼는 고통을 아이가 주는 행복으로 퉁침으로써 ‘극복’하지 않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외롭고 서럽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2.
    (150쪽) 앎이 내가 본 것과 안 본 것 사이에서 정해지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자신이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싸우기 쉽다. 전체도 부분도 없다. 앎의 범위를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상이 앎이요, 삶이어야 한다.

    (246쪽) 저항은 우리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위한 것이지, 피해자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아니다. 가해자의 권력과 지위는 피해자 없이 구성되지 않는다. 나의 고통은 상대방 권력의 크기를 의미한다. 물론 이는 군 위안부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이 피해에 대한 관점을 전환하는 의식과 문화의 탈식민을 의미한다.

    (24쪽) 부분적 관점은 모두를 똑같이 ‘여럿 중의 하나’라고 보는 탈정치가 아니다. 자기 입장의 사회성과 정치학을 분명히 하면서, 인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실천이다. 인식 대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말하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 신원, 위치, 체현을 밝혀야 한다. 다시 강조하면, 본디 말하기,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쓰는 것이다.

    (225쪽) 이때 경합하는 다양한 ‘나’의 위치도 중요하다.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내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김태리와 김민정 배우가 맡은 역에 자신들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중산층) 여성들의 공주병, 주인공병은 늘 나를 불편하게 한다.

    - 육아 초창기 남편과의 갈등이 소모적이었던 것은 우리의 갈등이 진실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자신이 진실이라 우기고,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투쟁. 진실과 진실의 투쟁으로 얻은 것은 서로에 대한 불신이었다. 시즌1 공부를 통해 나는 그간 나의 저항이 투쟁으로서의 저항이었음을 알게 됐고, 나 자신의 변화와 성장으로서의 저항으로 바꿔야 한다는 관점을 얻었다. 그걸 위해 필요한 노력은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 내 고통에의 직면. 내 사회적 신원, 위치, 체현에 대한 자각을 하지 않으면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 <미스터 선샤인>을 보지 않아 저자가 쓴 문장의 의도를 정확히 모르겠으나, ‘(중산층) 여성의 공주병과 주인공병’은 내가 앓고 있던(있는) 병이 아닐까 싶다. 내 고통을 과장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외면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루고 싶다.

  • 2023-06-17 23:36

    p148 세상에는 진실도 객관도 사실도 없다. 그것으로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보이는 세계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만이 위험하다. 나는 영화나 책을 집중해서 보지만, 완전히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노력하는 편이다. 본 것이 지식으로 자리 잡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앎은 기존의 앎을 비워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저자와는 확연한 내 삶의 태도 때문에 밑줄치게 되는 문장이다. 세상에는 진실도 객관도 사실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얼 지침으로 삼아 나아가야 할까. 다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염두에 둬야 한다는 말은 확신에 찬 내게는 꼭 필요한 말이다.

    p167 지금 인간이 자신과 지구를 살리는 길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생태사회주의가 주장하는 탈성장만이 답이다. 내겐 서울의 강남 좌파든 강남 우파든, 열심히 사는 부자들의 인생이 최악이다. 이들은 자연 파괴를 가족 단위로 세습한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사회적 성취가 아니라 생명체로서 도리, 자연과의 관계에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전진한다? 역사적 평가에 맡긴다? 여기서 역사는 발전주의에 기반한 근대 역사주의의 산물이지, 사실이 아니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가 아니다. 이제 혁명은 질주하는 자본주의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여야 한다. "무의미한 인생"이야말로 '없는 우리'의 최고 무기다. 기존의 역사는 상대화하면 그만이고, 특히 인간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타인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충분하다 생각하면서도 매출이 줄거나 멈추는 건 적응하지 쉽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해서 사회적 성취를 이뤄야 내 존재 이유가 있는 것만 같다. 내 일상에서도 탈성장이 답이다. "무의미한 인생"이어도 괜찮다는 말을 내게도 아이에게도 해주고 싶다.

  • 2023-06-1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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