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에세이

새봄
2023-12-02 21:30
61

 

복습의 시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무엇이든 가능하다』(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22)는 묘한 책이다. 처음 책을 들었을 땐 제목이 생뚱맞더니, 읽어나가기 시작하자 저자의 압축적인 요약에 무슨 말을 전하려는 것인지 쉽지 않았다. 노트에 인물들의 관계를 적어 나가면서부터 앰개시 마을에서의 일들이 조금은 선명해졌다. 책을 읽고 이야기 시간에 샘들의 반응도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랬던 우리는 지난 워크숍 시간에 다시금 『무엇이든 가능하다』에 대해 기나긴 이야기를 나눴고 난 우리를 매료시켰던 이 책을 다시 천천히 읽어 보기로 했다.

토미와 피트

첫 번째 단편인 「계시」의 토미는 서른다섯 살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농장이 불에 타는 불행을 겪지만, 쇠락한 타운인 앰개시로 이사와 학교 수위로 일하며 그 시간을 버티며 통과했다. 노년의 그는 자신이 “아는 사람 가운데 그에게 잘해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하고 베트남 참전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지닌” 찰리와 그의 부인 메릴린에게 연민을 느낀다. 학교에서 일하며 루시의 겁먹은 모습과 그의 목이나 팔에서 멍 같은 것을 발견하곤 했고 그의 아버지 켄 바턴의 성적인 행동을 아내 셜리에게 언급했지만, 고민 끝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두 번째 결론을 내린다. 고립된 집에서 단절된 생활을 하는 피트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려고, 그의 불운한 어린 시절이 알기에 아무도 찾지 않는 그를 애써 찾아간다. 과거의 일로 괴로워하는 피트에게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과 싸워왔다고 그만 흘려보내라고 제안한다. 아마도 그런 토미의 말로 인해 피트는 어머니의 “바느질과 수선”이라고 쓰인 간판을 망치로 때려 부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에 투쟁이 있는 거지. 혹은 다툼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언제나 존재하지. 내가 보기엔 그래. 그리고 자책한다는 것, , 자책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할 수 있다는 것-그것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주지(「계시」, p41)

 

뭘 할지와 뭘 하지 않을지-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는 것-사이에는 투쟁이 혹은 다툼이 있고 그런 투쟁 안에서 피트의 아버지 켄 바턴은 전쟁으로 끔직한 일들을 했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남자들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듯 턱에 힘을 주고 화난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었겠지. 토미는 이주일 뒤에 보자고 피트에게 제안하며 두 번이나 자신의 진심이 아님을 느낀다. “진심은, 지금 옆에 앉은 이 불쌍한 아이-어른을 정말로 두 번 다시 찾아오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진심이 아님에도 피트에게 “내가 고맙지”라고 말하며 그에게 자신의 곁을 내주려 하고 긴 시간 루시를 지켜보는 토미의 모습에서 나는 어른-어른을 느낀다.

11월 초 글쓰기 수업을 빠지고 중국여행을 다녀왔다. 에코프로젝트 샘들과 루쉰의 고향마을과 항정우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여행 셋째 날 늦은 시간까지 맥주와 사케를 마시며 이야기하던 중에 한 샘은 문탁에서 공부하는 20대 청년 C와 여행 다녀온 일을 물으며 동행한 내게 “어른”이라는 말을 건넸다. 난 고개 저었고 그는 “그럼 니가 어른이지, 얘냐”라며 한소리 했다. 난 내가 어른이라는 말에 왜 그리 고개 저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면 내겐 어른이란 말에 허들이 있는 것 같다. 토미가 자신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피트를 찾아가고 루시를 긴 시간 지켜보는 것처럼 어른이란 조바심내지 않고 자신의 이해를 떠나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난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도티와 스몰부인

<도티의 민박집>의 도티는 지독히도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서-6학년때 반 친구들 앞에 불려 나가 옷에 묻은 얼룩을 지적받으며 생리대를 살 돈도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성인이 된 후에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어느 가게에 들어가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다가 나가 달라고 말하는 순간이 오리라 예상했다. 그는 누구든 자신의 민박집에서 결코 그런 느낌을 받지 않게 하려고 애썼고 불안해 보이는 스몰부인-“불안해하고 약간 징징거리며 남편에게 무시당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여자”-에게 거의 연민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차 한잔을 제안한다.

스몰부인는 지나치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 몰두했고 도티의 선의에 감사는커녕 본체만체하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 뒤에 창피해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흔한 불만, 즉 지금껏 삶이 자기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같지 않았다는 불만 때문에 자신의 고통 안에 매몰된 사람 같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존재인 듯 말하도록 키워졌을 것이고 어린 시절의 도티처럼 여전히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 마땅하다고 느낄 것이다.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근처에 모르는 사람들이 앉은 아침식사 자리에서 함께 노래를 불러주는 남편이 있다는 사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타인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었던 도티지만, 스몰부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서 잼에 침을 뱉는 행동을 하며 짧은 쾌감을 느낀다. 세미나 시간 우리 모두는 스몰부인과 같은 면이 있지 않냐는 샘의 말에 난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다. 오히려 스몰부인 같은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겠냐는 말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게도 스몰부인과 같은 면이 있다.

내겐 스몰부인처럼 지나치게 자신에게 몰두하는 아이 같은 모습이 있다. 몇 년 전 20대 후반 조카는 내게 카페 창업과 관련된 상담을 했다. 난 그의 말 몇 마디로 상황을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 “엄마에게 의지하지 말고 우선 카페 알바부터 하라”는 거친 말이 나갔다. 그 말로 그날의 점심식사는 엉망이 됐고 한동안 조카와는 냉랭한 시간을 보냈다. 자립하지 않는 캥커루족 청년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간의 조카의 행동에 투영되고 바로 공격적인 말이 나간 것이다. 며칠 전에는 코난과 작은 언쟁이 있었다. 좋고 싫음의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와 구분하라는 바람의 말을 듣고 코난은 내가 종종 좋고 싫음의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끌고 가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난 기후정의나 소득불평등 같은 것이 어떻게 좋고 싫음의 문제일 수 있는지 따졌고 “그럼 네게 옳고 그름의 문제는 무엇이냐” 물었다. 당연히 코난은 이런 나를 슬슬 피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까운 사람이 입을 꾹 다물고 피해버리는 상황이 내겐 드문 일이 아니다.

문탁에서 보낸 2

지난 피드백시간 겸목샘의 말은 날카로웠다. 난 3페이지에 맞춰 소제목과 제목도 다 정해놓고 큰 문제없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샘의 오케이 사인을 기다렸다. 오케이 사인만 받으면 덮어놓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에이미와 이자벨>을 마져 읽어야지. 이번 시즌은 이 글만 쓰면 끝나는구나. 총 4편의 글을 써야하는 수업인데 난 여행으로 2편밖에 못 써서 찜찜했지만, 마무리 에세이를 완성했으니 이제 정말 끝이구나. 끝나고 샘들과의 뒷풀이를 생각하며 샴페인을 들고 가야지. 나름 즐거웠다. 샘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산만하다. 위험한 시기. 느슨해지려는 타이밍. 단도리. 긴장. 눈치채고 알아차려야 한다 등 샘의 말을 들으며 내가 적은 단어들이다. 이건 내 글에 대한 피드백인가 지금 내 상황에 대한 피드백인가. 헷갈린다. 곰곰이 들여다보게 된다. 어쩌면 지금 내겐 토미와 피트, 도티와 스몰부인이 어른이냐 아니냐의 구분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작년 초, 계속해오던 일은 하고 싫지 않고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는 답답함이 있었다. 우선은 문탁에서 2년여 열심히 공부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면 뭔가 답이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난 출근길을 뚫고 매주 수요일 용인으로 향했다. 성실하게 출석하고 메모하고 후기를 쓰고. 마지막 에세이까지 써냈다. 작년 에코 시즌1 에세이는 1페이지를 겨우 채웠지만, 이젠 2페이지, 3페이지 에세이도 쓸 수 있다. 여전히 가스불은 못 켜지만, 밥 당번도 하고 분리수거를 어디에 해야 하는지도 안다. 공동체생활을 안 해봐서 내게 공동체력(?)이 있을까 걱정했지만, 난 의외로 괜찮은 것 같다는 자평도 하게 된다. 에코샘들과 중국여행도 잘 따라다니고 칭찬도 받고. 나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나름 평가를 하며 뿜뿜했다. 처음의 긴장은 사라지고 어느 정도 느슨해지려는 마음은 나도 알고 있었다.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식물 집사가 돼서 내 시간을 채웠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재미에 2년여 그림 배우기로 내 시간을 채웠던 것처럼 문탁에서의 공부와 활동으로 내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어쩌면 밥벌이 일에서 식물과 그림으로 관심이 넘어간 것처럼 공부도 그런 것이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토미처럼 긴 시간 지켜보는 건 내겐 쉽지 않은 일이다. 현실에서 루시를 만난다면 아동학대전담기관이나 경찰에 신고하고 내 할 일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 같다. 나는 뭔가에 쉽게 홀린다.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쉽게 빠져들고 쉽게 이상화한다. 이런 면이 “순수하다, 순진하다”라는 주위의 평을 듣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누구든 이상적인 모습만을 보일 순 없다. 그걸 어찌 모르겠는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손절하는 사람을 어른스럽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조바심내지 않고 자신의 이해를 떠나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줄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이다. 섣부른 평가나 판단이 아닌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이다. 잘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어른이고 다시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어른이다. 나만 옳다는 확신은 내 안에 있는 아이-어른의 모습이다. . 문탁에서의 2년여의 생활이 우선은 이런 나의 모습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공부로 어른이 될 것이라는, 타인에게 자리를 내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아이같은 마음이다. 몇 번의 연대하는 자리에 함께 했다는 이유로 내가 타인에게 자리를 내주는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을 일이다. 내 가까운 사람은 이기적이어서, 욕심이 많아서 자신에게 갇혀있다고 평가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고 시즌2 마지막 다짐인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적절한 격려와 존중처럼 느껴지는”(김금희,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마음산책, 2021, p 156) 온난함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다시 생각해본다. 시즌3 공부는 시즌2의 복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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