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3.최종에세이

시소
2023-12-02 20:07
63

 

메리 & 앤젤리나 탈출프로젝트

-「미시시피 메리」를 생각하며-

    1.자라나는 아이들

  남자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남자애들 키우는 엄마 같지 않다가 나에게 건네는 첫마디일 때가 많다. 아이들은 부모의 의견을 잘 따라주었고 떼쓰거나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아서 소리 높여 혼을 내거나 소리칠 일이 없어서 일 것이다. 그 당시 아이들은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무엇을 해도 혼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런 아이들의 부탁을 무리하지 않다면 들어주다 보니 애들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시기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는 것만 해도 예쁜 시기이다.

엄마의 이혼시기와 아이들의 사춘기가 겹쳤다. 큰 사고 한번 안친 큰애와는 다르게 작은 아이는 매일매일이 사건의 연속이었다. 동급생과의 다툼으로 학폭위가 열리고 태도 문제로 학교와 학원에서 수시로 연락이 왔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가출을 안 하니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아이들의 요구사항이 내 기준으로는 무리하다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최신사양의 핸드폰을 요청 할 때는 난감했다. 일을 하기위해 핸드폰이 필수인 나도 오래된 구형을 쓰고 있는데 공부가 주업인 학생이 최신 폰을 꼭 사야 하는지에 대해 애들과 논의하다 아이들의 요구에 항복을 하는 것이다. 이혼을 하며 애들에게 환경적 정서적 영향을 적게 하기위해 이혼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는 신호를 계속 보냈고 애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했다. 거기서부터 잘못된 신호를 보낸 것 같다. 달라진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엄마의 마음과 애들의 마음을 서로 들여다보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되는 지점이다. 그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같이 모여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아빠가 사라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 큰애와는 이혼사유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작은애는 미성년이라 애기하지 못했다.) 질풍노도의 시기. 그 시기에는 부모가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의 말이나 행동에 비판이나 질책의 말을 할 수 없어서 일방적으로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참았던 것 같다. 물론 아빠의 부재로 상실감을 느꼈을 아들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도 참아야 하는 시기였다.

  내 키와 비슷하던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되자 내 키를 훌쩍 넘었다. 외형적으로 성인이 되어가는 아이들을 보니 이제는 내리 사랑이 아닌 서로를 배려해 주는 관계로 접어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집안일에 업무분장을 하였다. 화장실청소는 큰아이. 분리수거는 작은아이. 작자 방청소는 자기가. 일요일 오전은 다 같이 대청소. 하지만 애들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학원 수업이 많아지자 자기 역할을 못하게, 아니 안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화를 내다가 일하는 엄마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다 지쳐서 그냥 내가 하고 말자가 되면서 집안일도 전적으로 내가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집안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내가 배려 받지 못한다는 생각과 이기적인 아들에 화가 났던 것 같다. 수능은 끝났지만 논술시험이 안 끝났다는 이유로 여전히 집안일은 온전히 내 몫이다.

  부모의 역할은 어디까지이며 성인이 된 아들과 나는 어떤 관계 맺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타인에게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욕망이 있고 내 식구에게는 무한한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나는 어떻게 아들과 살아가야 할까?

 

  2.심란한 마음

  큰아들이 올2월 군에 입대를 해서 첫 면회를 가족들이 함께 갔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은 조금 늠름해 졌고 어른인 척 하려고 노력했다. 즐거운 식사자리가 끝나고 커피숍에 이동해서 아들이 한 말이 발단이 되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 다니고 싶은데 엄마 눈치가 보여서요. 학교를 그만 다니고 bar를 하고 싶어요. 그 말에 여동생은 경악을 했다. 보통 수능 끝나고 대학을 다니면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군대 가기 전까지 아르바이트도 안하고 자기 손으로 돈도 안 벌어본 놈이 무슨 돈으로 bar를 하고 싶다고 하냐면서 본인 노력은 안하고 언니에게 기대는 그 생각이 싫다고 했다. 웬만한 월급쟁이 월급을 학원비로 쓰는 나를 보며 ”언니는 애가 학원가고 싶다고 하니 학원을 보낸다고 하고 조카는 언니 때문에 대학을 왔다고 하니 시간이 지나 언니 탓을 할 텐데 언니는 어찌 그리 태연할 수 있어“라고 물었다. 그때 나는 군대라는 공간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공간이고 젊은 시절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행동하지 않고 생각을 하는 것인데 뭐 그리 화낼 일이냐고. 하지만 동생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막상 아들이 그런 선택을 하면 내가 어떻게 하리라는 것을. 나의 무한 희생정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내가 얼마나 전전긍긍할지 나를 48년 보아온 사람은 아는 것이리라.

  어려서부터 해외에서 유학생활은 하다 귀국한 조카는 자신의 인생이 꼬인 건 엄마 때문이라며 엄마 탓 만 하다가 이제 원망의 대상인 엄마와 같이 일을 하고 있다. 조카는 마땅한 일을 찾기에 스펙이 부족했고 바닥에서 시작하기에는 소비수준이 너무 높았다. 현재 우리조카는 30살이다. 안쓰럽게만 느껴지던 조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든 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독립하지 못한다고 생각이 될 때이다. 아르바이트 수준의 일을 하며 소비수준을 낮추지는 않으니 엄마에게 경제적으로도 정식적으로도 독립하지 못한다. 큰조카를 보며 애들을 키울 때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게 독립적으로 키워야지 생각했지만 막상 내 아이의 문제에서는 나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우리아이들의 10년 후의 모습이 조카의 모습과 오버랩 되는 것 같아 심란할 때가 있다.

  나는 두렵다. 아이들이 독립된 성인이 되지 못할까. 그래서 나에게 캥거루처럼 계속 기대고 있을까.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하는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보다 내 노후가 흔들릴까 걱정하는 내 마음이 더 두렵다.

 

  3.「미시시피 메리」 앤젤리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

  세미나 시간 중에 [미시시피 메리]의 앤젤리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는 앤젤리나는 그럴 수 있다고 의견을 표시했었다. 내안에도 어린 아이가 있어서 내가 힘들 때 엄마에게 그러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에게 투정부리고 싶은 마음과 원망하고 싶은 숨은 마음이 내안에 있다. 항상 의연한척 감정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표현을 못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메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숨이 막혔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줄 생각이 없었고 그리고 싶지도 않았는데(p163) 앤젤리나는 상처받았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다. 같은 성인으로서의 타인에 대한 이해가 아닌 엄마의 부재에 따른 본인의 상실감에만 몰입되어있는 앤젤리나는 여전히 아이이다.

그럼 입장을 바꾸어서 앤젤리나 입장에서는 어떠했을까? 모든 걸 다 이해해줄 것-아빠의 외도에도 참고 병간호를 하고-같았던 엄마와의 애착관계가 깊었던 딸 입장에서는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엄마)이 떠난 것이다. [미시시피 메리]가 아닌‘미시시피 앤젤리나’로 쓰여 졌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메리가 긴 시간 인내하고 기다리는 동안 앤젤리나는 자신의 세계가 깨어질 수 있다는 신호를 받지 못했을 수 있다.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재워(p178)주고 다섯이나 되는 딸이 전부 감기에 걸려 돌아오면 돌아다니면서 화장지를 주워주는(p176) 엄마를 보면 상상할 수 도 없었을 것이다. 매리 또한 가슴속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해서 가끔은 그게 짐으로 느껴지는(p191)딸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가 느끼는 지독한 굶주림을 앤젤리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두 아이는 또 다른 앤젤리나 이고 나는 또 다른 메리이며 앤젤리나 이다. 모두를 위해 참고 인내하는 시간이 지나면 떠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메리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은 앤젤리나에게 용서받지 못할 거라는 늦은 깨달음을 얻는다. 나도 시간이 지나 어릴 때와 다르게 자신들에게 냉정한 모습의 엄마를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두려운 메리이다.

  처음 엄마를 찾아온 앤젤리나는 지저분한 투룸 아파트에 사는 엄마에게 분노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엄마가 불안정하게 길을 건너는 노인에게 재빠르게(본인도 나이가 일흔여덜이나 되면서)다가가 자애롭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대하는 태도(p206)에서 개척자인 엄마를 보고 자신이 중요한 무언가를 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앤젤리나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엄마가 행하는 타인에 대한 연민어린 행동과 노인이 엄마에게 보내는 인간적인 느낌 따스하고 깊은 감사의 표시에(p204) 엄마를 엄마가 아닌 어른으로 본 것은 아닐까.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자신을 방치해서 병이 든 엄마가 아닌 타인에게 연민으로 대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면 앤젤리나도 분명 다르게 성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늦은 발견이다.

 

  4.성인인 아들들과의 관계

   이제 나는 아들들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기 딱 좋은 시기이다. 이제 막 성인이 되는 아이와 군대에서 제대(보통 남자들은 제대하면 철든다고 하니까)하는 아들과의 관계 맺기에 따라 우리는 달라질 것이다. 내가 ‘성년’에 이렇게 의미부여를 하게 된 것은 잘못 규정된 ‘부모의 역할’때문 이다. 미성년의 자녀를 대할 때는 참고 인내하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고 스스로 규정했다 . 성인이 되면 참지 않아도 되고 화를 내어도 된다고. 이기적으로 느껴졌던 아들은 배려심 깊은 아들로 ‘쏭’ 변신하듯 바뀔 수 있다 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인생은 도화지에 선을 긋듯이 그렇게 명쾌한 것이 아닌데도. 아이들이 어려서는 어리다는 이유로, 청소년기에는 상처받을까 이야기를 안했다면 이제 아이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나의 미래와 아들들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다. 그래야 마음의 지지를 보내던 경제적인 지원이 되었던 아이들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들의 요구가 있을시 마음의 지지만 보낼 자신은 지금은 없다. 하지만 조금씩 아들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알아간다면 거절하는 연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내가 ‘미시시피 메리’에서 이기적인 앤젤리나를 보며 두려움을 느꼈지만 반대로 희망도 보았다. 메리가 타인에 대한 연민과 타인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본 앤젤리나는 기존의 엄마가 아닌 순간이지만 ‘멋진 어른’으로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중요한 뭔가를 본 것 같다. 아이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만 했지 내 모습에서 아이들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막연히 요구가 커져가는 아이들에 대한 두려움만 있었지 정작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도 방향도 찾지 못했다면 메리와 앤젤리나를 보며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조금은 방향이 잡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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