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평범하지만 특별한 여행

모로
2024-01-25 08:17
486

모로

올해부터 일리치 약국에서 일하고 있다.

열심히 쌍화탕을 달이며, 공부와 삶이 연결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항상 궁리중.

 

 

  포르투갈에 갔다. 한국에서 암스테르담까지 14시간 반을 날아간 뒤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2시간 반을 비행해야 도착할 수 있는 곳. 유럽의 땅끝마을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거리였다. 남편은 일 때문에 여행 후반에 합류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이랑 둘이 떠나야 했다. 짐도 많고, 환승도 오랜만인 데다, 비행기도 잘 못 타는 쫄보라 이래저래 걱정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파김치가 되어 도착한 숙소에서 짐을 탁 풀고 창문을 열자 아이가 내뱉은 첫마디.

 

“엄마, 여기 참 평화로운 거 같아요.”

 

 

  우리가 도착한 포르투갈의 두 번째 도시 포르투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포르투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첫 번째 숙소는, 앞으로는 도우강이 흐르고, 멀리 동루이스 다리가 보이는 낭만적인 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라인으로 평범하고 작은 카페가 3개 있었는데, 단골들이 맥주를 한잔하거나, 간단한 요기를 하러 왔다. 나와 아이는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카페에서 토스트나 에그타르트를 먹고, 시간 날 때마다 집 앞을 산책했다. 매일 비슷한 길을 걸어 장을 보러 가고, 모루 공원에 앉아서 버스킹을 듣거나 갈매기를 구경했다. 저녁에는 숙소로 돌아와서 한국에서 싸 온 햇반에 김, 혹은 삼겹살을 사서 구워 먹거나 미역국을 먹었다. 포르투의 12월은 영상 5도에서 15도 정도로, 낮에는 꽤 포근하다. 우기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우리가 있는 내내 부슬비가 하루 이틀 정도 내렸을 뿐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많은 부분이 너그러워진다. 그렇게 둘이서 평범하고도 특별한 여행을 했다.

 

 

  사실 이제 만으로 10살이 지난 아이는 아스퍼거 증후군이다. 이제 키도 제법 크고 덩치도 있지만, 하는 짓이 아이 같다. 포르투에 둘이 머물면서 키작고 어리바리한 동양 여자와 아스퍼거를 가지고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커다란 아기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모르긴 몰라도 동네 사람들에게 한두 번 정도는 이야기가 오르내렸을 터. 아마 우리 둘이 신기해 보였을 테지. 하지만 그 정도였다. 외국에 나와서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그것만으로도 편안했다. 사실 아이에게 여행은 여태껏 신나는 일이 아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엄마, 아빠를 만나 틈만 나면 해외로 국내로 여행을 다녔지만 아이는 늘 시큰둥했다. 여행지 가서도 밤이면 집에 가고 싶다고 울어댔고, 음식을 가리는 터라 괌에 갔을 때는 삼시 세끼 감자튀김만 먹어대기도 했다. 포르투에서도 물론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챙겨간 한식을 먹었고, 3일 걸러 한 번씩 한식당에 갔다. 하지만 외국 음식은 절대로 먹으려 하지 않았던 예전과는 달리, 현지식을 도전해 보기도 했고, 그중 해물밥은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의 시선으로 함께 여행하는 것은 재미있다. 아이는 기호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한국에서 미리 포르투갈어 책을 한 권 구매했는데, 그 책이 브라질-포르투갈어책이어서 걱정을 했다. 브라질어와 포르투갈어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표기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포르투갈에 도착하자 자기가 아는 몇몇 단어 – 오렌지, 사과, 포도 같은- 를 발견하고 기뻐했다. 길을 걸으면서는 성당보다는 한국보다 훨씬 키가 작은 신호등을 발견했다. 노을을 보면서는 아름답다기보다 왜 이렇게 빨리 해가 지는 건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아마도 포르투갈이 한국보다 지도상으로 조금 더 위에 있어서 해가 더 빨리지는 거 같다고 추측했다. 얼토당토않은 내용 같아도 찬찬히 들어보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밤낮이 한국과 반대인 시차를 받아들이지 못해 해가 지기 전까지 절대자지 않을 거라던 아이는, 한국의 낮과 포르투갈의 밤을 연결해갔다. 그렇게 한 뼘 정도 아이의 세계가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에게 지금껏 한 방울, 한 방울씩 다른 세계를 맛보여주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발을 퐁당 담근 듯한 느낌이 들어서 신기했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을까. 문제는 마지막 날 일어났다. 아이는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 포르투갈에 푹 빠져서 여기에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집보다 좋아하는 곳이 생기다니. 하지만 아이는 아스퍼거 아닌가. 좋은 감정은 폭발했고, 때때로 크게 눈물을 터트렸다. 집에 가기 며칠 전부터 그러더니 비행기를 타는 당일에는 텐트럼(강렬하고 파괴적인 감정 폭발)이 심했다. 잘 있다가도 생각난 듯 눈물을 터트렸고, 비행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 비행기 스크린에 있는 게임에 심취해서 약간 텐션이 올라간 상태여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아이가 자지 못하자 귀마개를 끼워줬는데, 귀마개가 귓속으로 들어간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를 지르면서 일어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주의를 시키고 손을 잡아주며, 혹은 등을 두드리며 안정을 시켰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했나 보다. 승무원이 조용히 다가오더니 승객 중 한 명이 아이가 너무 시끄럽다며 돌봐달라고 요청했다는 말을 했다. 나는 물론 죄송하다고 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우리를 뚫어지라 째려보는 분이 있었기 때문에 누군지 짐작도 갔다. 아이 바로 뒤에 앉은 분이었는데, 아기도 아니고 다 큰 아이가 울었으니 시끄러웠겠지…. 하지만 비행기는 소란하고, 모터 소리가 윙윙거리고, 누군가는 코를 골고 있었고, 대부분 사람은 이어폰을 끼고, 혹은 귀마개를 하고 자는데 그렇게까지 시끄러운 일이었을까.

 

 

  예전일이 생각났다. 아이가 어릴 때는 더 죄송할 일이 많았다. 어린 시절 정말 많이 울었다. 밤이면 밤마다 깨서 울었으니 말 다 했지. 아이가 울면 제일 먼저 내가 했던 일은 화장실 문을 닫는 일이었다. 화장실은 소리가 더 크게 울리니까. 창문을 닫고, 방문까지 닫고 매일 밤 아이를 달랬다. 그때 살았던 아파트에서 한 번도 소음 문제로 민원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을 아직까지 감사하게 생각한다. 밤마다 울었는데... 달랜다고 달랬지만 누군간 불편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많다. 나는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 때마다 눈총을 받았고, 종종 시끄럽다는 민원을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이 쪼그라들었고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허리가 펴질 날이 없던 날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왜 나는 매번 과도하게 사과하는가. 왜 나는 내 아이를 먼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가. 아이가 그네를 타고 있는 친구를 보지 못하고 부딪혔다면, 나는 넘어진 우리 아이보다 그네에 탄 아이를 먼저 살폈다. 그렇게 하느라 내 아이의 상처를 못 봤다. 그때는 마음이 그렇게도 작아져 있었다. 장애 아이를 키우면서 세상에 죄송할 일은 너무나도 많은데, 그때마다 내가 내 아이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누가 아이의 편을 들어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좀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래 물론 죄송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게 내 최선이야. 이거보다 더 아이를 제어하는 건 불가능해.’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학교 상담에서도 이제 과도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걸 오픈하고, 학교생활에 어려움이 많겠지만 지적해 주시면 할 수 있는 한 같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말했다. 선생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풀어가기를 바랐다. 학교에서 화장실을 맨발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집에서는 맨발로 화장실에 간다는 점을 떠올려서 집에서도 신발을 신기기 시작했다. 물통을 자꾸 넘어뜨려서 물을 쏟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입구가 작은 물통으로 바꾸어주었고, 연필 끝을 잘근잘근 물어뜯어서 샤프로 바꿔버렸다. 가르쳐주면 잘하는 아이지만 응용이 안 되는 아이다. 모든 상황마다 모든 해결책을 가르쳐주어야 하니, 생각지 못했던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졌다. 하지만 다행히 따뜻한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하나씩 천천히 배워가고 있다.

 

  비행기에서는 죄송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했고, 조금 더 지나서는 약간 우울해졌지만, 집에 돌아와서 짐을 풀고 나서야 그때 내가 해야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 그래서 못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쟤 좀 이상해라고 생각할지도, 어쩌면 그런 눈빛을 많이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도 모르는 사람에게 ‘장애’를 언급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날이 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 내가 연재할 글은 평범한 한 여자의 용기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아스퍼거는 귀여워’라는 제목을 정하는데도 조금 망설였었다. ‘아스퍼거’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 단어를 제목으로 명시 하는 것이 조금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스퍼거는 우리 아이에게서 사라지지 않을 단어다. 이번 연재를 통해 내가 어떻게 장애와 만났고, 세상에 얼마나 미안해하면서, 또 얼마큼 고마워하면서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댓글 14
  • 2024-01-25 08:47

    모로 모루 포르투갈 포루투 뭔가 라임이 맞는것이 귀엽네요.
    모로님과 아드님처럼..
    같이 연재를 시작하는 동기로서 마니마니 응원합니다 ~~~
    (나중에 포루투라는 도시에서 한달살기 해봤음 좋겠단 생각이 드네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네요
    )

  • 2024-01-25 09:18

    샘 연재하실 글 더 읽어봐야 아스퍼거가 어떤 증후군인지 알 수 있겠지만, 이번 글 읽으면서 샘 아들이 감각하는 세상이 나랑 크게 다른가 생각되면서도, 깜짝 놀랄땐 소리내고 너무 좋으면 울듯이 느끼는 만큼 반응할수 있다는게 건강하다는 느낌도 들어요. ㅎㅎ
    샘 글에서 아이 많이 언급되는데 샘 아이를 제가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샘 아들, 아이라고 부르면 또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아서) 이 연재 시리즈에서만 그를 지칭하는 별명을 만들면 어떨까요? 본명 쓰는 것 보다 안전한 기분이 들면서도 친근하게... 예를 들면 예비신랑 ‘예랑’이라고 부르는 것 처럼요. 제안해봅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쌤 글 너무 좋아요. ㅠㅠ
    너무너무너무 좋아요. 다음글 기대합니더..💖

    • 2024-01-25 09:42

      난, 너의 글을 '학수' 고대한다. 푸하핫

  • 2024-01-25 10:57

    모로의 용기!! 주제가 좋네요^^

  • 2024-01-25 12:08

    이번 연재 정말 기대됩니다!

    • 2024-01-25 14:24

      저두요..^^

  • 2024-01-25 22:16

    모로의 용기 덕분에 귀여운 아스퍼거와 함께하는 모험, 여행, 일상 이야기들이 무궁무궁 펼쳐지겠네요, 우리 앞에.
    함께 해줘서 고맙고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귀기울여 잘 들을게요.

  • 2024-01-25 22:55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서로 응원하면서 지지고 볶아 봅시다!!! ^^

  • 2024-01-26 12:09

    너무 잘읽었어요 모로샘^^
    다음편이 벌써 기대되요~~~~~~!

  • 2024-01-26 23:24

    모로샘이 쓰신 여행긴가? 하는 첫인상으로 읽기 시작해서 어느덧 마지막 문장을 읽고 있었어요. 술술 읽히는 글이에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귀여운 아스퍼거와 모로님의 동행글이 앞으로 기다려질거 같습니다.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 2024-01-28 20:18

    모로모로~~~
    응원합니다~~!!!

  • 2024-01-29 15:40

    아스퍼거 증후군, 이름만 들어봤지 뭔지는 잘 몰랐는데 모로쌤 글 덕분에 어떤 건지 검색도 해보고 알게 되었네요ㅎㅎ
    잘 읽었어요. 연재 기대할게요!

  • 2024-01-30 10:52

    연재를 기대하겠습니다.!

  • 2024-01-30 18:03

    가보고싶은 나라 포르투갈을 샘글을 통해 만나네요. 저도 살면서 낯선 이들에게 너무 예의를 차리느라 정작 소중한 사람들을소홀히 하거나 상처준 적이 꽤 있었죠. 때론 뻔뻔해지는 용기가 퍽퍽한 인생을 fun fun하게 하기도 하는것 같아요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현민
2024.03.16 | 조회 279
일상명상
다시 돌아온 ‘명상의 시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대략 1980년대 초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우신국민학교는 당시 한 교실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오전형 콩나물도 있고 오후형 콩나물도 있던 시절. 몇 교시였을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교실에는 "끼이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곡명은 '타이슨의 명상곡' 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이어 "명상의 시간~"이라는 우아한 멘트가 전교에 울려 퍼지면 우리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의 시간'을 왜 갖는 건지 어떻게 명상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은 학교 전체가 잠시 고요해지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끼이이이~이~"하던 그 바이올린 연주곡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까지 극기훈련, 수학여행, 임원 수련회 등에도 종종 따라다녔다. ‘명상의 시간’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전략이었을까?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 같았던 ‘명상의 시간’에 이따금 소리 내어 우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의문 가득했던 '명상 시간' 아니 추억 속의 '명상의 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상의 시간’이 세월을 훌쩍 지나 어느 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십 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명상 방석 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한다. 방석이 좋긴 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명상을 하거나 여행지에서 명상을 하는 경우엔 이불을 접어 엉덩이에 받치고...
다시 돌아온 ‘명상의 시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대략 1980년대 초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우신국민학교는 당시 한 교실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오전형 콩나물도 있고 오후형 콩나물도 있던 시절. 몇 교시였을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교실에는 "끼이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곡명은 '타이슨의 명상곡' 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이어 "명상의 시간~"이라는 우아한 멘트가 전교에 울려 퍼지면 우리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의 시간'을 왜 갖는 건지 어떻게 명상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은 학교 전체가 잠시 고요해지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끼이이이~이~"하던 그 바이올린 연주곡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까지 극기훈련, 수학여행, 임원 수련회 등에도 종종 따라다녔다. ‘명상의 시간’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전략이었을까?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 같았던 ‘명상의 시간’에 이따금 소리 내어 우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의문 가득했던 '명상 시간' 아니 추억 속의 '명상의 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상의 시간’이 세월을 훌쩍 지나 어느 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십 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명상 방석 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한다. 방석이 좋긴 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명상을 하거나 여행지에서 명상을 하는 경우엔 이불을 접어 엉덩이에 받치고...
도라지
2024.03.10 | 조회 322
기린의 걷다보면
경강선을 타고 여주역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세 번 째로 여강길을 걷게 되었는데, 제일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여강은 여주지역에서 부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남한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여주 지역을 이은 여강길은 현재 총 11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인 옛나루터길은 물길을 따라가며 옛 나루터를 통과하는 18키로 정도 되는 길이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는 혼자 걸었는데,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걷게 되었다. 긴 코스이기도 하지만 외진 곳도 있어서 같이 걸을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 여주 터미널까지 걸어와서 점심을 해결하고 영월루로 향해서 길을 나섰다.     영월루에 올라서 보면 아래로 남한강과 여주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강 건너 편으로 천년고찰 신륵사도 보였다. 여강길 4코스를 걸을 때는 신륵사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사찰이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는데, 신륵사는 강줄기와 너른 모랫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절 이름의 유래로 고려시대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니 천년이 넘은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의 수피에 푸른 이끼가 뒤덮여 있었다. 평일(월요일) 오후 한가롭게 경내를 거니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친구가 그걸 보다가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운전해서 오면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신륵사까지 말이야. 근데 고작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 대놓고 시간을 보냈다니까.   자식 셋을 연이어 키워내느라 고단하던 어느 날의 순간, 집을 벗어나 바람 쐬러 나올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단다. 아름다운 풍광에 깃든 여유가 좁은 차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던 옹색한 순간을 환기시켰던...
경강선을 타고 여주역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세 번 째로 여강길을 걷게 되었는데, 제일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여강은 여주지역에서 부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남한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여주 지역을 이은 여강길은 현재 총 11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인 옛나루터길은 물길을 따라가며 옛 나루터를 통과하는 18키로 정도 되는 길이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는 혼자 걸었는데,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걷게 되었다. 긴 코스이기도 하지만 외진 곳도 있어서 같이 걸을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 여주 터미널까지 걸어와서 점심을 해결하고 영월루로 향해서 길을 나섰다.     영월루에 올라서 보면 아래로 남한강과 여주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강 건너 편으로 천년고찰 신륵사도 보였다. 여강길 4코스를 걸을 때는 신륵사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사찰이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는데, 신륵사는 강줄기와 너른 모랫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절 이름의 유래로 고려시대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니 천년이 넘은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의 수피에 푸른 이끼가 뒤덮여 있었다. 평일(월요일) 오후 한가롭게 경내를 거니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친구가 그걸 보다가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운전해서 오면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신륵사까지 말이야. 근데 고작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 대놓고 시간을 보냈다니까.   자식 셋을 연이어 키워내느라 고단하던 어느 날의 순간, 집을 벗어나 바람 쐬러 나올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단다. 아름다운 풍광에 깃든 여유가 좁은 차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던 옹색한 순간을 환기시켰던...
기린
2024.03.05 | 조회 332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얼마 전에 구청에서 이런 문자를 받았다.             몇 년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멧돼지가 출몰했다. 멧돼지는 어느 고깃집에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방 뛰었다. 몇몇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몇몇은 그릇이 잔뜩 깔린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몇몇은 칸막이를 들고 돼지를 출구로 몰았다. 멧돼지는 식당을 한바퀴 돌고 잠깐 버티다가 큰 저항 없이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영상에서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 하나. "웃긴 게 식당 아수라장 된 이유 자세히 보면 멧돼지는 하나도 안 건드렸는데 손님들이 다 때려부셔서 아수라장 됨."   당시에 나는 돼지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고, 돼지의 '출몰'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안전안내문자에 등장한 동물이, 행정전산망에 포착된 멧돼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안전', '출몰', '유의' 등의 말들 하나 하나가 도드라져 보였다. 카페에서 문자를 보고 있는 '나' 또한 낯설었다. 돼지는 어쩌다 '출몰'하는 자리에 있을까. 나는 어떻게 '안전'에 유의하는 자리에 있을까. 돼지의 출몰이 왜 더이상 하나의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을까.         바이러스와 식물     코로나 시국에 세계를 달리 감각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로 자가격리를 하던 나는 이렇게 썼다. "백신을 맞았음에도 통증은 상당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목이 아프고 발열 증상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통증 뒤에는 순간적인 쾌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 그것은 단순히 내 몸을 수호하는 면역 세포와 내 몸을 침범한 바이러스 간의...
  얼마 전에 구청에서 이런 문자를 받았다.             몇 년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멧돼지가 출몰했다. 멧돼지는 어느 고깃집에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방 뛰었다. 몇몇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몇몇은 그릇이 잔뜩 깔린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몇몇은 칸막이를 들고 돼지를 출구로 몰았다. 멧돼지는 식당을 한바퀴 돌고 잠깐 버티다가 큰 저항 없이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영상에서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 하나. "웃긴 게 식당 아수라장 된 이유 자세히 보면 멧돼지는 하나도 안 건드렸는데 손님들이 다 때려부셔서 아수라장 됨."   당시에 나는 돼지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고, 돼지의 '출몰'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안전안내문자에 등장한 동물이, 행정전산망에 포착된 멧돼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안전', '출몰', '유의' 등의 말들 하나 하나가 도드라져 보였다. 카페에서 문자를 보고 있는 '나' 또한 낯설었다. 돼지는 어쩌다 '출몰'하는 자리에 있을까. 나는 어떻게 '안전'에 유의하는 자리에 있을까. 돼지의 출몰이 왜 더이상 하나의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을까.         바이러스와 식물     코로나 시국에 세계를 달리 감각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로 자가격리를 하던 나는 이렇게 썼다. "백신을 맞았음에도 통증은 상당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목이 아프고 발열 증상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통증 뒤에는 순간적인 쾌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 그것은 단순히 내 몸을 수호하는 면역 세포와 내 몸을 침범한 바이러스 간의...
경덕
2024.03.02 | 조회 344
아스퍼거는 귀여워
  아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진통이 시작된 건 토요일. 39주 차인 만삭의 임산부가 절물휴양림으로 산책을 나갈 참이었다. 그 당시 젤 좋아했던 양념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휴양림 주차장에 주차하는 순간 딱 느낌이 왔다. ‘오늘이다! 오늘 나온다!’ 뭔가 세상 처음 느껴보는 진통인데도 오늘인 거 같다는 느낌이 빡 드는 순간이었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해 진통 정도를 이야기하자, “그 정도로 아파서는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기다려보고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기 시작하면 병원에 들르란다. 나랑 남편은 그 길로 차를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은 차가운 것은 못 먹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빠삐코를 사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세차를 하고 미리 사둔 카 시트를 설치했다. 몇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린 탓에 출산하는 날 해야 할 것들이 메뉴얼화 되어있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가선 간단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통 밑에 있는 거름망까지 탈탈 털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조리원에 들고 갈 짐을 싸고 있는데 진통이 왔다 갔다 한다. 어느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할까. 왠지 병원에 너무 일찍 가면 혼날 것 같았다. 그래도 편한 집이 낫겠지 싶어서 개그콘서트를 보고 있는데, 진통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제 가자!”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오랫동안 산파일을 하신 조산사가 계셨다. 내 주변의 몇몇 지인이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았고, 무통 주사도, 회음부...
  아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진통이 시작된 건 토요일. 39주 차인 만삭의 임산부가 절물휴양림으로 산책을 나갈 참이었다. 그 당시 젤 좋아했던 양념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휴양림 주차장에 주차하는 순간 딱 느낌이 왔다. ‘오늘이다! 오늘 나온다!’ 뭔가 세상 처음 느껴보는 진통인데도 오늘인 거 같다는 느낌이 빡 드는 순간이었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해 진통 정도를 이야기하자, “그 정도로 아파서는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기다려보고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기 시작하면 병원에 들르란다. 나랑 남편은 그 길로 차를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은 차가운 것은 못 먹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빠삐코를 사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세차를 하고 미리 사둔 카 시트를 설치했다. 몇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린 탓에 출산하는 날 해야 할 것들이 메뉴얼화 되어있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가선 간단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통 밑에 있는 거름망까지 탈탈 털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조리원에 들고 갈 짐을 싸고 있는데 진통이 왔다 갔다 한다. 어느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할까. 왠지 병원에 너무 일찍 가면 혼날 것 같았다. 그래도 편한 집이 낫겠지 싶어서 개그콘서트를 보고 있는데, 진통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제 가자!”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오랫동안 산파일을 하신 조산사가 계셨다. 내 주변의 몇몇 지인이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았고, 무통 주사도, 회음부...
모로
2024.02.25 | 조회 360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