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활동지원사가 된다는 것은 / 서해
문탁
2023-12-3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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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활동지원사를 아시나요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그 사람의 목소리와 표정, 일상적인 습관, 스타일 같은 것에 민감한 편이다. 무의식적으로 주변사람들을 관찰하는 습성은 주로 내가 속한 모임에서 불편해 보이는 사람을 빨리 발견하는데서 자각되곤 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를 고민했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끙끙거렸다. 특히 나와 일면식이 없더라도 주변에 바로 식별이 가능한 지체장애인이 나타나면 오지라퍼적인 감각이 더 살아나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고 긴장이 되곤 한다. 그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거나 접촉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물론 그것은 실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성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회사를 그만두면 돌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올해 여름 재취업한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회가 왔다. 장애인활동지원사 교육을 신청했고 5일간의 교육을 통해 그 현장의 소리를 들으며 장애, 돌봄, 비장애중심주의, 상호의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정된 교육 기관에서 5일간 8시간씩 4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현장 실습 10시간까지 완료하면 정식 장애인활동지원사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장애의 유형은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합쳐 15가지이고 신체장애와 관련된 보조기기만 해도 수백 가지인데 50시간의 교육만으로 실무에 투입된다는 게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나에겐 이론 교육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장애인활동지원사의 역할은 신변처리, 가사지원, 이동지원, 커뮤니케이션 보조 등 네 가지이고 구체적으로는 장애에 대한 이해, 장애인의 인권, 활동지원사의 윤리, 보조기기의 이해, 의사소통 방법, 응급 처치법 등을 배운다. 첫날 수업에서 강사는 장애와 손상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손상은 신체구조에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각자의 고유한 것이지만 장애는 손상을 입은 사람을 사회활동의 주류에서 배제함으로써 사회조직에 의한 불이익이나 활동에 제약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장애와 손상에 대한 구분은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에서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교재를 펴자마자 나오는 개념이라 더욱 각인이 되었다. 장애인의 인권을 강의한 교육센터의 원장님은 20대에 근육병을 진단받은 중증장애인 당사자였다. 그가 겪어온 장애인 인권투쟁의 경험과 그것을 통해 이루어 온 장애인지원정책의 변화상 역시 현장감 있게 다가왔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여전히 차별과 불완전한 인식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직접 밖으로 나와 주장했기에 변화된 것들 역시 많았고 그중 중요한 결과물의 하나가 장애인활동지원제도이다.
첫날 장애에 대한 이해나 장애인의 인권, 관련법 등에 대해 공부할 때만 해도 나는 적어도 그 교육장에 모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깨어 있는 비장애인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각론에 들어갈수록 장애나 장애인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어서 부끄러워졌다. 심지어 지체장애인 의미도 정확히 알지 못했을뿐더러 뇌병변장애인은 당연히 발달장애도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흔히 봐온 수동 휠체어의 정확한 작동법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최근 내가 해온 어떤 공부보다도 집중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했다.
교육의 효과는 새로운 감수성으로 발현되었다. 지하철에서 계단밖에 없는 진입로에 장애인용 개찰구가 버젓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식당에 들어갈 때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넷플릭스의 콘텐츠를 볼 때 대사 외에 음악이나 효과음을 설명하는 자막을 더 유심히 보게 되었다는 것, 지하철 내부 전광판이 고장나 역이름이 잘못 표시될 때 음성안내방송을 듣지 못할 청각장애인이 혹시 잘못 내리지는 않을까 상상하는 것 등등. 덕분에 나는 교육 이전과는 조금 다른 내가 되었다.
의존성에서 발견하는 장애의 역량
수나우라 테일러는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모든 몸이 비장애중심주의의 억압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문화적 견해와 가치관이 구축되는 데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그는 자립적이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산성이나 효율성을 측정하는 것에 대해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통념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리고 비인간 동물들에게도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이는 비장애인의 몸을 특권화함으로써 장애인의 몸을 불완전한 것으로, 동물을 하등한 것으로 여겨 비장애인, 장애인과 동물 사이에 몸에 대한 위계를 만드는 일이다.
불완전한 몸이라는 전제는 생산성과 효율성의 관점에서 장애인에게 ‘사회적 부담’의 프레임을 씌우면서 그들의 자존감을 위협한다. 권범철은 <장애는 어떻게 공통화의 역량이 되는가>에서 “어린아이, 노년층, 환자, 장애인 등은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이해된다. 소비만 하는 자, 혹은 돌봄을 받기만 하는 자, 다시 말해 ‘비용’과 ‘부담’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이들은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은 완전하지 못한, 결함이 있는 존재로 이해되기 때문에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그의 문제의식은 왜 우리가 모두 생산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사실 ‘싫지만 억지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초라함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장애인들을 ‘일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생산적’인 사람이라 치부하는 것 아니냐며 성장 지상주의에서의 생산성 강박을 비판한다. 생산적인 존재가 아닌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비생산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는 무능력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이다.
장애인활동지원제도에서 누구를 더 많이 지원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에도 생산성에 기반한 능력주의가 작동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기업의 파란색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은 시각장애인 안내견은 전국에 100마리가 되지 않는다. 시각장애인은 2022년 기준 25만 명이나 되지만 안내견을 지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매일’ 회사나 학교처럼 할 일이 있어서 외출해야 하는 경우라고 한다. 그래서 김예지 국회의원은 안내견과 함께 출근할 수 있지만 매일 동네 산책을 하고 싶은 시각장애인은 안내견을 꿈꿀 수 없다. 물론 다른 지체장애인의 경우에도 바우처 지원시간은 장애의 정도와 그 사람의 경제활동능력이 함께 고려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루 16시간의 활동지원서비스를 받는 장애인들도 65세가 넘으면 복지서비스 제공주체가 국민연금에서 노인요양보험으로 바뀌어 활동지원사 대신 요양보호사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지원시간은 하루에 3시간을 넘지 못한다. 장애는 나이로 판가름되는 노동가능성, 생산가능성의 벽 앞에서 다시 무력해진다. 몸이 불편한 비장애인은 65세가 되면 국가의 요양보호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반면 누군가의 보조를 받아야 하는 장애인은 65세가 되면 적극적인 케어 대상에서 배제된다.
나이 들고 몸이 불편한 비장애인과 나이 든 장애인 중에서 어떤 몸이 더 돌볼만한 가치가 있는 몸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노동하는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제도는 비장애인에 비해서 나이 든 장애인의 존재 가치를 매우 희미하게 만든다. 하지만, 의존하는 삶은 오래 살아남을 가치가 없다고 보는 현행 제도에 맞서 장애인들은 그들의 존재이유를 증명하고 있다. 전장연의 이동권투쟁도 그런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동권투쟁을 통해 만들어진 지하철의 엘리베이터는 그들의 삶에만 편의를 준 것이 아니라 노인과 유모차를 탄 아이들과 교통 약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비장애중심주의 일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놓치게 되는 것들을 일깨워 주고 생산성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속도지향의 세계에 천천히 브레이크를 걸었다.
‘비생산적 삶’이 결함이 아니라 능력임을 일깨워준 권범철은 장애를 역량으로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제안한다. 첫 번째는 장애인들에게는 비장애인들처럼 전형적인 삶의 경로가 주어지지 않으므로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존재가 되기 쉽다는 점을 든다. 그들은 각자 집밖으로 나가기 위해 백지상태에서 창조적 길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고 그들만의 배치와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각자의 삶의 개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장애인은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적 특성 때문에 필연적인 타인과의 마주침을 통해 서로를 연결하고 집합적 신체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비장애인들이 혼자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신념에 빠져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 있는 반면 협력으로 집합적 신체를 만들 수 있는 장애인들은 오히려 결코 고립될 수 없는 조건을 가졌다는 것이다.
상호의존적 돌보기를 꿈꾸며
그렇다면 장애로부터 역량을 이끌어 내기 위한 장애인활동지원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장애인에 대한 활동지원 패러다임은 방치에서 격리로, 수용(보호)으로, 수용에서 재활로 바뀌어 왔으며 특히 최근에는 재활을 넘어 자립생활(IL, Independent Living)이 목표가 되고 있다. 장애인들의 삶은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과도하게 통제되었고 삶의 주도권이 자신이 아닌 전문가에게 주어진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자립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들은 신체적 독립이 아닌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을 자립의 중요한 요건으로 삼는다.
활동지원사 교육을 받고 나서 장애인을 돌보는 상상을 해 본다. 발달 장애인?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혼잣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발달장애인이 청년이 떠오른다.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 집 앞 산책길에서 가끔 만날 때마다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늘 고민하게 되는 전동 휠체어를 탄 뇌병변장애여성이 떠오른다. 그리고 최근 강의를 들었던 장애여성독립센터 숨의 진은선 소장도 떠오른다. 진은선 소장은 장애인에게 자립은 물리적 독립을 넘어 욕구와 의사가 존중되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실패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돌봄이 자칫 지나친 간섭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장애인의 자립과 여러 활동을 위한 훌륭한 제도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려움도 있다. 활동지원사와 외출을 하거나 커뮤니케이션 지원을 받는 것과 같은 외부 활동 외에 신변처리나 식사수발 등 좀 더 사생활적인 지원에 장시간 노출되어야 하는 중증 장애인들 입장에서는 매 순간 타인과 함께 있다는 것이 큰 어려움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자신의 집안에서 조차 눈치 보지 않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없다면 자립이 과연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지 의문이다. 혼자 있고 싶은 상황에서조차 CCTV가 돌고 있는 것같은 그 불편한 느낌을 해소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이러한 상황을 서로가 이해하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서로 돌봄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포인트인 듯하다.
활동지원사의 역할을 상상하게 된 또 하나의 케이스는 올해 4월 5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틴에이지 딕>의 리처드역으로 연극부문 연기상을 수상한 뇌병변장애인인 하지성 배우이다. 뇌병변장애인이 장애인 역할로 상을 받은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하지성 배우는 장장 9분 41초 동안 수상소감을 이야기했다. 그는 다른 배우들처럼 유머를 섞어 이야기를 했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호명했다. 하지만 경직된 혀로 말하는 그의 말은 정확히 들리지 않아서 그가 의도한 웃음 포인트에서 아무도 웃어주지 못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하지성 배우가 유머를 날렸을 때 카메라에 잡힌 다른 배우들의 표정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동적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고 눈빛에는 불안함과 측은함이 서려있었다. 만약 그 순간에 자막이든, 음성이든 그의 이야기를 정확히 들려줄 방법이 있었다면 관객들은 평소대로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활동지원사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하지성 배우는 화려한 비장애 연예인들 틈에서 분투하는 장애인이 아닌 한 명의 동료배우의 모습에 더 가깝게 보이지 않았을까.
장애인활동지원사를 공부하며 다시 생각하게 된 단어는 돌봄과 의존이다. 언뜻 보면 반대말처럼 느껴지지만 이제 나는 이 단어들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앞뒤를 구분하기 어려울만치 연결되어 보인다. 수나우라 테일러는 우리는 모두 의존적이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이 잘못됐음을 지적한다. 누구도 자립적이기만 한 인간이거나 의존적이기만 한 인간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육을 받기 전 나는 돌봄이 상대방에게 내 마음과 시간을 내어주는 것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것이 잘못된 짐작이었음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써본 적이 없는 새로운 감각을 찾게 되는 일이며 특히 장애인을 돌본다는 것은 장애가 만들어낸 체현, 인지, 다양성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창조적인 내가 되어 보는 경험일 것이다.
장애여성공감의 이진희 활동가는 ‘존엄한 삶은 성공적인 독립의 모델, 돌봄 받지 않는 개인으로 존재하는 성공이 아닌, 상호의존과 상호돌봄의 감각을 쌓아나가는 관계 모델이 많아질 때 가능하다.’고 했다. 나의 감각 역시 상호의존과 상호돌봄의 경험을 쌓아가는 현장에서 더 예민해지고 더 발달해 갈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의 활동지원사가 되어 새로운 집합적 존재를 만들어낼 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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