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낯설고도 아름다운 -[망명과 자긍심] 을 읽고 /코투
문탁
2023-12-3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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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껏 내가 만난 가장 낯선 작가였다.
책을 읽기 전, 단톡방에 올라온 저자 일라이 클레어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자라고 들었는데, 두 귀가 다 드러난 반삭에 가까운 짧은 머리, 두툼한 안경을 낀 얼굴에 넓은 어깨, 지퍼 달린 낡은 녹색 점퍼... ‘남자같은 여자’ 내가 갖고 있는 단어의 수준에서 나는 이렇게밖에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글을 보니, 그는 ‘젠더 퀴어’란다. 무슨 뜻이지? 동성애자인가? 소수자 용어에 낯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퀴어는 동성애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퀴어란, 태어날 때 사회(의사)가 지정해준 생물학적 성과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성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을 통칭한다. 거기에는 여자지만 남자보다 여성에게 성적으로 더 끌리는 사람, 남녀 모두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사회에서 훈육되는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여자, 자신을 굳이 남녀이분법에 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 그러다 보니 나도 퀴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미디어와 문학의 일방적인 이성애적 세례가 없었다면, 혹은 대학 시절 다이크 공동체를 만났다면, 나도 지금과는 다른 젠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 대한 소개를 좀 더 해보자. 그는 1963년생, 미국 오리건주 시골 벌목 노동자 마을에서 백인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지정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자신이 소녀라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젠더 퀴어였고,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으로 어려서부터 지진아, 불구, 원숭이 같은 조롱과 비난을 들으며 자랐다. 그는 아주 어린 시기부터 아버지와 그 친구들로부터 성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당한 친족성폭력 생존자이기도 하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기 위해 큰 도시로 온 뒤 다이크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퀴어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퀴어, 장애, 노동, 환경 운동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난 가장 낯선 작가이다. 다양한 소수자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렵다. 그에게 공감하고 싶은데, 공감은커녕 이해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 시인이기도 한 그의 글은 나를 매료시켰다. 그래서 그가 표현한 인상적인 비유 세 개를 중심으로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1.은유로서의 산
은유로서의 산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의 고된 일상 속에서 뼈가 으스러진,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 속에 크게 다가온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버둥거리며 힘겹게 산에 오르고, 그 산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거기서 실패를 겪고, 그 그림자에 묻혀 살아 왔을까.(41쪽)
은유로서의 산은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먼저, 산이 갖는 높이와 모양의 특성상 계급 피라미드가 떠오르고, 그 다음엔 산꼭대기를 뜻하는 정상(頂上)이라는 단어가 갖는 동음이의어로서의 정상(正常, normality)이라는 단어도 떠 오른다. 일라이 클레어는 ‘뼈가 으스러진’ 그래서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산은 슈퍼장애인의 이미지로 다가온다고 한다. 슈퍼장애인, 자신의 장애를 극복한 혹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정상인)보다 우월한 혹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의 위대함. 사회적 성취와 인정, 귀함과 명예를 얻은 사람, 돋보임. 우린 이런 사람들이 부럽다. 그때 어디선가 이런 말이 들린다. ‘너희들은 게으르고 어리석고 나약하고 추하기 때문에 거기 아래 바닥에 살고 있는 거라고.’(41쪽) “누구든지 능력만 있다면,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사다리 위로 오를 수 있다고.”
누구나 산의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어하지만, 누구는 너무도 쉽게 그곳에 오르지만, 누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오를 수 없다. 설령, 만에 하나 그곳에 오른다 할지라도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지독한 외로움’이라고 일라이 클레어는 말한다. 그는 자신의 달리기 경험에서 사람들이 보여줬던 반응들과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떠올리며, 슈퍼장애인 이야기가 결코 장애인을 위한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슈퍼장애인 서사는 비장애인의 우월감을 부각하고 장애는 성취와 모순된다는 믿음을, 장애는 무능과 짝이라는 믿음을 유포한다. 이것은 장애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노들장애학 궁리소 노규호 님의 「마이너 서평」 중에는, 뇌병변 장애인으로 평소 학교에 가지 못한 것이 오랜 한이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시위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에 대해 알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이 자신의 뇌병변 장애 때문이 아니라 뇌병변 장애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학교 제도, 또 장애인은 공부해도 소용없다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자기 몸에 붙어있던 무거운 ‘자기 탓’으로부터 벗어나게 됐다는 해방의 이야기다.
책을 읽으면서 깨닫는다. 우리들이 높은 곳에 오를 수 없는 이유는 우리들의 장애 때문이라기보다, 다름을 차별로 만들어 놓고 정상/비정상으로 구분지어 온 역사 때문이라는 것을. 거기에는 비장애 중심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젠더이분법, 인종차별주의 등 수많은 차별의 역사가 맞물려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일라이 클레어와 함께 정상(正常, normality)으로 오르기를 거부하고, 위계와 불평등에 저항하며 다양한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은유로서의 산의 폭발’에 대해 생각해 본다.
2.집으로서의 몸
나는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다양한 소수자 운동들이 선명한 노선과 치열한 투쟁으로 우리 사회를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모시켜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진심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일라이 클레어는 그런 선명성과 단일쟁점 운동이 가져온 문제와 한계를 지적한다. 예컨대, 도시에 거주하는 중산층 환경운동가들이 환경파괴에 대해 논할 때 벌목노동자를 비난하고 배척하는 경우가 많다 벌목노동자들을 ‘무식한 짐승(레드넥)’, 혹은 ‘산림파괴의 공범’이라고 묘사할 때 활동가들과 벌목노동자들은 대립한다. 이에 일라이 클레어는 환경운동가들에게 벌목노동자들과 연대할 것을 제안한다. 벌목노동자 역시 자본주의의 착취 대상이며, 산림파괴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생계에 위협을 받는 피해자다. 환경파괴에서 막강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자연 파괴에 누가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가? 종이가 나무로부터 온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무분별한 자원개발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우리들은 무고한가? 환경을 지키고 벌목노동자들도 살리는 방법을 찾자. 착취의 구조를 끝내기 위해 피상적인 해결책을 버리고 복잡함(트러블) 속으로 들어가자고. 이런 주장은 그가 지닌 다수적 소수자성으로 인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장애가 있는 나의 몸... 내 몸은 침해당했다...나의 백인 몸...나의 퀴어 몸... 집으로서의 몸, 하지만 몸이 결코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 이해될 때에만 수많은 다른 몸들이 내 몸을 따라다니고 내 몸에 힘을 보탠다는 것이 이해될 때만 몸은 집일 수 있다... 백인, 시골, 노동계급 가치관을 가진 몸...(55~57쪽)
‘집으로서의 몸’이 의미하는 것은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정체성이 아닐까 싶다. 몸으로서의 우리가 갖고 있는 정체성은 꽤 복합적이다. 예컨대 장애인의 경우만 하더라도 가령, 장애의 종류에 따라, 장애 정도에 따라, 또 그가 가진 재산 정도에 따라, 성별에 따라, 나이에 따라, 몸이 가진 각자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경험하는 차별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린 이런 차이들을 무시하고, 장애인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일반화하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장애여성이면서 장애여성 독립생활 지원센터 소장인 진은선 님은 장애여성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장애남성이 겪는 어려움과 다르며, 오히려 비장애여성들과 공유되는 점이 많다’고 했다. 시설에 있는 장애여성들이 독립생활을 주장할 때 흔히 듣는 말이, “너는 독립할 수 없어, 너 혼자 밥 못해 먹잖아.” “너 성폭력 당할 수도 있어. 넌 위험한 상황에서 도망칠 수도 없잖아”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장애여성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여자는 미숙하고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으니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인식. 이것은 비장애여성들이 겪는 곤경이기도 하다. 밥 해 먹는 문제는 어떤가? 장애남성이나 비장애남성의 경우, 스스로 밥 해 먹지 않아도, 아내나 다른 사람이 해주는 밥을 먹고 살아도 독립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다. 밥하는 것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밥할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겐 독립의 요건이 되지만 누구에겐 그렇지 않다.
장애여성이 겪는 어려움은 장애인 차별주의와 여성 차별주의의 복합적 산물이며, 젠더 측면에서 장애여성과 비장애여성은 연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소수자성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겹쳐있을 수 있고, 그게 겹쳐질 때는 문제가 좀 다를 수 있다는 것, 이런 것을 다중쟁점 또는 교차성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3. 심장 속의 돌
1) 열세 살 때 내가 지속적으로 맺었던 관계의 대부분은 인간 세상에 속해있지 않았다. 나는 돌을 수집했다... 나는 은둔자가 되길 원했다. 소년도 소녀도 아닌 채, 내 돌과 나무들과 함께 홀로 있고 싶었다. (251쪽)
2) 때때로 내 심장에 작은 회색 돌이 가득 채워지고, 그 돌들은 결코 내 체온만큼 데워지지 않는 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내 심장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돌들이, 내 주머니 안에서 쉬고 있는 돌들이 내 유일한 진짜 몸이었다.(265쪽)
3) 내 주머니와 심장을 바깥으로 뒤집어 그 안에 담긴 돌을 늘어놓는다. 한때 내가 뒤에 숨어 살 았고 아직도 피난처로 사용하는 벽의 반질반질한 윗면에 돌을 나란히 올려놓는다. 돌들은 햇살 에 반짝인다.(272쪽)
자신을 따돌리는 아이들로부터 돌을 맞고 원숭이, 지진아라 불릴 때마다, 아버지와 그 친구들로부터 고문과도 같은 학대를 당할 때마다, 일라이 클레어는 몸의 감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버렸다고 했다. 그 정도로 그를 향한 외부의 폭력은 견디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그는 부서진 몸을 안고 숲으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은둔자로 살고자 했다. 나는 ‘심장 속의 돌’ 옆에 ‘부서진 몸’, ‘상처’, ‘공포’, ‘수치심’ 이라고 적어본다. 그는 아무도 없는 숲에서 자기에게 가장 한결같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상처(심장 속에 달그락 거리는 돌)를 안고 은둔하고 싶어했다. 자신의 아픔은 치유될 수 없다고 여겼으리라.
그랬던 그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생긴다. 도시로의 망명과 다이크들과의 만남이었다. 진보적인 도시의 퀴어 공동체에서 그는 안전함과 행복을 느꼈다. 그곳에서 자신의 다이크 정체성을 찾고, 은둔자로 살고 싶었던 마음을 버렸다. 불구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뇌병변과 힘센 육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무엇보다 페미니즘 활동을 통해 과거 자신이 겪은 성적 학대와 폭력을 더 큰 맥락에서 인식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자신의 몸속 깊이 새겨져 집요하게도 사라지지 않을 공포, 상처, 수치심의 기억을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한다.
내 아버지는 수많은 이유로 나를 강간했다. 그리고 그에게 폭력을 당하면서 나는 여자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나의 이 특정한 몸으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런 훈육은 더 큰 권력구조와 위계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260쪽)
아버지는 평소에는 그를 거의 아들처럼 대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또 굉장히 여성적으로 그를 착취했다. 그의 아버지는 교사였다. 나름 배운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버지는 그럴 수 있으니까 그랬던 거다. 나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구조의 문제’이고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부모는 아이들을 강간하고 어떤 부모는 때리고 어떤 부모들은 장애인 아이를 그 아이가 싼 똥 위에 몇 시간이고 앉혀 놓는다. 어른들은 그런 행위를 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에게 권력이 무엇인지, 소녀로, 아이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배우게 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아버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3)의 ‘심장 밖으로 꺼내진 돌’, ‘햇살 아래 반짝이는 돌’은 내면의 억압과 수치심을 해체하고 밖으로 나온 이야기로 해석된다. 세상과 자기에 대한 이해를 거친 뒤 나온 그의 이야기는 과거의 공포와 상처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담백하고 간결하다. 그런 이야기는 힘이 있다. 그 이야기의 힘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 같다.
마무리
책을 읽으며 작가가 겪은 고난의 행군과 해방의 기쁨을 보았다. 그것은 도둑맞은 몸을 되찾는 사건이었고, 거짓과 통념으로부터 ‘망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수치심을 버리고 ‘자긍심’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행군 중이다. 단일쟁점으로 나뉘어진 운동세력들 간의 연대를 모색하면서. 비극은 두 세력이 충돌하는데 둘의 입장이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가 정당할 때 생긴다. 사람들은 그런 복잡함을 싫어해서 하나만 선택하라고 강요하기 십상인데, 그 강요가 또 다른 폭력이 된다. 그래서 활동가들에게 필요한 것이 다면적 시각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그런 작가의 논지에 깊이 공감하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이해에 호흡을 맞추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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