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치의 전환이 시작됐다

윤아
2023-06-07 00:45
278

새로운 계절

 

남편과 결혼한 지 올해로 29년차이다. 그동안 떨어져 지낸 적도 거의 없다. 우리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오래 함께 살았다. 우리 사이에 세 아이가 태어났고 이미 모두 성인이다. 두 아이가 독립했으며,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막내가 있으나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 갈 길을 찾으리라 믿는다.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자라주었고, 팔순이 넘은 양가 부모님은 아직 건재하시며, 풍족했던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도 늘 안정되어있었다. 우리 부부는 각자의 방식으로 가정에 충실했고, 커다란 결격사유가 있다고도 여기지 않으며 서로가 책임감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는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처럼 외형적으로 보기에 우리 가정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남편도 늘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불행을 예감하는 나름나름의 문제가 늘 잠복해 있음을 느껴왔다. 그러고 보면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행복한 가정은 다른 누군가의 불행이나 희생으로 지탱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막내가 성인이 되고 집을 떠나 도시로 가던 날 커다란 트렁크를 기차역에 내려주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앞으로의 30년을 당신과 살아온 이전처럼 살라면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나는 할 만큼 했다는 마음이었고, 홀가분했고, 이제는 지금까지와 같이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이제 날개 달겠네”하며 빈정거리고는 곧 잊어버렸지만, 나는 우리 부부에게 새로운 계절이 도래했음을 예감했다.

 

 

바로 우리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밥을 했고, 농사일과 마당일을 하고, 책을 읽고 도서관 문화교실 강사와 독서 동아리 활동을 했다. 집안 일거리는 많이 줄었다. 이제 며칠 여행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여행은 떠나지 않았다. 나는 집을 좋아한다.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고 내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달라진 것은 서울 감이당으로 일주일에 한 번 공부하러 간다는 거다. 감이당 책까지 더해지니 또다시 바빴다. 달라진 것은 이제는 가족의 일이 아닌 내 일로 바쁘다는 것이었다. 이전처럼 시댁 일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명절과 생신을 챙기긴 하지만 제사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기회만 있으면 남편에게도 나의 의사를 피력했다. 그는 내 말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나는 제 좋은 걸 다 하고 살며 시댁에 대한 의무는 소홀한 여자였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문제들이 떠오르며 싸움이 잦아졌다.

 

 

 

당연한 것들의 세상

 

나의 결혼생활에 불씨처럼 잔존했던 나름나름의 문제는 뭐였을까? 뭐라 해도 처음부터 우리 부부가 독립된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시댁의 가부장적인 가족문화 직계로 편입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나는 처음 5년을 시댁 그늘에서 살았고, 11년은 20여분 거리에 살며 매주 시댁을 방문했다. 우리 집 일과 시댁의 일은 구분되지 않았다. 그것은 남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7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도시로 나왔다. 부모님은 농사일만으로도 바빴기에 우리 형제들은 이른 나이부터 대부분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았다. 시부모님은 두 형제만 키우셨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또 이후에도 자녀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으신 분들이었다. 시아버님은 전형적인 가부장이었고, 시어머니는 아버님이 지시하는 집안 대소사를 두 배로 초과달성하는 오지라퍼이자 에너자이저였다. 사실상 생각해보면 두 아들 장가보내기도 그분들의 프로젝트였던 거 같다. 두 며느리를 모두 선 보고 6개월 이내에 결혼시키셨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그의 대가족 가장 말단으로 편입되었다. 시댁식구라면 어린아이라도 도련님, 아가씨하며 존대하는 건 기본이었다. 난 개인주의적 성향에 독립적인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 환경이 낯설고 어려웠지만 남편의 배려는 없었다. 나를 부엌에 팽개치고 자신은 하던 대로 살았다. 남편은 가족들이 모이는 걸 좋아했고, 모이면 그 시중은 통 큰 어머니의 진두지휘 하에 며느리들이 척척 해치워야하는 것이 그 집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아버님 5형제에 6촌까지, 어머님 형제들까지 그 집 식구들은 모이고 또 모였다. 거동이 불편한 시할머니를 모시고 계시니 손님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제사만도 열 한 번이고, 명절에, 생신에, 모일 일은 많고 많았다. 시어머니는 그 일들을 정말 신나고 기운차게 해내셨다. 그 집안사람들은 남편처럼 목소리도 크고 활기찼으며 잘 먹었다.

 

 

나는 처음으로 시부모 모시고 큰며느리로 살면서 일곱 남매을 키웠던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어떻게 살았을까? 엄마는 한 번도 힘들다고 하소연 한 적이 없었다. 그러고보면 엄마는 그 모든 것은 살아있는 이상 당연하게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는 우리 시부모님을 좋은 분들이라 여기셨고 나도 그 분들을 나름 좋은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의 나를 힘들게 했지만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의 시대를 산 것이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우리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부모님이 살던 방식에 문제의식이 없었고 나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했다. 사실 당시의 나는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헷갈렸다. 시댁 식구들에게 인사 잘하고, 안부전화 드리는 게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지 않느냐, 네가 전업주부이니 집안일은 여자들이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남편 말이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보고 자란 것이 있기에 남편이 내 편만 되어 준다면 그깟 일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참으로 무심했다. 그는 시댁 식구들 앞에서 내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가하고 시댁에 있다가 집에 가려하면 ‘에미가 가야한데요’하며 자신은 가고 싶지 않으나 내가 가고자하므로 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는 나에게 시할머니는 무엇을 좋아하고, 시고모, 시작은 아버지 등등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좋아하는 지를 말했는데 정작 내가 무얼 좋아하는 지, 무얼 먹고 싶은지, 무얼 보고 싶어 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를 취향과 감정을 갖은 한 개체로 인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내가 결혼했으니 시댁의 취향에 당연하게 녹아 들어가리라고 생각했던 거 같았다.

 

 

나의 모든 원망의 화살은 남편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시댁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거의 매번 싸웠던 거 같다. 매번 그는 술에 취해 있었고 운전대를 잡은 나는 화가 나 있었다. 시댁은 모이면 술상이 차려졌는데 시아버지와 어머니, 고모들까지 술을 잘 먹었다. 아주버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일찍이 술상에서 배제되었고, 남편이 술상에서 어른들 장단을 맞췄다. 그건 그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도 했다. 친정에서 술 문화를 경험한 적이 없는 나는 그 시끄럽기 짝이 없는 술판 시중을 들다가 남편이 취해가는 속도로 분노 게이지가 올라갔다.

 

 

우리가 막 분가했을 때였을 것이다. 나는 처녀 적부터 용인 호암미술관을 가보고 싶었다. 결혼하기 전 인사동은 물론이고 청담동이나 평창동까지 미술관나들이를 좋아했던 나였었다. 호암미술관은 당시로는 서울에서 먼 곳이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까다로웠기에 내 생일을 맞이해 거길 가고 싶다고 졸랐다. 그는 마지못해 나와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갔다. 때는 늦가을, 날씨는 청명했고, 단풍나무 아래 붉은 단풍이 떨어져 동그란 꽃방석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들이 잘 가꾸어진 정원을 뛰어다녔고, 나는 그날 아담한 호암미술관에서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비롯한 국보급 미술품들을 호젓하게 관람하는 호사를 누렸다. 남편이 이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않았다면 완벽한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후에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녔다.

 

 

 

그와 나는 다른 사람

남편과 헤어지는 상상을 많이도 했지만 나는 끈기 있게 그곳에 눌러 살았다. 그 이유를 나는 오랫동안 아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아이들에 대해서 백퍼센트에 가까운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두고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혼자서 아이를 키울 자신도 없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 되어주는 자리가 바로 내가 있어야할 자리였다. 나는 유독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모성은 만들어진다’는 말에 고개가 갸우뚱해지는데, 나의 경우에는 아이를 보는 순간 엄마라는 숙명에 그저 납작 엎드려 복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엄마의 사랑과 노동만을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들이었고 나는 기꺼이 그 짐을 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남편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다. 하나는 그래도 아이들 아빠이자 지금 내 곁에 있는 그를 그냥 사랑하자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있기로 선택을 했으므로 거기서 최대한의 행복을 가꾸어야 했다. 옆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 자리를 지옥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바지런한 사람이다. 아무리 술을 먹어도 늦게 일어나지 않았으며, 시간약속은 칼 같이 지키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특히 어르신들에게 인사성 밝고, 싹싹하게 굴어서 누구나가 좋아하셨다. 그의 직업에도 몇 번의 풍파가 있었지만 생활력도 있고 책임감도 강한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헤쳐 왔다. 나는 그가 없을 때면 그의 장점들을 열거하며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에 진심을 내기도 했다. 내가 너무 예민하고 까다로운 인간이라고 자책하며. 또 하나는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놓는 방식이었다. 네가 나에게 이럴 수는 없다. 용서치 않으리라. 나는 그와의 이혼을 대비해 집과 부동산을 모두 내 앞으로 했다. 남편은 모든 걸 내게 위임했는데, 이사 등등의 일에 위임장과 인감을 받아 일을 처리하는 것은 번거롭다며 내 이름으로 하겠다고 했고, 그는 매번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러나 복수의 다짐은 지난 몇 년간의 공부로 인해 서서히 변화해갔다. 과거의 일들에 대한 생각도 현재의 시각으로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사주 명리학과 별자리 공부가 큰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그의 단점을 찾는데 급급했다. 이거 봐 간여지동 역시 고집이 세군, 일지에 겁재를 깔았으니 아내와 불화하는 것이네.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내 생각이 바뀌어 갔다. 그 사람의 기질은 그가 타고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별자리를 보면 내 별들이 몰려 있는 곳에 그의 별들은 없다. 내 욕구가 있는 곳에 그의 욕구들은 없는 것이다. 나는 옛것 보다는 새로움에 관심이 있고 감각적인 것에 끌리고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는 현실적 안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던 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와 나는 그저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고 돈에 관심이 많은데도 통장을 모두 나에게 맡겼고 완전하게 나를 신뢰했을 뿐더러 정말로 최선을 다해 처자식을 부양했다. 그것은 그가 나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그리하여 나와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 역할을 했을 것이었다. 나는 그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공부해왔고, 어떤 걸 하며 살아가면 행복할지 고민해왔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그 고충을 술로 풀어가며 자신이 뭘 좋아하는 지 탐색할 사이도 없이 시간들이 지나가 버렸다. 그는 열심히 일하면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을 줄 알았고 사랑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남편에게 바랐던 것은 무엇보다도 감정적인 교감이었던 거 같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 친밀하게 감정적 교류를 나누고 싶어 했으나 그는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각자 갈 길을 가면 그만인가? 그가 그렇게 잘못했는가? 오히려 한 사람에게 그렇게 여러 가지를 바라는 것이 너무 무리였던 것은 아닐까? 그와 함께한 시간에 대한 예의가 있다면 더 부딪히고 깨지며 합의점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게다가 최소한 그렇게 책임감 강한 남자와 있으면 안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유의 기술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소소한 일도 부딪치는 그와 앞으로도 30년을 산다고 생각하면 끔찍해 진다. 그의 머릿속은 20세기에 머물러 있고 아직도 고집을 부리며 눈을 부라리며 이기려고 큰 소리를 낸다. 극신강의 이 남자는 거실에서 스피커 폰으로 통화를 하고, 흘러간 노래를 크게 틀어놓는다. 아이들은 다 커서 내 품을 떠나는데 이 사람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거꾸로 가는 지 자꾸만 어려지는 거 같다. 가식이나 위선 따위는 없는 정말 속없는 무구한 행동들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는 이제 어쩌지 못하는, 버리지도 못하는 가족이 되어버렸다.

 

 

나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무엇 때문인지 자꾸만 머뭇거리는 기분이다. 나는 유리병에서 무엇을 쥐고 있어서 손을 빼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뭔가를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 가장 확실한 것은 조건이 바뀌고 상황이 바뀐 상황. 어차피 배치의 전환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계절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강을 건넌 배는 버려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돌아 갈 수는 없다. 정면돌파. 이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달려야 한다. 이제는 내 삶의 새로운 장을 펼치기 위해 발걸음을 뗄 때다.

 

 

자 이제 계산은 끝났다. 우리는 서로 원한도 분노도 없다. 서로 책임을 다했다. 환상을 가지고 결혼하고 그에게 의존했던 내가 내 발에 족쇄를 채웠고, 나의 선택과 동의가 그 관계를 지탱해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제는 남편과 이혼을 하든 졸혼을 하든 그냥 동거남으로 함께 살든 상관없지 않을까? 카잔차 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처럼 기대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댓글 1
  • 2023-06-08 09:41

    아이고..... 어찌 사셨을까?
    전 <나의 아저씨>에서 사실 주인공 아내가 (심지어 그녀의 바람까지도) 이해가 되었어요.
    무슨 남편이라는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계속 자기 형제들이랑 술 먹고, 초등 동창 선후배들이랑 술 먹고, 밥먹듯이 본가 가고, 동네사람들하고 조기축구 하고 그래요? 그거 쫌 이상하잖아요?

    윤슬샘, 언제 한번 우리 찐하게 이야기해봐요. 노하우, 전수해드릴 수 있어요. (제가 수만개의 케이스를 알고 있다는^^)

인문약방 에세이
      삐침과 빡침 : 마을에서 돌봄을 실천한다는 것은     김윤경       새로운 상상계:시민적 돌봄·난잡한 돌봄   나는 작년에 문탁네트워크에서 돌봄을 공부했고, 올해는 양생을 공부한다. 작년 ‘나이듦’세미나에서 읽었던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 중 전희경의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받기」 는 나에게 새로운 개념을 선사했다. 바로 ‘시민적 돌봄’이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돌봄을 발명해낸 개념이다. 이 새로운 돌봄관계는 ‘가족 돌봄’을 넘어서고, ‘서비스’들과는 다른, 다치고 아프고 늙고 언젠가는 죽어가는 취약한 존재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연루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의존’이라는 조건을 기본으로 한다. 전희경은 이 보편적이면서 불가피한 공동의 운명을 ‘시민적 돌봄’이라고 명명한다. 감정이 있고 취약하며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고 보살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다정한 존재로서의 ‘시민’을 상상해보라고 말이다.   또 올해 양생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읽은 『돌봄 선언』에서는 ‘난잡한 돌봄’이란 개념을 나에게 선사했다. 그 개념은 1980~1990년대 에이즈 인권운동 액트 업 활동가인 더글러스 크림프의 에세이 「전염병 중에 난잡할 수 있는 방법」에 근거를 둔 것이다. 에이즈 유행의 원인이 게이들의 성적 난잡함에 있다는 주장에 그는 게이들의 성 문화의 난잡함은 ‘실험적’인 성적 행위를 배가했음을 의미한다고 응수했다. 그는 난잡함이라는 개념을 ‘가벼운’ 또는 ‘진정성 없는’이라는 의미가 아닌 게이들이 서로에 대해 친밀감과 돌봄을 다양화하며 실험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난 친밀감으로 많은 관계들을 교차하며 난잡하게 돌봄을 실천하자고, 다정하면서 강한 시민으로서 다른 시민을 돌보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올해 초, 한 마을 모임에 참석했고, 다행히 정치적으로 견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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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07.02 | 조회 221
일상명상
  버섯에 빠지다                 요요 문탁에서 불교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나이듦연구소의 활동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존엄하게 늙는 길을 찾고 싶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풀어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장마에 가슴이 두근두근   장마가 시작되었다. 덥고 습하여 불쾌지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장마가 싫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심 격하게 장마시즌을 반기고 있다. 숲에서 버섯을 만날 수 있는 계절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작년 봄 내내 탄천변에서 풀꽃을 탐색하던 내가 여름 장마가 그친 뒤 뒷산 산책을 하던 중 우연히 버섯에 눈이 갔다. 그 뒤로 산에 갈 때마다 눈을 땅바닥에 두고 버섯 찾는 재미에 푹 빠지고야 말았다. 버섯 도감을 샀고, 산책을 다녀 오면 도감을 뒤지며 내가 본 버섯과 비슷한 버섯 그림을 찾고 이름을 확인했다. 도감에서 찾지 못하면 인터넷을 뒤졌다. 버섯 이름을 하나 둘 익히니 버섯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양도 재미있는 방귀버섯이며, 닭다리 버섯이며 말불버섯을 발견했을 때는 너무 기뻐서 ‘유레카’를 외쳤다. 십년 넘게 뒷산 산책을 다니면서 그동안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버섯과 갑작스레 사랑에 빠진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자 버섯이 사라졌다. 봄이 오면서부터 은근히 버섯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날이 더워지면서부터 마치 아열대성 기후의 스콜처럼 갑작스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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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3.07.01 | 조회 413
조은의 강정에서 살아남기
                  조은 5년 동안 현민, 시윤, 민서, 동희와 함께 동천동에서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다. 10년을 살던 마을을 떠나, 2월부터 강정에서 첫 독립을 시작했다.      2023년 2월20일에 강정으로 이사를 왔다. 이우중학교를 가기 위해서 동천동으로 이사를 했으니, 약 10년만에 동천(고기)동을 떠났다. 10년 동안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다. 10년을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같은 동네에 살았으니 지겹겠다는 생각을 누군가는 하겠지만, 나는 지겹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랜 기간 마을에 머무는 일은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오래된 친구들과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한다는건 때때로 외롭고 힘들었지만 대체로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떠나가는 이들을 많이 봐왔고, 그들을 보내주는 건 나에게 편안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작년 1월 피스파인더 모집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22년4월부터 3개월짜리 강정살이(피스파인더)를 시작했다. 그게 강정을 처음 만나게된 시작이었다.    강정마을에는 해군기지반대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평화운동을 하는 지킴이들이 살고 있다. 해군기지는 이미 지어졌지만, 해군기지 폐쇄를 외치며, 해군기지를 만들때 폭파시킨 구럼비바위를 그리워하고, 나아가 전쟁을 멈추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살고있다. 매일 아침에는 백배, 11시에 미사, 12시에는 인간띠잇기를 하고, 매일 점심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삼거리식당이 있다. 그렇게 지킴이들은 11년째 강정을 지키고있다. (강정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은 얼마전에 나온 <돌들의 춤>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6월18일, 강정에 함께 사는 친구들과 제주시에서 열린...
                  조은 5년 동안 현민, 시윤, 민서, 동희와 함께 동천동에서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다. 10년을 살던 마을을 떠나, 2월부터 강정에서 첫 독립을 시작했다.      2023년 2월20일에 강정으로 이사를 왔다. 이우중학교를 가기 위해서 동천동으로 이사를 했으니, 약 10년만에 동천(고기)동을 떠났다. 10년 동안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다. 10년을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같은 동네에 살았으니 지겹겠다는 생각을 누군가는 하겠지만, 나는 지겹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랜 기간 마을에 머무는 일은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오래된 친구들과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한다는건 때때로 외롭고 힘들었지만 대체로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떠나가는 이들을 많이 봐왔고, 그들을 보내주는 건 나에게 편안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작년 1월 피스파인더 모집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22년4월부터 3개월짜리 강정살이(피스파인더)를 시작했다. 그게 강정을 처음 만나게된 시작이었다.    강정마을에는 해군기지반대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평화운동을 하는 지킴이들이 살고 있다. 해군기지는 이미 지어졌지만, 해군기지 폐쇄를 외치며, 해군기지를 만들때 폭파시킨 구럼비바위를 그리워하고, 나아가 전쟁을 멈추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살고있다. 매일 아침에는 백배, 11시에 미사, 12시에는 인간띠잇기를 하고, 매일 점심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삼거리식당이 있다. 그렇게 지킴이들은 11년째 강정을 지키고있다. (강정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은 얼마전에 나온 <돌들의 춤>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6월18일, 강정에 함께 사는 친구들과 제주시에서 열린...
조은
2023.06.25 | 조회 390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7월 9일     작년 여름, 새벽이 잔디와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2022년 7월 9일. 그날은 새벽이의 세 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첫 돌봄을 며칠 앞두고 새벽이생추어리 인스타 계정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 다가오는 7월 9일은 새벽이의 세 번째 생일입니다! 새벽이는 종돈장에서 구조되어 세 번째 생일을 맞이하지만, 새벽이와 같이 태어난 돼지들은 생일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새벽이 역시 구조되지 않았더라면 생일을 맞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돼지가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에서 새벽이의 삶은 매일매일이 투쟁입니다. 그 매일의 시간이 쌓여 어느덧 3년이 지났습니다. 새벽이가 살아낸 날들을 기억하며 이 땅에 사는 돼지들도 생일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사전에 새벽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축하 크루'가 결성되었다. 크루들은 감자 케이크와 미강 미역국을 비롯한 음식들로 새벽이의 생일상을 준비했다. 그리고 생일날 이른 아침, 크루들은 새벽이생추어리에 가서 생일 축시를 낭송하고 축하 노래를 함께 불러주었다. 나는 같은 날 저녁에 처음으로 새벽이, 잔디와 만났다. 처음 본 새벽이의 모습은 위엄이 넘쳤고, 식사를 마치고는 더위를 피해 진흙탕에 몸을 풍덩 담갔다. 잔디는 만나자마자 슬금 슬금 다가왔고, 나는 미리 준비한 토마토를 잔디 입에 쏘옥 넣어주었다. 그렇게 돌봄이 시작되었다. 그날부터 매주 새벽이, 잔디를 만나왔다. 여름을 지나 가을, 겨울, 봄....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7월 9일     작년 여름, 새벽이 잔디와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2022년 7월 9일. 그날은 새벽이의 세 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첫 돌봄을 며칠 앞두고 새벽이생추어리 인스타 계정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 다가오는 7월 9일은 새벽이의 세 번째 생일입니다! 새벽이는 종돈장에서 구조되어 세 번째 생일을 맞이하지만, 새벽이와 같이 태어난 돼지들은 생일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새벽이 역시 구조되지 않았더라면 생일을 맞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돼지가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에서 새벽이의 삶은 매일매일이 투쟁입니다. 그 매일의 시간이 쌓여 어느덧 3년이 지났습니다. 새벽이가 살아낸 날들을 기억하며 이 땅에 사는 돼지들도 생일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사전에 새벽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축하 크루'가 결성되었다. 크루들은 감자 케이크와 미강 미역국을 비롯한 음식들로 새벽이의 생일상을 준비했다. 그리고 생일날 이른 아침, 크루들은 새벽이생추어리에 가서 생일 축시를 낭송하고 축하 노래를 함께 불러주었다. 나는 같은 날 저녁에 처음으로 새벽이, 잔디와 만났다. 처음 본 새벽이의 모습은 위엄이 넘쳤고, 식사를 마치고는 더위를 피해 진흙탕에 몸을 풍덩 담갔다. 잔디는 만나자마자 슬금 슬금 다가왔고, 나는 미리 준비한 토마토를 잔디 입에 쏘옥 넣어주었다. 그렇게 돌봄이 시작되었다. 그날부터 매주 새벽이, 잔디를 만나왔다. 여름을 지나 가을, 겨울, 봄....
경덕
2023.06.20 | 조회 393
먼불빛의 웰컴 투 60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취업을 했다     작년 정년퇴직 후 8개월이라는 실업급여 수급의 막바지가 다가올 즈음,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재취업에 시동을 걸었다. 역시나 내 나이와 경력을 활용할 만한 일자리는 없었다. 60이라는 - 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늙은 축에도 못 끼는 - 나이처럼 절망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렇다고 분투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을 차일피일 보내고 있을 때, 마침 일하지 않겠냐는 전 직장 팀장으로부터의 전화가 왔다. 조심스럽게 내 의향을 묻던 그는 주30시간(하루 6시간) 일자리라는 사실을 무척 강조했다. 사실 퇴직하기 전에 하루 8시간 근무가 버거울 수 있는 나이라는걸 깨달은 탓에, 중‧고령 노동 시장에서 나이 많은 나를 헐값이 아니고서는 받아줄 곳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처절히 깨달은 탓에, 나는 재지 않고, 그냥 넙죽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두 가지 염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나랑 안 맞으면 때려치우지, 뭐’ 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근무할 곳은 정년퇴직한 전 직장에서 이미 업무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던 곳이었고, 대부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함께 일하게 될 K는 사무국장이면서(헐... 나이 차는... 비밀!) 작년에 입사하여 혼자 일해 왔다. 올해 경기도와  00 재단으로부터 프로젝트 예산을 받게 되면서 자신을 보조할 인력이 필요했지만, 신입을 받고...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취업을 했다     작년 정년퇴직 후 8개월이라는 실업급여 수급의 막바지가 다가올 즈음,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재취업에 시동을 걸었다. 역시나 내 나이와 경력을 활용할 만한 일자리는 없었다. 60이라는 - 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늙은 축에도 못 끼는 - 나이처럼 절망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렇다고 분투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을 차일피일 보내고 있을 때, 마침 일하지 않겠냐는 전 직장 팀장으로부터의 전화가 왔다. 조심스럽게 내 의향을 묻던 그는 주30시간(하루 6시간) 일자리라는 사실을 무척 강조했다. 사실 퇴직하기 전에 하루 8시간 근무가 버거울 수 있는 나이라는걸 깨달은 탓에, 중‧고령 노동 시장에서 나이 많은 나를 헐값이 아니고서는 받아줄 곳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처절히 깨달은 탓에, 나는 재지 않고, 그냥 넙죽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두 가지 염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나랑 안 맞으면 때려치우지, 뭐’ 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근무할 곳은 정년퇴직한 전 직장에서 이미 업무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던 곳이었고, 대부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함께 일하게 될 K는 사무국장이면서(헐... 나이 차는... 비밀!) 작년에 입사하여 혼자 일해 왔다. 올해 경기도와  00 재단으로부터 프로젝트 예산을 받게 되면서 자신을 보조할 인력이 필요했지만, 신입을 받고...
먼불빛
2023.06.20 | 조회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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