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차일드, 사이보그, 해러웨이

문탁
2021-04-1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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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러웨이......아, 웬수들

 

  내 책장들은 모두 맞춤제작가구이다. 책을 최대한으로 수납할 수 있게, 그러나 a4 사이즈의 자료도 동시에 수납할 수 있게 정교하게 설계된 높이 2100~2200cm의 튼튼한 원목 7단 책장이다. 그 중 하나에 페미니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다. 주로 이론서와 역사서.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은 그곳에서 페미니즘 관련 책을 꺼낸 적이 거의 없다. 하여, 그 책장은 점점 나의 애물단지가 되어갔다.

   저걸 버려야지...근데 버리긴 너무 아깝잖아...그럼 누굴 줘버려...이걸 가져가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문탁에서는 페미니즘에 아무도 관심 없어..... 그렇다고 읽지도 않을 책을 왜 끼고 있니?...그러게 말야...ㅠ

 

  그런데 최근 몇 주 동안 나는 해러웨이를 읽기 위해 10년 동안 버려두었던 그 책장에서 날마다 책을 십 수권씩 꺼내서 옆에 쌓아두었다. 아이고 세상에, 이 책들을 다시 펴보는 날이 오는구나. 이게 무슨 일이래? 그런데도 해러웨이 읽기는 쉽지 않았다. 영어원문 pdf파일을 프린트해놓고 내용이 이상할 때마다 들여다보았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논문들도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아, 웬수! 해러웨이가 웬수인지, 이번 양생프로젝트에서 페미니즘 공부를 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겸목이 웬수인지, 악명높은^^ <동문선> 출판사가 웬수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 20년 전 열나 페미니즘 공부하다가, 어느 순간 “아니, 이렇게 이론들이 어려워서 누가 페미니스트가 되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들 (페미니즘을 공부하려면, 음, 맑스, 프로이드,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을 완벽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야 프렌치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를 따라 간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너무 어려운 이론들, 반면에 거버넌스에 목매달고 있는 한국의 여성단체들. 이 둘 사이의 “참을 수 없는” 괴리! 그 즈음 어느 때인가 나는 더 이상 페미니즘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도 버렸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난 몇 주 동안이나 “아, 이 웬수들!!!”을 부르짖으며, 이빨을 뻑뻑 갈며,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낮이고 밤이고 해러웨이 악몽에 시달리며 지냈다. 그리고 이빨이 진짜루 뽑혔다. ㅋㅋㅋ

 

 

2. 사이보그, 페미니즘SF, 그리고 옥타비아 버틀러

 

  다들 넋이 빠진 느낌이다. 아, 그래도 두 달 가까이 해러웨이를 읽었는데 정리를 좀 해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앗, 소설을 읽자. 해러웨이가 반복적으로 소환하고 있는, 빚지고 있는, 영감을 얻고 있는 옥타비아 버틀러를 읽자. 그렇게라도 우회적으로 해러웨이를 정리하자. 어쨌든 소설은 좀 낫지 않을까? 그런데 뭘 읽지?

 

 

 

 

 

     “나의 논의는 조안나 러스, 새뮤얼 들레이니, 존 발리,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옥타비아 버틀러, 모니크 위티그, 본다 매킨타이어 같은 작가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꾼인 이들은 하이테크 세계에 체현된다embodied는 것의 의미를 탐사한다. 이들은 사이보그를 위한 이론가이다.(69)...

    글쓰기의 의미가 걸린 씨름은 현대 정치투쟁의 주요 형식 중 하나다. 글쓰기 놀이의 해방은 더없이 진지한 문제다. 미국 유색인 여성의 시와 이야기들은 글쓰기, 곧 의미화의 권력을 쟁취하는 문제와 반복적으로 관련되지만 이때의 권력은 남근적이거나 순수해서는 안 된다. 사이보그 글쓰기는...옛날 엣적의 총체성을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사이보그 글쓰기는 본원적 순수함이라는 기반 없이, 그들을 타자로 낙인 찍은 세계에 낙인을 찍는 도구를 움켜쥠으로써 획득하는 생존의 힘과 결부된다.(72)...

   글쓰기는 무엇보다 사이보그의 기술로,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글자판이다. 사이보그 정치는 언어를 향한 투쟁으로, 완벽한 소통에 대항하며, 모든 의미를 완벽하게 번역해내는 하나의 코드, 즉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라는 중심원리에 대항하는 투쟁이다.(75)....

   페미니즘 SF를 채우는 사이보그들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 인공물, 인종 구성원, 개체적 실체, 몸의 지위를 매우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옥타비아 버틀러는 경쟁자의 유전적 조작을 막기 위해 변신 능력으로 맞서는 아프리카 여성 주술사의 이야기 (『야생종Wild Seed』), 현대 미국 흑인 여성을 노예 시대로 돌려놓은 뒤, 백인 주인-조상과 관련된 자신의 행위가 그녀 자신의 출생 가능성을 결정하게 되는 타임워크 이야기 (『킨Kinderd』), 적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교차-종 입양 아동이 공동체 및 정체성에 대해 금지된 통찰에 도달하는 이야기 (『생존자 Survivor』)를 쓴다. ‘이종 창세기’ 시리즈의 첫 작품인 『새벽』(1987)에서 버틀러는 릴리스 이야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릴리스’라는 이름은 아담이 쫓아낸 첫째 아내를 연상시키고 ‘이야포’라는 성은 미국의 나이지리아 이주민 가정 아들의 미망인이라는 지위를 표시한다. 흑인 여성이자 아이를 떠나보낸 어머니인 릴리스는 핵전쟁의 홀로코스트 이후 지구의 서식처를 개량하면서 인간 생존자들이 자신들과 융합하도록 강요하는, 외계인 연인/구조자/파괴자/유전공학자들과 유전적 교환을 통해 인류의 변환을 매개한다. 이 소설은 20세기 후반의 인종과 젠더에 따라 구조화된 신화의 장에서 생식, 언어, 핵의 정치를 조사한다.(81)...

    페미니즘 SF에 등장하는 사이보그 괴물들은 남성Man 및 여성Woman이 등장하는 세속적인 소설과는 사뭇 다른 정치적 가능성과 한계를 정의한다.(83)...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몸과 도구를 설명해왔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 아니라, 불신앙을 통한 강력한 이종언어heteroglossia를 향한 꿈이다. 이것은 신우파의 초구세주 회로에 두려움을 심는, 페미니스트 방언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기계, 정체성, 범주, 관계, 우주 설화를 구축하는 동시에 파괴하는 언어이다. 나선의 춤에 갇여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곘다.”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 책세상)

 

   지금 생각하면 『블러드 차일드』나 『와일드 시드(=야생종)』를 읽자고 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나는 그녀의 초기 대표작, “출간된 지 4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오늘까지도 웰메이드 SF 장편소설 가운에 첫 손에 꼽히고 있다”는 『킨』을 선택했다. 내일 우리는 『킨』을 통해 해러웨이를 마무리 짓는다.

 

 

3. <겟 아웃>과 <블러드차일드>

 

  <블러드차일드>는 “네뷸러상, 휴고상, 로커스상을 모두 석권한 전무후무한 작품”이라고 한다. (솔직히 이 상들이 뭔지 난 모른다) 『킨』을 읽다가 살~짝 지루해질 때 나는 이 단편을 집어 들었는데 알 수 없는 흡입력에 이끌려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아, 오잉, 음...이거 뭐지?

 

  처음엔 나도 외계생명체가 지구인을 숙주로 삼는 이 소설이 노예제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했다. 『킨』을 읽고 있던 중이었고, 저자가 흑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나에게는 <겟 아웃>의 버틀러 버전처럼 느껴졌다. (반대로 말하는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겟 아웃>이 <블러드차일드>의 영화적 버전이라고)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백인과 흑인 혹은 남성과 여성), 지배하는 자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끔찍한 짓들, 지배받는 자들의 무의식 깊은 곳의 수치와 공포,.... 영화 <겟 아웃>과 소설 <블러드 차일드>는 그런 맥락을 똑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런데 소설 뒤의 후기에서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  <겟 아웃>

 

 

   “<블러드차일드>늘 노예 이야기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 소설은 노예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관점에서 이것은 아주 다른 두 존재 간의 사랑 이야기다. 또 어떤 관점에서는 소년이 충격적인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정보를 이용하여 남은 평생에 영향을 미칠 만한 결정을 내리는 성장 이야기이다. 세 번째 관점에서 <블러드차일드>는 남성 임신에 대한 이야기다...나는 사랑의 행동으로 임신을 하게 되는 남자, 환경적인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선택하느 남자에 대한 극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다...하나 더..나는 ‘집세’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원래 거주민이 있는 태양계 밖 행성에 존재하는 고립된 인류 식민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인류는 늦든 빠르든 그들의...음, 숙주에게 모종의 숙박료를 내야 할 것이었다. 이것은 특이한 숙박료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블러드차일드> 후기, 『블러드차일드』, 비채, p56)

 

  다시 읽었다. 그랬다. 이것은 절대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3미터에 달하는 몸을 채찍처럼 휘두르면서..각 체절마다 네 쌍씩 달린 수족뼈...그러나..몸을 비틀어 던졌다가 떨어지는 방식으로 달릴 때면 뼈가 없어 보일 뿐 아니라...헤엄치는 생물”처럼 보이는 틀릭족은 지구에서 망명 온 테란족을 보호해주고, 그 테란족 남성은 그 보호의 대가로 그들의 숙주가 되어 그들의 자식을 키우고 죽음을 무릅쓴 출산(그건 마치 틀릭족이 임신한 테란족 남성을 “고문하고 잡아 먹는” 것 같이 보인다)을 감행해야 한다. 누가 그 일을 담당할 것인가? 테란족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자식들 중 하나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 이 단편의 주인공은 그 임무가 맡겨진 어린 소년, ‘단’이다. (더 자세한 것은 스포에 해당하기 때문에 생략^^)

 

 

 

 

  그랬다. 이것은 사랑이냐 폭력이냐로 구분되지 않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의무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의 구별이 불가능한 윤리에 관한 이야기이고, 쾌락과 죽음의 구별이 무의미해지는 생식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혼종’, ‘잡종’, ‘변종’, ‘경계없음', '무구하지 않음', ‘괴물', ’사이보그‘ 등의 언어가 이론적으로 제시될 때 주는 트랜디한 쾌감을, 이 소설은 주지 않았다. 기괴했고 불편했고 낯설었다. 이 소설을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도 결정하기 힘들었다. (『킨』에서 ‘백인 같은 흑인’이 되어버려 노예제의 일부가 되어가는 주인공 ‘다나’를 우리는 어찌 봐야 하는가?) 난 더 이상 'PC'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정치적 올바름’으로 사태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음, 엄청난 공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약간 판단불능의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4. ‘PC(정치적 올바름)’를 넘어, 해러웨이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해러웨이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동시에 그들이 놓치고 있었던 기술과학의 문제를 페미니즘 이론에 적극 결합시킨 과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이다. 당연히 기존(백인 중산층) 페미니즘의 전제이자 조건인 젠더정체성을 문제 삼는다. 모든 여성이 동일한 경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인식론적 폭력)

 

  “젠더는 언제나 관계이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존재들의 범주이거나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젠더는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적합한 것이 아니다. 젠더는 국가, 세대, 계층, 가계, 피부색, 그리고 이외의 다른 많은 것에 의해 차별되고 (차이화되고) 다양하게 구성된 남성과 여성의 범주들(그리고 다양하게 배열된 전의들) 사이의 관계이다.” (해러웨이,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_를 만나다』, 갈무리, P8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우리는 이번 선거를 보면서 매우 당황한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들은 “당선 확실 연설 때 그동안의 힘든 시간들이 떠올라 가족들이 함께 울었다, 잊지 않고 말씀해주시고 잘 살펴주신다니 감사드린다.”는 박원순 성추행 사건 피해자를 보면서 당혹스러워 한다. 뿐만 아니라 20대 남성들이 대거 오세훈을 뽑았다는 기사를 보면서도 우리는 당황한다. (당황한 나머지 너도 나도 온갖 분석을 – 포획을- 시도한다.) 그런데 “여성을 자연스럽게 결속시키는 여성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여성적으로 ‘되어간다’는 어떤 상태마저 없다”(「사이보그 선언」)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왜! 우리는 당혹스러운 것일까? 아마도 그들의 맥락이, 그들의 “무구하지 않은” 진실이, 나의 ‘PC’적 인식틀에 버그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오염을 잘 견디지 못한다!

 

<수난유감, 너는 내가 소풍나온 강아지 새끼인줄 아느냐>, 이불

 

 

  난 겸목이 말한 “해러웨이 ‘긴가민가’”는 겸목의 말처럼 난해한 이론이나 개판인 번역 때문이 아니라 (물론 이 영향도 무지 크긴 하다^^) 해러웨이가 던지는 메시지의 낯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신이 되지 않고 사이보그가 되는 것! 이분법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 표상하지/되지 않으면서(도) 서로 훈련해야만 얻어지는 ‘소중한 타자성’이란, 말처럼 쉬운 게 결코 아니다. 웃을 수 없는 곳, 웃는지 우는지 애매한 곳, 어떤 관성적 인식도 강제로 중단되는 곳, 불쾌감이 쾌감을 압도하는 곳. 해러웨이가 초대하는 그곳으로 기꺼이 갈 수 있을까? 해러웨이는 아마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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