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곤경노트 - 법이 폭력이라고? (무사)
문탁
2023-07-20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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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곤경노트 - 법이 폭력이라고?
무사
법이 무사 폭력이우까?!
폭력을 응징하는 법이 폭력이라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람.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폭력을 휘둘러 왔다는 말이야? 나는 강하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18년 전 기억을 소환했다. 2005년 가을이었고, 입대한 지 3년차였다. 관할 지역 남성 지휘관이 여성 장교를 강제추행한 사건이었다. 나는 수사과정에서 피해자 조사 입회 임무를 맡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뭐라도 해주려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그 후배는 물었다. “선배가 여기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날돕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냐” 고. 나는 조사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2차 피해를 막고 있다고 답했다. 가해자는 처벌되었고, 후배는 전역했다. 그리고 다른 유사한 사건들에 치어 나는 곧 이 일을 잊었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타인에 대하여 부당하거나 불법한 방법으로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법에 따른 힘의 행사(체포, 구속, 사형 등)나 법이 허용한 힘의 행사(정당방위 등)는 법질서를 위반하는 폭력에 대한 합법적인 억압에 해당한다.(<법률학 사전>, ‘폭력’ 편) 이처럼 법과 폭력은 완전히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알고 있던 나로서는 법과 폭력이 별개가 아니라고 말하는 버틀러의 주장 앞에 멈칫했다. 내가 수 십 년간 공부하고 다뤄 왔던 법에는 나름 양심이 있고, 일부 감정도 있다고 믿어 왔다. 피해 전부를 보상 받거나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지는 못하더라도 법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경우도 많았다. 법은 단순히 법전 안의 글자만은 아니다. 판결문에 자주 등장하는 ‘일반인의 법감정’이나 판사가 형을 선고할 때 참작하는 양형의 조건(형법 제51조) 등이 그 예이다. 물론 반론도 가능하다. 법의 이름으로 희생되었던 수많은 생명들, 성범죄의 피해자를 상대로한 무고죄와 명예훼손 역고소, 성범죄 가해자의 감형 패키지를 파는 변호 광고 등도 모두 법 안에서 이루어진다. 법은 폭력을 매개로 한 시장이 되었고, 그 속성상 정치권력과 사회구조와 묶여 있어서 그 원근 정도에 따라 선별적으로 눈을 가리기도 한다. 그러니 ‘살만한 삶’을 살고자 법에 호소한 피해자들로서는 ‘법이 진정 최후의 안전망인가?’ 라고 묻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법의 폭력성을 말하는 버틀러에게 전적으로 동의할 수만은 없었다. 지난 6월 17일 제15회 대구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적법하게 집회 시위 신고 후 설치한 주최 측의 시설물을 무단도로점용을 이유로 철거하기 위해 일반 공무원 500명을 동원해 행정대집행을 시도했다. 대구경찰청은 경찰 1500명을 배치해 공무원과 주최 측의 충돌에 대비하며 축제의 원활한 진행을 도왔다. 적법하게 집회 시위 신고를 마친 경우 추가로 도로점용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판례의 태도를 근거로 공무원들의 행정대집행을 막았던 것이다. 법과 법이 대치되는 상황에서 때론 어떤 법의 강제력에 기대는 순간이 온다. 우리가 기댄 그 법은 좀 덜 폭력적이라거나 정당한 목적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수단일 뿐이라고 말할 여지는 없는가? 대구퀴어문화축제의 진행을 도왔던 경찰력을 정당한 강제력이라고 두둔하는 것이 법의 폭력성을 비가시화하는 것인가? ‘정당화되는 폭력은 무엇이고 그렇지 못한 폭력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그리 잘못된 질문인가? 버틀러의 대답을 따라가보자.
정당한 폭력, 정당하지 않은 폭력
우리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더라도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폭력 중 최고봉)은 대체로 정당하다고 여긴다.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지만 목적이 정당하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인다. 버틀러는 정말 그러한지 묻고 있다. 특히, 이미 전 지구적 폭력의 장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저항이라는 맞폭력 전술 수단과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좌파 진영의 오랜 주장에 대해 다시 숙고해보자고 말한다. 그러한 입장은 '폭력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아예 회피하고 폭력의 ‘적용’으로만 관심을 유도하며, 무엇보다 ‘자기’방어에서의 ‘자기’는 누구인가?’ 라는 또 다른 질문에 봉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당한 폭력과 정당하지 않은 폭력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가령 현재 진행 중인 러-우 戰에서 목도하는 폭력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폭력은 정당하고 또 그렇지 않은지 색인을 붙일 수 있을까? 수단으로서 선택한 폭력이 단순히 수단에만 머물지 않고 꼬꼬무 악순환으로 이어진 사례는 역사 속에 많았다. 버틀러는 그것이 폭력의 속성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법과 폭력이 맺은 이면 계약
버틀러는 폭력의 속성을 법과 폭력의 상호연결성을 통해 설명한다. 이는 폭력이 특정 권력의장 안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규정되는가, 폭력의 전도는 전술적으로 어떻게 수행되는가를 포착해내어 결과적으로 ‘법이 폭력을 응징한다’는 일반 관념을 비판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버틀러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 Zur Kritik der Gewalt>(1921년) 논문을 참조한다.(참고로 독일어 게발트 Gewalt는 폭력을 뜻하지만 국가 권력 Staatsgewalt이라고 할 때의 적법한 힘, 허가된 강제력, 합법적 권력을 뜻하기도 한다.)
벤야민은 법 안에서 수단으로서 작동하는 폭력의 세 가지 성격을 법을 정하는 폭력, 법을 지키는 폭력, 신적 폭력으로 구분하고 있다. 법은 응징, 권력 행사(폭력)를 통해 새로 생겨나고, 공권력과 군사력은 정권 유지를 위해 법의 구속성을 계속 확인시켜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폭력은 법 정립과 법 보존의 수단으로서 처음부터 특정 프레임 내부에서 정의되어 있고, 이미 항상 그러한 정의 틀에 의해 해석된(정리된) 상태로 오기 때문에 (좌파 진영의 바람대로) 정당한 폭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폭력은 정당하고 다른 폭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나 역시 지금껏 어떤 ‘법’에 기대왔다. 그래도 양심이 있고, 감정이 있다고 믿어 온 그 ‘법'이다. 그래서 대구퀴어문화축제에서 보여준 경찰력의 승리가 바로 폭력이 아닌 그 ‘법’의 정의나 양심은 아닐까 기대한 모양이다. 법과 법의 대치 상황에서 경찰력은 결과적으로 홍시장의 행정력을 막아냈지만, 이는 법질서 간의 충돌, 폭력과 폭력의 힘겨루기, 한 폭력에서 다른 폭력으로 옮겨가는 현상의 현현일 뿐이었다. 데리다 역시 <법의 힘>에서 “사회의 안전을 보증하고 불확실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다는 것,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항상 호출할 수 있다는 편재성 자체가 경찰이 법의 힘임을 보여주는 징표”(97쪽, 102쪽) 라고 말하고 있다. 아쉽지만, 대구퀴어문화축제에서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한 듯 보였던 경찰력은 언제든 축제 주최 측을 폭력으로 명명할 수 있는 공권력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깨달았다. 18년 전 후배가 건넨 말의 의미를. 사법제도 종사자였던 나 역시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프레임(도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을. 법은 폭력이었다.
버틀러의 비폭력 실험-폭력은 거부하고 편견은 뛰어넘고
얼마 전 막을 내린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에서 시인과 활동가가 대통령경호실 직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갔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 가담 의혹을 받고 있는 한 인사의 홍보대사 위촉에 대한 항의과정에서였다. 항의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경호 구역 안에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음에도 공권력은 이들을 무력으로 탄압했다. 기자회견을 했을뿐인데도 참가자들은 대통령 가족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폭력 집단으로 명명되었다. 범주화된 계급, 젠더, 인종 등은 전 지구적으로 권력의 차별적 망상(‘저들이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에 의해 폭력 집단으로 명명되고 있으며, 이렇게 권력에 의해 정당화된 폭력 도식(‘그러므로 저들을 억압하는 것은 당연하다’)은 일반의 생각 속에 지속적으로 주입된다.
그런데 정말 ‘저들’은 ‘자기’와 다를까? 그 어떤 존재(자)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기립하는 근대적 보편 개인이야말로 허상임을 우리는 내내 배웠다. 그러하니 방어를 위해 경계 안에 넣어 놓은 그 ‘자기’는 ‘저들’과의 관계를 통해 구성된 것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기’만을 온리 방어하는 폭력은 있을 수 없다. 그 폭력은 관계를 파괴시킬테고 이는 곧 ‘자기’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가해진 폭력이 곧 자기에게 가해진 폭력이기도 하다”(<비폭력의 힘>, 21쪽, 이하 쪽만 표기)는 결론 끝에 버틀러가 향하는 비폭력은 어떻게 행동해야 폭력이 억제되거나 완화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 때의 비폭력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개인의 윤리적 입장이나 영혼의 평안한 부분에서 우러나오는 것과 같은 일반적 의미의 비폭력이 아니다. 개인의 윤리 영역을 넘어 관계와 구조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정치적 실천이다. 오히려 비폭력은 분노와 공격성으로 등장하고 다르게는 침묵과 비행동으로도 행해지며 ‘진행 중’이라는 애매함을 경유하기도 한다. 결국 버틀러가 말하는 비폭력은 “공격성의 경로를 바꾸는 방식”이며 “평등과 자유의 이상을 긍정하기 위한 지속적 참여”(43쪽)이다.
“비폭력은 폭력을 가하는 것이 극히 정당해 보이고 당연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가능한 선택지로 주어지는 저항적 실천이다…비폭력은 어떤 절대적 원칙이 아니라, 폭력과의, 그리고 폭력을 막겠다고 하는 힘들과의, 끝이 열려 있는 투쟁이다.”(43쪽, 78쪽)
비폭력의 힘
버틀러는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물리적 폭력이, 많은 경우 구조적 폭력과 연결된 것임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집회나 시위를 포함한 비폭력 실천 행위들이 오히려 폭력으로 명명되는 현실 속에서, 권력이 폭력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한다는 명분으로 정당성을 만들고 은폐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추적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비폭력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만 공고해진 망상적 각본에 의해 비폭력이 폭력으로 전도되는 반복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출간할 당시 독일은 양차대전 사이에서 불안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이었고, 히틀러의 전면 등장을 앞두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벤야민은 의회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상호 이해와 전달 가능성을 바탕으로 한 ‘언어’(번역으로 만난 두 언어)를 ‘폭력을 일체 불허하는 합의의 영역’으로 보았나보다. 버틀러는 벤야민이 말한 신적 폭력을, 폭력에 대한 합법 프레임을 잠시 중단시키고 경계를 허물어 갈등해결방안을 마련하는 것, ‘법폭력에 가해지는 폭력’으로 해석한다. 이어 신적 폭력(신적 언어)과 비폭력적 합의도출 기술을 연결하여 ‘비폭력의 힘’으로 논의를 이끌어간다. “(벤야민이 말하는) 언어의 번역을 주관하는 법은 사법과 무관한 법으로서, 비폭력이라는 사법권 바깥의 갈등해결방안과 공명한다”(167쪽) 고 강조하면서, 다른 언어들 사이의 번역 가능성이, 이질성과 접촉하여 변모할 수있는 어떤 개방성이, 비폭력 합의도출 기술로서 경계를 허물고 법폭력을 파괴하는 기능을 할 것이라며 낙관한다.
다만, 버틀러는 폭력과 비폭력, 법의 폭력성을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벤야민의 주장 중 일부만을 취할 뿐이다. 신적 언어(상위의 언어)라는 모호한 수사 대신 상호의존적이고 취약한 신체를 매개로한 연대를 말한다. 법에 기대지 않는 무정부주의 대신 비폭력을, 폭력이 아닌 듯 저질러지고 또 저질러지는 폭력에 저항할 때 발휘되는 힘, 저항과 생존의 연대 협력에서 표면화되는 힘으로 재명명한다. 메시아주의적 파괴와 절멸 대신 모두가 ‘살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폭력의 환등상의 도식을 반대할 때, 끊임없이 폭력으로 명명되는 도식에 대항하여 연대할 때,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안간힘을 써서 인식할 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가해진 폭력은 곧 자기에게 가해진 폭력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법은, 그리고 폭력은 비폭력의 힘에 의해 전도될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우리의 전장은 정치적으로 큰 힘을 행사하고 있는 환등상들의 한복판이다. 이런 입장들의 농간과 전략을 폭로하기 위해 우리는 폭력이 피해망상과 혐오에 물들어 있는 방어논리의 차원에서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간파할 수 있는 진지를 마련해야 한다.”(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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