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와 애도가능성(묘선주)
문탁
2023-07-2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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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평등을 위한 토대로서의 애도가치
묘선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10.29 이태원 참사가 벌써 200일째입니다. 아직 아무런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4월 나는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수원역 대합실에서 외쳤다.
이른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 학교 가는 학생들. 어디론가 이동하는 사람들. 퇴근하는 사람들이 한데 얽힌 수원역 대합실은 분주함 자체였다. 그 분주함 속에서 오가는 낯선 사람들과 1~2초 정도의 짧은 눈맞춤을 희망했다. 우리의 외침에 아주 잠시라도 귀 기울여 주기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의 외침에 관심이 없었다. 우리를 피해 빙 돌아가는 사람들, 핸드폰에 시선을 묶어둔 사람들, 가던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 속에 희생자들과 연령대가 비슷한 청년들을 향해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나의 눈빛에 냉대함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 냉대함은 마치 ‘나랑 무슨 상관이죠!’라는 듯 차가웠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무관심의 구조적 수준이 ‘평범함 banality’에 젖어” 이미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소중한 생명(사라진다면 애도 될 생명)이 따로 있고 하찮은 생명이 따로 있다는 그로테스크한 차별을 만들어 내는 인종 도식”(「비폭력의 힘」, p.24) 안에서, 오직 나의 ‘자기’만 ‘자기’로 인정되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불평등한 애도가치의 분배
“우리 회사에는 챗대리가 있어요.”라며 IT회사를 다니는 분께서 ‘챗GPT’ 기술을 현장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말해준 적이 있다. 영화 속에서 보던 AI 기술이 이미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을 정도로, 우리는 엄청난 기술의 발달을 이루었다. 의학의 발달 또한 인간수명 100세를 넘어 120세를 이야기하고 있는 시대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을 여기저기서 목도하고 있다. 예전과 하나도 다름없이 말이다.
느닷없는 죽음은 어떤 이에게는 나의 ‘자기’의 일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전혀 상관없고, 관심 없는 ‘자기’의 일이 된다. 10.29 이태원 참사 역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느닷없이 닥친 죽음이었다. 그 죽음은 전쟁도, 재해도, 질병도, 노화도, 빈곤도, 난민화로 인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는 헌법 제10조를 깡그리 생략했다. 유가족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이름 없는 위패’, ‘영정사진 없는 분향소’, ‘글자 없는 검은 리본 패용’을 공무원들에게 행동강령으로 지시하며, 그들의 죽음에 ‘애도가치 없음’을 낙인찍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사회적․경제적 지원체계 탓에 남들보다 더 많이 고통받으며 상해, 폭력, 그리고 죽음에 더 많이 노출되는, 정치적인 문제로 초래”(「연대하는 신체와 거리의 정치」, p.51)된 상태로 애도가치마저 차별적으로 할당된 불안정한 상태라고 우리는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그와는 반대로 며칠 전 인터넷뉴스에 경기도 모 시의원의 부고가 커다란 사진과 함께 실렸었다. 나의 인터넷 서핑에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연관 링크로 연결되어 무심결에 그 시의원의 활짝 웃는 영정사진과 부고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나와는 일면식도 전혀 없는 그 누군가였다. 10.29 이태원 참사의 죽음과는 대조되는 충분한 애도가치를 부여받은 상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불안정성은 불공평하게 할당되고 있으며, 아울러 모두의 삶이 동등하게 애도 가능하거나 동등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연대하는신체와 거리의 정치」, p.141)
“누구의 생명이냐에 따라 애도가치가 달리 매겨지는 조건하에 있다는 말은 평등의 조건이 충족될 수 없다는 뜻이다.”(「비폭력의 힘」, p.80)
애도가치란 생명(존재)의 인정임을
4.16세월호 참사와 10.29 이태원 참사를 통해 “생명가치와 애도가치를 불균형적으로 부여하는 식의 불평등이 일반화”되어 있음을 우리는 다시 한번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버틀러가 말하는 애도가치란 무엇일까. 10.29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정부의 대응이 지금과 정반대의 방식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사고 불안에 대한 국민의 신고에 적극 대응한다. 사고를 참사로 인정한다. 유가족 대책위를 빠르게 구성한다. 위패와 영정사진을 마련한 상식적인 분향소를 설치한다. 진상규명을 위한 수사에 착수한다. 책임을 규명한다. 책임자는 사과한다. 유가족과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용한 특별법을 제정한다.
바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야말로 “생명을 추모하기․보살피기․인정하기․지켜내기”(「비폭력의 힘」, p.153)를 통한 애도가치 인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의 생명이 폭력과 파괴를 금하는 명령을 적용받는 생명, 폭력으로 망가지지 않게 보살펴야 하는 생명”, “그 생명의 멸실이 손실로 개념화”될 때 그 생명에 애도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애도가치를 통해 “인간으로 인정받는 인간, 가치 있는 인간”이 된다고 버틀러는 말하고 있다.
또한 버틀러는 비폭력 실천으로 생명 지키기에 대한 철저한 평등주의적 접근을 강조하면서 애도가치를 언급한다. “애도가치는 생명들의 관리방식을 좌우하는 기준이며, 실제로 생명정치의 불가결한 차원이자 생명 있는 존재들의 평등을 생각해 보아야 할 때도 없어서는 안 될 차원이다.” (「비폭력의 힘」, p.78~79)
즉, 애도가치는 ‘죽음’에 초점을 둔 것 같으나, 실은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평등으로써의 생명가치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우리는 더욱더 그들의 죽음을 “용인될 수 없는 손실로, 있을 수 없는 일로, 충격과 격분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비폭력의 힘」, p.139)로 받아들임으로써 애도가치를 지닌 생명이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애도가치의 회복은 어떻게
얼마 전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하얀 상복을 입은 채 용산구청 앞에서 울부짖었다.
“나 먹을 것 안 먹고 새끼들 예쁘게 키워서 사회에 내보냈다. 그렇게 키워낸 자식을 국가가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참사 이후로 우리는 창살 없는 감옥을 살고 있다.”며 참사의 명백한 책임을 져야 할 용산구청장이 보석으로 풀려난 날이었다. 참사 200일을 훌쩍 넘긴 지금도, 왜 이들은 거리에서 울어야만 하는가. 버틀러는 “죽음의 전말과 누가 책임자인지를 포함하는 이야기를 확정할 수 있는 법과학적 증거를 내놓으라는 요구”(「비폭력의 힘」, p.99)를 애도시위라고 했다.
“스러져서는 안 될 생명이 스러졌다는 주장, 그 생명이 애도받아야 한다는 주장, 그 생명의 애도가치가 일찍이 인정되었다면 그 생명이 그렇게 스러지지 않았으리라는 주장”(「비폭력의 힘」, p.99)을 하기 위해 유가족들은 애도와 함께 시위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이 아직 거리에 있는 까닭이다.
“폭력 사망에서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애도는 불가능하다. 죽음이 발생했다는 것은 밝혀졌지만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니, 손실의 온전한 인지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죽은 생명의 애도가치는 인정받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비폭력의 힘」, p.100)
진상규명만이 손실되어 버린 그들의 죽음을 다시 애도가치를 인정받는 생명으로, 우리 곁에 함께 존재했던 생명으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회복 방법이며, 해결 방안이 된다.
나의 애도가치는 인정받고 있는가
“선생님은 공감 능력이 탁월한 것 같아요.” 10.29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159km 릴레이 시민행진 때 눈물을 훌쩍이던 나를 보고, 함께 참석한 동료 직원이 내게 건넨 말이다. 그 말에 나는 별 대꾸를 하지 못하고 살짝 웃어 보였을 뿐이다. 공감 능력으로 내가 참여하고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나는 왜 참여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를 본체만체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을 향해 나는 왜 깊은 아쉬움을 갖는가.... 그날 걷는 내내 내겐 물음이 많아졌다.
다행(더 좋은 단어가 있으면 좋겠는데….)스럽게도 내가 일하는 현장에서는 다양한 시민단체 활동 참여 시간이 허락된다. 아니 오히려 연대활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러니 나는 기꺼이 참여만 하면 된다. 물론 참여를 위해 업무처리는 신속 정확하게 전날 끝내 나야 한다.
시민행진 내내 나의 물음은 ‘연대’와 ‘참여’에 대한 확신 없음이었고, ‘공감능력’을 운운한 동료 직원에 대한 명징한 답변 찾기였다. 이 물음에 주디스 버틀러는 책 「비폭력의 힘」에 이렇게 글을 남겼다.
“비폭력이 ‘당신에게는 애도가치가 있다, 당신의 죽음은 감당 불가능한 손실이다, 나는 당신이 살아주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살고 싶어 하기를 바란다, 부디 나의 소망을 당신의 소망으로 삼아주기를, 당신의 소망은 이미 나의 소망’이 되었으니깐”. (「비폭력의 힘」, p.255)
주디스 버틀러의 소망으로 나는 애도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 또한 나의 소망으로 그들의 애도가치를 인정하고자 참여하고 슬퍼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또한 버틀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럴 뿐이다. “노력 중....”
그러니 나의 공감 능력의 탁월함을 칭찬(?)한 동료 직원에게 늦은 답을 말하고 싶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 중이고, 나의 가시적 영역 참여 활동은 모두를 애도받을 생명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음을, 자기 생활을 영위할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으로써, 모두의 애도가치 있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활동’이 된다고 말이다.
버틀러도 이러한 이어짐에 대해 이야기하며 책 「비폭력의 힘」을 마무리하고 있다.
“우리가 그 이어짐을 살아낼 수 있기를, 살아 있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죽은 이들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기를 (......) 슬픔과 울분의 한복판에서 생존을 입증/시위할 수 있기를”(「비폭력의 힘」,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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