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흡혈귀가 나타났다!

경덕
2023-07-22 00:01
353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흡혈귀가 나타났다!
 
 
낮은 자세
 
"내일 아침돌봄 때 잔디 배 안쪽 상처를 가볍게 소독해주실 수 있을까요? 상태가 어떤지 사진으로 찍어 공유 부탁드립니다."
 
전날 올라온 무모 님의 지시 사항을 읽으며 아침 돌봄을 갔다. '상처를 소독하려면 잔디가 잘 누워줘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새벽이생추어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날 따라 잔디는 활기가 넘쳤고 돌봄이 끝날 때까지 드러누울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봄 기운이 넘실대는 5월이었다. 잔디는 여기 저기 올라오는 풀을 뜯거나 부드러운 흙을 코로 탐색하며 봄내음을 맡느라 분주했다.
 
잔디가 눕지 않으니, 내가 누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잔디가 움직이지 않는 틈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잔디가 멈추는 순간 가까이 다가가 몸을 납짝 엎드려 배에 소독약을 뿌렸다. 잔디는 자신이 내키지 않을 때 자기 몸을 누가 만지거나 몸에 차가운 액체를 뿌리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럴 때 잔디는 몸을 부르르 떨고 꾸웅 꾸웅 소리를 내며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특히 식사 중에 어딜 만지거나 약을 바르려고 하면 코로 음식을 마구 헤집고 그릇을 퍽퍽 친다. 그러다 밥그릇이 엎어져 음식을 전부 쏟을 때도 있다. (근데 그런 반응은 너무 당연하잖아? 밥 먹을 때 누구라도 건드리면 짜증나잖아?) 어쨌든 전달 받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나는 약을 뿌렸고 잔디는 싫은 소리를 내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나는 잔디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보다가 여러 번 소독약을 뿌렸다. 
 
소독을 충분히 해준 후에는 사진을 찍어야 했다. 처음에는 휴대폰만 배 밑으로 낮게 깔고 사진을 찍었지만, 찍을 때마다 초점이 맞지 않거나 엉뚱한 부위가 찍혔다. 할 수 없이 나는 완전히 누운 자세로 얼굴을 땅에 바짝 붙여 프레임과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그리고 잔디의 피부 상태가 잘 보이는 사진을 골라 무사히 일지에 업로드했다.
 
2023년 5월 11일 돌봄 일지
- 잔디 배에 소독약 뿌려주었어요. 누울 생각이 없어보여서 제가 누워서 사진을 찍어야 했어요! 피부가 군데 군데 빨갛게 올라왔어요.
 
댓)
무모 : 잔디 배 사진 보니 경덕님 자세가 상상되었어요. 수고 많으셨어요!
경덕 : 오늘 돌봄, 가장 낮은 자세로 임했습니다!
 
 
 
 
치유제, 진흙과 황토
 
새벽이와 잔디도 아플 때가 있다. 피부에 상처가 나고 염증이 생기면 연고를 바르거나 약을 복용한다. 다리가 접질리거나 발에 이상이 생기면 다리를 절룩인다.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면 주사를 맞을 때도 있다. 그리고 컨디션이 안 좋으면 집 안에만 머무르기도 한다.
 
새벽이와 잔디는 특히 피부가 취약하다. 돼지의 피부는 많은 것들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자외선으로부터, 온갖 벌레들로부터, 부러진 나뭇가지나 땅 속에 묻혀 있는 날카로운 것들로부터. 돼지의 피부가 원래부터 취약한 건 아니었다. 돼지의 연약한 피부는 축산업에 의해 강제 개변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새벽이의 연분홍빛 피부는 축산업에 의해 강제 개변된 결과로, 그가 인간에 의해 얻은 장애 중 하나다. (...) 축산업은 이들의 털을 벗겨 먹기 쉽게 혹은 동물들을 통제하기 쉽게 몸에서 털을 없애고 색을 빼는 등 강제적 변형을 가했다. (...) 본래 돼지는 갈색과 검은색의 짙은 빛 털이 수북하게 자라난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46쪽
 
"새벽이는 인간의 동물산업으로부터 '장애화'된 몸으로 태어나,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축산업은 새벽이의 피부가 스스로 멜라닌을 생성할 수 없도록 피부를 품종개변했다." 같은 책, 48쪽
 
활동가들은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치료와 예방에 힘쓰고 있다. 피부 질환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흙을 바르는 것이다. 돼지는 땀샘이 거의 없어서 더운 날씨에는 체온 조절이 어렵다. 그런데 진흙은 햇빛을 차단하여 돼지의 체온을 낮춰준다. 또 자외선이나 벌레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고 피부 질환을 예방하며 예민한 피부를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햇볕이 뜨겁고 벌레가 들끓는 여름에는 새벽이와 잔디의 마당에 진흙 목욕탕을 만들어준다. 이전에는 '길 가다 재수 없이 밟는 축축한 흙탕물', '머드 축제에서나 볼 수 있는 이벤트 재료' 정도로만 진흙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진흙은 돼지의 피부를 케어하는 천연 치유제, 자외선 차단제, 쿨러의 역할로 먼저 떠오른다. 황토빛 진흙이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에 듬뿍 묻어 있는 모습을 보면 훨씬 야생적이고 굳세게 느껴지기도 한다.
 
 
근데 진흙 목욕탕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새벽이와 잔디의 몸이 전부 잠길 만큼 목욕탕이 크지 않아 등이나 머리와 가까운 부위는 진흙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땐 활동가가 직접 황토를 발라주어야 한다. 황토를 바르기 전에 새벽이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잔디는 예민하게 반응하더라도 덩치가 작아서  크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새벽이는 친밀한 사람에게만 곁을 내어 주고, 오래된 활동가도 새벽이가 무심코 하는 행동에 다칠 수 있어(날카로운 엄니에 긁히거나, 돌진하는 새벽이와 충돌하는 경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귀 뒷부분은 자외선에 취약하고 피부암이 생기기 쉬운 곳이라 썬크림을 발라주어야 하는데, 얼굴과 가까울수록 새벽이가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h 활동가는 일지에 이렇게 남겼다.
 
- 새벽이가 누워있을 때 새벽이 공간에 들어가서 황토 뿌려줬는데 싫어하는 게 느껴졌어요. 머리 근처로 갈수록 싫어하는 표현을 했는데 황토를 뿌려야 건강에 더 좋으니까... 미안했지만 천천히 뿌렸어요. 그러다가 새벽이가 일어나려고 하자 저는 후다닥 도망갔는데, 다 도망치고 뒤를 돌아보니 새벽이는 다 일어나지도 않고 앉아서 저를 보고 있었어요.. ㅋㅋ 스스로 좀 웃기기도 하고 철망 없이 새벽에게 그정도로 가까이 간 건 처음이어서 신기하기도 했어요!
 
y 활동가는 화끈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 새벽이 황토를 발라줄 때 역시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머리쪽을 많이 발라주고 싶어서 이번에도 새벽이 집 지붕 위에 올라가서 머리 위에 황토물을 부었어요…새벽이에겐 미안하지만.. 이사갈 생추어리를 설계할 때 황토를 발라주는 등 새벽이 가까이에서 해야 하는 돌봄을 위한 공간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흡혈귀가 나타났다!
 
또 여름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를 노리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파리와 등에이다. 등에 중에서도 동물의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종류의 등에가 있다. 왕소등에와 북방등에는 큰턱과 작은턱이 칼날모양을 이루어 숙주동물의 피부와 혈관을 자를 수 있는 무서운 흡혈 곤충이다. 등에가 머물다 간 피부에는 상처가 남고, 상처에는 금새 파리들이 달라붙는다. 파리는 상처에 세균을 옮기고, 상처에 알을 낳을 수도 있다. 활동가들이 피부에 붙어 있는 파리와 등에를 보는 즉시 쫓아내도 그 녀석들은 금방 다시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에 들러붙는다. 등에와 파리를 쫓기 위해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에 벌레 기피제를 뿌리고, 상처가 난 피부에는 연고를 바른다. 하지만 이 때에도 새벽이에게 바로 다가갈 수 없는 경우에는 새벽이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민첩하고 대담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 새벽이는 파리가 배에 많이 붙어 있었는데, 용기가 안 나서 들어가지 못했어요. (j 활동가)
 
- 둘 모두 약을 발랐어요! 새벽이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왼쪽 배 전체적으로 발랐고 엉덩이는 바르니까 다리 움찔하길래 혹시 일어날까봐 제일 큰 상처에만 좀 발랐어요. 잔디 배는 새벽이에 비해 상태가 좋아보였고 군데군데 좀 빨간데만 발랐어요. 근데 턱 쪽도 좀 빨개서 약 발랐어요. (d 활동가)
 
- 잔디가 따온 풀을 먹는 동안에 후다닥 발라줬어요. 풀을 먹을 때 약을 발라서 예민해진 탓에 저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는데 바지에 잔디 코 자국이 찍혀서 웃겼어요. (b 활동가)
 
- 배에 소독약을 뿌리긴 했어요. 굉장히 싫어했지만 고루고루 뿌려줬습니다. 정중히 사과했어요. (h 활동가)
 
새벽이의 피부를 케어하는 돌봄은 난이도가 꽤 높다. 새벽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손으로 직접 새벽이를 만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벽이가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스스로 내킬 때와 내키지 않을 때가 있다. 새벽이도 마음이 여유로울 때 누군가의 손길을 잘 수용하기 때문에 활동가들은 매번 새벽이 눈치를 살피며 새벽이의 몸과 마음이 느긋해지길 기다린다. 
 
 
 
벌레와, 함께 살 수 있을까?
 
어느 날 이런 공지가 올라왔다. 
 
- 잔디 안방, 새벽 안방에 파리끈끈이를 설치했어요. 지난 돌봄모임에서도 나눴지만, 파리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벌레물린 상처에 파리가 꼬이면 심각한 염증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몇 년 동안 소극적인 대처로 기피제를 뿌려보았지만 큰 효과는 없었어요. 새벽이 잔디 건강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자 합니다. 곧 전기파리채도 시도해볼 예정이에요. 벌레와의 공존에 대한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니 불편한 마음이나 더 좋은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 등 자유롭게 나누어요.
 
활동가들은 새벽이와 잔디를 돌본다. 그리고 새벽이와 잔디를 위협하는 벌레들을 퇴치한다. '벌레와의 공존에 대한 고민'은 인간중심주의, 종차별주의에 대한 고민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불편한 마음'이나 '더 좋은 방법'에 대한 나눔은 어떤 사유와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보호' 너머의 '돌봄'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고민을 나누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간, 비인간 동료들과 계속 함께하는 것 또한 그 자체로, '돌봄'의 일환일 수 있을까?
댓글 3
  • 2023-07-23 07:45

    사람의 고기로 만들기 위해 품종을 개변하는 과정에서 파리, 모기, 등에에도 취약하고
    심지어 자외선도 견딜 수 없는 피부를 갖게 되었다니..
    새벽이와 잔디의 피난처인 생추어리야말로 '원죄'를 끊임없이 떠올리게 하는 장소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에 약을 발라주고 사진을 찍기 위해 땅바닥에 누워 애쓰는 경덕님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옵니다.ㅎㅎ 고생하셨어요!!

  • 2023-07-26 22:32

    우리도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가차없이 항생제나 항바이러스제를 이용해서 죽이잖아요! 무구할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린 늘 윤리를 생각해야 하는 거겠죠?
    돼지가 품종이 개량(?)되어서 분홍색 피부를 갖게 되었다니요 …ㅠㅠ

  • 2023-07-27 10:53

    활동가들의 모습이 상상되는 일지들이 재밌네요. 마냥 재밌을 수 만은 없지만요.
    마당에 풀을 뽑으면서 가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 왜 이건 살리고 이건 뽑는건지 모르겠다...
    벌레와의 공존은...음... 쉽지 않네요...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두부와 나단       아래의 쓰여진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하며, 화자를 나나라는 인물로 칭한다.     두부   두부는 나나가 이 곳에서 만나 알게 된 유일한 한국 사람이다. 과거에 어디 하나 엮인 데 없이 말이다. 작년 겨울, 두부는 한국에 가는 동안 방을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집이 없던 나나는 우연히 두부의 방을 보러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더 길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단기임대는 무산되었지만, 나나는 두부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한번 만났지만, 이 맑은 얼굴의 여자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새해를 핑계 삼아 떡국을 먹자고 두부를 집으로 초대하며 인연은 이어지게 되었다.   두부를 볼 때마다 그에겐 어딘가 단단한 마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고생하여 결국엔 이뤄 본 사람. 착하지만 아무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의 느낌. 두부는 독일에서 고생만 했는지 나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두부에게는 애인이 있다. 나나보다도 어린 두부가 10살 연상의 사람을 만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머리 속에서 빠르게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두부와 나단       아래의 쓰여진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하며, 화자를 나나라는 인물로 칭한다.     두부   두부는 나나가 이 곳에서 만나 알게 된 유일한 한국 사람이다. 과거에 어디 하나 엮인 데 없이 말이다. 작년 겨울, 두부는 한국에 가는 동안 방을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집이 없던 나나는 우연히 두부의 방을 보러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더 길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단기임대는 무산되었지만, 나나는 두부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한번 만났지만, 이 맑은 얼굴의 여자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새해를 핑계 삼아 떡국을 먹자고 두부를 집으로 초대하며 인연은 이어지게 되었다.   두부를 볼 때마다 그에겐 어딘가 단단한 마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고생하여 결국엔 이뤄 본 사람. 착하지만 아무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의 느낌. 두부는 독일에서 고생만 했는지 나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두부에게는 애인이 있다. 나나보다도 어린 두부가 10살 연상의 사람을 만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머리 속에서 빠르게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현민
2023.08.18 | 조회 475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밀양에 작은 목공소를 차렸다.   지난 5년 간은 창고 하나 없이 여기저기 얹혀 살며 가구도 만들고 집도 지었다. 연장은 뿔뿔히 흩어져 매일 늦은 밤마다 다음 날 쓸 연장을 챙기러 돌아다녀야 했고, 사용 가능한 자재가 남았을 때에도 챙겨 둘 수 없었다. 현장에 짐을 둔다는 대가로 이런저런 눈탱이를 맞는 일도 잦았다. 임금을 떼이거나, 아주 잡스러운 심부름을 시켜도 마스크 속에서만 보이는 욕을 하며 버텨야만 했다. 쫒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눈에도 사람의 감정이 드러난다지만, 몇 년간은 마스크가 참 고마웠다.   돈을 버는 건지 스트레스를 버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를 얻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해방이 온다고 생각했다. ​ 작은 창고는 싱크 공장을 하던 곳이었다. 비록 비 오는 날에는 풍향에 따라서 바닥으로 물이 제법 스며들었고, 몇 명의 세입자가 뚫었을지 모르는 벽 곳곳의 연통 구멍 안으로는 냉기가 빨려 들어오는 곳이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공간이다. 목수 일로 먹고사는데 이 정도 문제가 별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일이 시작되었다. 내 몸에 가장 알맞게 구성된 공간,...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밀양에 작은 목공소를 차렸다.   지난 5년 간은 창고 하나 없이 여기저기 얹혀 살며 가구도 만들고 집도 지었다. 연장은 뿔뿔히 흩어져 매일 늦은 밤마다 다음 날 쓸 연장을 챙기러 돌아다녀야 했고, 사용 가능한 자재가 남았을 때에도 챙겨 둘 수 없었다. 현장에 짐을 둔다는 대가로 이런저런 눈탱이를 맞는 일도 잦았다. 임금을 떼이거나, 아주 잡스러운 심부름을 시켜도 마스크 속에서만 보이는 욕을 하며 버텨야만 했다. 쫒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눈에도 사람의 감정이 드러난다지만, 몇 년간은 마스크가 참 고마웠다.   돈을 버는 건지 스트레스를 버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를 얻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해방이 온다고 생각했다. ​ 작은 창고는 싱크 공장을 하던 곳이었다. 비록 비 오는 날에는 풍향에 따라서 바닥으로 물이 제법 스며들었고, 몇 명의 세입자가 뚫었을지 모르는 벽 곳곳의 연통 구멍 안으로는 냉기가 빨려 들어오는 곳이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공간이다. 목수 일로 먹고사는데 이 정도 문제가 별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일이 시작되었다. 내 몸에 가장 알맞게 구성된 공간,...
문탁
2023.08.10 | 조회 299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7월 30일 토요일 아침, 후포는 햇빛 쨍쨍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낮 최고 기온 32도에 체감 온도는 34도 라고 했다. 후포 한마음 광장에서 시작하는 해파랑길 24코스를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침 아홉시, 온 몸으로 쏟아지는 햇빛의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십 분쯤 걸어 등기산 공원 초입에서 가지 말까 잠깐 망설였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얼굴 전체를 가린 모자에 팔토시까지 했더니 순식간에 땀범벅이 된데다 발걸음도 무거웠다. 망설임을 떨쳐내기 위해 한 호흡 깊이 들이마시고 공원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서서 걷기를 시작했다.       내 기억의 바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변길로 총 750㎞에 이르는 길인데 2016년 5월에 정식 개통하였다. 그중 울진 구간인 24코스는 후포항 한마음 광장에서 출발해서 기성터미널까지 18.2km 구간이다. 후포는 내가 태어난 곳이자 지금도 어머님이 고향집에 살고 계시고, 스무 살에 수도권으로 상경한 이후 명절이나 대부분의 여름휴가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2년 전 해파랑길에 대해 알게 된 후 고향에 내려올 때 마다 영덕 구간과 울진 구간을 찾아서 걷곤 했다.         그...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7월 30일 토요일 아침, 후포는 햇빛 쨍쨍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낮 최고 기온 32도에 체감 온도는 34도 라고 했다. 후포 한마음 광장에서 시작하는 해파랑길 24코스를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침 아홉시, 온 몸으로 쏟아지는 햇빛의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십 분쯤 걸어 등기산 공원 초입에서 가지 말까 잠깐 망설였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얼굴 전체를 가린 모자에 팔토시까지 했더니 순식간에 땀범벅이 된데다 발걸음도 무거웠다. 망설임을 떨쳐내기 위해 한 호흡 깊이 들이마시고 공원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서서 걷기를 시작했다.       내 기억의 바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변길로 총 750㎞에 이르는 길인데 2016년 5월에 정식 개통하였다. 그중 울진 구간인 24코스는 후포항 한마음 광장에서 출발해서 기성터미널까지 18.2km 구간이다. 후포는 내가 태어난 곳이자 지금도 어머님이 고향집에 살고 계시고, 스무 살에 수도권으로 상경한 이후 명절이나 대부분의 여름휴가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2년 전 해파랑길에 대해 알게 된 후 고향에 내려올 때 마다 영덕 구간과 울진 구간을 찾아서 걷곤 했다.         그...
기린
2023.08.06 | 조회 337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마더, 해피님   4년째 도시락 싸기가 가능해?      점심시간이 되면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주섬주섬 꺼낸다. 아침에 지은 잡곡밥에 3첩 반상을 먹고 참외로 입가심을 한다. 완벽한 점심식사다. 코로나 이후 유지하고 있는 루틴이다. 사먹는 밥은 소화가 잘 되질 않아서 코로나 유행이 지나간 지금도 계속 도시락을 싼다. 오늘은 유독 고추장아찌가 맛있다. 이 고추장아찌는 집에서 손수 양념을 무쳐 만든 것이다. 당연히 주 5일 근무를 하는 음식 솜씨 없는 임수는 만들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반찬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 집 업무 분장(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3회 참고)을 잠시 복습해보자면 음식 만들거나 반찬 정리, 냉장고 관리는 임수 담당이다. 어쩌다가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화는 요리를 잘 못한다. 아니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청소를 잘한다. 그렇다면 누가 고추장아찌를 만들었을까? 4년 가까이 도시락 루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정화 어머니덕분이다.   < 4년 가까이 싸가는 도시락, 3첩반상과 과일 후식 >      음식 담당을 맡고 있지만 임수의 요리 실력은 늘지 않고 있다. 바쁜 주중 저녁에는 시간 상 음식을 만들 수 없다.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을 꺼내 먹거나, 외식을 한다. 정임합목...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마더, 해피님   4년째 도시락 싸기가 가능해?      점심시간이 되면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주섬주섬 꺼낸다. 아침에 지은 잡곡밥에 3첩 반상을 먹고 참외로 입가심을 한다. 완벽한 점심식사다. 코로나 이후 유지하고 있는 루틴이다. 사먹는 밥은 소화가 잘 되질 않아서 코로나 유행이 지나간 지금도 계속 도시락을 싼다. 오늘은 유독 고추장아찌가 맛있다. 이 고추장아찌는 집에서 손수 양념을 무쳐 만든 것이다. 당연히 주 5일 근무를 하는 음식 솜씨 없는 임수는 만들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반찬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 집 업무 분장(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3회 참고)을 잠시 복습해보자면 음식 만들거나 반찬 정리, 냉장고 관리는 임수 담당이다. 어쩌다가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화는 요리를 잘 못한다. 아니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청소를 잘한다. 그렇다면 누가 고추장아찌를 만들었을까? 4년 가까이 도시락 루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정화 어머니덕분이다.   < 4년 가까이 싸가는 도시락, 3첩반상과 과일 후식 >      음식 담당을 맡고 있지만 임수의 요리 실력은 늘지 않고 있다. 바쁜 주중 저녁에는 시간 상 음식을 만들 수 없다.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을 꺼내 먹거나, 외식을 한다. 정임합목...
루틴
2023.07.31 | 조회 379
조은의 강정에서 살아남기
                조은 5년 동안 현민, 시윤, 민서, 동희와 함께 동천동에서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다. 10년을 살던 마을을 떠나, 2월부터 강정에서 첫 독립을 시작했다. 방학을 맞이한 친구들과 엄마의 방문에 고단하지만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작년 6월 인간띠잇기에 불현듯 나타난 친구가 있었다. 키가 컸고, 복슬머리였고, 인상이 좀 험악하게 생긴 탓에 오해도 많이 받는다던 친구였다. 그는 뜸이라고 불렸고, 해군기지가 지어질 때와 제주 제2공항 등 다양한 현장에 함께 했던 친구라고 한다. 첫인상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강정에는 많은 사람이 왔다 가기에 그중 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서 유심히 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매일 인간띠잇기에 나왔고, 어느새 저녁을 함께 먹고 있었고, 강정천에 가서 함께 수영했다. 그렇게 천천히 스며든 그 친구와 조금은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 때, 강정에 오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에게 소중한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때, 나의 3개월 강정살이가 끝이 났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눴다.   졸업여행을 떠나며 마지막 배웅을 해주던 강정 친구들    3개월 강정살이가 끝나고, 피스파인더 친구들과 졸업여행을 갔다. 약 10일 정도의 여행으로 종점은 퀴퍼에서 화려한 막을 내리기로 했다. 시골에서 서울을 가는 건 쉽지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에서 동쪽 서쪽 지역을 오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사드 문제로 대치 중인 소성리, 밀양 송전탑, 군산 해군기지와 새만금 등 다양한...
                조은 5년 동안 현민, 시윤, 민서, 동희와 함께 동천동에서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다. 10년을 살던 마을을 떠나, 2월부터 강정에서 첫 독립을 시작했다. 방학을 맞이한 친구들과 엄마의 방문에 고단하지만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작년 6월 인간띠잇기에 불현듯 나타난 친구가 있었다. 키가 컸고, 복슬머리였고, 인상이 좀 험악하게 생긴 탓에 오해도 많이 받는다던 친구였다. 그는 뜸이라고 불렸고, 해군기지가 지어질 때와 제주 제2공항 등 다양한 현장에 함께 했던 친구라고 한다. 첫인상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강정에는 많은 사람이 왔다 가기에 그중 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서 유심히 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매일 인간띠잇기에 나왔고, 어느새 저녁을 함께 먹고 있었고, 강정천에 가서 함께 수영했다. 그렇게 천천히 스며든 그 친구와 조금은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 때, 강정에 오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에게 소중한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때, 나의 3개월 강정살이가 끝이 났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눴다.   졸업여행을 떠나며 마지막 배웅을 해주던 강정 친구들    3개월 강정살이가 끝나고, 피스파인더 친구들과 졸업여행을 갔다. 약 10일 정도의 여행으로 종점은 퀴퍼에서 화려한 막을 내리기로 했다. 시골에서 서울을 가는 건 쉽지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에서 동쪽 서쪽 지역을 오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사드 문제로 대치 중인 소성리, 밀양 송전탑, 군산 해군기지와 새만금 등 다양한...
조은
2023.07.26 | 조회 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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