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을 위한 ‘정치’가 바로 ‘정의’이다 (둥글레)

문탁
2023-07-2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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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을 위한 정치가 바로 정의이다

 

둥글레

 

 

인문학을 공부하며 친구들과 공동체적 삶을 도모하고 가끔이지만 연대하며 살고 있다. 그럭저럭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미나에서 읽는 책들이 늘어날수록 내 삶이 안이하게 느껴진다. 나의 ‘그럭저럭 좋은 삶’은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구성이 되었을까? 나는 전문직을 가진 이성애 비혼 여성 한국인이다. 중산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빈곤층도 아니다. 비노인이며 비장애인이다. 나의 사회적 정체성은 비혼 여성으로 차별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지만 전문직 이성애 비장애인 비노인 한국인으로 차별을 하는 쪽에도 서 있다. 차별을 받는 쪽에만 있었다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반대쪽의 삶의 지분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생각은 『동자동 사람들』(2021, 빨간소금)을 읽고 뼈아프게 다가왔다. 작가는 “사회 전체가 누리는 행복과 물질적 풍요는 사회의 한구석에 버려진 채 가난, 고통, 질병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자동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버려졌다고 결론 내린다. 작가는 그들에게 개입된 돌봄들(주로 복지나 자원봉사 형태)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사회적 버려짐’에서 찾는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차이의 정치와 정의』(2017, 모티브북)에서 천착한 정의(justice)와 정치의 문제도 『동자동 사람들』에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결이 같다. 그녀는 분배적 패러다임에 묶인 정의를 그 너머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정의의 조건이자 요소로 민주주의(정치)의 쇄신을 제안한다.

 

 

동자동 쪽방촌

 

 

 

 

분배 패러다임이 놓치고 있는 구조적 부정의

 

기존의 정의 담론을 지배해 온 것은 분배 패러다임이다. 분배적 정의란 사회적 이익과 부담을 도덕적으로 정당한 방식으로 배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배적 정의론에 대항적으로 나온 정의 담론이 바로 인정적 정의이다. 문화적 인정(또는 차이의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정의를 분배냐 인정이냐로 나누는 이분법적 정의 논쟁에 반대한다. 즉 분배 문제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구조와 제도적 맥락을 무시하는 분배적 정의를 넘어서야 하는 지점에서 인정적 정의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영은 분배 정의 이론들이 놓치고 있는 쟁점들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의사결정 구조 및 절차, 노동 분업, 그리고 문화. 예컨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투자, 고용, 임금 등을 결정할 권력을 일부 집단의 사람들에게만 부여하는 회사 구조와 각종 절차는 부정의하다. 노동 분업이 업무의 범위나 가치를 규정하는 데에도 부정의가 일어난다. 어떤 집단들에게 표지를 부여하고 차별하는 문화적 부정의는 가장 일반적이다. 이러한 비분배적 쟁점들이 정의의 중요한 측면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 영의 주장이다.

 

사회구조와 제도적 맥락에서 파생한 문제들은 결국 분배 상의 불평등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억압’과 ‘지배’라는 부정의를 만들어 낸다. 억압은 개인들의 ‘자기 발전’을 막는 제도적 제약을, 지배는 개인들의 ‘자기 결정’을 막는 제도적인 제약을 지칭한다. 그리고 지배는 대체로 억압을 수반한다. 따라서 정의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지배와 억압이 없는 상태가 실현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조건 및 제도적 조건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공역자들은 영의 정의론을 ‘인간 존재들의 위계화 서열화를 철폐하려는 정의론’이라고 말한다. 영 또한 서문에서 자신의 정의론이 “흑인 라틴 아메리카인, 아메리카 인디언, 빈민, 레즈비언, 노인, 장애인의 급진 운동”에 빚지고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도 빈곤 문제가 여전하고 또 이주 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등 여러 문제들이 내재해 있다. 최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후 전장연)의 이동권 투쟁을 보면서 마음이 답답했다. 1990년에 나온 영의 정의론은 지금도 유효하다.

 

 

 

 

 

 

 

 

억압당하는 집단들

 

구조적 억압은 착취, 주변화, 무력함, 문화제국주의, 폭력이라는 다섯 가지 범주로 정리될 수 있다. 『동자동 사람들』을 읽으면서 그들이 사회관계에서 버려짐으로써 궁핍과 절멸에 몰린 가장 위험한 억압 형태인 ‘주변화’를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문직이 우대받는 구조화된 노동 분업에서 그들이 가진 노동 지위는 존중받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무력함’을 더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지배 집단의 문화가 표준이 되어 타자라는 표지가 붙은 ‘문화제국주의’라는 억압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장애인이 겪는 억압도 동자동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여성이라면 젠더 ‘착취’나 ‘폭력’이 더해질 수 있다.

 

이렇듯 억압은 여성, 비백인 인종, 비전문직 노동자, 성소수자 등 어떤 집단을 무력화하거나 폄훼하는 구조적 현상이다. 영은 이러한 억압이 집단 간의 차이에 기반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집단’에 대한 고찰을 한다. 흔히 개인들이 모여 집단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집단이 개인을 구성한다”라고 말한다. 집단이란 문화적 형식과 관행, 또는 삶의 방식 때문에 적어도 하나의 타 집단과는 구별되는 사람의 무리이다. 집단의 정체성은 사회과정에서의 변화와 더불어 변해 간다. 나의 정체성은 나와 비슷한 경험이나 삶의 방식에서 오는 집단 친연성에 의해 부분적으로 구성되고 이 또한 가변적이다. 분배 패러다임이 사회 내 개인들이 상호 내적 관계를 맺지 않는 사회 원자주의를 전제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특히 영은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과 혐오와 같은 문화 부정의가 대개는 무의식적으로 또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꼬집고 있다. 페미니스트 정신의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 이론을 빌려와 이를 분석하고 있는데 꽤 설득력이 있다. 아브젝트한 것(콧물이나 대변처럼 주체 속에 있으나 바깥으로 배출되는 것)이 아브젝시옹(두려움과 혐오)을 유발한다. 이는 혐오의 대상이 된 타자가 나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타자는 주체의 정체성 경계를 넘으려는 위협으로 느껴진다. 주체는 차이를 발생시키는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역겨움과 반감으로 반응한다. 예컨대 동성애 공포증은 누구나 게이가 될 수 있다는 경계 불안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노인 차별주의와 장애인 차별주의 역시 경계 불안을 보여준다. 내가 무심결에 뱉은 말이나 행동이 어떤 집단을 억압하고 있을 수 있다. 영은 이럴 경우에도 자기 말과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 무심결에 뱉은 그 말과 행동에 어떤 의미와 함의가 들어있는지 자각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새로운 지배의 형태, 복지 자본주의 사회

 

나는 빈곤이나 장애인 문제뿐 아니라 나의 노후를 위해서 복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권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복지 정책에 신물이 난다. 대선 때는 앞다투어 복지가 중요하다면서도 공공성은 한없이 후퇴되고 민영화는 가속화되는 상황이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진다. 영의 복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을 보면 이런 상황이 예견되어 있었구나 싶다. 영이 지적하는 복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두 단어로 얘기하자면 ‘지배’와 ‘비정치화’이다.

 

복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공동 복지를 위해 경제활동을 규제한다. 사적인 경제 활동 부분이 공공정책의 관할 범위 하에 들어오면서 공적인 것이 점점 더 비정치화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갈등과 논의는 대체로 분배의 쟁점으로 국한된다. 그리고 여타의 근본적인 제도적 쟁점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시민은 고객-소비자로 규정되어 공적 참여가 없는 사적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비근한 예가 올 6월부터 실시된 비대면진료 시범사업이다. 플랫폼 업체, 의사회 그리고 약사회만이 정부와 함께 이익 관점에서 논의했을 뿐 시민이 참여한 숙의 과정은 전무했다. 이렇게 비정치화는 의사결정 절차에서도 부정의 가져온다. 바로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조건으로서 지배 말이다.

 

관료주의 체제 역시 비정치화와 새로운 형태의 지배를 만들어 낸다. 관료 체제는 기술주의, 과학주의, 전문가주의를 내세우면서 가치중립성을 추구하기에 출발부터가 비정치화되어 있다. 어떤 결정이나 행동이 옳은지 정의로운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규칙과 절차 의해서만 평가한다. 또 능력주의 시스템 하의 노동 분업은 위계질서적인 권위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되면 관료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부분을 제거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애당초 관료 체제가 제거했다고 주장하는 인적 지배를 부흥시킨다. 또 고객과 소비자가 된 시민은 병원, 학교, 관청, 은행 등 많은 기구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이를 영은 하버마스의 말을 빌려와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고 불렀다.

 

 

 

 

 

 

이질적 공중의 차이의 정치

 

억압과 지배라는 부정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불편부당성의 이상(ideal of impartiality)이다. 근대의 도덕적 이성은 현상들을 모두 아우르는 통일되고 보편적인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개별특수적인 것들을 보편적인 범주에 집어넣는 과정에서 유사한 것은 똑같음으로 다른 것은 절대적 타자로 전환된다. 즉 우열 관계가 있는 이분법적 대립 관계가 만들어지고 열등한 것은 차별받는다. 보편성의 총체화를 요구하는 불편부당성의 이상(또는 동화주의 이상)은 결국 이분법으로 귀결되면서 총체화에 실패하게 된다. 이 실패의 공간을 메꾸는 게 바로 지배 집단의 개별특수적인 관점들을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편부당성의 이상은 억압을 행사하고 의사결정 구조의 계급적 질서를 정당화한다. 더 나아가 차별받는 집단은 지배 집단의 정체성을 수용해야 하는 과정에서 자기 혐기와 이중의식을 낳는다.

 

따라서 영은 불편부당한 이성의 관점을 표현하는 ‘시민 공중(the civic public)’이라는 이상에 반대한다. 시민 공중은 육체와 감정을 초월할 수 있는 이성적 시민의 모델을 가정한다. 때문에 개별특수성과 차이를 탈피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시민 공중은 항상 일부 사람들을 배제할 위험이 있다. 영은 ‘공적인 것’의 의미는 공개되고 누구나 접근 가능한 것이라며 ‘이질적 공중(heterogeneous public)의 이상’을 제안한다. 이질적인 공중에서는 각자의 상이함이 승인받고 존중받으면서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하게 된다. 이를 위해 참여민주주의가 이질적 공중의 이상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논의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질적 공중의 이상이 활성화되려면 집단 간 차이를 긍정하고 공적 삶에 모든 집단을 포용하고 참여시켜야 한다. 영은 ‘차이’가 동일한 것도 아니지만 상호 대립적인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차이가 있어야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고 모두의 이해를 풍성하게 해 준다고 말이다. 따라서 의견의 정치에서 정의는 수렴이 아니라 방산성의 규칙 아래에 놓여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단들에게 특별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그 집단들의 완전한 참여를 증진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렇듯 ‘차이의 정치(politics of difference)’를 위해서는 평등 대우 원리가 양보 돼야 할 수도 있음을 영은 강조한다.

 

영은 차이의 정치를 위한 실천적 방안으로 정책 결정에서의 ‘집단 대표제(group representation)’를 제안한다. 집단 대표제는 억압받거나 불이익받는 집단들이 특별히 대표되는 제도이다. 특권 집단들은 이미 대표되고 있기 때문에 이 제도에 해당되지 않는다. 영은 집단 대표제야말로 숙의 과정(참여 민주주의)을 통해 정당한 결과가 나오도록 촉진하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강조한다. 집단들로 분화된 사회에서 정의는 집단들의 사회적 평등, 집단 간 차이의 상호 승인과 긍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은 “정의는 좋은 삶 그 자체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이나마 차이가 있고 그만큼 좋은 삶의 내용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이 말하는 정의는 쉽게 말해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한 요소로서의 ‘정치’이다. 그녀에게 정의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일치한다. 어찌 보면 영은 분배적 정의에 갇힌 정치를 쇄신해야 한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진보와 퇴보를 반복하고 있다. 영은 이를 반란과 재봉쇄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다고 표현한다. ‘먹고사니즘’이란 분배의 틀 안으로 저항과 요구들이 재흡수되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쉽다. 하지만 영은 그럴 때일수록 다시 민주주의를 얘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정치에 대한 회의감에 점점 귀를 닫고 그저 정권에 대한 투덜거림으로 일관했다.

 

이런 시기에 전장연의 이동권 투쟁은 유일하게(?) 저항을 이어가며 다시 반란의 시기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영이 말하는 차이의 정치를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영이 여러 급진운동에 빚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 또한 전장연의 투쟁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정의와 민주주의가 이 투쟁에 빚을 지고 있다. 조금 숨통이 트인다. 영이 바란 삶의 재정치화는 이렇게 근근이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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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두부와 나단       아래의 쓰여진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하며, 화자를 나나라는 인물로 칭한다.     두부   두부는 나나가 이 곳에서 만나 알게 된 유일한 한국 사람이다. 과거에 어디 하나 엮인 데 없이 말이다. 작년 겨울, 두부는 한국에 가는 동안 방을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집이 없던 나나는 우연히 두부의 방을 보러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더 길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단기임대는 무산되었지만, 나나는 두부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한번 만났지만, 이 맑은 얼굴의 여자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새해를 핑계 삼아 떡국을 먹자고 두부를 집으로 초대하며 인연은 이어지게 되었다.   두부를 볼 때마다 그에겐 어딘가 단단한 마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고생하여 결국엔 이뤄 본 사람. 착하지만 아무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의 느낌. 두부는 독일에서 고생만 했는지 나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두부에게는 애인이 있다. 나나보다도 어린 두부가 10살 연상의 사람을 만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머리 속에서 빠르게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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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3.08.18 | 조회 477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밀양에 작은 목공소를 차렸다.   지난 5년 간은 창고 하나 없이 여기저기 얹혀 살며 가구도 만들고 집도 지었다. 연장은 뿔뿔히 흩어져 매일 늦은 밤마다 다음 날 쓸 연장을 챙기러 돌아다녀야 했고, 사용 가능한 자재가 남았을 때에도 챙겨 둘 수 없었다. 현장에 짐을 둔다는 대가로 이런저런 눈탱이를 맞는 일도 잦았다. 임금을 떼이거나, 아주 잡스러운 심부름을 시켜도 마스크 속에서만 보이는 욕을 하며 버텨야만 했다. 쫒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눈에도 사람의 감정이 드러난다지만, 몇 년간은 마스크가 참 고마웠다.   돈을 버는 건지 스트레스를 버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를 얻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해방이 온다고 생각했다. ​ 작은 창고는 싱크 공장을 하던 곳이었다. 비록 비 오는 날에는 풍향에 따라서 바닥으로 물이 제법 스며들었고, 몇 명의 세입자가 뚫었을지 모르는 벽 곳곳의 연통 구멍 안으로는 냉기가 빨려 들어오는 곳이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공간이다. 목수 일로 먹고사는데 이 정도 문제가 별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일이 시작되었다. 내 몸에 가장 알맞게 구성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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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08.10 | 조회 301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7월 30일 토요일 아침, 후포는 햇빛 쨍쨍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낮 최고 기온 32도에 체감 온도는 34도 라고 했다. 후포 한마음 광장에서 시작하는 해파랑길 24코스를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침 아홉시, 온 몸으로 쏟아지는 햇빛의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십 분쯤 걸어 등기산 공원 초입에서 가지 말까 잠깐 망설였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얼굴 전체를 가린 모자에 팔토시까지 했더니 순식간에 땀범벅이 된데다 발걸음도 무거웠다. 망설임을 떨쳐내기 위해 한 호흡 깊이 들이마시고 공원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서서 걷기를 시작했다.       내 기억의 바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변길로 총 750㎞에 이르는 길인데 2016년 5월에 정식 개통하였다. 그중 울진 구간인 24코스는 후포항 한마음 광장에서 출발해서 기성터미널까지 18.2km 구간이다. 후포는 내가 태어난 곳이자 지금도 어머님이 고향집에 살고 계시고, 스무 살에 수도권으로 상경한 이후 명절이나 대부분의 여름휴가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2년 전 해파랑길에 대해 알게 된 후 고향에 내려올 때 마다 영덕 구간과 울진 구간을 찾아서 걷곤 했다.         그...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7월 30일 토요일 아침, 후포는 햇빛 쨍쨍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낮 최고 기온 32도에 체감 온도는 34도 라고 했다. 후포 한마음 광장에서 시작하는 해파랑길 24코스를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침 아홉시, 온 몸으로 쏟아지는 햇빛의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십 분쯤 걸어 등기산 공원 초입에서 가지 말까 잠깐 망설였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얼굴 전체를 가린 모자에 팔토시까지 했더니 순식간에 땀범벅이 된데다 발걸음도 무거웠다. 망설임을 떨쳐내기 위해 한 호흡 깊이 들이마시고 공원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서서 걷기를 시작했다.       내 기억의 바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변길로 총 750㎞에 이르는 길인데 2016년 5월에 정식 개통하였다. 그중 울진 구간인 24코스는 후포항 한마음 광장에서 출발해서 기성터미널까지 18.2km 구간이다. 후포는 내가 태어난 곳이자 지금도 어머님이 고향집에 살고 계시고, 스무 살에 수도권으로 상경한 이후 명절이나 대부분의 여름휴가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2년 전 해파랑길에 대해 알게 된 후 고향에 내려올 때 마다 영덕 구간과 울진 구간을 찾아서 걷곤 했다.         그...
기린
2023.08.06 | 조회 339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마더, 해피님   4년째 도시락 싸기가 가능해?      점심시간이 되면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주섬주섬 꺼낸다. 아침에 지은 잡곡밥에 3첩 반상을 먹고 참외로 입가심을 한다. 완벽한 점심식사다. 코로나 이후 유지하고 있는 루틴이다. 사먹는 밥은 소화가 잘 되질 않아서 코로나 유행이 지나간 지금도 계속 도시락을 싼다. 오늘은 유독 고추장아찌가 맛있다. 이 고추장아찌는 집에서 손수 양념을 무쳐 만든 것이다. 당연히 주 5일 근무를 하는 음식 솜씨 없는 임수는 만들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반찬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 집 업무 분장(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3회 참고)을 잠시 복습해보자면 음식 만들거나 반찬 정리, 냉장고 관리는 임수 담당이다. 어쩌다가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화는 요리를 잘 못한다. 아니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청소를 잘한다. 그렇다면 누가 고추장아찌를 만들었을까? 4년 가까이 도시락 루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정화 어머니덕분이다.   < 4년 가까이 싸가는 도시락, 3첩반상과 과일 후식 >      음식 담당을 맡고 있지만 임수의 요리 실력은 늘지 않고 있다. 바쁜 주중 저녁에는 시간 상 음식을 만들 수 없다.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을 꺼내 먹거나, 외식을 한다. 정임합목...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마더, 해피님   4년째 도시락 싸기가 가능해?      점심시간이 되면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주섬주섬 꺼낸다. 아침에 지은 잡곡밥에 3첩 반상을 먹고 참외로 입가심을 한다. 완벽한 점심식사다. 코로나 이후 유지하고 있는 루틴이다. 사먹는 밥은 소화가 잘 되질 않아서 코로나 유행이 지나간 지금도 계속 도시락을 싼다. 오늘은 유독 고추장아찌가 맛있다. 이 고추장아찌는 집에서 손수 양념을 무쳐 만든 것이다. 당연히 주 5일 근무를 하는 음식 솜씨 없는 임수는 만들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반찬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 집 업무 분장(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3회 참고)을 잠시 복습해보자면 음식 만들거나 반찬 정리, 냉장고 관리는 임수 담당이다. 어쩌다가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화는 요리를 잘 못한다. 아니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청소를 잘한다. 그렇다면 누가 고추장아찌를 만들었을까? 4년 가까이 도시락 루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정화 어머니덕분이다.   < 4년 가까이 싸가는 도시락, 3첩반상과 과일 후식 >      음식 담당을 맡고 있지만 임수의 요리 실력은 늘지 않고 있다. 바쁜 주중 저녁에는 시간 상 음식을 만들 수 없다.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을 꺼내 먹거나, 외식을 한다. 정임합목...
루틴
2023.07.31 | 조회 380
조은의 강정에서 살아남기
                조은 5년 동안 현민, 시윤, 민서, 동희와 함께 동천동에서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다. 10년을 살던 마을을 떠나, 2월부터 강정에서 첫 독립을 시작했다. 방학을 맞이한 친구들과 엄마의 방문에 고단하지만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작년 6월 인간띠잇기에 불현듯 나타난 친구가 있었다. 키가 컸고, 복슬머리였고, 인상이 좀 험악하게 생긴 탓에 오해도 많이 받는다던 친구였다. 그는 뜸이라고 불렸고, 해군기지가 지어질 때와 제주 제2공항 등 다양한 현장에 함께 했던 친구라고 한다. 첫인상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강정에는 많은 사람이 왔다 가기에 그중 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서 유심히 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매일 인간띠잇기에 나왔고, 어느새 저녁을 함께 먹고 있었고, 강정천에 가서 함께 수영했다. 그렇게 천천히 스며든 그 친구와 조금은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 때, 강정에 오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에게 소중한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때, 나의 3개월 강정살이가 끝이 났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눴다.   졸업여행을 떠나며 마지막 배웅을 해주던 강정 친구들    3개월 강정살이가 끝나고, 피스파인더 친구들과 졸업여행을 갔다. 약 10일 정도의 여행으로 종점은 퀴퍼에서 화려한 막을 내리기로 했다. 시골에서 서울을 가는 건 쉽지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에서 동쪽 서쪽 지역을 오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사드 문제로 대치 중인 소성리, 밀양 송전탑, 군산 해군기지와 새만금 등 다양한...
                조은 5년 동안 현민, 시윤, 민서, 동희와 함께 동천동에서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다. 10년을 살던 마을을 떠나, 2월부터 강정에서 첫 독립을 시작했다. 방학을 맞이한 친구들과 엄마의 방문에 고단하지만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작년 6월 인간띠잇기에 불현듯 나타난 친구가 있었다. 키가 컸고, 복슬머리였고, 인상이 좀 험악하게 생긴 탓에 오해도 많이 받는다던 친구였다. 그는 뜸이라고 불렸고, 해군기지가 지어질 때와 제주 제2공항 등 다양한 현장에 함께 했던 친구라고 한다. 첫인상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강정에는 많은 사람이 왔다 가기에 그중 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서 유심히 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매일 인간띠잇기에 나왔고, 어느새 저녁을 함께 먹고 있었고, 강정천에 가서 함께 수영했다. 그렇게 천천히 스며든 그 친구와 조금은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 때, 강정에 오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에게 소중한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때, 나의 3개월 강정살이가 끝이 났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눴다.   졸업여행을 떠나며 마지막 배웅을 해주던 강정 친구들    3개월 강정살이가 끝나고, 피스파인더 친구들과 졸업여행을 갔다. 약 10일 정도의 여행으로 종점은 퀴퍼에서 화려한 막을 내리기로 했다. 시골에서 서울을 가는 건 쉽지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에서 동쪽 서쪽 지역을 오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사드 문제로 대치 중인 소성리, 밀양 송전탑, 군산 해군기지와 새만금 등 다양한...
조은
2023.07.26 | 조회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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