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나는 비빌언덕이 되고 싶다

김윤경~단순삶
2024-02-20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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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말고 함께

 

 

내가 사는 금천은 1995년 3월 구로구에서 분구하였다. 서울 면적의 2.1%를 차지하고 중구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구이다. 그런데도 2022년 서울시 정신건강 지표조사에 따르면 금천구는 우울감 경험률(11.9%)과 자살률(28명/10만 명당)이 서울시 평균(7.3%, 21.4명/10만 명당)보다 높다. 면적은 작지만, 인구는 적지 않고 비교적 사회적 시설과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서 신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 수치가 서울시 평균보다 안 좋은 것 같다. 내가 마을 일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충격적인 얘기도 우리 구 청년들의 자살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천구에서 내가 무소속 마을활동가로서 그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제안이 들어온 ‘노랑식탁’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노랑식탁을 기획한 ‘청춘삘딩’은 예전에는 청소년 독서실로 쓰던 공간이었다. 구청에서 그 공간을 없애려고 할 때 지역 주민들의 제안으로 기초지자체 최초의 청년활동공간으로 탈바꿈 한 곳이다. 도시재생과 거버넌스의 좋은 사례가 되는 청년들을 위한 반짝반짝 빛나는 장소다. 그런 곳에서 청년 1인 가구를 위한 밥상을 준비한다니 더욱 기대되었다. 2023년 6월부터 사전 준비모임을 가져 메뉴 선정과 시장 조사를 했다. 7월 한차례 테스트 파일럿 식탁을 준비한 후 8월 첫 주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총 16회, 160명 이상(중복 제외 47명)이 참여했고, 93가지의 메뉴를 선보였다.

 

 

이름은 노랑식탁이고 형식은 집밥을 차려주는 것이었지만, 실제 그 안은 마음건강을 케어하는 것이 주요한 목표였다. 금천구에 정착한 1인 가구 청년들에게 건강한 식사를 매개로 안전한 사회적 관계망을 맺어가게 하는 것이 노랑식탁의 추진 방향이다. 노(NO)는 ‘인스턴트 NO, 휴대폰 NO, 혼밥 NO’의 의미를 담았고, 랑(WITH)은 ‘대화랑, 건강한 집밥이랑, 이웃이랑’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메뉴는 신선한 제철 재료를 위주로 혼자서는 절대 해 먹을 것 같지 않은 그런 요리들(꽃게탕, 갈치조림, 소고기무국, 육전 등)과 싸갈 수 있는 반찬류로 정했다. 양을 넉넉히 준비하여 남은 반찬을 포장해서 가져가 집에서도 건강한 끼니를 챙길 수 있도록 말이다. 저녁 7시부터 시작해 마을활동가 이모 셋이 정성껏 준비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난 후엔 공감대를 쌓고, 세대 간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의 장을 마련했다. 그리고 설거지 및 뒷정리를 함께 하며 마무리하는 순으로 진행했다.

 

 

 

 

 

1회부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준비를 한 우리는 음식의 맛을 걱정했지만, 참여자 친구들은 음식의 맛은 기본이고 거기에 정성까지 느꼈다고 말해주었다. 또 끝맺을 때 나눈 오(5)자 소감으로 그들의 진심을 전해주었다. 제철 음식 짱, 눈코입 만족, 또 오고 싶다, 다정한 식탁, 뜻밖의 상담, 건강한 한 끼, 푸근한 느낌, 퇴근 후 힐링, 일주일의 힘 등등. 맛나고 정성스러운 저녁 식사, 주제가 있는 이야기, 또래 친구들과 동네 이웃과의 대화, 재미있는 게임 등 노랑식탁은 말 그대로 노랑노랑 따뜻한 식탁이었다.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워

 

 

노랑식탁에서 나의 담당은 ‘환대’였다. (결국엔 힘쓰는 일, 온갖 궂은일도 나의 담당이 되었지만 ^^;;) 처음 청춘삘딩이나 노랑식탁에 와 봤을 참여자들이 어색하지 않게 조금은 ‘오버’해서 맞이하는 환대, 말이다. 나는 나름의 아이디어를 내어 ‘웰컴 음료’를 준비해 “어서 오세용”라는 멘트와 함께 와인잔에 따라주었다. 비록 와인은 아니지만 와인잔이 놓인 식탁은 멋스러워 보였고, 분위기도 한결 누그러졌다. 서로가 초면일 참여자들이 뻘쭘하지 않도록 “금천엔 언제 정착했냐, 집은 어디냐, 밥은 어떻게 챙겨 먹느냐” 등 질문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집중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 참여자들이 맛난 저녁을 먹는 동안 이야기가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난 후에는 다른 마을활동가가 바통을 이어받아 준비해온 다양한 심리 카드를 이용해 마음속 이야기들을 꺼내어 놓을 수 있는 시간을 가졌었다. 질문 카드에 적힌 다양한 질문에 답을 하면서 참여자들은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해가고 있었다. 또래 친구들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고, 그들의 외로움과 어려움에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연장자들인 마을활동가 이모들의 인생 경험담에서 위로가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떤 주에는 심리 카드로 대화하고 어떤 주에는 게임을 했다. 추석이 다가오는 금요일에는 윷놀이를 했었는데, 승부에 집착한 참여자 친구들이 정말 청춘삘딩이 떠나갈 정도의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었다. 이렇게 노랑식탁이라는 건강한 밥상은 참여자 모두에게 따뜻한 그 어떤 것을 선물해 주었다.

 

 

 

 

 

 

노랑식탁이 횟수가 쌓여 가는 동안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알아가고, 서로의 이름을 알아갔다. 우리 모두 친함이 익어가고 있었다. 모임을 한 번만 남겨둔 11월 마지막 금요일, 겨울 방학처럼 한동안 못 볼 것이 아쉬워(이미 시즌2가 내년에도 열릴 것이라는 사실이 공지되었다)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급 뒷풀이 모임을 제안했다. 가까운 호프집으로 이동해 맥주를 마시며 못다 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들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워했다. 그래서 내가 독서 모임을 후속 모임으로 제안했다. 뒷풀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동의해 단체 대화방을 만들었다. 그날 못 온 다른 참여자들도 대화방에 초대해서 일단 시작은 나까지 13명이 되었다. 어찌하다 보니 다 여성 청년들이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청년 여성들과 중년 여성들을 연계하는 모임으로까지 키워나가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

 

 

 

 

 

2024년 1월 26일, 노랑식탁에서가 아닌 우리의 첫 모임을 가졌다. 처음으로 읽은 책은 『우리에겐 비빌언덕이 필요해』(최정은/오월의 봄)였는데 막상 책 이야기는 많이 안 하고 수다만 떨다 모임을 마쳤다. 그래도 우리 모임이 앞으로도 서로에게 ‘비빌언덕’ 같은 존재가 되었음 좋겠다는 바람은 나누었다. 그래서 청춘삘딩에서 진행해왔던 ‘청년시민지원사업 두잇(Do It)커뮤니티’에 응모하기로 했다. 리더를 정하고 모임의 이름은 ‘금덩굴’로 정했다. 금천 사랑방과 덩굴식물들을 합친 이름이다. 모임원 중 한 친구가 최근 『랩걸-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호프 자런/김희정옮김/알마)을 읽었는데 책에 나온 덩굴식물들의 생명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10팀 모집에 64팀 응모) 우리 모임이 선정되어 백만 원의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모임 진행에 더욱 탄력을 받을 것 같아 모임원 모두 기뻐했다. 덩굴식물들처럼 우리 모임이 어떠한 장애물도 아우르며 계속 만남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비빌언덕같은 사람

 

 

나는 내가 비빌언덕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비빌 언덕은 ‘보살펴주고 이끌어주는 미더운 존재’라고 나온다. 검색창에서 검색해보면,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라는 속담이 먼저 뜬다. 어린 소는 뿔이 날 때 무척 가려운데, 그래서 언덕에다 머리를 자꾸 비벼서 그런 속담이 생겼단다. 누구나 의지할 곳이 있어야 무슨 일이든 시작하거나 이룰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내가 무소속 마을활동가로 금천에서 하는 활동들이 딱 비빌언덕 같았으면 좋겠다.

 

 

나는 유난히도 힘들게 20, 30대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뭐 누구나 인생을 사는 게 쉬운 게 아니지만 말이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대학입시에 실패해서, 4년제에 못 갔다는 자괴감에, 자격증 시험에 또 떨어져서, 뚱뚱해 남자 친구는 고사하고 사람들이 다 날 싫어한다는 자기 비하에, 정규직이 아니라 월급도 적고 승진도 안 되고..... 나를 괴롭히며 내 인생을 비관할 이유는 인생 굽이굽이 마다 널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낙담하고 비관할 때 누군가가 또 무엇인가가 내 옆에 있었다. 누군가들은 내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의 술주정을 받아주기도 하고, 내 손을 잡아주거나, 등을 토닥여주기도 했다. 또 지도(지도map는 나에게 아주 아주 각별하다)와 수많은 산과 길, 골목은 늘 자기 자리에서 내게 비빌언덕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40대에 만난 감이당에서 인생의 지도를 다시 그렸고, 문탁네트워크에서 내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을 찾았다. 인생의 고비마다 수많은 비빌언덕들이 나의 ‘비빔’을 받아주고 있었기에 나는 잠시 쉬어 숨을 고르고 다시 인생길에 나설 수 있었다. 노랑식탁의 활동 경험은 좋은 징조 같다. 나도 누군가에게 비빌언덕이 될 수도 있겠다는. 내가 인생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수많은 비빔을 할 수 있었듯이, 나도 그런 비빌언덕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금덩굴의 청년 여성들과 그리고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기대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지오디의 ‘촛불 하나’의 노래 가사가 이 글을 마무리하는 나의 마음가짐이다. (지오디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지치고 힘들 때 내게 기대, 언제나 네 곁에 서 있을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내가 너의 손 잡아줄게”, “작은 촛불 하나 켜 보면 달라지는 게 너무나도 많아,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던 내 주위엔 또 다른 초 하나가 놓여져 있었기에 불을 밝히니 촛불이 두 개가 되고 [...] 세 개가 되고 네 개가 되고 어둠은 사라져 가고”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에 불 밝히는 소소하지만 큰 힘을 가진 활동을 해 나갔음 좋겠다. 만나보니 좋은 친구, 마을활동가 윤경이~~로서 말이다!

 

 

 

 

 

김윤경~단순삶

다르게 살아보려고 자발적 백수가 되었고, 이제는 마을활동가로 변신 중.

마을에서  조증적 열광적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다.

 

댓글 12
  • 2024-02-20 08:57

    와... 또 멋지다!

    소셜다이닝도 멋지고,
    윤경샘 마음도 멋지다.

    샘, 나는 샘의 비빌언덕이 되볼게요.
    아니, 문탁 친구들 모두가 서로간의 비빌언덕이에요^^

    피에쑤1 : <랩걸> 이거 내가 비업무용독서 1순위로 코앞책꽂이에 꽂아놓고 있어유.
    피에쑤2 : '이모' 말고 다른 용어가 필요해!!! ㅋㅋㅋㅋ

  • 2024-02-20 10:21

    정화의 작은 촛불에서 소도 비비고 싶은 언덕으로 마구마구 빛을 넓혀가겠다는 포부~ 멋지네요~

  • 2024-02-20 10:24

    만나 보니 좋은 친구, 마을 활동가 윤경샘~
    새삼 반갑네요^^
    매번 글 읽을 때마다 반가울듯 ㅋ

  • 2024-02-20 10:33

    이렇게 글로 윤경님이 어떤분인지 조금 알게 되었네요..!
    누군가의 촛불 윤경님 멋지셔요

  • 2024-02-20 10:34

    명품은 아니지만,
    든든한 '빽'에
    손을 번쩍 듭니다. ㅎㅎ

  • 2024-02-20 12:40

    와~~
    글로 만나는 윤경샘도 너무 좋네요~~^^

    그냥 그냥 너무 좋아요~~!!!

  • 2024-02-20 14:27

    글을 읽는데 감동이 찡 ~ 했어요 ㅜㅜ 윤경님의 찬란한 삶이 제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있어요!!! 싸랑합니당

  • 2024-02-21 08:03

    노랑식탁에 이어 금덩쿨로! 윤경샘의 다음 행보를 기대해봅니다~

  • 2024-02-21 13:27

    비빌언덕-되기, 수많은 되기가 있지만 참으로 멋진 되기인 것 같아요.^^

  • 2024-02-22 18:22

    와! 단순삶님, 삶이 단순하지 않은데요? ㅎㅎ
    정말 멋지십니다^^

  • 2024-02-27 23:05

    조증적 열광을 실물을 매달 볼 수 있어서 기쁩니다! (전염되는 기분..^^)

  • 2024-03-19 16:36

    배우고 싶은 활동이네요. 윤경샘 정말 멋져요!

기린의 걷다보면
30대 중반을 통과하던 무렵이었다. 신문에서 일본 시코쿠섬에 위치한 88개의 절을 순례하는 도보 여행가의 여행기를 보게 되었다. 1번 절에서 출발해서 88번까지 이르는 완주 과정 자체가 내게는 경이롭게 다가왔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방을 빼고 적금을 깨 여행을 떠났다는 이력도 그랬고, 여자 혼자서 그 길을 완주하는 실행력도 멋있어 보였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았고, 오랜 걷기로 발가락에 생긴 물집 터뜨리기에 점점 능숙해지는 변화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홀가분하게 떠난 그의 도전이 부러웠다. 언젠가는 나도 한 번 해 봐야지 다짐했다.     그렇지만 나는 하던 일을 때려치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다짐은 서서히 잊혔다. 시간이 지나 인문학공부를 하게 되면서 다른 일상으로 접어들었고, 타고 다녔던 승용차를 처분했다. 집을 나서서 걷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사이 걷기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의 관심 영역으로 떠올랐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걷는 이야기들이 더 자주 들려왔다. 시코쿠 순례길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끌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고향집을 통과하는 해파랑길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긴 트레일 코스로 50개 코스로 이루어진 750km의 길이었다. 고향집 주변 코스부터 몇 코스를 걷기 시작하면서 다시 예전의 그 다짐이 떠올랐다. 나도 한번 해 봐야지.       해파랑길을 검색하다보니 완주한 사람들의 사연도 올라왔다. 명예퇴직을 한 후 이 길을 완주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는 50대 중년의 이야기도 있었고, 전국의 길을 다 걷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걷기의 달인도 있었다. 언젠가가...
30대 중반을 통과하던 무렵이었다. 신문에서 일본 시코쿠섬에 위치한 88개의 절을 순례하는 도보 여행가의 여행기를 보게 되었다. 1번 절에서 출발해서 88번까지 이르는 완주 과정 자체가 내게는 경이롭게 다가왔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방을 빼고 적금을 깨 여행을 떠났다는 이력도 그랬고, 여자 혼자서 그 길을 완주하는 실행력도 멋있어 보였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았고, 오랜 걷기로 발가락에 생긴 물집 터뜨리기에 점점 능숙해지는 변화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홀가분하게 떠난 그의 도전이 부러웠다. 언젠가는 나도 한 번 해 봐야지 다짐했다.     그렇지만 나는 하던 일을 때려치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다짐은 서서히 잊혔다. 시간이 지나 인문학공부를 하게 되면서 다른 일상으로 접어들었고, 타고 다녔던 승용차를 처분했다. 집을 나서서 걷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사이 걷기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의 관심 영역으로 떠올랐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걷는 이야기들이 더 자주 들려왔다. 시코쿠 순례길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끌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고향집을 통과하는 해파랑길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긴 트레일 코스로 50개 코스로 이루어진 750km의 길이었다. 고향집 주변 코스부터 몇 코스를 걷기 시작하면서 다시 예전의 그 다짐이 떠올랐다. 나도 한번 해 봐야지.       해파랑길을 검색하다보니 완주한 사람들의 사연도 올라왔다. 명예퇴직을 한 후 이 길을 완주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는 50대 중년의 이야기도 있었고, 전국의 길을 다 걷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걷기의 달인도 있었다. 언젠가가...
기린
2024.04.06 | 조회 223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코에 흙을 잔뜩 묻힌 돼지가 보인다.   돼지는 큰 귀를 곧게 세우고 어딘가를 응시한다.   뒤쪽엔 보다 작은 돼지가 보인다.   돼지는 코를 땅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다.   루팅을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돼지들 위로 두 명의 고양이가 나란히 앉아 있다.   한 명은 그릇에 얼굴을 묻고 무언가를 먹는다.   그 옆에 있는 고양이는 허리를 세우고 정면을 본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뭘 쳐다보냐는 눈빛으로.     -         봉봉오리님의 『지구에 살 자격』의 표지에는 돼지와 고양이 그림이 있다. 동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생의 어느 한 순간을 표현한다. 움직이지 않지만 살아 있고 저마다 생기를 분출한다. 책 표지를 넘기면 봉봉오리님의 친필 문구가 보인다.     종차별 없는 연대를.     한 페이지를 더 넘기면 저자의 한 줄 소개가 있다.     동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동물해방을 그린다.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를 하며 봉봉오리님을 만났다. 봉봉오리님은 생추어리와 재개발구역을 오가며 돼지를 돌보고, 또 고양이를 돌본다. 돌봄 일지를 블로그에 공유하고, 동물들 그림을 그려 전시를 한다. 나는 어느날 봉봉오리님에게 재개발 구역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돼지를 만나온 나는 또 다른 동물 돌봄 현장이 궁금했다. 설 연휴로 날짜가 정해졌다. 같이 갈 사람들이 모였다. 봉봉오리, 그린, 이슬, 세원, 그리고 나. 이들은 새벽이생추어리 돌봄 혹은 비질 모임으로 돼지를 만나온 사람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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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
2024.04.02 | 조회 307
아스퍼거는 귀여워
  - 글 속에서 아이의 지칭을 ‘감자’로 변경. 감자를 좋아하는, 감자같이 귀여운 얼굴의 남자아이. 현재 초등학교 5학년생.     새 학기다. 초조하다. 애써 웃음 지어보지만, 마음 한구석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겁다. 우리 감자는 이제 5학년. 개학하기 2주 전부터 서서히 어둠이 도사린다.  “엄마, 학교는 왜 가야 하는 걸까요?”     몇백 번은 이야기 했을 텐데…. 모르는 게 아니지만 가기 싫은 마음으로 질문한다는 걸 안다. 또 답할 수밖에. 먼저 1단계 협박.    “응,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 안 가면 엄마가 잡혀가.”     팩트 체크. 사실 감자는 때에 따라서 홈스쿨링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구구절절 학교의 장점을 이야기해봤자 감자에게 와 닿는 건 없다. 학교 공부도 지루하고 친구도 없는 아이에게 먹힐 리가. 다음은 2단계 공감.    “근데…. 엄마도 진짜 학교 가기 싫고, 공부도 하기 싫었어. 어릴 때 소심하고 친구도 없어서 맨날 맨 앞자리에 앉아서 종이접기하고 그랬지.”  “진짜 엄마도 그랬어요?”  “그래 진짜지. 아빠한테도 물어봐.”     3단계 동조.    “그래 아빠도 그랬어. 근데 그냥 학교 가서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어려워?”     에이 도움이 안 된다. 쩝, 다시 2.5단계 공감+희망.    “엄마도 그래. 쉬다가 약국에 일하러 가는 거 얼마나 가기 싫은 줄 알아? (오바) 몸이 천근만근이라고 (이 정도는 아님) 근데 막상 가잖아? 그럼 또 재미있다?”     협박과 공감과 회유 사이를 무한 반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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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2024.03.25 | 조회 342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나는 마젠마 회원~     우리 동네 금천에는 ‘마젠마’라는 단체가 있다. ‘마을에서 젠더를 마주하다’를 줄인 것이란다. 2013년부터 무려 글쓰는 엄마동아리로 시작해, 2015년에는 금천구마을활동가 모임으로 재구성했고, 2020년 여성의 사회적 성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변신을 이어온 단체였다. ‘우와 우리 동네에도 이런 모임이 있다뉘’. 좀 놀라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있어 보이는 단체명을 가진 마젠마를 빨리 접하고 싶었다. 기회를 엿보다가 2023년 5월 23일, 함께 영화 보기 행사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당근 신청했고, 당근 참석했다. 함께 볼 영화는 <와즈다>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에게 금지된 자전거 타기를 도전하는 소녀 와즈다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본 장소는 마을공동체 지원센터였다. 마을 공유공간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는 경험은 처음이라 마을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그리고 마젠마의 대접도 융숭해 더 만족했었다.       그러다 여름에 마젠마 신입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고, 망설임 없이 바로 가입했다. 가입신청서를 낸 얼마 후 신입회원 환영회가 있었다. 상반기 활동을 공유하고 각자 자신을 표현하는 물건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입회원 웰컴 선물도 증정해줬다.^^ 마을에서 여성들끼리 이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위하는 모습에 몸과 마음이 훈훈했다. ‘이런 게 비빌언덕이지. 이런 단체가 하나쯤은 동네에 있어야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진짜 이런 단체가 우리 마을에 존재해줘서 고마웠다. 두 팔 벌려 환영해주는 기존 멤버들과 나도 이제 같은 멤버라는 소속감에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이제 마젠마 회원이다~.             그 후로도...
    나는 마젠마 회원~     우리 동네 금천에는 ‘마젠마’라는 단체가 있다. ‘마을에서 젠더를 마주하다’를 줄인 것이란다. 2013년부터 무려 글쓰는 엄마동아리로 시작해, 2015년에는 금천구마을활동가 모임으로 재구성했고, 2020년 여성의 사회적 성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변신을 이어온 단체였다. ‘우와 우리 동네에도 이런 모임이 있다뉘’. 좀 놀라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있어 보이는 단체명을 가진 마젠마를 빨리 접하고 싶었다. 기회를 엿보다가 2023년 5월 23일, 함께 영화 보기 행사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당근 신청했고, 당근 참석했다. 함께 볼 영화는 <와즈다>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에게 금지된 자전거 타기를 도전하는 소녀 와즈다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본 장소는 마을공동체 지원센터였다. 마을 공유공간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는 경험은 처음이라 마을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그리고 마젠마의 대접도 융숭해 더 만족했었다.       그러다 여름에 마젠마 신입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고, 망설임 없이 바로 가입했다. 가입신청서를 낸 얼마 후 신입회원 환영회가 있었다. 상반기 활동을 공유하고 각자 자신을 표현하는 물건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입회원 웰컴 선물도 증정해줬다.^^ 마을에서 여성들끼리 이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위하는 모습에 몸과 마음이 훈훈했다. ‘이런 게 비빌언덕이지. 이런 단체가 하나쯤은 동네에 있어야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진짜 이런 단체가 우리 마을에 존재해줘서 고마웠다. 두 팔 벌려 환영해주는 기존 멤버들과 나도 이제 같은 멤버라는 소속감에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이제 마젠마 회원이다~.             그 후로도...
김윤경~단순삶
2024.03.20 | 조회 341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현민
2024.03.16 | 조회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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