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명상에 빠지다

오영
2024-02-11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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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밍아웃

 

명상에 빠졌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엇이든 이렇게 대놓고 덕심을 드러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혼자 은밀하게 빠졌다가 시들해져서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슬그머니 발을 빼곤 했다. 무언가를 오래 꾸준히 좋아하기에는 열정이나 에너지가 늘 부족했다. 그런 내가 명상에 대한 덕심을 표출하며 더 많은 친구들을 명상의 세계로 초대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우연 혹은 필연

 

문탁에서 주로 서양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불교는 관심 밖이었다. 명상도 요가를 마무리하는 한 과정이나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요가 니드라 정도를 해봤을 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불교와 명상’이 어느 순간 덕질의 대상이 될 줄이야. 그것도 이 둘이 별개가 아닌,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완전체로 말이다.

 

처음 불교 명상을 만난 날의 기억이 2021년 1월 4일자 일기에 남아 있다. 바로 그 전날 문탁네트워크의 마지막 운영회의가 있었다. 그날, 2 년 여에 걸친 분리 논의가 마침내 종결됐다. 몇 달간 그 최종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난 그 논의 과정에 집중하지 못한 채 이 모든 것으로부터 빨리 벗어 나고만 싶었다. 다들 공동체의 분리를 새로운 10년을 준비하는 전환점이자 출발점으로 삼아 애쓰고 있는데 난 여전히 쿠키무이 사업을 정리한 후 그 감정적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바라던 후련함보다는 상실감과 허탈감이 더해져서 당혹스러웠다.

 

논의가 이어지는 동안 때때로 템플스테이를 떠올리곤 했다. 고즈넉한 산사에 머무는 동안 저절로 머릿속은 말끔히 비워지고 헛헛한 마음은 채워질 것만 같았다. 그날도 템플스테이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문득 ‘초기불교 명상법’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땐 배경 지식이 없어서 ‘초기 불교’와 ‘명상법’, 이 둘의 조합이 무척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다. 초기 불교가 어떤 것인지, 기존 불교와는 어떻게 다른지, 초기 불교의 명상은 선(禪)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궁금했다. 호기심에 이끌려 둘러보다가 한 법문 영상에 딱 꽂히고 말았다.

 

그 법문에 따르면 아무리 멋진 여행지에, 좋은 경치라도 종일 돌아다니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하물며 복잡한 거리를 이리저리 쉬지 않고 돌아다닌다면 당연히 지치고 괴롭지 않겠는가. 근데 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까? 그건 원하는 것을 잡으려 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싫은 것을 피해 도망가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무료한 느낌에서 벗어나 더 강한 느낌을 찾느라 그러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그러고 있는 줄도, 그래서 지치고 힘든 줄도 모르기 때문에 멈추고 쉴 줄도 모른다. 그래서 더 괴롭다. 그 순간 양동이 가득 얼음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진 것 같았다. 아, 지금 내가 그러고 있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쿠키무이 사업이 끝난 후 일상은 그 어느 때보다 한가했지만 매일 매일 마라톤을 뛰는 것처럼 지치고 힘들었다. 그건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미 지난 일들을 끊임없이 복기하며 시시비비를 따지는 마음 때문이었다. 사업 정리 과정에서 뜻대로 되지 않았던 여러 상황들에 대한 원망과 자책,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뒤엉켜 생겨난 망상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나를 직시하는 순간, 캄캄한 어둠 속에서 EXIT→이라는 선명한 불빛을 발견한 것 같았다. 숨통이 좀 트였다. 그것 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명상이 주는 선물

 

드디어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 수 없던 출구를 찾았다는 희망, 기쁨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이제 시작일 뿐 종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명상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15분, 20분 그저 눈을 감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때 명상은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되고 편안한 좋은 친구와도 같았다. 하지만 어렴풋하게 나마 가야 할 방향은 알지만 먼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지도도, 나침반도, 변변한 장비도 갖추지 못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가이드도, 동료도 없으니 종종 길을 잃곤 했다.

 

 

시간이 흐르고 2023년 불교 학교에서 초기 불교와 명상에 대해 공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선뜻 용기 내기가 어려웠다. 시간도, 돈도 문제가 되었다. 그러다 딱 일 년만 무진장*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기로 했다.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공부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괜한 욕심에 여러 친구들에게 민폐만 끼치고 있다는 자의식이 일어나곤 했다. 도움은 도움대로 받으면서 이 불편한 마음까지 피하려는 건 지나친 욕심이라고 떨쳐버렸다. 그래도 때때로 일어나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러다 여름 학기부터 세미나 회원들과 명상 수행을 함께 하고 일지를 공유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2023년을 보내고 돌아보니, 작년 이맘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무진장에 대한 마음의 변화, 태도의 변화는 그 모든 변화들을 함축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민폐라는 말에 얽매이지 않았다.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 덕분에 배우고 경험한 것들에 온전히 감사하고 기뻐하기에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로 가장 행복해진 사람은 바로 나였다.

 

 

이 모두 붓다의 가르침과 명상 덕분이다. 명상을 통해 얼마나 많은 편견과 습관적인 생각, 그리고 망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다. 명상이 특별한 신비 체험이라서가 아니다. 일상에서는 수많은 자극들에 가려 알아차리기 힘든 마음의 움직임, 그 변화의 흐름이 명상 중에는 고스란히,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나는 마음을 단지 알아차리고 관찰하기만 할 뿐이지만 일상에도 차츰 스며들어 저절로 마음의 태도가 달라진다. 명상을 통해 달라진 이런 변화들을 일상에서 알아차릴 때마다 그저 놀랍다.

 

많은 경우 내가 경험하는 괴로움의 대부분은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내 것, 내 느낌, 내 생각’에 대한 집착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의지나 노력으로는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특별한 친구라고 명상을 소개하는 순간, 그 특별함이 오히려 빛을 잃고 초라해질까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두려움 역시 소중한 내 것,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라는 착각과 집착에서 생겨난 것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순간 사라진다. 물론 이는 일시적인 변화이므로 언제든 다시 일어날 것을 알지만 그렇다 해도 똑같은 경험이 되풀이되는 일은 없다. 모든 변화는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언제나 전혀 새로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번 명상을 할 때마다 이번엔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기대되고 설렌다. 그리고 매일 매일 그런 변화의 순간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 몸과 마음에 온전히 새겨질 날이 오리라 믿는다. 명상은 늘 내게 그 어떤 조건에서도 마음을 멈추고 고요함과 평온, 그로 인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앞으로도 그 기쁨이 에너지가 되는 한 이 덕심이 사그라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 무진장 : 문탁 회원들이 출자해 만든 한 통장의 공동 창고로 상호 부조와 재분배의 원리로 운영된다. 어려움에 처한 회원들을 필요에 따라 긴급한 생활 자금이나 기본 소득의 개념인 마중물로 지원하고 있다.

 

     

 

  오영 

  작년에 불교공부와 명상을 시작하면서 서두르지 않는 삶, 천천히 읽고 쓰며 명상하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더불어 올 한해 명상동아리 활동으로 조금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명상하기를 소망한다.

댓글 8
  • 2024-02-12 08:43

    덕심 ㅋ
    난 덕질을 평생 못할줄 알았는데 오영샘 글을 읽으니 이것도 덕질일수 있군요 ㅎ
    명상에 대한 저의 변화도 참 어마어마하네요 지난1년간 ^^
    친구들과 함께 명상하기 올해도 좋은 한해가 될듯요~

  • 2024-02-12 18:37

    오영쌤이 다른 데 안 빠지고 명상에 빠져서 얼마나 다행인지요!ㅎㅎ

    어떤 장비도 없이 언제 어디에서든 숨쉴 줄만 알면 할 수 있는 명상은 참 신기하고 매력이 넘쳐요. ^^
    오영쌤이랑 오래오래 함께 명상하고 싶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 2024-02-13 09:35

    명상으로 일상을 보살피는 힘을 키울 수 있군요~명상 멋지네요~

  • 2024-02-13 10:21

    오영님의 글 읽으니 좋네요~~

  • 2024-02-13 10:23

    오영샘과 명상이라.
    이건 요요샘과 명상, 도라지와 명상...과는 좀 다른 느낌인 것 같아요.
    요요샘과 도라지는 본투비 명상러일것 같은디, 오영샘은 뭐랄까...결이 좀 다르다랄까...ㅋㅋ
    요요샘이나 도라지과가 아닌 저는, 그래서 오영샘의 명상일기에 더 관심이 갑니다.
    잘 읽었고 앞으로도 잘 읽을게유^^

  • 2024-02-13 10:53

    명상을 덕질하다니요! 신선한 조합입니다.
    저도 올해 같이.. 빠질 수 있기를요!!

  • 2024-02-21 08:07

    덕밍아웃 좋아요~
    근데 덕질이 명상이라뉘 더할나위 없이 좋네요.
    전 무릎이 시원치않아 명상은 패슈...ㅎㅎㅎㅎㅎ

  • 2024-02-27 23:01

    매일 매일 명상하고 일지쓰고, 명상에세이까지 쓰는 오영샘 옆에서 많이 배워야지..
    올해도 함께 공부할 수 있어 기쁩니다^^

기린의 걷다보면
30대 중반을 통과하던 무렵이었다. 신문에서 일본 시코쿠섬에 위치한 88개의 절을 순례하는 도보 여행가의 여행기를 보게 되었다. 1번 절에서 출발해서 88번까지 이르는 완주 과정 자체가 내게는 경이롭게 다가왔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방을 빼고 적금을 깨 여행을 떠났다는 이력도 그랬고, 여자 혼자서 그 길을 완주하는 실행력도 멋있어 보였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았고, 오랜 걷기로 발가락에 생긴 물집 터뜨리기에 점점 능숙해지는 변화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홀가분하게 떠난 그의 도전이 부러웠다. 언젠가는 나도 한 번 해 봐야지 다짐했다.     그렇지만 나는 하던 일을 때려치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다짐은 서서히 잊혔다. 시간이 지나 인문학공부를 하게 되면서 다른 일상으로 접어들었고, 타고 다녔던 승용차를 처분했다. 집을 나서서 걷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사이 걷기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의 관심 영역으로 떠올랐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걷는 이야기들이 더 자주 들려왔다. 시코쿠 순례길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끌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고향집을 통과하는 해파랑길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긴 트레일 코스로 50개 코스로 이루어진 750km의 길이었다. 고향집 주변 코스부터 몇 코스를 걷기 시작하면서 다시 예전의 그 다짐이 떠올랐다. 나도 한번 해 봐야지.       해파랑길을 검색하다보니 완주한 사람들의 사연도 올라왔다. 명예퇴직을 한 후 이 길을 완주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는 50대 중년의 이야기도 있었고, 전국의 길을 다 걷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걷기의 달인도 있었다. 언젠가가...
30대 중반을 통과하던 무렵이었다. 신문에서 일본 시코쿠섬에 위치한 88개의 절을 순례하는 도보 여행가의 여행기를 보게 되었다. 1번 절에서 출발해서 88번까지 이르는 완주 과정 자체가 내게는 경이롭게 다가왔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방을 빼고 적금을 깨 여행을 떠났다는 이력도 그랬고, 여자 혼자서 그 길을 완주하는 실행력도 멋있어 보였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았고, 오랜 걷기로 발가락에 생긴 물집 터뜨리기에 점점 능숙해지는 변화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홀가분하게 떠난 그의 도전이 부러웠다. 언젠가는 나도 한 번 해 봐야지 다짐했다.     그렇지만 나는 하던 일을 때려치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다짐은 서서히 잊혔다. 시간이 지나 인문학공부를 하게 되면서 다른 일상으로 접어들었고, 타고 다녔던 승용차를 처분했다. 집을 나서서 걷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사이 걷기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의 관심 영역으로 떠올랐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걷는 이야기들이 더 자주 들려왔다. 시코쿠 순례길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끌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고향집을 통과하는 해파랑길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긴 트레일 코스로 50개 코스로 이루어진 750km의 길이었다. 고향집 주변 코스부터 몇 코스를 걷기 시작하면서 다시 예전의 그 다짐이 떠올랐다. 나도 한번 해 봐야지.       해파랑길을 검색하다보니 완주한 사람들의 사연도 올라왔다. 명예퇴직을 한 후 이 길을 완주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는 50대 중년의 이야기도 있었고, 전국의 길을 다 걷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걷기의 달인도 있었다. 언젠가가...
기린
2024.04.06 | 조회 223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코에 흙을 잔뜩 묻힌 돼지가 보인다.   돼지는 큰 귀를 곧게 세우고 어딘가를 응시한다.   뒤쪽엔 보다 작은 돼지가 보인다.   돼지는 코를 땅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다.   루팅을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돼지들 위로 두 명의 고양이가 나란히 앉아 있다.   한 명은 그릇에 얼굴을 묻고 무언가를 먹는다.   그 옆에 있는 고양이는 허리를 세우고 정면을 본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뭘 쳐다보냐는 눈빛으로.     -         봉봉오리님의 『지구에 살 자격』의 표지에는 돼지와 고양이 그림이 있다. 동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생의 어느 한 순간을 표현한다. 움직이지 않지만 살아 있고 저마다 생기를 분출한다. 책 표지를 넘기면 봉봉오리님의 친필 문구가 보인다.     종차별 없는 연대를.     한 페이지를 더 넘기면 저자의 한 줄 소개가 있다.     동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동물해방을 그린다.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를 하며 봉봉오리님을 만났다. 봉봉오리님은 생추어리와 재개발구역을 오가며 돼지를 돌보고, 또 고양이를 돌본다. 돌봄 일지를 블로그에 공유하고, 동물들 그림을 그려 전시를 한다. 나는 어느날 봉봉오리님에게 재개발 구역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돼지를 만나온 나는 또 다른 동물 돌봄 현장이 궁금했다. 설 연휴로 날짜가 정해졌다. 같이 갈 사람들이 모였다. 봉봉오리, 그린, 이슬, 세원, 그리고 나. 이들은 새벽이생추어리 돌봄 혹은 비질 모임으로 돼지를 만나온 사람들이었다.  ...
      코에 흙을 잔뜩 묻힌 돼지가 보인다.   돼지는 큰 귀를 곧게 세우고 어딘가를 응시한다.   뒤쪽엔 보다 작은 돼지가 보인다.   돼지는 코를 땅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다.   루팅을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돼지들 위로 두 명의 고양이가 나란히 앉아 있다.   한 명은 그릇에 얼굴을 묻고 무언가를 먹는다.   그 옆에 있는 고양이는 허리를 세우고 정면을 본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뭘 쳐다보냐는 눈빛으로.     -         봉봉오리님의 『지구에 살 자격』의 표지에는 돼지와 고양이 그림이 있다. 동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생의 어느 한 순간을 표현한다. 움직이지 않지만 살아 있고 저마다 생기를 분출한다. 책 표지를 넘기면 봉봉오리님의 친필 문구가 보인다.     종차별 없는 연대를.     한 페이지를 더 넘기면 저자의 한 줄 소개가 있다.     동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동물해방을 그린다.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를 하며 봉봉오리님을 만났다. 봉봉오리님은 생추어리와 재개발구역을 오가며 돼지를 돌보고, 또 고양이를 돌본다. 돌봄 일지를 블로그에 공유하고, 동물들 그림을 그려 전시를 한다. 나는 어느날 봉봉오리님에게 재개발 구역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돼지를 만나온 나는 또 다른 동물 돌봄 현장이 궁금했다. 설 연휴로 날짜가 정해졌다. 같이 갈 사람들이 모였다. 봉봉오리, 그린, 이슬, 세원, 그리고 나. 이들은 새벽이생추어리 돌봄 혹은 비질 모임으로 돼지를 만나온 사람들이었다.  ...
경덕
2024.04.02 | 조회 307
아스퍼거는 귀여워
  - 글 속에서 아이의 지칭을 ‘감자’로 변경. 감자를 좋아하는, 감자같이 귀여운 얼굴의 남자아이. 현재 초등학교 5학년생.     새 학기다. 초조하다. 애써 웃음 지어보지만, 마음 한구석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겁다. 우리 감자는 이제 5학년. 개학하기 2주 전부터 서서히 어둠이 도사린다.  “엄마, 학교는 왜 가야 하는 걸까요?”     몇백 번은 이야기 했을 텐데…. 모르는 게 아니지만 가기 싫은 마음으로 질문한다는 걸 안다. 또 답할 수밖에. 먼저 1단계 협박.    “응,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 안 가면 엄마가 잡혀가.”     팩트 체크. 사실 감자는 때에 따라서 홈스쿨링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구구절절 학교의 장점을 이야기해봤자 감자에게 와 닿는 건 없다. 학교 공부도 지루하고 친구도 없는 아이에게 먹힐 리가. 다음은 2단계 공감.    “근데…. 엄마도 진짜 학교 가기 싫고, 공부도 하기 싫었어. 어릴 때 소심하고 친구도 없어서 맨날 맨 앞자리에 앉아서 종이접기하고 그랬지.”  “진짜 엄마도 그랬어요?”  “그래 진짜지. 아빠한테도 물어봐.”     3단계 동조.    “그래 아빠도 그랬어. 근데 그냥 학교 가서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어려워?”     에이 도움이 안 된다. 쩝, 다시 2.5단계 공감+희망.    “엄마도 그래. 쉬다가 약국에 일하러 가는 거 얼마나 가기 싫은 줄 알아? (오바) 몸이 천근만근이라고 (이 정도는 아님) 근데 막상 가잖아? 그럼 또 재미있다?”     협박과 공감과 회유 사이를 무한 반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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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2024.03.25 | 조회 342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나는 마젠마 회원~     우리 동네 금천에는 ‘마젠마’라는 단체가 있다. ‘마을에서 젠더를 마주하다’를 줄인 것이란다. 2013년부터 무려 글쓰는 엄마동아리로 시작해, 2015년에는 금천구마을활동가 모임으로 재구성했고, 2020년 여성의 사회적 성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변신을 이어온 단체였다. ‘우와 우리 동네에도 이런 모임이 있다뉘’. 좀 놀라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있어 보이는 단체명을 가진 마젠마를 빨리 접하고 싶었다. 기회를 엿보다가 2023년 5월 23일, 함께 영화 보기 행사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당근 신청했고, 당근 참석했다. 함께 볼 영화는 <와즈다>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에게 금지된 자전거 타기를 도전하는 소녀 와즈다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본 장소는 마을공동체 지원센터였다. 마을 공유공간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는 경험은 처음이라 마을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그리고 마젠마의 대접도 융숭해 더 만족했었다.       그러다 여름에 마젠마 신입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고, 망설임 없이 바로 가입했다. 가입신청서를 낸 얼마 후 신입회원 환영회가 있었다. 상반기 활동을 공유하고 각자 자신을 표현하는 물건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입회원 웰컴 선물도 증정해줬다.^^ 마을에서 여성들끼리 이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위하는 모습에 몸과 마음이 훈훈했다. ‘이런 게 비빌언덕이지. 이런 단체가 하나쯤은 동네에 있어야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진짜 이런 단체가 우리 마을에 존재해줘서 고마웠다. 두 팔 벌려 환영해주는 기존 멤버들과 나도 이제 같은 멤버라는 소속감에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이제 마젠마 회원이다~.             그 후로도...
    나는 마젠마 회원~     우리 동네 금천에는 ‘마젠마’라는 단체가 있다. ‘마을에서 젠더를 마주하다’를 줄인 것이란다. 2013년부터 무려 글쓰는 엄마동아리로 시작해, 2015년에는 금천구마을활동가 모임으로 재구성했고, 2020년 여성의 사회적 성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변신을 이어온 단체였다. ‘우와 우리 동네에도 이런 모임이 있다뉘’. 좀 놀라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있어 보이는 단체명을 가진 마젠마를 빨리 접하고 싶었다. 기회를 엿보다가 2023년 5월 23일, 함께 영화 보기 행사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당근 신청했고, 당근 참석했다. 함께 볼 영화는 <와즈다>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에게 금지된 자전거 타기를 도전하는 소녀 와즈다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본 장소는 마을공동체 지원센터였다. 마을 공유공간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는 경험은 처음이라 마을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그리고 마젠마의 대접도 융숭해 더 만족했었다.       그러다 여름에 마젠마 신입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고, 망설임 없이 바로 가입했다. 가입신청서를 낸 얼마 후 신입회원 환영회가 있었다. 상반기 활동을 공유하고 각자 자신을 표현하는 물건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입회원 웰컴 선물도 증정해줬다.^^ 마을에서 여성들끼리 이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위하는 모습에 몸과 마음이 훈훈했다. ‘이런 게 비빌언덕이지. 이런 단체가 하나쯤은 동네에 있어야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진짜 이런 단체가 우리 마을에 존재해줘서 고마웠다. 두 팔 벌려 환영해주는 기존 멤버들과 나도 이제 같은 멤버라는 소속감에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이제 마젠마 회원이다~.             그 후로도...
김윤경~단순삶
2024.03.20 | 조회 341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현민
2024.03.16 | 조회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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