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내가 누군데!’ 근데, 내가 누구지?

가마솥
2023-02-1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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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외워야 하느니라

 

문탁에서 10년을 공부하고 있는 마눌님이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논어(論語) 책(?)을 시도 때도 없이 외운다. 특히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있을 때에는 거의 백퍼센트다. 방금 읽었던 앞 페이지도 다시 봐야 할 때가 빈번한 이 나이에 논어를 통째로 외운다고 시도하니, 무섭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다. 사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먼저 그의 말을 이해하고 나의 말로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작은 외우는 것일 게다. 나도 함 해볼까?

 

문탁 홈페이지를 열어 꼼꼼히 살펴보았다. 공부하는 방식이 크게 보아서 선생님이 하는 강의가 있고, 참가자들끼리 하는 세미나가 있다. 일단 발제없이 듣기를 잘하면 되는 논어 후반부 강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공부도 쉽지 않다. 학교 다닐 때처럼 기록하고 정리하여야 따라 갈수 있었다. 외운 것을 까먹어 헷갈리는 상황에서도 ‘그렇지!’하는 문장을 발견하는 재미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강의를 들었다.

 

반장님이 강의 마지막 날 행사에 대해서 말한다. 다른 강의들은 에세이를 쓰지만 이번 강의에서는 논어 ‘낭송(朗誦)’을 하겠단다. 다만, 책을 보고 읽는 게 아니고 암송(暗誦)하는 것이란다. 나도 외워 본다. 첫 페이지, 논어 학이(學而), 제 1편(第一編).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많이 들었던 문장이니 외우지 않아도 술술 나온다.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뭐, 이 문장도 처음 보는 문장이 아니니 그래도 잘 외워진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서 덜컹거린다.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이 문장은 처음 보았다. 성낼 ‘온(慍)’이란 한자도 처음 알았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뜻은 잘 알겠는데, 문장이 잘 외워지지 않는다. 그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 문장에서만 빙빙 돌았다. 기억력이 이렇게나 나빠지다니 치매가 왔나? 통째는 고사하고 제 1편, 첫 문장에서 쩔쩔매고 있으니, 어처구니도 없고 짜증도 난다.

 

내가 누군데!

 

문탁 회원인 여울아, 뿔옹, 대학생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논어 후반부를 읽는 세미나를 하게 되었다. 발제하고 후기 쓰고 에세이를 써야하는 세미나는 쪼매 겁나지만, 일단 네 명이니까, 좀 쉽지 않겠어? 첫 시간. 젊은 친구는 한자를 잘 모른다고 한다. 그는 논어를 읽으면서 한자도 익히려고 한단다. 다행히 난 한문세대이니 한자는 좀 안다. 적어도 쪽 팔리지는 않게 생겼다. 두 번째 시간. 미리 나누어진 분량의 발제를 발표하게 되었다. 첫 발표자는 그 대학생이다. 으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자를 잘 모른다면서, 한 문장을 가지고 논어 어느 편에서는 이렇게 말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있고, 이에 대해 누구의 해석은 이렇고 다른 책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다. 자기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토론하고 싶다는 것이다. A4 용지 두 장에 반듯하게 작성해 왔는데, 그 예쁜 포맷하며 인용문과 핵심어를 볼드체와 따옴표를 넣어가면서 정돈한 문장은 아주 보기 좋았다. 나의 예상을 배반하고 이렇게 발제하다니, 그것은 ‘반칙’이었다.

 

사실 나는 과장이후로 이메일 빼고는 문서 작성을 거의 안했다. 작성된 문서(보고서)를 읽기만 하고 결재만 하였다. 실로 오랜만에 내가 작성한 문서, 나의 발제문은 내가 보아도 포맷도 엉망이고 내용도 그 문장에만 제한된 나의 뇌피셜만 잔뜩 늘어놓았다. 창피했다. 그런데, 여울아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쉼없이 지적질(!)을 한다. 얼굴이 화끈거리다가 슬슬 열이 오른다. ‘아이구야! 고만 좀 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나도 논문을 두 번이나 쓴 사람이라구!’ 소리가 목 안에서 맴돌았다. 다행히도 어떤 문장에 대한 뿔옹의 해석에 대해서 여울아가 논쟁을 하느라 나에 대한 지적이 끝났길 망정이지, 자리를 박차고 나올 뻔하였다.

 

하! 신병 신고식을 40년 만에 다시 치룬 느낌이었다. 아니, 공부 때문에 누군가에게 혼이 난 것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내가 누군데! 기분은 복잡 미묘한 혼돈, 그 자체였다. 창피함이 섞인 불쾌감과 수십 년 만에 받아보는 ‘혼냄이 주는’ 살아있는 기분이 교차하였다. 그렇게 외워지지 않더니만,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가 떠오른다. 그럼 그럼, 소인배가 아닌 내가 참아야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그건 애초에 화낼, ‘온(慍)’할 일이 아니었다. 알고 모르는 것은 나의 일이지, 상대방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음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이 시간은 내가 누구라는 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발제문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여울아는 가감없이 의견을 준 것 뿐이었다. 내가 스스로 발제문과 나의 존재감을 연결시켜서 생각하고 화를 내고 있는 사태인 것이다.

 

계급장이 진리이다?

 

은퇴를 하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난감함(?)은 한 장으로 자기를 표시할 수 있는 명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친구는 사적 모임인 ‘ㅇㅇ산악회 총무’가 새겨진 명함을 들고 다닌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애처롭기도 하고 공감이 가기도 해서 그렇다. 그동안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에 익숙한 사회생활 속에서 얻어진 습관, 그것을 잘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습관이 집안에서 발휘될 때이다. 한 친구는 은퇴하니 애들도 그렇고 마누라도 그렇고 예전 같지 않다고 푸념한다.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개새끼’도 자기를 낮춰 본다는 것이다. 다른 친구는 식구들이 ‘덤빈다’고 표현한다. 가만히 들어 보면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인데, ‘덤빈다’고까지 느낀다.

 

직장에서 대부분의 상사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 특히 부하직원의 의견을 최대한 많이 듣고자 노력했다고 말한다. 착각이다. 나도 그랬다. 한참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데, 분위기가 조용한 경우에는 돌아봐야 한다. 공감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지만, 착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십중팔구는 결정권자인 내가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의 근거를 논리적으로 저 먼 곳에서부터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계급장이 진리였다. 문제는 집안 식구들은 부하직원들이 아니다. 말을 한다. 다른 의견을 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은퇴 전에도 식구들은 똑같이 의견을 내었다. 자기주장이 있었다. 아마도 부하직원들보다 열배는 강하게 냈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에는 대수롭지 않았는데, 지금은 ‘고깝게’ 들린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집밖에서 남들이 나의 이력(履歷)과 나의 명함, 나의 지위로 붙여진 계급장이 내게 주었던 존중감(尊重感)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역 때에 식구들의 다른 의견은 그 계급장이 만든 내면의 여유로써 ‘받아 주었다’. 이제, 계급장이 떼어진 그 상실감을 집안 식구들이 채워주었으면 좋으련만, 눈치도 없이 은퇴전후가 똑같다. 헌데, 당연하게도 존중받는 것은 내가 내게 주는 존중, 자존감(自尊感)이 먼저이다. 그 동안, 계급장이 주는 외부의 존중감(尊重感)을 나의 자존감(自尊感)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퇴 후에도 나의 자존감(自尊感)을, 나의 계급장을 집안 식구들, 타인에게서 요구하고 있는 사태가 ‘고깝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계급장을 은퇴자인 나만 떼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도와 달라고 말도 못하고......

 

 그러고 보니, 은퇴 후에도 자주 만나는 친구 녀석들의 수다가 늘었다. 세계평화와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한 정치 이야기를 지나고 나면, 특이하게도 은퇴 전에는 단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는 ‘아내 이야기’들을 쏟아 낸다. 은퇴 전에는 다소 팔불출(八不出)로 취급당할 수 있는 금기어(禁忌語)였는데 말이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서로들 많은 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여자들의 수다를 공감해주는 추임새까지 넣어가면서.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짐에 따르는 티격태격 사례도 있지만, 그건 에피소드일 뿐이다. 크게 정리하면, 아내는 아직 남편의 은퇴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가정의 구도가 남편은 밖에 나가 돈을 벌어 오고, 아내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집안일을 성실히 수행한 경우가 더욱 그랬다.  그럼, 남편이 이제 집안일을 도우면 되는가?  꼭 그것도 아니란다. 그런 모습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럼, 어쩌라고. 먹고 사는데 필요한 자산이 딱히 부족한 것도 아닌데, 건강함을 핑계로 나가서 일을 더 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삼식이(三食) 취급받지 않으려면 할 일없이 집을 나서야 할 정도로. 아내는 아직 남편의 계급장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녀석들이 말하는 은퇴자의 재취업 공식이 있다. 그냥 앉아서 내 시간을 죽이는 일은 연봉이 얼마이고, 그동안 놀리던 근육들을 쓰느라 골병드는 일은 그 보다 조금 높은 얼마, 그리고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일은 내 영혼을 파는 것이다. 나의 마지막 계급장을 활용한 로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어 제명에 살지 못하는 일이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면 한 가닥 남은 자존심도 내려놓아야 하고, 때로는 현역 때 그렇게 엄정하게 관리했던 후배들에게 못할 짓을 해야 하니까. 더 늦기 전에, 식구들(특히 아내) 모두가 달고 있는 그의 계급장을 떼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처럼 보였다. 중년 남자들에게 놓여있던 가족, 사회적 배치들을 돌아보고 노년의 삶을 ‘함께’ 그려보는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도와 달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좋으련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넌 어떠냐? 다행히 나의 아내는 나에게 먼저 은퇴를 신청한 사람이라고 자랑한다. 팔불출!

 

그러니, 이제 내 스스로 나를 일으켜 세우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하나? 젊었을 때 꿈꾸었던 입신(立身)이 아니고, 진정으로 나를 존중할 수 있는 나를 찾아야 한다.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할 것 같다. 타자들이 만든 내가 아닌,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나를 만나야 한다. 수도자가 추구하는 득도(得道)수준이 아니라, 인생 후반부를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말이다.

 

하이데거 읽어......

 

 문탁 철학학교 공지가 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는단다. 이것이다! 싶었다. 나의 일상 ‘시간’ 속에서 안팎으로 달라진 나의 ‘존재(存在)’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 제목도 ‘존재’와 ‘시간’이다. 떨어진 나의 자존감(이 때까지 자존감의 한자를 ‘自感’으로 알고 있었음)을 새로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논어 강의처럼 외우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쉽지 않았다. 아니, 아직도 읽었노라고 말하기 겁난다. 공부가 이렇게 어렵나 싶었다. 차라리 수학문제라면 며칠을 끙끙거려서라도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은 몇 번을 읽어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명 한글로 쓰여 있는데, 단어를 찾아 가면서 읽는 영어 문장 같다. 무슨 새로운 개념들이 그렇게 많은 것인지. 책을 집어 던진 것이 서너 번은 된다. 저자의 정의에 따라 ‘개념’을 간신히 이해해도, 문장에서 그 단어가 나오면 덜컹 거리기 일쑤다. 보조 교재인 해설서들을 펼치면, 그 분들 간에 번역용어가 달라서 이번엔 ‘용어’정리를 한다. 첩첩산중이 따로 없다. 튜터인 정군님이 왜 그런지 다른 철학자를 등장 시켜서 설명을 하지만 난 그 철학자도 모른다. 세미나원인 아렘님은 특유의 독화살로 하이데거를 마구마구 비판한다. 이해를 했어야 딴지라도 걸어보지,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의 교수님, 요요님이 나서서 ‘그것은 이렇고요 저것은 좀 그래요’ 해야 정리가 좀 된다. 세미나원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특히, 나에게 ‘전교 1등’이라고 별명을 붙여 주며 끝까지 읽게 하였다. 가까운 곳에 공부할 수 있는 문탁이 있고, 고마운 학인(學人)들이 있어서 나에겐 큰 행운이다.

 

그래서, 나를 찾는데 하이데거가 도움이 되었나? 그럴 리가! 한 술 밥에 배부를 수가 있나? 다만, 내 안에서만 밖을 보았는데, ‘세계’에서 나를 바라보는 다른 눈을 느꼈을 뿐이다. 읽을 때에는 그의 불친절에 치를 떨었지만, 그의 ‘존재와 시간’이 ‘철알못’인 내게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일단 그것으로 만족한다. 시간은 많다. 다른 철학여행을 다녀와서 이 책을 또 펼쳐보면 어떨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밖에 나가면 “어떻게 지내?” “요즘 뭐해?”하고 묻곤 한다. 상대방의 질문의도에 따라 혹은 나의 기분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기가 좀 ‘거시기’할 때가 있다. 그래서 집밖에 나가 사회생활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모임을 즐기지 않는다. 이럴 때 꺼낸다. “요즘, 하이데거 읽어.” 대부분은 ‘다음 질문 끝!’이지만, 조금 아는 사람은 “아니, 웬 실존?” 한다. 지금 ‘하이데거’는 내 명함이다. 다음번엔 이직(移職)해서 ‘들뢰즈’로 명함을 바꾸면 어떨지 기대된다. 흐흐흐.

 

그렇게 나의 사회적 명함을, 계급장을 나의 내면의 명함으로 바꾸어 가고 있다. 이 명함들이 쌓이고 쌓일 때, 나의 자존(自尊)은 어디에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금처럼 그 명함들도 버릴 때가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내가 누군데!’에 매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길 바란다.

 

댓글 8
  • 2023-02-19 12:47

    글이 재밌게 읽힙니다. 지난번 글도 그랬고요.
    가마솥님 글을 읽으며 언젠가 우리집에도 닥칠 일, 어떻게 닥칠까... 생각하게 됩니다.
    귀한 경험 재밌게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3-02-19 16:26

    저도 가마솥님과 같이 공부하고 가마솥님 글에 이름 좀 나왔으면 좋겠네요^^ 친구들 이름이 아주 부러워요~

  • 2023-02-20 09:20

    가마솥님도 문탁에서 공부를 논어로 시작하셨군요^^ 저도요, ㅋ 학이편 첫 문장과 씨름하기도 여전한 것까지^^그래서 반갑네요~

  • 2023-02-20 15:17

    너무 재밌어요!!!!

  • 2023-02-21 09:15

    저도 가마솥샘 글 재밌게 보고있어요ㅎ
    다음글도 기대합니다. 철학공부도 응원해요!

  • 2023-02-21 11:30

    참…그쵸? 조직의 위계가 주는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계급장으로 한껏 올라간 자기애도 있는 것 같습니다.
    조직을 나와 문탁에서 공부를 시작한 부분에 공감이 많이 되네요~~~ ㅋ
    가마솥님! 글이 진솔하고 재밌어요!!
    역시 식상이 많아서 그러신가? ㅋㅋㅋ
    그나저나 ‘열이 오빠’는 누구에게 불리는 호칭인가요?
    설마 인디언님은 아니실테고 ㅋㅋㅋㅋㅋㅋ

    • 2023-02-21 12:04

      '열이 오빠'는 성산동에 살면서 마을만들기 하던 때에, 동네에서 부르던 별명입니다.
      성미산 싸움하면서 동네에 알리기 위해서 밴드를 만들었고, MaPos 라고 이름지어서 4-5년 활동(?) 했었습니다.
      군악병 특기를 살려서 드럼을 쳤구요......ㅎㅎㅎ

  • 2023-02-23 10:05

    아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가마솥샘의 글.. 아침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마솥샘은 매번의 배움이 삶에서 어느 자리를 차지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옮겨가고 있는지 잘 보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거기에 늘 마음을 기울이고 계시기 때문이겠지요. 올해도 가마솥샘과 함께 공부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인문약방 에세이
    “감정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 캐럴라인은 사안의 경중과 상관없이 달아나기보다 오히려 문제에 다가가는 사람이었다. 해결이 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감정의 여파로 아무런 비난이나 앙금을 남기지 않았다. 내게도 비슷한 문제해결 본능이 있었다. 침묵과 거리두기가 정면충돌보다 훨씬 더 해롭다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수년 동안 우리 사이에 해결하지 못한 부유물이 남지 않았던 것은 이런 공존 능력 덕분이었다.” (게일 콜드웰 , 먼길로 돌아갈까?, 문학동네, 2021, p51)       1. 30년 지기, K   감정의 여파로 비난이나 앙금, 부유물이 남지 않는 관계라니...이 문장으로 나는 오랜 친구인 K를 떠올렸다. K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로 지금껏 근거리에서 교류를 이어가는 사이다. 공통의 관심사로 끊임없이 이어지던 우리의 대화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끊어지는 시간들이 생겼고 나는 K가 내 인생에서 소중한 만큼 어떻게 우리의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런 고민으로 두 번째 글쓰기는 K와의 “이 우정이 잘 되어가고 있나”라는 글을 썼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와 드러나는 것 말고도 생각해 보는 건 뭘까 라는 질문이 내게 던져졌다.     요즘 부쩍 위스키에 관심이 많아진 난 베트남여행을 하는 K에게 면세 위스키를 부탁했고 귀국 후 동네 근처에서 만났다. 중학교 물리교사인 K는 방학이라 적당히 느긋하고 편안한 모습이었고 나도 바쁜 시기가 아니라 여유로웠다. 동네 횟집의 평일 점심 특선에 감탄하며 이번 여름휴가지인 강원도에서 있었던 인상 깊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감정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 캐럴라인은 사안의 경중과 상관없이 달아나기보다 오히려 문제에 다가가는 사람이었다. 해결이 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감정의 여파로 아무런 비난이나 앙금을 남기지 않았다. 내게도 비슷한 문제해결 본능이 있었다. 침묵과 거리두기가 정면충돌보다 훨씬 더 해롭다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수년 동안 우리 사이에 해결하지 못한 부유물이 남지 않았던 것은 이런 공존 능력 덕분이었다.” (게일 콜드웰 , 먼길로 돌아갈까?, 문학동네, 2021, p51)       1. 30년 지기, K   감정의 여파로 비난이나 앙금, 부유물이 남지 않는 관계라니...이 문장으로 나는 오랜 친구인 K를 떠올렸다. K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로 지금껏 근거리에서 교류를 이어가는 사이다. 공통의 관심사로 끊임없이 이어지던 우리의 대화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끊어지는 시간들이 생겼고 나는 K가 내 인생에서 소중한 만큼 어떻게 우리의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런 고민으로 두 번째 글쓰기는 K와의 “이 우정이 잘 되어가고 있나”라는 글을 썼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와 드러나는 것 말고도 생각해 보는 건 뭘까 라는 질문이 내게 던져졌다.     요즘 부쩍 위스키에 관심이 많아진 난 베트남여행을 하는 K에게 면세 위스키를 부탁했고 귀국 후 동네 근처에서 만났다. 중학교 물리교사인 K는 방학이라 적당히 느긋하고 편안한 모습이었고 나도 바쁜 시기가 아니라 여유로웠다. 동네 횟집의 평일 점심 특선에 감탄하며 이번 여름휴가지인 강원도에서 있었던 인상 깊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새봄 2023.09.03 조회 170
인문약방 에세이
두려움_임신의 경험   ‘이 제도(‘제도로서의 모성’)가 빚어낸 가장 기본적이고 당황스러운 모순은 우리 여성들을 우리 몸 안에 가둠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몸으로부터 소외시킨 것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130쪽, 에이드리언 리치)      30살에 첫 임신을 했다. 입덧으로 시작된 임신 기간은 나른함과 졸림, 움직임의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낯설고 불편한 시기였고, 임산부인 나에게 몇 가지 제약이 따라왔다. ’건강한 아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임산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술, 카페인, 흡연-이것을 어길 경우 태아에게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2021. 헬스조선) 와 같은 문구들의 홍수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술‘과 ’담배‘, ’커피‘를 즐길 수 없었다. 한동안 피웠던 담배는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남편 때문에 끊은 뒤였지만 술과 커피는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음에도 가끔씩 아쉬웠다. 어느 날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던 중 직원이 건넨 믹스커피를 무심코 받아서 마시려는데 옆에 앉아있던 남편이 갑자기 화를 내며 커피를 버리라고 했다. 남편의 관점에서 나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먹는 부주의한 여성(임산부)이었고, 결국 나는 커피를 마시지 못한 채 버려야만 했다.      4~5개월쯤에는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산전 검사를 하게 되었다. 그 후 남편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산부인과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산전 검사 결과 일정 확률의 가능성으로 ’태아 기형‘의 위험성이 발견되었다는 것과 양수 검사를 해 정확한 확인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양수 검사는 선택 사항이었다. 검사를 받는다는 의미는 몸속의 태아가 ’장애‘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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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유상 2023.09.03 조회 100
인문약방 에세이
    따스함과 자유   『먼길로 돌아갈까?』(게일 콜드웰, 문학동네, 2023)는 게일 콜드웰이 마흔 둘에 폐암으로 죽은 캐럴라인 냅과의 우정을 기억하며 쓴 책이다. 그들은 우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말도 추가하고 싶다. 이들의 사랑은 희생, 인내, 고통 보다 자기 긍정, 성장, 자유와 연결된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5,6년이었다. 둘 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았으며,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들이 만들어낸 사랑과 우정의 경이로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게일은 친밀한 관계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자연스러운 관계가 주는 따스함과 오롯한 자유로움 둘 다를 원했던 그녀는 따스한 관계가 만족되면 자유를 잃었고, 자유를 얻었다 싶으면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처리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캐럴라인도 게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자신의 자율을 침해 받는 것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따스함과 자유가 공존하는 관계를 구현해낸다.       게일과 캐럴라인은 닮은꼴이다. 게일은 소아마비를 이겨냈고, 캐럴라인은 거식증의 물살을 헤쳐 나왔다. 두 여성은 알코올중독이라는 자기 파괴의 늪에서도 과감하게 살아나와 존재를 파산시키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개를 통해서 터득하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공통적으로 술이든 사람이든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과 자립을 지켜내기 위해, 그런 힘을 지니기 위해 분투했던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이 공유한 명제는 “삶은 고되고 때로 가장 치열한 싸움은 고독하게 치러야 하지만, 두려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상처를 입고 나올지라도 여전히 숨을 쉴 수 있다는 믿음”(119쪽)이었다.       이런...
    따스함과 자유   『먼길로 돌아갈까?』(게일 콜드웰, 문학동네, 2023)는 게일 콜드웰이 마흔 둘에 폐암으로 죽은 캐럴라인 냅과의 우정을 기억하며 쓴 책이다. 그들은 우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말도 추가하고 싶다. 이들의 사랑은 희생, 인내, 고통 보다 자기 긍정, 성장, 자유와 연결된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5,6년이었다. 둘 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았으며,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들이 만들어낸 사랑과 우정의 경이로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게일은 친밀한 관계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자연스러운 관계가 주는 따스함과 오롯한 자유로움 둘 다를 원했던 그녀는 따스한 관계가 만족되면 자유를 잃었고, 자유를 얻었다 싶으면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처리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캐럴라인도 게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자신의 자율을 침해 받는 것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따스함과 자유가 공존하는 관계를 구현해낸다.       게일과 캐럴라인은 닮은꼴이다. 게일은 소아마비를 이겨냈고, 캐럴라인은 거식증의 물살을 헤쳐 나왔다. 두 여성은 알코올중독이라는 자기 파괴의 늪에서도 과감하게 살아나와 존재를 파산시키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개를 통해서 터득하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공통적으로 술이든 사람이든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과 자립을 지켜내기 위해, 그런 힘을 지니기 위해 분투했던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이 공유한 명제는 “삶은 고되고 때로 가장 치열한 싸움은 고독하게 치러야 하지만, 두려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상처를 입고 나올지라도 여전히 숨을 쉴 수 있다는 믿음”(119쪽)이었다.       이런...
윤아 2023.08.29 조회 168
인문약방 에세이
    “ 난 난파선을 탐색하러 내려왔다/ 단어들이 목적이다 /단어들이 지도이다/ 난 이미 행해진 파괴의 정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보물들을 보러왔다/<중략> 내가 찾으러 왔던 것/ 그것은 잔해이지 잔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체일뿐 그것을 둘러싼 신화가 아니다”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6쪽)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는 그녀의 작품 활동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다. 1960년대 서구 가부장제 사회를 ‘난파선’으로 명명하며 위험한 심해에 들어가 그녀가 응시하고자 한 ‘잔해’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 속의 자아는 불편한 잠수복을 입고 산소마스크를 달고 내려가 검은색으로 변한 바다 속으로 몸을 옯겨 놓는다. 그곳에는 중력이 없고 산소가 없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권력이 없고 너와 내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스트레스를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익사자의 시체, 고장난 나침반, 물먹은 일지. 그곳에서는 이 모두가 그녀 자신이며, 우리이다. 여기에서 길어올린 ‘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레즈비언이며 가부장제에 부역한 이혼녀이고 세 아이의 엄마였던 미국여성 시인인 그녀의 글속에서 자유롭게 횡단하고 있다. 그녀의 에세이 <뿌리에서 갈라지다>와 <피,빵 그리고 시>에서는 자신을 손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 제치는 그녀의 소심함과 용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유대인이면서 미국 주류 사회의 토큰이 되고자 했던 그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수치스럽지만 꼭 써야만 하는 의무감으로 표현된다. “내가 유대인인 것은 기독교인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까”(288쪽) , “유대인으로서 나의 양가감정이 대체 어디서...
    “ 난 난파선을 탐색하러 내려왔다/ 단어들이 목적이다 /단어들이 지도이다/ 난 이미 행해진 파괴의 정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보물들을 보러왔다/<중략> 내가 찾으러 왔던 것/ 그것은 잔해이지 잔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체일뿐 그것을 둘러싼 신화가 아니다”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6쪽)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는 그녀의 작품 활동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다. 1960년대 서구 가부장제 사회를 ‘난파선’으로 명명하며 위험한 심해에 들어가 그녀가 응시하고자 한 ‘잔해’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 속의 자아는 불편한 잠수복을 입고 산소마스크를 달고 내려가 검은색으로 변한 바다 속으로 몸을 옯겨 놓는다. 그곳에는 중력이 없고 산소가 없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권력이 없고 너와 내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스트레스를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익사자의 시체, 고장난 나침반, 물먹은 일지. 그곳에서는 이 모두가 그녀 자신이며, 우리이다. 여기에서 길어올린 ‘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레즈비언이며 가부장제에 부역한 이혼녀이고 세 아이의 엄마였던 미국여성 시인인 그녀의 글속에서 자유롭게 횡단하고 있다. 그녀의 에세이 <뿌리에서 갈라지다>와 <피,빵 그리고 시>에서는 자신을 손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 제치는 그녀의 소심함과 용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유대인이면서 미국 주류 사회의 토큰이 되고자 했던 그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수치스럽지만 꼭 써야만 하는 의무감으로 표현된다. “내가 유대인인 것은 기독교인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까”(288쪽) , “유대인으로서 나의 양가감정이 대체 어디서...
꿈틀이 2023.08.29 조회 69
인문약방 에세이
      지난 시간 세미나에서 현모양처와 관련된 나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셨다. 그때는 단순히 현모양처가 아이 옷을 잘 입히는 게 아니지 않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난 우리 아이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엄마이고 애를 자율적으로 키웠다고 자부하고 살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내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난 왜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을까? 노력도 안 하면서 왜 그토록 줄기차게 애기하고 다닐까?       난 기억력이 안 좋은 편임에도 기억나는 몇 가지들은 음식에 대한 것이 많다. 엄마 심부름으로 아빠 드릴 보신탕을 사러 심부름 하던 기억. 비린 것을 싫어하는 엄마가 생선을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해주시던 생선조림. 가족이 많다 보니 항상 음식은 부족했고 엄마음식은 너무 맛있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엥겔지수는 상당했을 것이다. 애들은 서로서로 같이 잘 켰고 엄마는 때에 맞춰서 밥을 해주는 것으로도 엄마의 소임을 다 하신건데 거기다 돈까지 벌어오셨다. 물론 엄마의 고단한 생활은 어린 자식들에게 폭발한 적이 많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명절에도 엄마의 주방은 빛을 발한다. 육형제의 장남인 아버지 형제들과 그 가족까지 모두 모이면 30명은 족히 되는 대가족의 음식준비의 대장인 엄마는 작은 엄마들을 지휘하며 요리를 만드시고 그 모든 행사가 끝나시면 그것으로 아빠에게 유세를 하셨다. 나이가 9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엄마는 아빠의 밥을 챙겨주시는 것으로 아내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신다. 배우자가 정말 원하는 게 무언지 궁금하지도 묻지도 않으신다. 엄마에게는 가족을 위해 차리는...
      지난 시간 세미나에서 현모양처와 관련된 나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셨다. 그때는 단순히 현모양처가 아이 옷을 잘 입히는 게 아니지 않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난 우리 아이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엄마이고 애를 자율적으로 키웠다고 자부하고 살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내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난 왜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을까? 노력도 안 하면서 왜 그토록 줄기차게 애기하고 다닐까?       난 기억력이 안 좋은 편임에도 기억나는 몇 가지들은 음식에 대한 것이 많다. 엄마 심부름으로 아빠 드릴 보신탕을 사러 심부름 하던 기억. 비린 것을 싫어하는 엄마가 생선을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해주시던 생선조림. 가족이 많다 보니 항상 음식은 부족했고 엄마음식은 너무 맛있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엥겔지수는 상당했을 것이다. 애들은 서로서로 같이 잘 켰고 엄마는 때에 맞춰서 밥을 해주는 것으로도 엄마의 소임을 다 하신건데 거기다 돈까지 벌어오셨다. 물론 엄마의 고단한 생활은 어린 자식들에게 폭발한 적이 많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명절에도 엄마의 주방은 빛을 발한다. 육형제의 장남인 아버지 형제들과 그 가족까지 모두 모이면 30명은 족히 되는 대가족의 음식준비의 대장인 엄마는 작은 엄마들을 지휘하며 요리를 만드시고 그 모든 행사가 끝나시면 그것으로 아빠에게 유세를 하셨다. 나이가 9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엄마는 아빠의 밥을 챙겨주시는 것으로 아내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신다. 배우자가 정말 원하는 게 무언지 궁금하지도 묻지도 않으신다. 엄마에게는 가족을 위해 차리는...
시소 2023.08.29 조회 75
인문약방 에세이
    출생의 비밀 잠결에 엄마와 외할머니의 말소리를 들었다. “남의 자식 키우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억울하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곧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잠결이지만 나는 놀랐다. ‘이런 일이 우리 집에? 나에게?’ 나와 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가 가출을 했다. 언니네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고, 엄마에게 “계모라서 애한테 너무 신경 안 쓴 거 아니냐고” 모진 소리를 하고 갔다. 살기 바빠서 내 새끼고 남의 새끼고 간에 건사하지 못한 건 맞지만, 본인 또래의 여자에게 계모소리 들은 것을 엄마는 분해했다. “지가 뭐라고!” 언니는 가출청소년이 되었고, 우리 집은 문제아가 있는 문제 가정이 되었다. 당시는 밤 9시만 되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청소년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라는 ‘계몽적’ 멘트가 나왔던 시절이다. 뉴스에서는 ‘문제 청소년은 문제 가정에서 나온다’는 캠페인을 자주 내보냈다. 나는 우리 집의 문제가 걱정스러웠지만, 그것보다는 이걸 사람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우선이었다.     언니의 가출은 계모 때문일까? 아니라고는 말 못 한다. 그러나 언니네 담임선생님 말고 언니의 가출을 엄마와 연관 지어 생각한 사람은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계모라서가 아니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 언니는 가출했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이다. 가난과 돌봄의 공백은 이어진 문제이고,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언니는 격렬하게 맨몸으로 겪어냈다. 언니의 가출은 두 달 정도 지속되었다. 돌아왔지만 우리와 살지 않고 혼자 사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거기서 학교에 다녔는데, 몇...
    출생의 비밀 잠결에 엄마와 외할머니의 말소리를 들었다. “남의 자식 키우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억울하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곧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잠결이지만 나는 놀랐다. ‘이런 일이 우리 집에? 나에게?’ 나와 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가 가출을 했다. 언니네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고, 엄마에게 “계모라서 애한테 너무 신경 안 쓴 거 아니냐고” 모진 소리를 하고 갔다. 살기 바빠서 내 새끼고 남의 새끼고 간에 건사하지 못한 건 맞지만, 본인 또래의 여자에게 계모소리 들은 것을 엄마는 분해했다. “지가 뭐라고!” 언니는 가출청소년이 되었고, 우리 집은 문제아가 있는 문제 가정이 되었다. 당시는 밤 9시만 되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청소년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라는 ‘계몽적’ 멘트가 나왔던 시절이다. 뉴스에서는 ‘문제 청소년은 문제 가정에서 나온다’는 캠페인을 자주 내보냈다. 나는 우리 집의 문제가 걱정스러웠지만, 그것보다는 이걸 사람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우선이었다.     언니의 가출은 계모 때문일까? 아니라고는 말 못 한다. 그러나 언니네 담임선생님 말고 언니의 가출을 엄마와 연관 지어 생각한 사람은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계모라서가 아니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 언니는 가출했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이다. 가난과 돌봄의 공백은 이어진 문제이고,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언니는 격렬하게 맨몸으로 겪어냈다. 언니의 가출은 두 달 정도 지속되었다. 돌아왔지만 우리와 살지 않고 혼자 사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거기서 학교에 다녔는데, 몇...
겸목 2023.08.29 조회 100
먼불빛의 웰컴 투 60
      내가 아니 에르노의 책과 만난 건 작년 2022년이었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그녀의 모든 책이 다시 주목받았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사회학적 글쓰기 방식은 독특했다.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울 정도로 고스란히 글로서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결국 그 사회의 젠더 문제,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 고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정면으로. 나는 그녀의 이름도 생경했고, 글도 낯설었고, 문장도, 읽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뜻밖에도 아니 에르노와 닮기도 한, 다르기도 한 내가 보였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고, 게시하고, 함께 공감하는 시대다. 그렇지만, 자기 이야기를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늘 부정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그것이 내밀한 이야기라면 더욱더 분명한 목적과 자기 사명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쓸 수 있는 용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사회적 해석과 만나 더 많은 보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너무나 관습화된 몸, 인식, 타인에 대한 의식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글을 만들게 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내가 아니 에르노의 책과 만난 건 작년 2022년이었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그녀의 모든 책이 다시 주목받았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사회학적 글쓰기 방식은 독특했다.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울 정도로 고스란히 글로서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결국 그 사회의 젠더 문제,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 고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정면으로. 나는 그녀의 이름도 생경했고, 글도 낯설었고, 문장도, 읽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뜻밖에도 아니 에르노와 닮기도 한, 다르기도 한 내가 보였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고, 게시하고, 함께 공감하는 시대다. 그렇지만, 자기 이야기를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늘 부정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그것이 내밀한 이야기라면 더욱더 분명한 목적과 자기 사명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쓸 수 있는 용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사회적 해석과 만나 더 많은 보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너무나 관습화된 몸, 인식, 타인에 대한 의식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글을 만들게 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먼불빛 2023.08.24 조회 215
인문약방 에세이
    ‘품위’ 있는 학교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기     모로       초등학교 4학년인 나의 아들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다. 고기능 자폐라고도 부른다. 인지나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으나 사회성만 떨어지는 경우다. 거기에 상위 1%의 지능을 가진 영재이기도 하고, ADHD가 있고, 간혹 틱도 보인다. 이렇게 동시에 두 개의 특성을 가진 것을 2E(twice exceptional)라고도 하는데, 두 번의 예외라는 뜻이다. 2E들은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영재 집단에서는 비슷한 관심사를 만날 수 있지만, 소통이 잘되지 않는다. 장애 집단에서의 반복적인 행동 수정 교육은 흥미를 떨어트린다. 아이들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커서, 자랄수록 정신적인 문제가 두드러진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유치원 시절부터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난관의 연속이었다. 학교를 빠지는 건 기본, 단체 운동이나 학원은 다녀보지도 못했다.   학기 초에 공개수업을 했는데, 교실에서 만난 아이는 내 걱정보다 많이 자라있었다. 물론 수업 중간에 큰 소리로 “엄마 왔어?” 인사를 하고, 심지어 뭔가를 보여주겠다며 뒤에 서 있는 나에게 걸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지시하는 것을 수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나의 눈에 띄는 것은 반 친구들의 태도였다. 아들은 다행히 여러 가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복이 있다. 쉬는 시간에도 몇몇 아이들이 몰려와 이것저것 말을 걸어주고, 대답을 안 하는 아들을 위해 서로 주고받는 손 하트를 날렸다.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별로 구성된 팀원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양 우리 아이를 전담 마크하고 있었고,...
    ‘품위’ 있는 학교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기     모로       초등학교 4학년인 나의 아들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다. 고기능 자폐라고도 부른다. 인지나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으나 사회성만 떨어지는 경우다. 거기에 상위 1%의 지능을 가진 영재이기도 하고, ADHD가 있고, 간혹 틱도 보인다. 이렇게 동시에 두 개의 특성을 가진 것을 2E(twice exceptional)라고도 하는데, 두 번의 예외라는 뜻이다. 2E들은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영재 집단에서는 비슷한 관심사를 만날 수 있지만, 소통이 잘되지 않는다. 장애 집단에서의 반복적인 행동 수정 교육은 흥미를 떨어트린다. 아이들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커서, 자랄수록 정신적인 문제가 두드러진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유치원 시절부터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난관의 연속이었다. 학교를 빠지는 건 기본, 단체 운동이나 학원은 다녀보지도 못했다.   학기 초에 공개수업을 했는데, 교실에서 만난 아이는 내 걱정보다 많이 자라있었다. 물론 수업 중간에 큰 소리로 “엄마 왔어?” 인사를 하고, 심지어 뭔가를 보여주겠다며 뒤에 서 있는 나에게 걸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지시하는 것을 수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나의 눈에 띄는 것은 반 친구들의 태도였다. 아들은 다행히 여러 가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복이 있다. 쉬는 시간에도 몇몇 아이들이 몰려와 이것저것 말을 걸어주고, 대답을 안 하는 아들을 위해 서로 주고받는 손 하트를 날렸다.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별로 구성된 팀원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양 우리 아이를 전담 마크하고 있었고,...
문탁 2023.07.20 조회 178
인문약방 에세이
      좋은 삶을 위한 ‘정치’가 바로 ‘정의’이다   둥글레     인문학을 공부하며 친구들과 공동체적 삶을 도모하고 가끔이지만 연대하며 살고 있다. 그럭저럭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미나에서 읽는 책들이 늘어날수록 내 삶이 안이하게 느껴진다. 나의 ‘그럭저럭 좋은 삶’은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구성이 되었을까? 나는 전문직을 가진 이성애 비혼 여성 한국인이다. 중산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빈곤층도 아니다. 비노인이며 비장애인이다. 나의 사회적 정체성은 비혼 여성으로 차별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지만 전문직 이성애 비장애인 비노인 한국인으로 차별을 하는 쪽에도 서 있다. 차별을 받는 쪽에만 있었다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반대쪽의 삶의 지분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생각은 『동자동 사람들』(2021, 빨간소금)을 읽고 뼈아프게 다가왔다. 작가는 “사회 전체가 누리는 행복과 물질적 풍요는 사회의 한구석에 버려진 채 가난, 고통, 질병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자동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버려졌다고 결론 내린다. 작가는 그들에게 개입된 돌봄들(주로 복지나 자원봉사 형태)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사회적 버려짐’에서 찾는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차이의 정치와 정의』(2017, 모티브북)에서 천착한 정의(justice)와 정치의 문제도 『동자동 사람들』에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결이 같다. 그녀는 분배적 패러다임에 묶인 정의를 그 너머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정의의 조건이자 요소로 민주주의(정치)의 쇄신을 제안한다.     동자동 쪽방촌         분배 패러다임이 놓치고 있는 구조적 부정의   기존의 정의 담론을...
      좋은 삶을 위한 ‘정치’가 바로 ‘정의’이다   둥글레     인문학을 공부하며 친구들과 공동체적 삶을 도모하고 가끔이지만 연대하며 살고 있다. 그럭저럭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미나에서 읽는 책들이 늘어날수록 내 삶이 안이하게 느껴진다. 나의 ‘그럭저럭 좋은 삶’은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구성이 되었을까? 나는 전문직을 가진 이성애 비혼 여성 한국인이다. 중산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빈곤층도 아니다. 비노인이며 비장애인이다. 나의 사회적 정체성은 비혼 여성으로 차별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지만 전문직 이성애 비장애인 비노인 한국인으로 차별을 하는 쪽에도 서 있다. 차별을 받는 쪽에만 있었다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반대쪽의 삶의 지분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생각은 『동자동 사람들』(2021, 빨간소금)을 읽고 뼈아프게 다가왔다. 작가는 “사회 전체가 누리는 행복과 물질적 풍요는 사회의 한구석에 버려진 채 가난, 고통, 질병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자동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버려졌다고 결론 내린다. 작가는 그들에게 개입된 돌봄들(주로 복지나 자원봉사 형태)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사회적 버려짐’에서 찾는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차이의 정치와 정의』(2017, 모티브북)에서 천착한 정의(justice)와 정치의 문제도 『동자동 사람들』에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결이 같다. 그녀는 분배적 패러다임에 묶인 정의를 그 너머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정의의 조건이자 요소로 민주주의(정치)의 쇄신을 제안한다.     동자동 쪽방촌         분배 패러다임이 놓치고 있는 구조적 부정의   기존의 정의 담론을...
문탁 2023.07.20 조회 70
인문약방 에세이
      나의 곤경노트 - 법이 폭력이라고?   무사     법이 무사 폭력이우까?!   폭력을 응징하는 법이 폭력이라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람.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폭력을 휘둘러 왔다는 말이야? 나는 강하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18년 전 기억을 소환했다. 2005년 가을이었고, 입대한 지 3년차였다. 관할 지역 남성 지휘관이 여성 장교를 강제추행한 사건이었다. 나는 수사과정에서 피해자 조사 입회 임무를 맡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뭐라도 해주려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그 후배는 물었다. “선배가 여기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날돕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냐” 고. 나는 조사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2차 피해를 막고 있다고 답했다. 가해자는 처벌되었고, 후배는 전역했다. 그리고 다른 유사한 사건들에 치어 나는 곧 이 일을 잊었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타인에 대하여 부당하거나 불법한 방법으로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법에 따른 힘의 행사(체포, 구속, 사형 등)나 법이 허용한 힘의 행사(정당방위 등)는 법질서를 위반하는 폭력에 대한 합법적인 억압에 해당한다.(<법률학 사전>, ‘폭력’ 편) 이처럼 법과 폭력은 완전히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알고 있던 나로서는 법과 폭력이 별개가 아니라고 말하는 버틀러의 주장 앞에 멈칫했다. 내가 수 십 년간 공부하고 다뤄 왔던 법에는 나름 양심이 있고, 일부 감정도 있다고 믿어 왔다. 피해 전부를 보상 받거나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지는 못하더라도 법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경우도 많았다. 법은 단순히 법전 안의 글자만은 아니다. 판결문에 자주 등장하는 ‘일반인의 법감정’이나 판사가...
      나의 곤경노트 - 법이 폭력이라고?   무사     법이 무사 폭력이우까?!   폭력을 응징하는 법이 폭력이라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람.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폭력을 휘둘러 왔다는 말이야? 나는 강하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18년 전 기억을 소환했다. 2005년 가을이었고, 입대한 지 3년차였다. 관할 지역 남성 지휘관이 여성 장교를 강제추행한 사건이었다. 나는 수사과정에서 피해자 조사 입회 임무를 맡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뭐라도 해주려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그 후배는 물었다. “선배가 여기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날돕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냐” 고. 나는 조사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2차 피해를 막고 있다고 답했다. 가해자는 처벌되었고, 후배는 전역했다. 그리고 다른 유사한 사건들에 치어 나는 곧 이 일을 잊었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타인에 대하여 부당하거나 불법한 방법으로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법에 따른 힘의 행사(체포, 구속, 사형 등)나 법이 허용한 힘의 행사(정당방위 등)는 법질서를 위반하는 폭력에 대한 합법적인 억압에 해당한다.(<법률학 사전>, ‘폭력’ 편) 이처럼 법과 폭력은 완전히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알고 있던 나로서는 법과 폭력이 별개가 아니라고 말하는 버틀러의 주장 앞에 멈칫했다. 내가 수 십 년간 공부하고 다뤄 왔던 법에는 나름 양심이 있고, 일부 감정도 있다고 믿어 왔다. 피해 전부를 보상 받거나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지는 못하더라도 법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경우도 많았다. 법은 단순히 법전 안의 글자만은 아니다. 판결문에 자주 등장하는 ‘일반인의 법감정’이나 판사가...
문탁 2023.07.20 조회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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