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시 과제_공무원아파트 17동 303호

당최
2023-03-18 00:55
139

공무원아파트 17303

 

1980년대 용산구 동부이촌동에는 공무원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현재 한가람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는 이촌역 근방이다. 아파트는 한 층에 열 호가 있었고, 동에 따라 4층짜리도 있었고 6층짜리도 있었다. 우리 집은 17동 303호였다. 공무원아파트 17동 303호. 이 말은 내가 그리움에 빠지는 주문이다.

두터운 보라색 철제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면 무릎 높이의 툇마루가 나온다. 호마다 대문 모양이 다 달랐다.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나무문도 있고 연두색 대문도 있었다. 우리 집은 유독 튼튼해 보이는 보라색 철제였다. 난 이 문틈에 손가락이 끼어서 한동안 왼손 중지 손톱이 시퍼랬던 적이 있다. 툇마루에 오르기 전 현관 오른편엔 부엌이 있었다. 방에서 부엌에 가는 일은 신발을 신어야 하는 일이었다.

부엌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아궁이가, 오른편에 싱크대와 가스레인지가 있었다. 아궁이에 연탄을 넣고 불을 붙이면 안방 아랫목이 뜨끈뜨끈해졌다. 아궁이 뚜껑을 열어 연탄을 가는 모습은 매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연탄을 갈 때면 난 옆에서 지켜보곤 했다. 부뚜막엔 늘 집기가 가득했다. 하늘색 플라스틱으로 된 건조대도 그곳에 있었다. 아궁이 위로는 안방에 딸린 다락 외벽이 천장까지 육중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 외벽엔 흰색과 하늘색 페인트가 가로로 구획을 나누며 칠해져 있었다. 잎맥처럼 갈라진 페인트 조각들이 낙엽 부스러기처럼 떨어지곤 했다.

싱크대 쪽엔 복도로 통하는 창이 있었다. 창틀을 따라 압정을 박아둔 파란 방충망이 쳐져 있었다. 우리 집은 부엌 문틀에 못을 박아 열쇠를 걸어 두었는데, 이따금 열쇠를 깜빡하고 문을 잠그고 나간 날에는 옆집에서 철사 옷걸이를 빌려와야 했다. 복도에서 그것을 일직선으로 쭉쭉 펴고 방충망을 뜯어 부엌 창 안으로 팔을 뻗으면 문틀에 걸린 열쇠고리가 아슬아슬하게 낚아채지곤 했다. 우리 가족 네 명 다 그렇게 열쇠를 빼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나랑 내 동생은 키가 작아 실패할 때가 많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툇마루에 오르면 방 두 개가 있었다. 오른쪽 방은 엄마 아빠가 쓰는 안방이고, 왼쪽 방은 남동생과 내가 쓰는 작은방이었다. 안방의 노란 옥수수알 무늬 장판은 아랫목만 짙은 갈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부엌과 접해 있는 벽면엔 나무로 된 미닫이문 두 짝이 있는 다락이 있었다. 그 안엔 옷가지를 넣는 3단짜리 서랍장 하나가 들어가고도 아이 한 명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었다. 몸이 작을 땐 다락문을 열어놓고 서랍장 옆 공간에 들어가 놀곤 했다.

창을 떼어버린 베란다엔 낮고 긴 TV장과 브라운관 TV가 있었고 주위로 화분이 그득했다. 조그만 집이었지만 베란다는 바닥 장판까지 유독 푸르렀다. 나는 화분 사이의 빈틈을 딛고 올라가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그 창으로 장독을 묻어놓은 화단도 보이고, 아파트 앞마당에서 노는 애들도 보이고, 맞은편 18동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보였다. 고개를 좀 빼면 우리가 늘 놀던 파출소 뒤편 놀이터와, 놀이터 안에 제단 같이 생긴 돌계단 언덕과, 그 중턱에 붙박은 우람한 느티나무도 보였다.

작은방엔 동생과 내 책상이 있었다. 우린 널찍한 바닥에 이부자리를 펴고 함께 자다가 언제부턴가 이층침대가 들어오며 잠자리가 분리되었다. 이층침대가 들어오니 넓어 보이던 방이 꽉 찼다. 나는 일층, 동생은 이층에서 잤는데, 난 해져서 실오라기가 늘어진 시커먼 천을 바라보며 잠들곤 했다. 한번은 동생이 자다가 난간 위로 몸이 넘어가 바닥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엄마, 아빠는 식겁해서 동생을 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머리를 부딪쳐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침대 밑엔 레고나 마루인형 같은 장난감을 넣어둔 상자가 있었다. 우린 침대 밑으로 손을 뻗어 꺼내서 가지고 놀다 다시 침대 밑으로 집어넣곤 했다.

화장실은 현관 왼편, 툇마루를 두고 작은방과 마주한 자리에 있었다. 화장실 안엔 거대한 세탁기와 드럼통만 한 갈색 다라가 벽면을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늘 그 다라에 물을 가득 받아놓고 바가지로 퍼서 몸에 끼얹으며 씻었다. 그땐 샤워기가 없고 수도꼭지만 있었는데, 수도꼭지에 늘 짤뚱한 호스가 끼워져 있었다. 그 아래 자기 자리라는 듯 세숫대야가 있었다. 쪽창이 복도 쪽으로 나 있어서 언제부턴가 난 그 창을 의식하며 씻곤 했다.

여름이면 대문을 열어놓고 복도에 돗자리를 깔고 놀았다. 대문을 늘상 열어두었기 때문에 항상 발이 쳐있었다. 때때로 엄마, 아빠가 집을 비울 때면 동사무소 건너 21동에 사는 친할아버지가 와서 우리를 봐주곤 했다. 할아버지는 동네 산보를 자주 했는데, 17동을 지날 땐 아빠 차를 들여다보며 계기판의 주행거리를 확인하곤 어제 아빠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추측했다. 할아버지의 일상이었다.

우리 가족은 일요일 아침마다 만화영화를 틀어놓고 라면을 먹었다. 8살인가 9살 때 한번은 평일에 라면이 먹고 싶어서 할아버지랑 둘이 있을 때 라면 끓이기를 시도했다. 엄마가 하던 대로 잘 따라한 것 같은데 냄비가 진죽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아서라 말렸지만 난 신경질이 나서 고집을 피우며 물을 더 붓고 다시 끓였다. 할아버지는 손을 뗐고 라면은 더 엉망진창 진죽이 되었다. 그걸 결국 먹었던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난 좀 울고 싶었다.

17동엔 엄지, 대희, 준희, 규임이, 규상이 오빠가, 18동엔 대호, 래미, 용천이, 용선이 오빠가 살았다. 17동과 18동 사이 화단엔 피처럼 붉은 덩굴장미가 피었다. 덩굴장미 아래엔 가가호호 묻어둔 김치독이 있었다. 철근을 반원 패턴으로 박아둔 펜스에 앉아있자면 금세 엉덩이가 아파왔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에서 세발, 네발 자전거부터 두발 자전거까지 다 떼었다. 무릎과 정강이는 멍과 딱지로 얼룩져 있어야 마땅했던 그 시절—

그 시절 옆집 304호엔 우유배달을 하던 진원이 아줌마가 있었다.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20대 어느 날 한가람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아줌마를 마주쳤다. 아줌마는 그때도 우유배달을 하고 있었다. “미라니? 어유, 많이 컸네. 진원이는 지금 어디어디 다닌다. 우유요!” 그때처럼 가난하고 누추해 보이는, 그러나 바위처럼 단단해보이던 진원이 아줌마. 돌이켜보면 그게 내가 목격한, 최후까지 남아있던 공무원아파트의 마지막 풍경이었다.

 

댓글 2
  • 2023-03-18 18:44

    그 무렵 저도 거기 어디서 1년 정도 살았는데, 거기가 그런 곳이었군요.
    같은 공간이라도 누구에겐가는 그리움의 주문이 되고
    누구에겐가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장소도 되는구나, 싶습니다.

    덕분에 돌아보기도 싫었던 그 시절, 칙칙했던 그 장소가
    조금은 색채가 좋아지고 밝아졌습니다.
    붉은 덩굴장미도 기억 났어요.
    김치독은 모르겠고....

    따뜻한 유년 시절을 보내신 거, 부럽습니다. ^^

  • 2023-03-19 19:38

    영화 <벌새>가 생각나고, 서정주 시인의 시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가 떠오르며 세세한 묘사가 돋보였습니다.
    당최님의 이번 '그리움의 디테일'을 살리는 목표는 달성하셨으니, 분량의 제약으로 하려다 만 다음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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