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사람 낳고 돈 나왔지, 돈 낳고 사람 나왔나

가마솥
2023-09-0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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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고등학교 때, 한문 선생님은 대학에 들어가면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꼭 읽어 보라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말씀하셨다. 학교가 전두환 일당들에게 강제휴교를 당했을 때, 도서관에서 『사기』를 대출해서 고향에 내려가서 펼쳐 보았다. 아뿔사! 한자 원문이었다. 아마도 본기(本紀)쯤 되었나 보다. 그냥 중국 역사책이다. 몇 페이지 읽어 보다가 덮었다. 급변하는 이 시기에 한가로이 지금 중국 역사를 읽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게 멀어진 『사기』를 문탁 고전읽기 모임에서 열전(列傳)으로 다시 만났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하! 이래서 『사기』를 읽으라고 하셨구나’, 지우기가 아까울 정도로 멋지게 판서(板書)하셨던 선생님 모습을 열전 속에서 떠올렸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사공자(四公子)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있다.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이 그들이다. 이 들은 수많은 인재들을 모아 자신의 식객(食客)으로 후하게 대접하며, 자신의 나라를 위하여 그 들의 식견을 취하며 경쟁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기』에 소개된 많은 식객들 이야기는 여기 저기서 들은 바가 있어서 익숙한데, 뜻밖의 발견은 풍환(馮驩)이란 인물이다.

 

풍환(馮驩)

 

    맹상군의 식객 중 풍환(馮驩)은 전국책(戰國策) 제책편(齊策篇)에서는 ‘풍훤(馮諼)’으로 나와 있다. 맹상군의 지략가 중 으뜸인 풍환과 관련된 유명한 고사는 세 가지이다. 수 천명의 식객 중 하나인 자기를 불러 의견을 묻지 않는 맹상군에게, 수시로 “긴 칼아! 제자리로 돌아 가자”고 외쳤던 ‘장협귀래호(長鋏歸來乎)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라고 요구하는 말’로 쓰인다. 또, 자신의 능력에 걸맞지 않은 대접이라며, 자신에게 고기반찬, 수레 제공을 요구한 ‘거어지탄(車魚之歎)’은 ‘끝없는 욕심’의 대명사로 쓰인다. 많이 회자되는 사자성어는 ‘교토삼굴(狡兎三窟)’인데, ‘토끼는 항상 세 개의 굴을 파서 위험을 대비한다’는 경구이다. 『전국책』 제책편에서는 맹상군이 수십 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작은 재앙조차 당하지 않은 것은 모두 풍환의 계책이었다고 하였고, 사마천은 『사기』 권75 맹상군(孟嘗君) 열전(列傳)에서 이를 상세히 소개한다. 나는 그의 지략보다는 그의 인물됨을 소개하는 에피소드 중에서, ‘빚문서 소각‘사례에 눈이 번쩍 뜨였다.

 

    맹상군은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설(薛) 땅 1만호에 봉해졌다. 그 식객이 3천에 이르렀기 때문에 봉읍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는 식객을 보살피기 부족하여, 설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게 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수입이 없었다. 설 땅의 수확이 좋지 않아 돈을 빌려간 사람 대부분이 이자조차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맹상군이 하릴없이 놀고 먹는 풍환을 찾아 이자를 받아 올 일을 요청한다. 이에 풍환은 설 땅에 가서 그들에게서 10만 전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술과 살찐 소를 사서 돈을 빌려간 사람을 다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다. 술이 돌자 이전의 차용증을 모아 보고는 이자를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기한을 정해주고, 가난하여 이자를 낼 수 없는 사람의 차용증은 거두어 불태웠다.

맹상군은 풍환이 차용증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화가 나서 풍환을 불러들인 뒤, 사실관계와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풍환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소를 잡고 술을 많이 차리지 않으면 다 모을 수가 없는 일이고, 그러면 여유가 있는지 부족한지를 모르게 됩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기한을 정해주면 되지만, 부족한 사람은 10년 기한을 주어도 이자만 늘고, 급하면 도망쳐 증서를 버릴 것입니다. 급해지면 어떻게 해도 갚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위로는 당신은 이익만 밝히고 백성은 아끼지 않는 것이 되고, 아래로는 주인의 빚을 갚지 못해 도망가는 꼴이 되니, 이는 인재와 백성을 격려하고 당신의 명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차용증을 불태워 받을 수 없는 헛된 돈을 버림으로써 설 땅의 백성들을 당신과 가깝게 하고 당신의 좋은 명성을 드러낸 것인데, 군(君)께서는 어찌 의심하십니까?”

 

어차피 갚지 못할 빚증서로 닦달해보았자 도망가서 증서를 버리면, 빚도 못 받고 노동력도 상실할 상황이니, 쓸모없는 빚증서를 가지고 당신의 명성(전국책에서는 ‘義’)을 사왔다는 이야기이다. 맹상군은 바로 손뼉을 치며 풍환에게 감사했다.

 

 

 

5억원으로 8,100억원의 빚을 갚는다.

 

    10여년 전에 성남에서 중소기업 지원 일을 할 때이다. 중소기업 대표로부터 몇 번의 사업고비에 대한 경험담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정부의 서민의 채무지원 정책 혜택을 입어서 재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채권 추심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경우, 은행은 그 대출금을 회수할 권리인 ‘채권(債權)’을 가지게 되고 그 금액을 표시한 유가증권이 ‘채권(債券)’이다. 이제 빚을 낸 채무자가 일정기간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할 경우에, 은행은 그 채권을 평가하여 장부에서 떨어 낸다. 왜냐하면, 받을 돈(채권)이 많아 장부상(대차대조표)으로는 매우 좋은 은행으로 표시되나, 실제로는 수금하지 못하는 (부실)채권이 많이 쌓여 있어 은행부실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방법은 그 채권의 원래 가격을 깎아서(할인하여) 하위 금융권으로 매각한다. 이 하위 금융권으로 서너 단계만 걸치면 그 가격이 원금의 1% ~ 10% 가격으로 뚝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채무자는 금융계에서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이 자본주의 하에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못하게 되고, 그 채권을 사서 소각하지 않는 한, 전문 채권추심업체가 나서서 채무자를 닦달하는 근거가 된다. 추심업체가 구입한 가격은 채권액이 소액일수록 싼 가격이었는데, 1% 미만의 것도 있었다.

     기업 대표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펼쳤다. 1년간 고생하며 모은 성금이 약 2억원 가량 되었다. 그 돈으로 부실 채권 소각액으로는 106억원, 구제 인원은 1,072명에 이르는 성과를 보았다. 이제야 통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펑펑 울던 아주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공감할 수 있었다. 많은 것이 디지털화 되어가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모든 것을 현금으로만 거래해야 하는 생활 말이다. 그녀가 빌린 원금은 500만원이었고, 채권의 매매가격은 12만원이었다. 좀더 지속적인 사업을 위하여 OO시(市) 사업으로 옮겼다. 공적인 기관에서 운영하면 더 많은 기부금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무원들의 불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실, 기부와 뇌물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이럴 때 따지는 것이 법적 근거인데, 있을 리 만무하다. 할 수 없이 민간단체인 롤링 주빌리 은행으로 사업을 옮겼고, 그들의 홈피 현황판에는 현재까지 5억여원의 성금으로 8,100억의 빚을 갚아 51,500 여명이 혜택을 보았다고 게시되어 있다.

 

 

    풍환의 고사에서 현대판 롤링 주빌리 은행을 보았고, 2,500여년 전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그런데, 가만. 그 당시에도 돈이 돈을 버는 대부업이 있었고, 이자 개념이 있었나?

 

 

 

대출, 이자개념은 언제부터?

 

   가장 오래된 대출과 이자에 대한 법률은 기원전 1,800년전의 함무라비 법전이 최초이다. 기원전 3,000년경의 수메르 시대에 있었던 이자 관습을, “보리 대출에 대한 관습 이자율은 연 33.33%이고, 은에 대한 관습 이자율은 연 20%”라고 법제화 하였다. 금융의 역사를 보면, 역사시대 초기부터 상호 합의한 수준의 이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빌려주는 생산적 대출 행위가 있었다고 한다. 선의에 따라 비생산적인 물품을 이자 없이 빌려주는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오래 전부터 '이자가 있는 생산적 대출'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것이 화폐의 발달과 더불어 오늘날과 유사한 '이자가 있는 비생산적 대출' 형태로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사기』에 나와 있는 고대 중국의 이자개념, ‘식(息)’에는 돈만 빌려주고 이자만 받는(예 : 맹상군) 현대식 이자개념도 있지만, 화식열전(貨殖列傳)의 무염씨(無鹽氏) 사례처럼 아무도 대부해주려 하지 않는 위험한 대출에 10배의 식(息)을 받는 투자 개념도 있다. 욕심많은 대출(貪賈三之)에는 33.33%, 염치있는 대출(廉賈五之)에는 20%로써 함부라비 법전의 이자조항과 비슷하다. 고대의 통상 이자율을 엿볼 수 있는, 우연치고는 재미있는 비율이다.

 

 

 

 

금융의 순기능과 그 이상을 위하여

 

    금융은 원래 물건(곡식, 씨앗)을 빌려주고(대출) 일정기간 후에 원금에 일정부분 추가된 량으로 갚는 ‘이자가 있는 생산적 대출’에서 시작하였다. 화폐의 등장으로 자금의 흐름이 신속하고 원활한 세상이 되자 ‘이자가 있는 비생산적 대출’이 생겨났고, 현대에는 이런 형태가 금융의 전유물이 되었다. 사마천이 토지와 인력이 경제의 근본인 고대 중국의 경제체계에서-당시의 많은 사상가와 다르게-상공업이 가진 재생산 가치(재화의 유통측면)를 인정한 것처럼, 금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화의 생산에 기여하는 필수적인 서비스임에 틀림없다.

또한 금융의 역사는 그 본래 기능을 넘어서, 인류역사 속의 흥망성쇠에 대한 보이지 않은 손으로 작용하곤 하였다. 표면화된 수많은 전쟁의 물밑에는 금융이 흐르고 있었으며, 금융은 르네상스를 이끈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을 만들기도 하고, 리먼 브라더스의 Subprime Mortgage Loan 사태를 만들어 전 세계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 뜨리기도 한다. 인간의 무한한 욕심이 금융의 본래 기능을 잃게 하고 이자로부터 파생된 위험을 폭증시킨 것이 사태의 본질이다.

 

    20세기 들어 현대금융의 어두운 그림자, 이자지급 방식에 대한 재검토가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났다. 즉,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Shariah)'에는 대출에 대한 이자(Riba)의 수취를 부당 이득으로 간주하고 있다. 더 분명하게 기술하면, 사업의 성패와 관계없이 받게 되는 현대 금융 시스템의 ‘확정수익(prefixed Return)’을 금지한다. 글로벌시대에 다른 나라와도 연계되어야 하니, 다양한 대안 모델들이 만들어졌다. 즉, 단순 대출에 대한 이자취득이 아닌, 파트너십 형태의 신탁인 ‘무다라바’ 서비스 등이 그것이다. 1975년, 두바이 이슬람 은행과 이슬람 개발은행이 설립되어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서구의 많은 은행들이 이슬람권의 금융사업을 위하여 ‘무라바하’, ‘무샤라카’, ‘사르프’ 등등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로써 동참하고 있는데, 기본 사상은 파트너쉽 형태의 투자 혹은 운용신탁으로 이익과 손해에 대해 대출자와 동등한 책임을 지는 공동책임 형태이다.

     또 다른 금융형태는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 총재인 무함마드 유누스에 의해 개발된 빈민 구제 방식인 ‘마이크로 크레딧’이 있다. 그는 능력도 아이디어도 있는데 돈이 없어서 잡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태반인 시골 빈민들에게, 금융으로 가난을 극복하는 빈민구제 기능을 수행하게 한다. 즉, 빈민들에게 소규모 사업 자금을 무이자 무담보로 지급한다. 다만, 완전한 무이자가 아니다. 정해진 이자로 상한선을 긋고, 이자를 낼 수 없는 첫 거래자는 제외한다. 이 정도도 엄청난 제안인 것이, 방글라데시 서민들이 어쩔 수 없이 쓰는 사채업자의 이자는 50~70% 이상에 심지어 90%가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라민 은행의 이자는 10% 남짓이다.

이러한 서민구제 금융이 20년 동안 운영되면서 얻는 효과를 보면서, 다른 은행들도 이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와 함께 사업이 확장되고 난립하기 시작한 일부 마이크로 크레디트 단체들이 고리대금업을 마이크로크레디트로 포장하기도 하는 부작용도 생겼다. 유누스는 아직은 더 많이 노력하고 고쳐야한다면서 일부 밖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 일부가 500만명을 헤아린다. 무엇보다도 ‘금융으로 빈민을 만드는 서구의 첨단 자본주의와 다르게, ‘금융으로 빈민을 구제한다는 정신과 그 실례를 만든 것은 실패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상이 이슬람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한국의 마이크로크레디트(미소금융)는 민간 주도로 2000년부터 처음 시도되었다. 이를 시도한 단체가 정식 금융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출만 시행하며, 자본금은 국가·기업으로부터 기존 빈곤층 창업지원 사업을 위탁받는 방식으로 받거나, 개인들한테 기부금을 받아 마련하고 있다. 사회연대은행, 신나는 조합, 아름다운 세상 기금(아름다운 세상 재단), 사회복지은행 등이 한국의 민간 마이크로크레디트를 담당하고 있다.

 

   전 세계가 엮여있는 거시 경제차원의 건전한 금융정책은 정부가 할 일이고, 나는 ‘풍환’이 일깨워 준 서민 경제에서 일어나는 금융의 어두운 그림자에 햇볕이 들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첫째, 은행은 금융 본연의 기능, 재화의 생산력 증진을 위한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담보물에 대한 확정금리로 대출해 주는 정도의 기능이 아니라, 투자형 대출위주의 기능을 하여야 한다. 채무자의 손익을 함께 가져가는 것이다. 손해 보지 않으려면 대출이후에도 적극 지원해야 한다.

둘째, 금리의 차등지원이다. 즉, 투자형 대출에는 상호 협의에 의해서 이자율을 정하겠지만, 생계형 지원에는 일정 금리 이하를 적용하는 것이다. 貪賈三之는 33.33%, 廉賈五之는 20% 정신으로, 소액의 경우에는 더욱 낮은 금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은행은 투자형 상품에서 돈을 벌어서 ‘이자있는 비생산형 대출’에는 아주 낮은 금리를 적용하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예대마진(預貸margin : 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이)로 앉아서 이익을 보는 제한적인 기능에서 벋어나야 한다. 사실, IMF 때 부도난 시중은행을 살려 놓은 것은 국민의 세금, 시민들의 돈이 아니었나?

셋째, 평가된 채권 가액이 일정수준 이하(예, 10% 이하?)인 부실채권은 하위 금융기관 혹은 채권추심업체에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소각되어야 한다. 은행도 대손처리하여 비용으로 떨어 버리면 당기순이익이 줄어들어 세금이 줄어든다. 회생된 채무자가 정상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하면 개인의 행복을 물론 사회적으로도 이득이다. 특히, 소액 대출 후 연체비용이 급증하여 파산을 맛보고 있는 청년 대출자들에게는 일정 조건으로 그 빚을 탕감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문탁의 ‘무진장’은 투자 부분이 없지만 앞서가는 금융이다. 마르지 않게 잘 살려 보자.

 

댓글 2
  • 2023-09-06 11:45

    주빌리은행을 방문해서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지요. 그때만 해도 그게 그렇게 혁신적인 것인지 몰랐는데, 가마솥샘의 글이 기억을 되살려 주셨네요. 화폐에 대한 책을 모아 읽던 2015, 6년쯤에 이자야말로 화폐의 악마성을 보여준다고 공분했던 기억도 나구요....사기에서 함무라비 법전으로 현대판 주빌리은행으로, 미소금융으로 종횡무진하며 돈이야기를 이리 깔끔하게 정리해주신 가마솥샘 멋지심!!!!

  • 2023-09-16 09:14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 그 첫 5000년' 제목 아래 이렇게 씌여 있다.
    '세상에 돈이 있기 전에 거기에 부채가 있었다'
    책 표지를 넘기면
    일단 프롤로그.. 제목은 '당신은 빚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제가 밑줄 친 몇 줄을 적어 보면...
    *성경의 희년禧年 정신을 따르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부채란 반드시 상환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바로 그 문제이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거예요" 이는 경제적 진술이 아니다 도덕적 진술이다.
    *부채는 왜 생기는가? 소비자 부채는 우리 경제의 피다.
    *부채의 파워는 우리가 부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과 부채라는 개념 자체의 유연성에 있다.
    폭력에 근거한 관계들을 정당화 하고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그 관계들을 부채의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채를 바탕으로 할 경우 폭력의 희생자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저는 예전부터 금융을 상품이라고 하는 말이 이상했어요
    왜 금융을 상품이라고 하지?
    그런데 금융도 떨이 판매를 한다고 하니 이해가 확~ 되네요.^^ 그것도 2차, 3차로
    추심이라는 말이 이런 때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인간은 부채라는 폭력에 반대 급부로 잘살기 위한 생각으로 희년처럼 탕감의 실천도 발명했나 봅니다.
    풍환이나 주빌리은행처럼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희년:그리스도교에서 罪를 赦하여 주는 해

인문약방 에세이
  수치로 되돌아가다   모퉁이       나는 사실 그 사람들과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227쪽)   나의 부모는 18세에 나를 낳았다. 나는 실수로 태어난 미운 오리 새끼였다. 아주 어려서부터도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서 우아하게 저들을 떠나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삼십 년도 더 걸렸다. 어려서 이미 그들이 얼마나 철없고 부모 역할에 부적합한지를 알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그들의 무지와 폭력으로부터 나와 동생들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서른이 될 때까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그들의 대책 없는 생활을 뒤치다꺼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혼을 하는 내가 수치스럽다고 했고(본인들도 이혼했다.) 아이를 줘버리라고 너무도 쉽게 충고했다. 그제야 그들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지를 알게 됐고, 그 길로 그들을 떠나서 가족과 단절했다. 그렇게 폭력과 무지, 염치가 없고 수치도 모르는 그들을 경멸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내가 선택한 삶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모든 게 평안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죄책감과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나를 둘러싼 작은 사회에는 나처럼 단절 혹은 탈주를 감행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에게 나는 별종이거나 독한 사람일 뿐. 그래서일까 염치가 없고, 수치를 모르는 그들을 정말 오랜 시간의 망설임과 주저함 끝에 힘겹게 떠나왔지만, 설거지를 하고, 운전을 하고, 샤워를 하는 동안 그들과 매일 무수히 맞닥뜨렸다. 그들은 맏딸로서 책임감을 저버린 나를 비난했고, 혼자만 살겠다고 뛰쳐나갔다면서 힐난했다. 내가 그들을 떠나서 얻어낸 평안함과 여유 뒤에는 항상 죄책감과 수치심이...
  수치로 되돌아가다   모퉁이       나는 사실 그 사람들과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227쪽)   나의 부모는 18세에 나를 낳았다. 나는 실수로 태어난 미운 오리 새끼였다. 아주 어려서부터도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서 우아하게 저들을 떠나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삼십 년도 더 걸렸다. 어려서 이미 그들이 얼마나 철없고 부모 역할에 부적합한지를 알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그들의 무지와 폭력으로부터 나와 동생들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서른이 될 때까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그들의 대책 없는 생활을 뒤치다꺼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혼을 하는 내가 수치스럽다고 했고(본인들도 이혼했다.) 아이를 줘버리라고 너무도 쉽게 충고했다. 그제야 그들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지를 알게 됐고, 그 길로 그들을 떠나서 가족과 단절했다. 그렇게 폭력과 무지, 염치가 없고 수치도 모르는 그들을 경멸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내가 선택한 삶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모든 게 평안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죄책감과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나를 둘러싼 작은 사회에는 나처럼 단절 혹은 탈주를 감행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에게 나는 별종이거나 독한 사람일 뿐. 그래서일까 염치가 없고, 수치를 모르는 그들을 정말 오랜 시간의 망설임과 주저함 끝에 힘겹게 떠나왔지만, 설거지를 하고, 운전을 하고, 샤워를 하는 동안 그들과 매일 무수히 맞닥뜨렸다. 그들은 맏딸로서 책임감을 저버린 나를 비난했고, 혼자만 살겠다고 뛰쳐나갔다면서 힐난했다. 내가 그들을 떠나서 얻어낸 평안함과 여유 뒤에는 항상 죄책감과 수치심이...
문탁
2023.09.19 | 조회 493
인문약방 에세이
        자기 삶의 연구자 되기 해야     “나이듦과 자기서사”에서 지금껏 네 편의 에세이를 썼다. 인생의 취약한 경험을 서사로 풀어내는 것이 예상대로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확인했다. 존경받는 영성가, 작가, 교육자인 파커 J. 파머는 그를 주기적으로 괴롭혔던 우울증의 경험을 글로 풀어내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우울증을 겪을 때마다 모든 걸 끝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고, 그 경험은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우울증에서 벗어난 후, 숙고 끝에 파머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간 살펴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직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파머는 이 과정이 취약한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일부로 통합시키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강조하는 파머는, 서사가 조언이나 요령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한다. 또 독자들을 주눅 들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훌륭한 서사에는 독자들이 저자를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로 여기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강조한다. 나는 파머가 바람직한 자기 서사의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고 느꼈다.      이러한 파머의 통찰과 들어맞는 두 편의 소수자 서사를 만났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푸코 전기의 작가로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이하 <<랭스>>)와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하 <<실격>>)이다. 나는 취약함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담은 서사들에 공감했고 두 저자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두 책이 소수자 서사의  훌륭한 모델로 다가온 이유는 자기 기술지(autoethnography)라는 독특한 글쓰기 장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로 소수자로 정체화하는 사회 과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자기 기술지는 개인의 경험 (“auto”)에서 출발한다. 그 경험의 사회 정치적 배경 (“ethno”)을 탐구하고, 경험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에 기반하여 자기를 상세히 기술 (“graphy”)한다. 자기 기술지 연구자는 인생의 궤적이 사회 구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살피고, 개념과 이론을 동원하여 서사를 해석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에 대한 앎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나는 두 저자가 자기 기술지라는 글쓰기 형식을 통해 자기 삶에 대한 연구를 어떻게 수행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싶어졌다.            자기 분석은 곧 수치 분석이다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탐구는 개인적인 배제와 차별의 경험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모욕의 경험을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하지 않았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 그 경험을 문제화하였다. 노동자 아들이자 성소수자로서 일상적인 모욕을 겪으면 자란 에리봉은 자연스럽게 게이의 성적 주체화를 연구의 주요 의제로 삼게 되었다. 가족과 고향을 탈주하여 자유로운 게이이자 지식인이 되고 싶었으나, 성적 수치는 그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몸에 새겨진 인장과 같은 것이었다. 떨쳐내기 어려운 성적 수치와 수치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가 에리봉의 지적 탐구의 중심이 되었다.     에리봉은 폭력 가장이자 동성애 혐오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지금껏 외면해 왔던 가난한 노동자 아들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줄곧 본인의 동성애 성향과 아버지 및 노동 계급 문화의 동성애 혐오라는 “고상한” 이유를 들어, 가족과 노동 계급을 떠나야 했다고 설명해 왔었다.  노동자 도시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자란 경험을 반추하는 가운데, 그는 본인이 노동자들의 생활 양식이나 사고 체계에 대해 경멸감과 수치심을 갖고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명민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했음에도 에리봉은 상급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문학, 철학, 예술 등의 교육은 중산층이 전유하는 아비투스(학습된 문화적 성향 쳬계)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고등 학교 과정에서 접하게 된 부르주아의 언어, 교양있는 행동, 상류층 취향의 문화 등은 동급생들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에리봉에겐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다. 그는 무지를 감추기 위해 아는 것처럼 위장하고, 소외감을 반항으로 표출하고, 떄로는 민중 계급의 남성성을 버리고 심미주의자 소년이 되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중산층 아비투스에 대한 체화나 학업에 열중하기 위한 신체적 훈육이 없이 지식인 사회로의 편입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란 걸 체험했다. 프랑스의 상급 학교 교육은 상류층 아이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었기에, 에리봉과 같은 노동 계급의 아이들은 지적인 열망을 갖더라도 그 체계 안에서 배제와 수치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치심이 사회적이고 구조적이라는 에리봉의 분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 자본과 사회 관계 자본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는 구별짓기는 내가 고등 교육에 접근하고자 했을 때, 그리고 지금의 한국 및 미국의 교육 체계에서도 목격할 수 있기 떄문이다. 에리봉은 문화 자본이란 개념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계급적 질서를 설명하는 이론들(아비 투스, 사회 관계 자본, 구조의 평행 이동 등)에 기반하여 본인이 경험한 계급과 불평등을 분석한다. 사회학적 개념들을 장착하여 서사를 해석함으로써 구조 속에 위치한 개인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회학적 자기 탐구는 사회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앎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에리봉이 계급적 수치에 중점을 두었다면, 선천성 골형성부전증을 갖고 태어난 김원영은 <<실격>>에서 몸의 수치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신체적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법과 제도, 사회적 관습, 통념 등에 의해 ‘잘못된 삶’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철저히 논증한다.  에리봉과 구별되는 점은 본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적극적 변론을 펼친 점이다.   저자는 ‘비정상적’ 몸으로 인해 겪는 수치를 자신이 어떻게 다루는지 상세히 기술한다. 모욕적인 언사나 상황에 직면할 때, 그는 좌절감에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하여 말을 더듬지 않는다. 자아를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바로 구분한다. 바라보는 나는 냉철하게 상황 분석을 하고, 보여지는 나는 그 분석에 기반하여 유머 또는 차가운 분노가 담긴 대응을 한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탄 자신을 보고 가여워 하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묻는 이에게 “장애인 할인을 받으려고요”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 방어적 퍼포먼스가 자기 존중과 사회적 존엄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여기서 나아가 수치가 자기 수용이나 존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자신과 비슷한 신체적 장애가 있는 이들과 연대하여 “수평적 정체성” 그룹을 구성한 경험을 소개한다. 그는 휠체어를 탄 친구들과 함께 간지 나는 휠체어 운전법을 연습하였고, 그 작동 기술 자체가 그 그룹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그 경험은 자신들을 정상성이 결여된 존재가 아닌 정상성과 다른 무엇으로 적극적으로 규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가난한 배경에서 성장하여 지식인 또는 전문직 종사자로의 계층 이동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역경을 극복한 성공의 서사 구조에 딱 들어맞지만, 이들의 자기 기술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성공 서사들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치의 경험을 드러내며 ‘벌거벗은’ 채 독자에게 다가선다.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든 경험을 사회 구조 내에서 분석하고, 해석한다.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두 저자가 깊이 있는 자기 이헤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변호사       정체성의 교차가 핵심이다   이 두편의 자기 기술지는 개인적인 경험이 구조의 산물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각 개인에게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정체성의 다양성과 교차성으로 인해 소수자 개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기술지를 통해 에리봉과 김원영은 여러 정체성의 충돌과 교차를 탐구하였다.      <<랭스>>는 자기 탐구가 성적 주체화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기에,  계급적 주체화를 주로 다루었다. 그럼에도에리봉의 서사에는 자신의 계급성 뿐 아니라 성소수자, 지식인,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게이 지식인이 되기 위한 여정은 성적인 자아와 계급적 자아가 충돌 가운데 이뤄진 것이었다. 또 게이로서의 정체성은 동성애 혐오적 노동자 문화와 거리를 두면서 성적 주체화에 대한 탐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에리봉의 서사를 통해 교차된 정체성이 가족(노동자 남성, 노동자 여성 등)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중 나는 에리봉이 명시적으로 기술하지 않은 젠더와 계급의 교차가 인상적이었다. 어머니는 저자의 동성애 성향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반면,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 노동 계급 남성들의 외도나 성적인 유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여성들의 자유 연애와 낙태(외할머니의 경우)는 사회적 낙인과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계급적 배경과 젠더로 인해 남성들이 겪지 않은 성희롱과 성적 대상화를 겪어야 했다. 같은 계급 내에서도 젠더에 따라 특권과 배제가 다르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도 장애와 다른 정체성들의 교차가 개별 장애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계급과 장애가 교차할 때 겪게 되는 모욕적인 상황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장애인들은 적은 액수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 대신 정치인들의  PR을 위해 동원되고 “전시품”으로 취급 받는다. 수치심을 느끼지만 본인들의 위치로 인해 저항이 불가능하다.  장애인의 정체성은 학력과도 밀접하게 교차한다. 이동이 불가능하고 교육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아, 장애인들은 초등 학교조차 다닐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교육에서의 배제로 인해 이들은 자기를 드러낼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자신을 설명할 언어 발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낮은 계급과 무학 또는 저학력의 정체성이 장애와 만날 때, 출발부터 실격당한 인생의 운명에 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에리봉은 최근의 사회 과학 연구와 정치 담론이 특정 정체성의 사회적 인정에 집중함으로써 계급이 간과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정체성 정치에서 놓치기 쉬운 개인적 체험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존재를 하나의 집단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 우리의 복잡한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개인을 특정 정체성의 고정된 주체로 이해하는 것이 불완전한 자기 이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반증해 주었다. 나는 성적인 정체성의 인정에 대한 집중한 나머지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정체성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하여 지금의 나를 구성하였는지 살펴보지 못했다. 내가 겪은 배제와 차별, 그리고 특권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표현되는 나의 독특하고 복잡한 위치성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살필 때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두 책이 보여주듯 자기 기술지는 개인 서사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교차성의 서사는 인간 경험의 보편성에 호소하는 힘 또한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에리봉과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지만  사회 관계 자본과 문화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등 교육에 접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게이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대도시로 탈출한 경험도 유사하다. 난 김원영처럼 선천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란 걸 확신하고 확인 받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김원영이 장애인 이외의 “매력 자원”이 부족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예를 들어, ‘못생겼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 내내 집단 괴롭힘을 당한 명문대 여힉셍)을 본인과 비슷하게 실격당한 처지에 있다고 얘기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맥락이 그 서사 안에서 자연스럽게 엮어게 되는 힘이 있다. 두 저자의 복잡한 서사에 나의 모습이 투사되어 있음을 발견하면서 난 이들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자기 기술지는 ‘나’의 서사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서사로 해석되고 확장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 기술지를 쓸 수 있을까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기술지 작업은 밀도 있는 자기 반성(self-reflection)과 엄격한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수치와 배제를 생산하는 구조와 사회적 질서의 작동 방식을 잘 드러내었다. 동시에 그 질서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의 결합과 충돌 가운데 구성된 나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지난한 자기 연구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역자는 에리봉의 자기 연구의 과정을 자기 발명이라고 불렀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계급이 본인 인생의 변곡점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고, 특히 계급적 수치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살핀 것 자체가 그에겐 자기를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 김원영은 자신을 비롯한 실격당한 이들의 삶이 가치있고 존엄함을 보여주기 위해 변론을 끝까지 밀어 부쳤다. 그의 자기 변호는 논리와 이론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이뤄졌고, 독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논리, 설득력, 당당함을 갖춘 서사는 그가 <<실격>>을 자기 발명의 일환으로 삼았음을 잘 보여준다.    나는 두 소수자의 자기기술지에 공감했고 영감을 받았다. 이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용기, 자기 성찰 능력, 학문적 엄격함, 정교한 자기 기술 능력 등이 글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자와 작가로서 이러한 덕목들을 갖춘 두 사람이 부러웠다. 나와 같이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 자기 기술지를 서사의 장르로 삼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회 과학이나 철학 등에 대한 지적인 토대가 약하다. 개념과 서사를 엮는 학문적 글쓰기에 대한 훈련도 부족하다. 이에 대한 장기간의 밀도 있는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엄격한 의미의 자기 기술지에 접근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두 텍스트로부터  서사를 구성할 때 참조할 수 있는 기준점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 기준은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구조와 결합되어 서술되었는가’, ‘학문적 개념과 이론이 경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가’, ‘개인의 고유한 교차적 정체성이 드러났는가’,  ‘고유성이 보편성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가’ 등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는 길을 천천히 걸어보려 한다      “자기 삶의 연구자”라는 표현은 박노해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자기 기술지는 서사가 중심이기 때문에 이론과 개념어로 점철된 논문에 비하면 일반 독자들의 접근이 비교적  쉽다. 단,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 집단의 이해와 권리에 집중하는 사회운동이다. 자신들의 입장에 매몰되어 타정체성 그룹과의 연대에 무관심하거나 극단적으로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자기 삶의 연구자 되기 해야     “나이듦과 자기서사”에서 지금껏 네 편의 에세이를 썼다. 인생의 취약한 경험을 서사로 풀어내는 것이 예상대로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확인했다. 존경받는 영성가, 작가, 교육자인 파커 J. 파머는 그를 주기적으로 괴롭혔던 우울증의 경험을 글로 풀어내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우울증을 겪을 때마다 모든 걸 끝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고, 그 경험은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우울증에서 벗어난 후, 숙고 끝에 파머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간 살펴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직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파머는 이 과정이 취약한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일부로 통합시키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강조하는 파머는, 서사가 조언이나 요령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한다. 또 독자들을 주눅 들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훌륭한 서사에는 독자들이 저자를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로 여기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강조한다. 나는 파머가 바람직한 자기 서사의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고 느꼈다.      이러한 파머의 통찰과 들어맞는 두 편의 소수자 서사를 만났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푸코 전기의 작가로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이하 <<랭스>>)와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하 <<실격>>)이다. 나는 취약함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담은 서사들에 공감했고 두 저자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두 책이 소수자 서사의  훌륭한 모델로 다가온 이유는 자기 기술지(autoethnography)라는 독특한 글쓰기 장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로 소수자로 정체화하는 사회 과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자기 기술지는 개인의 경험 (“auto”)에서 출발한다. 그 경험의 사회 정치적 배경 (“ethno”)을 탐구하고, 경험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에 기반하여 자기를 상세히 기술 (“graphy”)한다. 자기 기술지 연구자는 인생의 궤적이 사회 구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살피고, 개념과 이론을 동원하여 서사를 해석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에 대한 앎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나는 두 저자가 자기 기술지라는 글쓰기 형식을 통해 자기 삶에 대한 연구를 어떻게 수행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싶어졌다.            자기 분석은 곧 수치 분석이다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탐구는 개인적인 배제와 차별의 경험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모욕의 경험을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하지 않았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 그 경험을 문제화하였다. 노동자 아들이자 성소수자로서 일상적인 모욕을 겪으면 자란 에리봉은 자연스럽게 게이의 성적 주체화를 연구의 주요 의제로 삼게 되었다. 가족과 고향을 탈주하여 자유로운 게이이자 지식인이 되고 싶었으나, 성적 수치는 그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몸에 새겨진 인장과 같은 것이었다. 떨쳐내기 어려운 성적 수치와 수치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가 에리봉의 지적 탐구의 중심이 되었다.     에리봉은 폭력 가장이자 동성애 혐오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지금껏 외면해 왔던 가난한 노동자 아들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줄곧 본인의 동성애 성향과 아버지 및 노동 계급 문화의 동성애 혐오라는 “고상한” 이유를 들어, 가족과 노동 계급을 떠나야 했다고 설명해 왔었다.  노동자 도시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자란 경험을 반추하는 가운데, 그는 본인이 노동자들의 생활 양식이나 사고 체계에 대해 경멸감과 수치심을 갖고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명민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했음에도 에리봉은 상급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문학, 철학, 예술 등의 교육은 중산층이 전유하는 아비투스(학습된 문화적 성향 쳬계)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고등 학교 과정에서 접하게 된 부르주아의 언어, 교양있는 행동, 상류층 취향의 문화 등은 동급생들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에리봉에겐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다. 그는 무지를 감추기 위해 아는 것처럼 위장하고, 소외감을 반항으로 표출하고, 떄로는 민중 계급의 남성성을 버리고 심미주의자 소년이 되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중산층 아비투스에 대한 체화나 학업에 열중하기 위한 신체적 훈육이 없이 지식인 사회로의 편입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란 걸 체험했다. 프랑스의 상급 학교 교육은 상류층 아이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었기에, 에리봉과 같은 노동 계급의 아이들은 지적인 열망을 갖더라도 그 체계 안에서 배제와 수치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치심이 사회적이고 구조적이라는 에리봉의 분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 자본과 사회 관계 자본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는 구별짓기는 내가 고등 교육에 접근하고자 했을 때, 그리고 지금의 한국 및 미국의 교육 체계에서도 목격할 수 있기 떄문이다. 에리봉은 문화 자본이란 개념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계급적 질서를 설명하는 이론들(아비 투스, 사회 관계 자본, 구조의 평행 이동 등)에 기반하여 본인이 경험한 계급과 불평등을 분석한다. 사회학적 개념들을 장착하여 서사를 해석함으로써 구조 속에 위치한 개인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회학적 자기 탐구는 사회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앎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에리봉이 계급적 수치에 중점을 두었다면, 선천성 골형성부전증을 갖고 태어난 김원영은 <<실격>>에서 몸의 수치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신체적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법과 제도, 사회적 관습, 통념 등에 의해 ‘잘못된 삶’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철저히 논증한다.  에리봉과 구별되는 점은 본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적극적 변론을 펼친 점이다.   저자는 ‘비정상적’ 몸으로 인해 겪는 수치를 자신이 어떻게 다루는지 상세히 기술한다. 모욕적인 언사나 상황에 직면할 때, 그는 좌절감에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하여 말을 더듬지 않는다. 자아를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바로 구분한다. 바라보는 나는 냉철하게 상황 분석을 하고, 보여지는 나는 그 분석에 기반하여 유머 또는 차가운 분노가 담긴 대응을 한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탄 자신을 보고 가여워 하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묻는 이에게 “장애인 할인을 받으려고요”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 방어적 퍼포먼스가 자기 존중과 사회적 존엄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여기서 나아가 수치가 자기 수용이나 존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자신과 비슷한 신체적 장애가 있는 이들과 연대하여 “수평적 정체성” 그룹을 구성한 경험을 소개한다. 그는 휠체어를 탄 친구들과 함께 간지 나는 휠체어 운전법을 연습하였고, 그 작동 기술 자체가 그 그룹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그 경험은 자신들을 정상성이 결여된 존재가 아닌 정상성과 다른 무엇으로 적극적으로 규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가난한 배경에서 성장하여 지식인 또는 전문직 종사자로의 계층 이동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역경을 극복한 성공의 서사 구조에 딱 들어맞지만, 이들의 자기 기술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성공 서사들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치의 경험을 드러내며 ‘벌거벗은’ 채 독자에게 다가선다.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든 경험을 사회 구조 내에서 분석하고, 해석한다.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두 저자가 깊이 있는 자기 이헤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변호사       정체성의 교차가 핵심이다   이 두편의 자기 기술지는 개인적인 경험이 구조의 산물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각 개인에게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정체성의 다양성과 교차성으로 인해 소수자 개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기술지를 통해 에리봉과 김원영은 여러 정체성의 충돌과 교차를 탐구하였다.      <<랭스>>는 자기 탐구가 성적 주체화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기에,  계급적 주체화를 주로 다루었다. 그럼에도에리봉의 서사에는 자신의 계급성 뿐 아니라 성소수자, 지식인,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게이 지식인이 되기 위한 여정은 성적인 자아와 계급적 자아가 충돌 가운데 이뤄진 것이었다. 또 게이로서의 정체성은 동성애 혐오적 노동자 문화와 거리를 두면서 성적 주체화에 대한 탐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에리봉의 서사를 통해 교차된 정체성이 가족(노동자 남성, 노동자 여성 등)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중 나는 에리봉이 명시적으로 기술하지 않은 젠더와 계급의 교차가 인상적이었다. 어머니는 저자의 동성애 성향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반면,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 노동 계급 남성들의 외도나 성적인 유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여성들의 자유 연애와 낙태(외할머니의 경우)는 사회적 낙인과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계급적 배경과 젠더로 인해 남성들이 겪지 않은 성희롱과 성적 대상화를 겪어야 했다. 같은 계급 내에서도 젠더에 따라 특권과 배제가 다르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영도 장애와 다른 정체성들의 교차가 개별 장애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계급과 장애가 교차할 때 겪게 되는 모욕적인 상황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장애인들은 적은 액수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 대신 정치인들의  PR을 위해 동원되고 “전시품”으로 취급 받는다. 수치심을 느끼지만 본인들의 위치로 인해 저항이 불가능하다.  장애인의 정체성은 학력과도 밀접하게 교차한다. 이동이 불가능하고 교육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아, 장애인들은 초등 학교조차 다닐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교육에서의 배제로 인해 이들은 자기를 드러낼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자신을 설명할 언어 발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낮은 계급과 무학 또는 저학력의 정체성이 장애와 만날 때, 출발부터 실격당한 인생의 운명에 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에리봉은 최근의 사회 과학 연구와 정치 담론이 특정 정체성의 사회적 인정에 집중함으로써 계급이 간과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정체성 정치에서 놓치기 쉬운 개인적 체험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존재를 하나의 집단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 우리의 복잡한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에리봉과 김원영은 개인을 특정 정체성의 고정된 주체로 이해하는 것이 불완전한 자기 이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반증해 주었다. 나는 성적인 정체성의 인정에 대한 집중한 나머지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정체성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하여 지금의 나를 구성하였는지 살펴보지 못했다. 내가 겪은 배제와 차별, 그리고 특권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표현되는 나의 독특하고 복잡한 위치성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살필 때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두 책이 보여주듯 자기 기술지는 개인 서사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잘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교차성의 서사는 인간 경험의 보편성에 호소하는 힘 또한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에리봉과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지만  사회 관계 자본과 문화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등 교육에 접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게이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대도시로 탈출한 경험도 유사하다. 난 김원영처럼 선천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란 걸 확신하고 확인 받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김원영이 장애인 이외의 “매력 자원”이 부족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예를 들어, ‘못생겼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 내내 집단 괴롭힘을 당한 명문대 여힉셍)을 본인과 비슷하게 실격당한 처지에 있다고 얘기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교차적 정체성의 서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맥락이 그 서사 안에서 자연스럽게 엮어게 되는 힘이 있다. 두 저자의 복잡한 서사에 나의 모습이 투사되어 있음을 발견하면서 난 이들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자기 기술지는 ‘나’의 서사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서사로 해석되고 확장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 기술지를 쓸 수 있을까   에리봉과 김원영의 자기 기술지 작업은 밀도 있는 자기 반성(self-reflection)과 엄격한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수치와 배제를 생산하는 구조와 사회적 질서의 작동 방식을 잘 드러내었다. 동시에 그 질서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의 결합과 충돌 가운데 구성된 나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지난한 자기 연구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역자는 에리봉의 자기 연구의 과정을 자기 발명이라고 불렀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계급이 본인 인생의 변곡점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고, 특히 계급적 수치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살핀 것 자체가 그에겐 자기를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 김원영은 자신을 비롯한 실격당한 이들의 삶이 가치있고 존엄함을 보여주기 위해 변론을 끝까지 밀어 부쳤다. 그의 자기 변호는 논리와 이론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이뤄졌고, 독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논리, 설득력, 당당함을 갖춘 서사는 그가 <<실격>>을 자기 발명의 일환으로 삼았음을 잘 보여준다.    나는 두 소수자의 자기기술지에 공감했고 영감을 받았다. 이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용기, 자기 성찰 능력, 학문적 엄격함, 정교한 자기 기술 능력 등이 글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자와 작가로서 이러한 덕목들을 갖춘 두 사람이 부러웠다. 나와 같이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 자기 기술지를 서사의 장르로 삼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회 과학이나 철학 등에 대한 지적인 토대가 약하다. 개념과 서사를 엮는 학문적 글쓰기에 대한 훈련도 부족하다. 이에 대한 장기간의 밀도 있는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엄격한 의미의 자기 기술지에 접근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두 텍스트로부터  서사를 구성할 때 참조할 수 있는 기준점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 기준은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구조와 결합되어 서술되었는가’, ‘학문적 개념과 이론이 경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가’, ‘개인의 고유한 교차적 정체성이 드러났는가’,  ‘고유성이 보편성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가’ 등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는 길을 천천히 걸어보려 한다      “자기 삶의 연구자”라는 표현은 박노해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자기 기술지는 서사가 중심이기 때문에 이론과 개념어로 점철된 논문에 비하면 일반 독자들의 접근이 비교적  쉽다. 단,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 집단의 이해와 권리에 집중하는 사회운동이다. 자신들의 입장에 매몰되어 타정체성 그룹과의 연대에 무관심하거나 극단적으로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문탁
2023.09.19 | 조회 332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교 합격자 게시판에서 내 이름 석자를 확인하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쁨, 설레임, 죄책감, 부담감 등의 감정이 교차했다. 두려움 자체였던 아버지에게서, 성소수자로서 철저히 고립될 수밖에 없는 시골 동네에서 벗어날 명분이 생겨 기뻤다. 거기에다 대학교 졸업장으로 내 처지과 인생이 달라질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건 우리집 형편에 무모한 일이었다. 다른 시골 친구들처럼 취업하여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 주질 못할망정 가난한 시골집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들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 한 켠에 늘 죄책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에도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고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과연 내가 돈을 벌어 생활비를 마련하고 수업료에도 보탤 수 있을까, 내향적이고 자의식 많은 내가 고립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상경하게 되었다.     서울 생활은 만만하지 않았다. 구로공단 근처의 지하방에서 자취를 했다. 바퀴벌레와 같이 사는 건 일상이었고, 때론 쥐까지 출몰했다. 보안이라곤 자물쇠 하나가 전부였던지라 며칠이라도 집을 비울 때면 밤손님들이 문을 따고 들어와 방을 다 헤집어 놓고 가곤 했다. 집주인들은 이사를 할 때면 아직 나오지 않은 마지막 달의 전기세와 물세를 몇 배로 뻥튀기하여 받아냈다. 그런 다음에야 월세 보증금을 내주었다. 거기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수업료를 제때 내고 졸업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노순택 사진 (오마이 뉴스에서 가져옴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9822 )       처음엔 편의점에서 일을 했다. 일머리가 별로 없는데다 멀티태스킹이 잘 안되어 힘들었다. 게다가 점주가 일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주지 않아 그 일은 오래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강남이나 목동에서 대학생 과외 수요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과외를 연결해 주는 학교 취업처를 자주 들락거리고 벼룩시장에 광고를 냈다. 처음에 구한 과외들은 단기로 끝났다. 언변도 없었고 의욕이 없는 학생을 독려할 카리스마도 부족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씩 요령을 터득했다. 난 무조건 10분 일찍 도착하는 걸 룰로 정했다. 내가 공부했던 방식을 복기해보며 어려운 영어문법 개념을 정리해서 가르쳤다. 학부모의 신뢰를 얻었고 과외가 꾸준히 연결될 수 있었다. 만원권 지폐가 빼곡히 담긴 봉투를 매달 받게 되면서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은 질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정된 돈으로 살아야 했기에 짠테크는 필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의 자취로 요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가격이 싼 몇 가지 제철 야채와 계란만으로도 여러 반찬과 국을 뚝딱 만들어냈다. 또 얼마 안되는 수입이지만 이를 조금이라도 불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매달 정해 놓은 금액을 단기 적금에 넣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불어난 원금을 수업료에 충당했다.    나는  출퇴근 시간의 1호선 열차가 좋았다. 마치 시루 안의 콩나물처럼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사이에 있다보면 안도감이 느껴졌다. 실제적인 연결감이 아니었지만 이는 일시적으로나마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친밀한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단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방 출신의 노동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종종 있었다. 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돈도 내세울 지위도 없는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에 기초한 세계관은 내가 쉽게 수용할 수 없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 사는 고향 친구들을 가끔씩 보는 게 반가웠지만 갈수록 이들과의 공유 지점이 없어졌다. 술에 취해 마초적 기질을 드러내는 것은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에 가면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속한 학과는 강남 출신과 해외거주자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학회 활동이나 데모 등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의 정의감과 열정이 부러웠지만, 난 노동자 계층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었고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여유도 없었다.    나는 청년기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억누르며 살아왔다.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를 위해서 살았다는 죄책감이 지금도 마음 한 켠에 있다. 가난과 어수룩함으로 인해 온당한 대우와 존중을 받지 못했다는 상처도 있다. 또 고립되어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시절이었다. 이처럼 자존감을 지켜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절은 건드리지 않고 묻어두는 게 속편했다.  20대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죄책감을 곁으로 밀어 놓자 지금껏 주목하지 않은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내게는 당시 마주한 장애물의 무게만큼이나 이를 넘어설 에너지가 있었다.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천천히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때론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도 발휘했다. 내 안에 자신을 지키는 힘이 생각보다 많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청년기를 떠올릴 때 무심코 사용했던 ‘자립’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를 챙겨주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르쳤던 학생의 어머니는 다른 과외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난 시골집에서, 누나에게서 가끔식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학과장님은 장학금을 챙겨주기도 했다. 과외 학생의 학부모는 명절 때마다 보너스를 주셨다. 쉽게 잊고 살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를 살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처지와 내향적 성격으로 인해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지만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에게 다가와준 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한 친구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을 털어 놓았다. 다른 친구는 가족 문제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와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난 이들에게 아버지 이야기나, 다음 학기 수업료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란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농촌 출신의 일하는 가난한 대학생이라는 내 배경에 대한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거부당할 것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자의식과 외로움으로 힘들었고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대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난 연결되어 있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다음 편에서는 성소수자로 살아가면서 가진 두려움이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교 합격자 게시판에서 내 이름 석자를 확인하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쁨, 설레임, 죄책감, 부담감 등의 감정이 교차했다. 두려움 자체였던 아버지에게서, 성소수자로서 철저히 고립될 수밖에 없는 시골 동네에서 벗어날 명분이 생겨 기뻤다. 거기에다 대학교 졸업장으로 내 처지과 인생이 달라질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건 우리집 형편에 무모한 일이었다. 다른 시골 친구들처럼 취업하여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 주질 못할망정 가난한 시골집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들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 한 켠에 늘 죄책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에도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고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과연 내가 돈을 벌어 생활비를 마련하고 수업료에도 보탤 수 있을까, 내향적이고 자의식 많은 내가 고립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상경하게 되었다.     서울 생활은 만만하지 않았다. 구로공단 근처의 지하방에서 자취를 했다. 바퀴벌레와 같이 사는 건 일상이었고, 때론 쥐까지 출몰했다. 보안이라곤 자물쇠 하나가 전부였던지라 며칠이라도 집을 비울 때면 밤손님들이 문을 따고 들어와 방을 다 헤집어 놓고 가곤 했다. 집주인들은 이사를 할 때면 아직 나오지 않은 마지막 달의 전기세와 물세를 몇 배로 뻥튀기하여 받아냈다. 그런 다음에야 월세 보증금을 내주었다. 거기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수업료를 제때 내고 졸업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노순택 사진 (오마이 뉴스에서 가져옴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9822 )       처음엔 편의점에서 일을 했다. 일머리가 별로 없는데다 멀티태스킹이 잘 안되어 힘들었다. 게다가 점주가 일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주지 않아 그 일은 오래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강남이나 목동에서 대학생 과외 수요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과외를 연결해 주는 학교 취업처를 자주 들락거리고 벼룩시장에 광고를 냈다. 처음에 구한 과외들은 단기로 끝났다. 언변도 없었고 의욕이 없는 학생을 독려할 카리스마도 부족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씩 요령을 터득했다. 난 무조건 10분 일찍 도착하는 걸 룰로 정했다. 내가 공부했던 방식을 복기해보며 어려운 영어문법 개념을 정리해서 가르쳤다. 학부모의 신뢰를 얻었고 과외가 꾸준히 연결될 수 있었다. 만원권 지폐가 빼곡히 담긴 봉투를 매달 받게 되면서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은 질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정된 돈으로 살아야 했기에 짠테크는 필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의 자취로 요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가격이 싼 몇 가지 제철 야채와 계란만으로도 여러 반찬과 국을 뚝딱 만들어냈다. 또 얼마 안되는 수입이지만 이를 조금이라도 불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매달 정해 놓은 금액을 단기 적금에 넣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불어난 원금을 수업료에 충당했다.    나는  출퇴근 시간의 1호선 열차가 좋았다. 마치 시루 안의 콩나물처럼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사이에 있다보면 안도감이 느껴졌다. 실제적인 연결감이 아니었지만 이는 일시적으로나마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친밀한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단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방 출신의 노동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종종 있었다. 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돈도 내세울 지위도 없는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에 기초한 세계관은 내가 쉽게 수용할 수 없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 사는 고향 친구들을 가끔씩 보는 게 반가웠지만 갈수록 이들과의 공유 지점이 없어졌다. 술에 취해 마초적 기질을 드러내는 것은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에 가면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속한 학과는 강남 출신과 해외거주자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학회 활동이나 데모 등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의 정의감과 열정이 부러웠지만, 난 노동자 계층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었고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여유도 없었다.    나는 청년기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억누르며 살아왔다.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를 위해서 살았다는 죄책감이 지금도 마음 한 켠에 있다. 가난과 어수룩함으로 인해 온당한 대우와 존중을 받지 못했다는 상처도 있다. 또 고립되어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시절이었다. 이처럼 자존감을 지켜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절은 건드리지 않고 묻어두는 게 속편했다.  20대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죄책감을 곁으로 밀어 놓자 지금껏 주목하지 않은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내게는 당시 마주한 장애물의 무게만큼이나 이를 넘어설 에너지가 있었다.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천천히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때론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도 발휘했다. 내 안에 자신을 지키는 힘이 생각보다 많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청년기를 떠올릴 때 무심코 사용했던 ‘자립’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를 챙겨주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르쳤던 학생의 어머니는 다른 과외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난 시골집에서, 누나에게서 가끔식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학과장님은 장학금을 챙겨주기도 했다. 과외 학생의 학부모는 명절 때마다 보너스를 주셨다. 쉽게 잊고 살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를 살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처지와 내향적 성격으로 인해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지만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에게 다가와준 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한 친구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을 털어 놓았다. 다른 친구는 가족 문제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와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난 이들에게 아버지 이야기나, 다음 학기 수업료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란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농촌 출신의 일하는 가난한 대학생이라는 내 배경에 대한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거부당할 것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자의식과 외로움으로 힘들었고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대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난 연결되어 있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다음 편에서는 성소수자로 살아가면서 가진 두려움이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문탁
2023.09.15 | 조회 356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도시에서는 가뭄이 상대적으로 덜 와닿는 일이다. 비가 올 때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그저 화창한 날이 많은 것으로 쉽사리 여기니 말이다. 나에게도 비가 자주 오지 않는 건 그저 그런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편히 일할 수 있는 날이었다. 올해 봄은 정말 가물었다. ​ ​ ​ 접시 물에 망할 뻔 ​ 완도군에서는 주 1~2회만 물이 나오는 ‘제한 급수’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위쪽 광주 광역시도 제한 급수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었다. 놀기도 좋고 일하기도 좋은 봄날을 열심히 보내다 ‘아 이거 좀 비가 너무 안 오네?’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가뭄이 코앞에 다가왔다. 문득 한 농부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작년에 그 농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물길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잠깐이라도 다른 일을 보면 어느샌가 돌아가 있는 물꼬 때문에 미쳐 버리겠단다. 그는 ‘이대로라면 올해도 벼가 자라지도 않은 논에서 허수아비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날이 가물다고 해서 당장 내 목을 비틀어 쥐는 일은 아니니, 나에게는 기우제를 지내기는 것보다 눈앞의 돈벌이에 충실한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도시에서는 가뭄이 상대적으로 덜 와닿는 일이다. 비가 올 때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그저 화창한 날이 많은 것으로 쉽사리 여기니 말이다. 나에게도 비가 자주 오지 않는 건 그저 그런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편히 일할 수 있는 날이었다. 올해 봄은 정말 가물었다. ​ ​ ​ 접시 물에 망할 뻔 ​ 완도군에서는 주 1~2회만 물이 나오는 ‘제한 급수’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위쪽 광주 광역시도 제한 급수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었다. 놀기도 좋고 일하기도 좋은 봄날을 열심히 보내다 ‘아 이거 좀 비가 너무 안 오네?’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가뭄이 코앞에 다가왔다. 문득 한 농부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작년에 그 농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물길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잠깐이라도 다른 일을 보면 어느샌가 돌아가 있는 물꼬 때문에 미쳐 버리겠단다. 그는 ‘이대로라면 올해도 벼가 자라지도 않은 논에서 허수아비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날이 가물다고 해서 당장 내 목을 비틀어 쥐는 일은 아니니, 나에게는 기우제를 지내기는 것보다 눈앞의 돈벌이에 충실한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문탁
2023.09.11 | 조회 366
인문약방 에세이
      치유의 본능을 깨우자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_ 고미숙     김은영         1. 『동의보감』은 삶의 비전서다   저자, 고미숙은 40대에 생긴 종양의 치료법이 수술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지만, 수술 없이 스스로 종양을 감당해 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먼저, 병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대체 병이 왜 생겨났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그런데 그 원인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리고 왜 하필 그 병일까 등등. 질문이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졌고, 병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의 몸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병은 귀찮은 불청객이 아니라 나와 몸을 이어주는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몸들’에 대한 탐구로 연결되었고, 『동의보감』과 접속하게 되면서, 이제까지의 ‘앎’들이 재배치되어 연결되는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인식론 안에서 몸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자연이며, 우주와 연결되는 하나의 세계임을 알게 되었고, 몸을 치유하는 것은 삶을 치유하는 일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질병과 치료에 국한되는 의서가 아니다. 알려진 대로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약이나 침으로 하는 치료 보다 수양을 우선시 하라는 특급 요청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며, 무엇보다 그 기저에는 중국 의학사의 엑기스가 깔려있다. 『동의보감』이 의서를 넘어 생명과 자연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텍스트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내경편]의 첫 장에 등장하는 ‘신형장부도’와 손진인의 멘트를 들 수 있다.   신형장부도란 몸의 형태와 오장육부를 그린...
      치유의 본능을 깨우자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_ 고미숙     김은영         1. 『동의보감』은 삶의 비전서다   저자, 고미숙은 40대에 생긴 종양의 치료법이 수술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지만, 수술 없이 스스로 종양을 감당해 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먼저, 병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대체 병이 왜 생겨났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그런데 그 원인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리고 왜 하필 그 병일까 등등. 질문이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졌고, 병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의 몸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병은 귀찮은 불청객이 아니라 나와 몸을 이어주는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몸들’에 대한 탐구로 연결되었고, 『동의보감』과 접속하게 되면서, 이제까지의 ‘앎’들이 재배치되어 연결되는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인식론 안에서 몸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자연이며, 우주와 연결되는 하나의 세계임을 알게 되었고, 몸을 치유하는 것은 삶을 치유하는 일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질병과 치료에 국한되는 의서가 아니다. 알려진 대로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약이나 침으로 하는 치료 보다 수양을 우선시 하라는 특급 요청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며, 무엇보다 그 기저에는 중국 의학사의 엑기스가 깔려있다. 『동의보감』이 의서를 넘어 생명과 자연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텍스트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내경편]의 첫 장에 등장하는 ‘신형장부도’와 손진인의 멘트를 들 수 있다.   신형장부도란 몸의 형태와 오장육부를 그린...
문탁
2023.09.11 | 조회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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