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비글] 8차시 4월 28일 <슬픔의 방문> 세미나 공지

겸목
2024-04-24 11:14
87

 

 

어느덧 이번 시즌 마지막 텍스트에 이르렀네요. 이번 책은 장일호의 <<슬픔의 방문>>(낮은산, 2022년)입니다. 글쓰기프로그램을 하며 글 잘 쓰는 여자들이 이렇게 많았나!! 놀라게 되는 텍스트들을 만났어요. 너무 멋진 여자들이 많구나!! 그 길이 쉽지는 않았구나!! 어려움은 멋진 길로 가는 비상구가 될 수 있겠구나!! 이런 감탄을 하며 리베카 솔닛, 캐롤라인 냅, 비비언 고닉, 아니 에르노, 게일 콜드웰, 에드리언 리치, 로런 엘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읽어갔습니다. 그 와중에 황정은, 진은영, 이슬아, 홍승은, 홍은전, 정희진 같은 한국 작가들의 책도 읽어갔습니다. 하미나, 희정, 이반지하, 김지승처럼 아직 읽지 않았지만, 멋진 작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일호도 그런 작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2020년대의 출판계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저자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굵직한 탐사보도와 깊이 있는 기사들로 ‘바이라인’을 각인시킨 〈시사IN〉 기자 장일호의 첫 책을 선보인다. “통째로 한 편의 시 같다”, “이것이 뉴스스토리다”라는 찬사와 함께 오래도록 회자되는 그의 기사들은 유통기한이 없다. 현실에 발 딛고 선 문장들은 단단함이 지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많은 이들에게 알려주었다. 문화팀, 사회팀, 정치팀을 두루 거쳐 오며 그가 가장 오래 머문 현장은 세상에서 밀려난 장소들이었으며, 가장 마음을 기울인 사람들은 세상이 눈감은 이들이었다. 그는 기자의 일이 “물음표 대신 마침표를 더 자주 써야” 하는 일이라며 한탄하지만, 그의 손에 단단히 쥐인 물음표는 서늘한 현실을 바닥까지 파헤쳐 기어이 한 줌의 온기를 품은 마침표를 건져 올리곤 했다. 장일호의 에세이 《슬픔의 방문》은 아프고 다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꿈꾸며 “슬픔”에게 건네는 온기 어린 마침표이다."

 

인터넷서점에 올라온 소개글을 옮겨봅니다. <시사인> 기자 장일호의 첫 에세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게 될까요? 지난 시간 끝에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무엇을 썼는지?" "왜 썼는지?"보다 장일호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 주목해서 읽어보자고! 내 이야기는 어떻게 진술 되어야 다른 사람에게 읽힐 수 있는 글이 될까요? 장일호 작가는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를 진술하고 있나요? 무엇을 썼는지? 왜 썼는지?와 구별되기 힘든 지점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썼는지에 주목해서 읽어봅시다.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는 4월 27일 토요일 오후 10시까지 이 공지글에 댓글로 달아주세요. 간식과 후기는 시소, 무이님이에요! 그럼, 일욜에 봬요~ 

 

 

댓글 10
  • 2024-04-27 07:57

    P.62 나는 때때로 오늘을 잘 살기 위해서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 이라는 말에 깊이 동의한다. 죽음은 공평하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필연인 죽음은 늙은 결과가 아니라 살아온 것의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 날은 좀 더 씩씩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외할머니는 어땠을까. 외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고민해 본 적 있을까. 우리는 왜 이 주제를 한번도 나누지 못했을까.
    (중략)
    <어떻게 죽을 것인가> 속에서 완화 치료 전문가인 수전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었더 질문이다. "제가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당신이 생명 유지를 위해 얼마만큼 견뎌 낼 용의가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상태면 사는게 괴롭지 않을지 알아야만 해요." 그래서 당신 대답에 따라, 당신 뜻대고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된다면 좋겠다. "결국은 이기에 되어 있는 죽음"을 주제로 우리가 오래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P.134 우리는 여재애들이 야망을 가질 때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꺾어 버리고 길들여 왔는지 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고 나니까. 나는 유력 정치인과 바람 난 적없고, 과도한 사이버 불링을 당한 적도 없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일을 무수히 겪으며 깎여 나가고 작아졌다. 실수나 실패로 내 인생이 끝나는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페미니즘을 팝니다>의 저자 앤디 자이슬러는 성평등을 이렇게 정의한다. "성평등이란 단순히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커다란 실패를 허용하는 것이다." 시장후보를 뽑는 투표장에 들어간 제인은 자신의 이름에 투표한다. 그 순간 제인은 20대의 자신, 비바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 "하나만 물어도 될까? 어떻게 그 스캔들을 극복했어?"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p.152 수신지 작작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네 나이를 겪어 봤으니까 내가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완벽하게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그 반대보다는 쉬울 거야. 그러니까 윗세다가 이해하려고 더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해."

    P.158 노늘 야학 교사이자 저자인 홍은전씨는 비 장애인이다. 그는 자신을 '9'라고 칭한다. "10명 중에 1명은 장애인이다.(….) 1들이 말하는 세상은 야만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라온 세상은 한번도 1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중략) 누군가 목숨 걸고 투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전해야한다. 이 '당연한' 문장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이 죽어, 몸으로 쌓아 올린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 2024-04-27 17:16

    p54-55
    너무 빨리 어른인 척해야 했던 스무 해 전 나 같은 사람에게 나는 ‘곁’이 되어 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찾았으면 좋겠다.

    십대: 이쁘다고 말해 주고 싶다, 너에게. 그때 그 불만투성이의 노여움과 서러움으로 가득한 내 눈빛을 보고 이쁘다고 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십대 또한 그러했으므로.

    p74-75
    남동생이 2012년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주변이 모두 당혹해할 정도로 오래 통곡했다. 2.9kg의 조그만 아이를 처음 안고 터뜨린 울음을 한동안 나조차 해석하지 못했다. 그건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깨달았다. 나는 그 아이가 살아갈 많은 날이 안쓰러웠다. 앞으로 ‘당할’ 일들이 떠올라 고통스러웠고, 무서웠고, 서러웠다.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 경험해야 할 모든 일들이 먼저 경험한 내게 무게로 다가와 나를 짓눌렀다. ...... ‘핏덩이’는 내가 가난 때문에 늘 상처받는 사람이라는 걸 상기시켰다.

    ⇒ 또 다른 이유로 딸아이를 낳았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그 아이가 이 세상에서 ‘여자로’ 살아갈 일이 녹녹치 않으리라는 것이 슬펐다.

    p135
    “하나만 물어도 될까? 어떻게 그 스캔들을 극복했어?”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p145
    다만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니었기 때문에 삶의 비참을 다르게 견디고 싶었을 뿐이다.

    p174
    “선배...... 저는 10시까지 출근 못 하겠습니다.”
    ... 문제의 성격을 막론하고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솔직함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 남들이 다 할 수 있어도 나는 못 할 수 있다고, 못 하는 부분은 인정하고 ‘다르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 마음의 자유를 얻으니, 몸이 적응하게 시작했다.

    p205
    정답을 찾고 싶어서 책을 읽지만 책에는 정답이 없다. 자기계발서만 아니라 모든 책이 마찬가지다. 대신 책에는 ‘질문’이 있다. ‘실마리’를 잡는다면 그나마 나쁘지 않다. 정답은 여러 개이며 결국은 내가 써야 한다. 하지만 이 문장만큼은 내가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한 발 떼는 데 큰 위로가 됐다. “왜 내가 이걸 하고 있는 거지?”

    p217
    나는 출산과 비출산 사이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내가 가진 정답이 무엇이든 이유와 입장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내가 분명히 느끼는 슬픔과 상실은 충분히 설명이 안 됐다. 중간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삶도 좀 더 가뿐해졌다.

  • 2024-04-27 20:10

    p28)
    결혼을 한 지금도 자정 넘어 귀가 중일 때, 엄마의 전화가 없으면 괜히 서운하다. 기껏해야 20여조, 짧은 통화마저도 가끔은 귀찮지만 실은 그보다 많이 안심이 된다. 엄마는 늘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다. 엄마가 앞으로도 오래오래 나를 기다려 줬으면 좋겠다. 엄마도 모르는 사이 나는 엄마와 싸우고 화해하고 또 다른 엄마를 만들어 내기도 했으므로, 내 몸을 만든 엄마의 무수한 칼자국 덕분에 나 역시 ‘가슴이 아프다’라는 말을 물리적으로 아는 사람이 되었다.

    --> 이 세상에 태어나 물리적 시간이 많이 지나갈수록 좋은 것은 뭔가를 많이 알아간다는 사실인 것 같다. 물론 안다고 말하는 것이 또 뒷날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들과 뒹굴고 즐거워하고 아파하는 시간들을 통과하는 내 몸과 마음은 더 깊은 아픔을 알고 동시에 더 깊은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는, 살아가는 것이 고귀한 이유는 ‘가슴이 아프다’라는 말을 아는 것에서 연원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p236)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곳에서 살고 무엇을 하는지와 같은 삶의 맥락은 진료실에 들어온 순간 모두 사라진다. 모든 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직 한가지, 증상만 남는다. 이것이 의사가 경험하는 첫 번째 마술이다. 하지만 왕진을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단 거기에는 ‘한사람’이 자신의 방에 앉아 있다. 그 모습이 의사에게 주는 정서적인 변화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는 자기 삶의 맥락 속에 있으므로 나는 그를 ‘한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왕진을 가는 의사의 가치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의료낙후 지역을 위한 봉사하는 의료인 정도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 맥락이 같이 하는 장소에서 증상만이 아닌 ‘한사람’을 본다는 말에 현 사람들의 근원적인 외로움의 통로를 본 것 같다. 병원에서는 한 인간이 아니라 환자a,환자b... 로 취급된다.개인 소득이 얼마인지에 따라 구분되는 제도적 혜택도 많다. 개인의 인생 맥락은 중요치 않다. 우리는 이런 사회 환경에 익숙하다. ‘나’로써 존재하지만 ‘내’가 없는 것 같은 느낌. 증상만 보지 않고 ‘한사람’을 보게 된다면 ‘우리’로써 존재하게 된다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하다. 나도 ‘한사람’으로 존재하고 싶다.

  • 2024-04-27 21:38

    시간권력을 '갑'이 쥐고 있다고 해서 '을'에게 시간주권이 없는것은 아니다. 나 같은. 우리같은 을에게 시간 주권을 보장했을 때에고 갑은 충분히 이익을 낼수있다. 이와 관련해 책에 여러 사례가 나오지만 [다임 프어]를 읽으며 내가 굵게 밑둘을 그었던 문장은 이렇다. "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전 8시에 어디에 있었느냐고 캐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p185)
    ='을'의 시간 주권을 생각해 보지못했다. 근로자의 삶이라는 것은 나의 시간을 파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을 잘하나 못하나 그사람의 인생의 얼마간의 시간을 회사는 사는것이란 생각을 했던거 같다. '을'의 시간 주권은 어떻게 발현될수 있는 것일까?

    막상 결혼하고 보니 '미세 먼지'같은 불편과 불쾌는 좀체 언어화하기 쉽지 않았다. (p147)
    =일상을 살아갈때 짬짬이 청소를 하면 대청소를 할일이 없다. 렌지후드의 기름때도 매번 닦으면 큰일이 아니지만 몇달아니 일년에 한번 청소하면 너무 힘이 든다. 관계에 있어도 미세먼지 같은 불편함이나 불쾌도 마찬가지인것같다. 그때 그때 해소하면 관계도 편해질텐데 .. 나는 그게 힘든것 같다.

    나는 때때로 오늘을 잘 살기 위해서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것" 이라는 말에 깊이 동의한다. 죽음읒 공평하다. 나도 예외는 아닐것이다. 필연인 죽음은 늙은 결과가 아니라 살아온 것의 결과로 평가 받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 날은 좀 더 씩씩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p62)
    =좋은 삶이란 어떤것일까? 각자의 기준이 있을것이다. 나는 어떤게 좋은 삶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살면 죽을 때 후회가 안된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까. 조금 일찍시작했어야 할 고민들을 지금 하고 있는 나는 '오춘기'이다.

  • 2024-04-27 22:23

    P20.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나는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 봐 무릎이 떨리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 그러나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최종 면접을 보고 온 날, 밤 새 뒤척이며 또 김애란의 문장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절실함은 언제나 내게 이상한 수치심을 주었다."

    P25. 그래도 엄마는 자기 일을 좋아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이 빈 그릇으로 돌아오는 경험이 얼마나 황홀한지에 대해서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들어가는 글 부터 눈을 뗄 수 없던 문장들은, 책을 읽는 내내 이어졌다. 처음 나오는 이 장을 읽으며 나에 대해, 엄마에 대해, 엄마와 나의 관계에 대해 한 번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P36. 나는 사랑을 '어떤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이 관계를 지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어떤 맹세보다 중요한 사랑의 태도가 짧은 그림책 안에 깊고 빼곡하다.

    P81. 어차피 아무것도 그렇게 잘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잘 안다고 해서 좋아하는 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좋아하고, 상관없이 좋아하는 거죠. 좋아하는데 그 사람에게서 조금씩 다른 면을 보게 되고, 그걸 보게 되는 과정도 즐기는 것, 그게 좋은 것 같습니다. 좋아하기 때문에 더 참을 수 있고, 그래서 내 속의 두려움이나 불편함을 이겨내고, 전엔 어색했던, 삐뚤게 봤던 그 다른 면을 이젠 온전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게 덤으로 얻는 겁니다. 그 덤으로 내가 조금씩이지만 변하는 것 같습니다.

    P83. 무용해 보이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발버둥 치는 일의 필요와 중요를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받은 사랑과 주목을 소수자를 위한 자원으로 돌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팬들은 종현을 기억하고자 기일과 생일이면 '청소년성소주자위기지원센터 띵동'같은 단체에 기부한다.

    P91. 어떻게 고통과 더불어 살아갈지, 어디에 서서 고통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따라 고통은 다르게 해석된다.

    P135. "하나만 물어도 될까? 어떻게 그 스캔들을 극복했어?"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p206 " '왜 내가 이걸 하고 있는 거지?' 내 대답은 늘 같습니다. '안 될 게 뭐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고 지금 나 말고는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 그리하여 함께 일하는 친구들에게 당부하게 되는 건 언제나 결과보다는 태도다.

    (책 전반에 걸쳐 '태도'의 중요성 혹은 본질은 '태도'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에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무모함 혹은 무용함이 주는 패기, 그로 인해 변화하는 나 혹은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경험하게 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 2024-04-27 22:33

    1.
    욕심과 허기가 나를 책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읽는 사람은 자유로웠다. 재능 없음을 탓하지 않아도 좋았다. 책장을 펼치면 누적된 지혜가 고스란히 누워 있었다. 행간에 숨기도 하고, 행과 행 사이를 뛰어다니기도 하면서 세상과 몇 번이고 거듭 화해했다. 무언가를 기어코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겠는 일이 많아지는 게 좋았다. 경합하는 진실을 따라 나는 기꺼이 변하고, 물들고, 이동하고, 옮겨 갔다.
    책에서 취한 살과 뼈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마음대로 이어 붙였다. ‘읽기’는 자주 ‘일기’가 되었다. 밑줄을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나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 (p.9)
    --->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책들을 찾아보게 된다. 책에서 그가 길을 찾고, 방법을 찾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책은 기본적으로 정보와 지혜의 보고이다. 그런데 장일호의 독서의 독특한 점이 있는 것 같다. 그 점을 생각해봐야겠다.

    2.
    런던에서 서울까지 약 8,000km를 건너 내 앞에 도착한 <가난 사파리>>를 넘기는 동안 나는 다른 문화권에 살며 다른 언어를 쓰는 저자와 내가 경험한 가난이 너무 가깝고 때로 겹친다는 ‘당연한’ 사실에 자꾸 몸서리를 쳤다. 우리가 해 왔던 분노의 다짐과 잦은 실패와 달라지는 신념이 비슷한 뿌리를 지녔다는 게 신기했다. 대런 맥가비의 말마따나 “가난은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이기 때문일 테다.
    저자가 그랬듯 어린 시절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가족’이 전부였다. 나의 엄마는 사남매의 둘째딸이다. 엄마와 엄마 형제들이 낳은 자녀는 나를 포함해서 아홉 명이다. 그중 전문대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아이는 셋뿐이었다. 정규직 역시 세 명뿐이며, 나머지 여섯 명은 불안정 비정규 노동을 전전한다. 1980~1990년대생인 우리는 대학 진학률 80%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나는 세 명에 속하고 나의 남동생은 여섯 명에 속한다. 가까이는 우리의 차이를 숙제처럼 끌어안고 살았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접점이 넓어질수록 숙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상업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과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은 극과 극이어서 때로 어지러웠다. (68)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멀미 나는 격차들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그 숙제를 얼마간 해결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지식인’ 세계에 진입했을 때 나는 그들과 되도록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게 가난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것이엇음을 그제야 알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좌불안석하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가난으로 인해 어딘가 부서지고 망가진 내면이 언젠가는 사고를 치고 말 것이라고 긍긍한다. (69)

    상업고를 나온 사람이 드물고, 기초수급을 오랫동안 받았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회사에서 내가 지나온 가난은 ‘자원’이었다. 다른 시각을 가졌으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기까지는 내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내 인생이, 또는 실로 내가 어떤 식으로든 흥미롭다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은 이 사회의 많은 문제가 시작되는 저수지였다. 가난과 관련된 아이템은 흔하고 넘쳤다. 그래서 의미 없을 때가 많았다. 오만함과 절박함과 희망이 범벅된 진창에서 구르는 동안 ‘글’ 따위는 몇 번이고 무참히 패배했다. (69~70)

    하지만 가난은 돈의 많고 적음으로만 구별되지 않는다. 문화와 교양과 취향으로만 드러난다. 나는 그 말에서 내가 빠져나온 세계를 본다. 그리하여 안온한 세계에서 구경한다. (70~71)

    생각지 못한 지출이 반복되며 내 삶도 일부분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외면했던 가난의 그림자는 이런 식으로 내 발목을 잡곤 했다. 내가 잘못하며 살지 않아도 책임을 져야 했다. 부채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중 나만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던 건 그 애가 공부를 못한 까닭도 있지만, 그 이유로 그 애가 돈을 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집안 생계를 책임진 덕분에 나는 내 앞가림만 하면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73)

    “누나, 나는 잘해 보려고 했던 일인데 매번 이런 식이야.”
    나는 그 말에 아직도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세상은 모르는 그 애의 최선을 나는 안다. 다만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비정규 노동의 틈새를 전전해 온 30대 중반의 남성은 ‘작은 성공’조차 쉽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려 할 때 대단히 많은 벽에 부딪친다”는 점은 가난이 가진 질긴 속성이다. 온라인 도박 사이트는 드물게 장벽이 없는 공간이었다. 가끔이긴 하지만 성취감을 줬다. 청소년기에는 게임이 그 역할을 했었다. 나는 내 동생의 노동을 딛고 공부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생 삶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만 바쁘게 쓰고 있다는 자괴가 몰려왔다. 세상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74)
    ------> <아주 평범한 가난>은 글 전체가 다 좋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다고 손꼽는 편이다.

    3.
    며느리나 사위로서 할 일의 목록에 효도를 넣지 않으면 서운함이나 다툼의 여지가 정말이지 아주 많이 줄어든다. 우리가 예의를 지켜야 하는 ‘남’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150)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좋은 시댁을,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걸 ‘운’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싸워서 얻어 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싸울 수 있었던 건 동료 여성들 덕분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결혼’이 ‘착취’의 동의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열고 있다. (153)
    ----> 가족이 아니라 '남'이라 생각하고 예의를 지키는 관계가 되는 것! 요즘 우리 집 식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다. 젊은 세대 여성들에게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이다.

  • 2024-04-28 00:10

    (8쪽)쓸 말이 너무 많았다. 동시에 아무것도 없었다……………중략
    (9쪽)대신 읽었다. 욕심과 허기가 나를 책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읽는 사람은 자유로웠다. ………중략………책에서 취한 살과 뼈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마음대로 이어 붙였다. ‘읽기’는 자주 ‘일기’가 되었다…………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 슬픔의 얼굴은 구체적이었다……..

    =>1. 문장을 짧은 단문 형태로 표현하는 것. 읽는 이로 하여금 표현하고 싶은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만들면서, 글에 빨려들어 리드미컬하게 읽일 뿐 아니라 집중하게 만든다. 짧게, 압축적 표현…요런 문장은 어떻게 쓸 수 있지? 타고나는 건가?
    2. 대체 모든 글쓰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그 책의 모든 문장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단순한 이야기 하나가 내가 쓰고자 한, 쓰고 싶은 주제로 접근하기 위해서 책들 속의 문장은 적절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쓰기 위해 읽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만고의 진리지만, 참 어렵고 많은 시간을 요하는 일인 것 같다. 무슨 비법이나 비책이 있는가. 저자는 기자라서 더 유리했던 것일까?

    16쪽
    “사실은 자살”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살짝 놀랐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정말 자살이라면, 근사한 측면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했다.
    요절은 한때 나의 꿈이었는데, 나는 죽지 못했다. 요절을 하려면 세상에 뭔가 멋진 글을 남겨야 하는데 그런 글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그때는 꽤 진지했다) 지금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내 꿈을 대신 이뤘다. 내가 요절할까 봐 본인이 죽어 버린 게 분명했다. 아버지는 ‘멋진 글’ 대신 ‘멋진 나’를 남겼으니까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 버린 건 아닐까. 나는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남긴 사랑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살면서 가끔 필요하고 때로 간절했던 ‘부정’의 결핍을 나는 그런 식으로 채우곤 했다.

    =>나는 저자의 이런 글이 너무 짜릿하고 좋다. 아버지의 죽음을 뭔가 부정적으로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환타지와 결합하여, 묘하게 그냥 내뱉어도 부담스럽거나, 무겁지 않고 가벼우면서도 페이소스가 있는 이런 묘사.누구나 소녀적 자신이 마치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꿈을 꾸지 않는가. 죽음, 불행, 결핍, 그로 인한 생의 고통을 이토록 가볍게 쓸 수 있다면 저자에게 남은 아픔은 더이상 아픔으로만 남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도 이렇게, 제멋대로 생각하며, 무거운 사실을 가볍게 써보고 싶다.

    110쪽
    “ 사람과 동물은 다르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미래지향적이다. 우리는 그 아이가 무언가가 되어 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공부 잘하는 사람, 재능이 뛰어난 사람, 돈 잘 버는 사람, 꼭 그런 게 아니라도 보통의 시민으로 제 몫을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그렇기에 때론 다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물은 그렇지 않다. 그저 내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금 이대로, 매일매일 똑같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동물을 돌본다는 것은 현재지향적이다”

    고양이로 출발해서=>고양이가 나에게 준 것, 내가 감수한 것, 결국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왜 이런 정서적 교감과 피곤과 사랑을 동시에 나누어가지는 한지붕에 사는 생명체가 가족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질문이 있다. 그리고 자기만의 해석(답)이 있다.
    비인간과도 충분히 가족이 될 수 있다. 동물을 키우는 것과, 아기를 키우는 것의 차이를 들여다 본다. 그 의미성. 미래에 살게 한다는 것과 현재에 살게 한다는 것의 차이를 발견한다. 우리는 이분법에 익숙하다. 언뜻보면 미래에 사는 것은 왠지 부질없어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그저 사실만 언급할 뿐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고양이로 출발해서 사랑, 그리고 가족의 문제까지, 법적,제도적,현실적 여건까지 확대해가며 결국 그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쓴다. 에세이의 전형적인 기승전결, 점진적인 비약을 통해 설득력을 발휘한다. 이런 글이 참 어렵다. 나도 딸에게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왜 못하고 있는걸까? 이 책을 꼭 읽어보게 만드는 수밖에.

  • 2024-04-28 00:30

    (9) 욕심과 허기가 나를 책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읽는 사람은 자유로웠다. 재능 없음을 탓하지 않아도 좋았다. 책장을 펼치면 누적된 지혜가 고스란히 누워 있었다. 행간에 숨기도 하고, 행과 행 사이를 뛰어다니기도 하면서 세상과 몇 번이고 거듭 화해했다. ...(중략)... 경합하는 진실을 따라 나는 기꺼이 변하고, 물들고, 이동하고, 옮겨 갔다.
    ---> 끊임없이 책장을 뒤적이고 도서관을 들락거리는 이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흔들리고 헤매일 때 마다. 맞다고, 틀린거 아니라고, 함께 가자고 손잡아준다. 그렇게 나도 책을 따라 기꺼이 변하고, 물들고 이동하고 옮겨 간다.

    (15) 엄마, 다음 생엔 내 딸로 태어나
    (211) “너는 딸도 없고 불쌍하다.” ...(중략)... 나는 엄마의 그 말이 아주 좋다고. 그건 엄마가 나로 인해 불행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 나도 그렇다. 적어도 엄마가 나로 인해 불행하진 않았기를....

    (55) 십대: 이쁘다고 말해 주고 싶다, 너에게. 그때 그 불만투성이의 노여움과 서러움으로 가득한 내 눈빛을 보고 이쁘다고 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 ‘이십대’에게도 이쁘다고 말해주고 싶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기혐오로 가득한 마구 흔들리고 휘청이던 그 시절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 내 딸들에게 괜찮다고, 맘껏 흔들리고 실패도 해보라고. 난 항상 니편이라고.

    (62)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에 깊이 동의한다. ...(중략)... 필연인 죽음은 늙은 결과가 아니라 살아온 것의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 날은 좀 더 씩씩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73) 내가 잘못하며 살지 않아도 책임을 져야 했다. 부채가 있었다. (74) 나는 내 동생의 노동을 딛고 공부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생 삶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만 바쁘게 쓰고 있다는 자괴가 몰려왔다.
    ---> 가난을 무능력과 게으름으로 개인을 탓하지 않고 구조 속에서 바라 볼 수 있는 작가의 시선과 나 혼자 잘나서 누리는 건 없다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83)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굉장한 재능중의 하나다. 꼭 그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싫어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가면서 살고 싶다.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침범해 올 때 숨거나 도망갈 수 있는 요새를 짓는 기분이 든다.
    ---> 종현의 죽음을 함께 겪으면 느꼈던 당시의 소회가 떠오른다.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재능이라는 거, 나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나를 지며주는 요새를 짓는 일도 하면서 살자고 결심하고 실천하게 된 계기.

    (91) 그러나 나는 페미니즘 덕분에 삶에서 아주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중략)... “어떻게 고통과 더불어 살아갈지, 어디에 서서 고통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따라 고통은 다르게 해석된다. ”
    (132) 대학시절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나는 나와 내 주변 여성들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할 언어를 얻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강남역 사건이후) 무엇보다 내 뒤에 오는 여성들이 나보다는 덜 울퉁불퉁한 길을 걷길 바라게 됐다. 그러려면 지금 내 몫으로 주어진 싸움을 피해서는 안됐다.
    (135) 앤디 자이슬러 <페미니즘을 팝니다>에서 “성평들이란 단순히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커다란 실패를 허용하는 것이다,”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 20대 대학생 때 접했던 페미니즘과 50대 초에 다시 접하고 빠져들게 한 페미니즘은 달리 다가왔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가족 내에서의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는 것, 무엇보다 딸들에게 ‘이딴 세상’을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생겼다. 작가의 말처럼 지금 내 몫의 싸움부터 시작했고 그 싸움은 아직도 진행중이고 동료들이 생겨 여간 든든하지 않다. “이 구역의 미친 년, 나쁜 년”들이 많이 생겨나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좋다. “ 착한 여자는 천당엘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딘든 간다”

    (109)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기르는 일은 전전긍긍을 동반하다. ...(중략)... 사랑은 피곤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임을 배웠다. (110)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미래지향적이다. 우리는 그 아이가 무언가가 되어 가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중략)... 그렇기에 때론 다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물은 그렇지 않다. 그저 내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금 이대로, 매일 매일 똑같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동물을 돌본다는 것은 현재지향적이다.
    나 역시 아니를 통해 ‘현재’를 산다. 무엇보다 내가 구한 줄 알았던 고양이는 나를 구했다.
    ---> 동물과 함께 사는 반려인의 입장으로 너무나 공감가는 내용이다. 더 나아가 동물권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118) 결혼을 아주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해보고 아니면 그만 둘 수도 있는 인생의 ‘과정’중 하나로 생각한다고. 되도록 실패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노력하겠지만, 이 관계의 결말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실패가 내 인생을 흔들도록 두지는 않을 거라고.
    (121)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 말”아야 할, 그 무엇.
    (122)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그 안에 포함된 사람은 물론이고 벗어난 사람에게도 특정 삶의 형태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123) 결혼도 다수가 선택한 제도와 관계 맺기일 뿐인데 왜 유독 ‘우월한’ 선택이 되는 걸까
    ---> 나는 왜 결혼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결혼 후 출산 또한 당연한 절차이자 과정이라고 의심없이 저질렀을까? 왜 선택의 문제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최근엔 이혼과 분거(별거)에 대해서 고민할 때면 결국 내 발목을 잡는 것 역시 이데올로기다. 그러면서도 이미 이번 생은 망했으니(?) 딸들이라도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며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은 많이 든다. 그런데 딸들이랑 얘기를 해보면 오히려 아이들이 나보다 더 보수적인 생각을 하고 있음을 느낄 때면 좀 당황스럽기도 하다.

    (147) 막상 결혼하고 보니 ‘미세먼지’같은 불편과 불쾌는 좀체 언어화하기 쉽지 않았다. ...(중략)...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게 아주 많아.”
    (150) 무엇보다 우리는 ‘효도는 셀프’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 며느리나 사위로서 할 일의 목록에 효도를 넣지 않으면 서운함이나 다툼의 여지가 정말이지 아주 많이 줄어든다. 우리가 예의를 지켜야 하는 ‘남’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152)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좋은 시댁을,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걸 ‘운’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싸워서 얻어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싸울 수 있었던 건 동료 여성들 덕분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결혼이 ‘착취’의 동의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열고 있다.
    ---> 결혼 후 첫 명절에 스무시간 가까운 이동시간이 걸렸던 ‘귀성길’-대체 누구 고향이란 말인가- 끝에 ‘시가’에 들어가자 마자 치러내야 했던 명절 준비와 그 낯선 풍경들에 당혹스럽고 서럽기 까지 했던 기억들이 수십년이 흐른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끊임없이 남편의 부모와 형제들과 불화했다. 그 덕분에 요즘은 좀 편해졌다. 나 역시 내가 욕먹을 각오로(실제로 욕먹고 있음) 덤비고 싸운 결과다. 요즘은 함께 설치고 말해주는 여성동지들이 있어 훨씬 수월한 싸움이 된다고 느껴진다. 만고의 진리이자 복음이다. “효도는 셀프!!!”

    (240) 병은 내 삶을 흔들어 대고 일정 부분 바꿨지만, ‘나라는 사람’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병의 원인을 내가 살아온 삶을 반성하는 일로 갈음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온 삶을 바꾸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아픈 몸을 대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 아픈 내 몸을, 내 몸을 병들게 한 내 삶을, 나 자신을 비난하고 바꾸라고 하기 보다는 “아픈 몸을 대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작가의 말이 굉장히 신선하게 들려왔다. 문탁의 다른 세미나의 후기 중에 “왜 아프고 나서도 반성을 안하냐?”는 글을 봤는데 좀 충격이었다. 두 가지의 문제제기를 함께 들고 고민 중이다.

    (254) 많은 이들이 이미 알거나, 안다고 착각하는 이야기를 한번 더 보게 하고, 읽게 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 지난함을 알면서도 무언가 계속 발화하는 이들은 본다. 장일호도 그런 이 중 하나다.
    ---> 겸목샘께서 이 책을 읽으며 주목해 보라고 하는 부분이다 싶다. 내 이야기를 어떻게 누구나의 이야기처럼 읽히도록 쓰는가? 탁월한 재능이다. 다시 한번 나의 글을 앞에 두고 절망한다. 도저히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할 수’가 없다.

  • 2024-04-28 02:03

    68p 나는 세 명에 속하고 나의 남동생은 여섯 명에 속한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접점이 넒어질수록 숙제는 눈덩이 처럼 불어났다. 상업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과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은 극과 극이어서 때로 어지러웠다. 69p 상업고를 나온 사람이 드물고, 기초수급을 오랫동안 받았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회사에서 내가 지나온 가난은 '자원'이었다.
    74P 다만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비정규 노동의 틈새를 전전해 온 30대 중반의 남성은 '작은 성공' 조차 쉽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려 할때 대단히 많은 벽에 부딪친다"는 점은 가난이 가진 질긴 속성이다. => 나와 같은 환경의 상고를 나와 비슷한 루트의 방식으로 사회를 경험하였지만, 자본과 권력에 충실했던 나와 달랐던 저자의 삶을 읽으며, 질문이 없던 원망만이 지배했던 내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83p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굉장한 재능 중 하나다. 꼭 그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싫어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 가면서 살고 싶다.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침범해 올 때 숨거나 도망갈 수 있는 요새를 짓는 기분이 든다.
    => 장일호작가의 삶을 맞이하는 방식은 언제나 진실하기에 가질수 있는 큰 장점인듯 하다.

    135p 성평등이란 단순히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커다란 실패를 허용하는 것이다.

    143p 천국 아니면 지옥만 있던 지독하게 선명한 세계에서 걸어 나온 나는 무엇이든 예전처럼 함부로 확신하지 않는다. 여러 개의 진실과 사실 앞에서 차라리 무력한 자로 남기를 기꺼이 선택한다. =>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여러가지 현상들 앞에서 정답 혹은 진리를 찾고 있는 나의 관성에 기꺼이 무력한 자로 남는다는 저자의 말은 울림이 크다

    176p '연쇄지각마'는 그시스템에 적응하고 싶지 않은 내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였다

    233P 비교하고 알아보는 과정이 결국은 의료 자원을 낭비 하고 정보를 독점하는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내 결정에 만족했다. 홀로 고요한 가운데 주변이 부산스러웠다.
    => 이런방식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주변에 의료관련 지인이 없는게 한 스러웠을뿐

    237P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상이 있다는 걸 헤아렸다./ 전문가에게 부족한 것이 '자기 지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지식을 바라보는 태도'임을 깨닫는다 => 양창모라는 의사가 의사이기 이전에 손님 이고자 하는사람이라고 저자는 소개한다. 타자를 잘 알수도 없지만, 알고자 한다면 타자의 시선과 타자가 되어야만 하는 쉽지 않는 과정.. 쉽게 타자를 다 아는것 처럼 말할 수 없겠다 싶다.

  • 2024-04-2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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