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도 가슴 시린 연애와 이별의 시절이 있었다

유유
2024-04-21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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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도 가슴 시린 연애와 이별의 시절이 있었다 - 유유

 

몇 년 전 아버지가 어딜 가시고 친정에 엄마 혼자 계신 날, 근처에서 일이 늦게 끝나고 마음도 울적해서 엄마가 좋아하는 치킨을 주문 배달을 시키고 맥주를 사서 엄마한테 깜짝 방문을 했던 일이 있다. 엄마가 꽤나 반가워하셨다. 결혼 후 몇십년 만에 엄마랑 단 둘이 자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역시나 어색했는데 술을 함께 마시고 수다를 떨다보니 분위기가 좀 좋아졌나 보다. 서로의 남편 흉을 한참 보다가 내가 문득 “ 엄마는 아버지가 첫 남자였어? 그 전에 한 번도 남자를 사귀어 본적이 없어?” 질문을 했다. 갑자기 그 날 나는 생전처음 엄마의 결혼 전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엄마는 중매로 약혼 후 아버지가 군대에 가는 바람에 꼬박 3년을 기다리다 그 당시로는 꽤나 늦은 나이인 스물여덟에 결혼을 한 걸로 나는 익히 알고 있던 차라 나는 당연히 엄마가 “당연히 니 아버지가 첫 남자였지”라고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의 대답은 “왠걸... 꽤 오래 만나고 좋아했던 해군이 있었어. 결혼 직전까지 갔었는데 그 남자가 10남매의 맏이고 집안도 찢어지게 가난하다고 니 큰 외삼촌이 엄청 반대를 해서 결국 헤어지고 니 아버지랑 중매해서 약혼하고 결혼한거지.”

기분 탓이었을까 술탓이었을까. 엄마의 눈빛이 꽤나 아련했다. 그 남자는 엄마를 꽤나 아껴줬다고 한다. 창경궁으로 남산으로 남대문으로 데이트도 자주 다니고, 데이트를 할 때면 꼭 집으로 데리러 오고 데려다 주고 했다고. 처녀적 엄마는 직물공장 여공으로, 남대문시장 대형 포목점의 수완좋은 점원으로 생활하며 철마다 양장이나 한복으로 외출복을 맞춰 입고 애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꽃놀이도 데이트로 즐겼던 ‘서울아가씨’였다는 것이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상상이 안 가는데 엄마가 옛날 앨범을 뒤져 몇 장의 흑백 사진을 내게 보여줬다. 연애과거 세탁(?)을 하려 했는지 남자하고 찍은 사진은 없는데 고데를 세게 말은 우아한 헤어스타일에 원피스를 차려입은 늘씬한 엄마가 화사한 표정으로 어느 궁궐 담장앞에 양산을 쓰고 서있었다. 내 얼굴이 보였다. 정말 놀라웠다. 나에게 내 엄마의 젊은 모습은 사진 속에서나 있었다. 엄마는 내게 늘 허리 굽고 숨차하고 했던 말 반복해서 질리게 하는 노인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내게 엄마는 늘 늙어있었다.

엄마가 남자와의 연애에 달뜬 마음을 숨기지 못해 사진 속에서도 활짝 피어있는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아껴줬다고 여겼던 사랑하는 애인과 가난한 집안의 맏이라는 죄로 생이별을 당해야 했던 젊은 연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나는 왜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을까?

 

아버지가 땅이 많다는 이유로 엄마의 큰오빠는 밥은 안 굶기겠다며 엄마의 혼처를 정해버렸다. 약혼을 하고 뒤늦게 군입대를 하게 된 아버지의 사정으로 엄마는 꼼짝없이 3년을 기다렸다 마침내 결혼을 하고 시골로 내려와 농부의 아내가 되었다. 아버지는 연애(?)-단지 약혼과 결혼 사이 기간이었다)기간 동안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군복무를 하는 덕분에 휴가나 외출도 자주 나왔지만 그 전 엄마의 멋쟁이 애인과 함께 했던 나들이나 하다못해 영화관 가는 것 조차 하지 않고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밥이나 해달라고 하고 호시탐탐 엄마와의 동침(?) 기회만 노리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멋대가리도 없는 약혼자는 인물도 못나고 광대뼈 뛰어나오고 시커먼 얼굴이라 엄마는 아버지가 가까이 다가오는게 무섭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의 청춘은 시들어가고 시골 농부의 아내가 되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 치열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내며 지금은 여섯 손녀의 할머니가 되어 하루하루 늙고 병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그날도 나는 엄마의 병원진료 동행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엄마 집으로 가서 엄마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야했다. 동네 의원 진료 수준을 넘어서는 진찰과 치료를 위해 대학병원급의 진료를 하는 경우에는 예약부터 진료 전 과정에 내가 동행해야 하는 게 최근에는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요실금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변실금까지 시작되었다고 엄마는 하소연을 했고 곧이어 수영장 친구인 지인분이 효과를 봤다는 병원을 콕 찍어 거길 가야겠다고 한다. 의료파업으로 어쩔까 싶었는데 다행히 정상 진료 중이라고 한다. 예약을 잡고 해당 날짜가 되어 엄마를 모시고진료를 갔는데 노화로 인한 근육의 이완으로 수술을 권하지는 않는다고 의사는 말한다. 약물치료와 물리치료(기계의 보조를 받아 하는 케겔운동)를 통해 약간 증상이 완화될 수는 있으나 드라마틱한 차도는 없을거라고 한다. 실망스러운 표정의 엄마의 휘청거리는 걸음을 부축하며 병원을 나섰다.

집으로 모셔다 드리려고 가는 중 점심시간도 얼추 되었고 엄마의 기분 전환도 해드릴 겸 근처 저수지 근처의 식당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우리 엄마는 간장게장을 너무 좋아해서 간장게장을 사드리면 어김없이 밥 두 공기를 드신다. 이 날도 엄마는 간장게장에 밥 두 공기를 역시나 싹싹 비우곤 포만감에 약간 기분이 좀 풀렸는지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느라 식당에서 2시간 가까이 머무르게 되었다.

 

아버지와 내 남편의 무뚝뚝함과 답답할 정도의 말수 적음에 대해 두 모녀가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 내가 더 답답하다는 토로를 하던 중 갑자기 엄마의 옛 애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엄마 그 해군 아저씨, 아직 살아계셔?”

“누구?”

“있잖아, 그 해군 아저씨, 엄마 옛날 애인.”

“얘는... 누가 애인이야. 모르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근데 너 이거 니 아부지한테 얘기하면 안된다. 니 아부진 몰라.”

50년도 훨씬 전 연애사가 80대 중반의 남편에게 숨겨야 할 비밀이라고 목소리를 낮혀 속삭이는 80대 중반의 엄마에겐 아직도 그 찬란했던 청춘의 설레임이 아련하게 남아있다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에게 귀하고 유일한 존재 그자체로 존중받고 사랑받아봤다는, 그리고 뜨거운 열정으로 누군가를 가슴 설레고 깊이 사랑해봤던 그 또렷한 경험이 50년, 60년 세월이 흘렀어도 들키고 싶지 않은 소중한 추억으로 가슴 한켠에 묻어둔 채 이렇게 딸에게라도 수줍게 꺼내 보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 나까지 싱숭생숭해졌다.

 

굽은 허리로 숨이 차서 자꾸 자꾸 걸음을 멈췄다 걸어야 하고 변과 오줌이 나도 모르게 새서 자꾸 마음이 참혹해질 때가 더 자주, 오래 찾아오지만 지금 내 눈앞의 부석부석 메마른 엄마의 껍데기 그 깊은 속에는 찬란한 시절들이 켜켜이 쌓여 있음을 엄마가 진심으로 알고 계셨음 좋겠다.

 

댓글 1
  • 2024-04-22 19:39

    유유님 엄마의 찬란한 시절을 생중계로 보는 듯한 유려한 글솜씨세요.
    덩달아 저도 몇 장면이 떠오르는.... ㅎ
    엄마의 찬란한 시절과 변실금과 요실금을 대비시키니,
    인생 별거 없다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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