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랑을 하니까요"

꿈틀이
2024-04-20 22:36
38

1.

루시는 과거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 살 때를 회상하며 ‘제러미’라는 이웃 남자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 남자는 프랑스 귀족 출신에 예술가이며 동성애자이자 에이즈에 걸린 불운한 사람이었다. 어느날 루시는 이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창밖에 에이즈에 걸린 법한 비쩍 마른 남자 두명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나는 저들이 거의 부러울 지경이에요. 저 두 사람은 서로를 가졌고, 진정한 공동체로 결속되어 있으니까요. 그러자 그가 나를 보았고, 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다정함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 겉은 풍족해 보여도 속은 외롭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다.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 그날 그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리고 그는 친절했다 ‘그러네여’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쉽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정신이에요?’ 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나를 에워싼 외로움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p<54>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늘 외로웠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유년은, 물론 철없이 뛰어놀던 섬머슴 같은 기질도 있었다. 엄마는 항상 바빴고 보호받아야 마땅한 어린 딸을 귀찮아했다. 엄마는 농사일이나 동네 부역을 나가기라도 하면 옆에서 징징거리는 나를 밀어내고 짜증냈다. 나는 몇 조각의 이런 기억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엄마에게 요즘 ’오은영‘식 공감이나 정서적 안정 같은 건 절대 요구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놀다 학교 창문을 깨트렸을 때도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서 어찌어찌 해결 했었다. 두렵고 무셔웠지만 엄마가 무리없이 해결해 주리라 신뢰하지 않았다. 루시와 마찬가지로 나도 엄마에게 안전한 보살핌을 제공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열 살도 되기 전에 엄마는 아팠고 내 불안의 씨앗이 되었다. 나는 잘 모른다. 엄마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그저 결핍이 많았고 외로웠으며 단단해져서 살아남아야 하는 다짐밖에 없었다. 열 살 이후 엄마라는 존재는 사라졌고 그 이후 나는 엄마를 모른다. 하지만 불완전하지만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1.  

이런 내가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낳아서 우유를 먹이고 보살피는 일은 본능적으로 했었던 것 같다. 노동에 대한 인내심은 탁월했고 부당함을 참는데도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는 밥만 먹고 옷을 갈아입히고 잠만 재운다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우울했었다. 아이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주는 일에 대한 소중함을 알지 못했다. 늘 피곤했고 지쳐 있었다.

딸아이가 고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친구들과 문제가 있었고 꽤 심각한 상황이었다. 나는 항상 너가 좀 잘하고 이런저런 행동 하지 말고 말조심하고 이런 식으로 아이를 다그쳤다. 어느날 하루는 내가 하고 있던 공부가 너무 벅차고 힘들어서 지쳐 있는데 딸아이가 학교 다녀와서 어두운 표정으로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었다. 나는 그냥 방에 들어가라고 싸늘하게 밀어내고 거부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일생일대의 큰 실수를 저질렀고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학교 생활이 원만하지 않던 딸아이가 하소연 하려고 노크했을텐데 나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때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나는 엄마의 역할을 잘 몰랐다. 사랑을 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것을 줄 수 있는 에너지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인정한다. 그것을 인정한다.

루시는 어릴 때 사랑은커녕 거의 학대 수준으로 외로움에 내몰렸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서 내가 제일 의아해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루시는 어떻게 따뜻한 엄마가 될 수 있었을까? 엄마에게 사랑의 키스를 받아본 적도 없었는데. 그렇게 다정한 키스를 아이들에게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안다. 그것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하는 키스에는 뻣뻣함과 부자연스러움이 베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공감받고 인정받은 기억이 없는 사람은 상대에게 그런 향기를 뿜어낼 수 없다는 것을. 루시는 노력형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어쩌면 루시는 제러미나 그 친절한 의사. 세라페인, 남편 윌리엄 등 그녀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몇몇 사람들의 이해와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했는지도 모르겠다.

딸과 나의 관계는 지금도 뒤틀려있다. 딸이 대학생이 되었지만 우리는 따뜻한 모녀지간이 되지 못했다. 나는, 딸의 예의 없음에 분노하고 딸은 공감받지 못했다는 기억으로 지금의 나를 잘 보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 어긋났다.

 

3.

오늘 아침 밥을 먹다가 엄마를 떠올려 보았다. 나는 무슨 근거로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고 쓸 수 있었던 것일까? 아홉 살 때, 홍역에 걸려서 생사를 헤매일 때 엄마는 나를 들쳐업고 아버지의 담배 냄새나는 잠바를 둘러씌우고 보건소로 내달렸다. 비쩍 마른 그 여인에게 무슨 힘이 솟았는지 밤속 어둠을 물러 세우고 그렇게 날쌔게 걸음을 재촉했을까? 물론 해열제 정도 받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시골에서 그거라도 해야 엄마는 쪽잠이라도 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의 다 나아갈 무렵. 나를 혼자 방에 두고 부모님은 일하러 갔었는데 점심때쯤 두분 몫의 새참인 빵과 사이다를 당신들이 먹지 않고 나에게 가져다 주었었다. 밥을 먹다가 나는 거의 오열하는 수준으로 꺼이꺼이 울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 몇 조각의 기억으로 사랑을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루시처럼 불완전하지만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 그리고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가을에 농사지은 콩을 팔아서 바로 위 언니와 나에게 끈이 달린 예쁜 주름치마와 땡땡이 무늬 블라우스를 사주었다. 나는 엄마가 죽음을 예감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안다. 우리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간 것이라고. 그 여인의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해서. 아직 어린 딸들을 바라보는 그 여자의 마음이 어떠했을 거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나는 때론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쌕쌕거리던 나를 기억한다. 그 볼품없는 남편의 잠바를 어린 자식을 지키는 무기로 만들어버린 그 강한 여성을 이미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엄마도 아니었고 공감의 언어를 세련되게 사용할 줄 아는 엄마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아들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다 내탓인 것만 같고, 아들이 마음의 상처라도 입으면 나는 온몸으로 아프다. 딸에게도 그렇다.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훨씬 더 멋진 어른이 되었을텐데.. 불완전하지만 이것은 나의 사랑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정말로 아이들을 아프게 사랑한다.

루시의 말처럼 삶은 멈출 때가지 흘러간다. 우리는 그 흐름속에 자신을 세우며 그럭저럭 살아갈 뿐이다. 순간을 사는 동안 우리는 철학을 말하지 않고 가치관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외로웠고 사랑했고 미워했으며 이해했다. 또는 이해하지 못했다. 세라페인이 루시에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랑을 하니까요”<p124>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완전하지 않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외로움을 입안 틈속까지 채워 넣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댓글 2
  • 2024-04-22 20:12

    우리는 늘 불완전한 사랑을 하고,
    외로움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불쑥 존재를 드러내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랑 없이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하고, 아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살아가는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 2024-04-23 15:56

    인간은 본질적인 외로움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저만 외롭다고 징징거린거 같아 마음이 쪼~금 안좋았어요. 루시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사랑해준 몇몇사람들로 극복했을지 모른다는 글에 저도 공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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