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미리 덕질> 르귄의 말들(2)-주역이 여기서 나와?

기린
2024-02-2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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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귄의 문장에서 주역을 만나다

 

덕질세미나의 첫 책 르귄의 『로캐넌의 세계』를 책상에 올려놓고 야금야금 읽고 있다. 그간 해러웨이나 애나 칭이 언급한 르귄의 작품에 대한 찬사만 들었지, 본격 작품으로는 첫 작품이다. 그전에 덕질을 위한 참고자료로 에세이나 다른 책들을 훑어보면서 르귄 작품 세계의 매력에 점점 물들어가는 중이다. 그 중에는 위 책에 대한 머리말로 쓴 르귄의 에세이도 있다.

 

이 작품을 쓸 때 나는 SF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40년대 초와 60년대 초에 SF를 제법 읽기는 했는데, 그때 읽은 단편 및 장편이 내 지식의 전부였다. (....)나는 멋진 신세계를 탐험하면서 과도하게 조심성을 발휘했다. 주인공 로캐넌을 미지의 땅으로 아무 보호 없이 보내는 주제에 나 자신은 친숙한 모습들 사이에 피신해 있으려 들었다. 북구 신화의 조각을 사용한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저질러 버리라고, 내키는 대로 자신의 신화를 만들라고, 어차피 옛날 신화와 같아질 것이라고 격려해 줬어야 하는, 경험에 근거한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

 

내 세계에 주민을 채울 때도 마찬가지로 소심함이 작용했다. 엘프와 드워프. 영웅과 하수인. 남성이 지배하는 봉건주의 사회. 검과 마법이 존재하는 청동기 시대의 꿈속 세상. 국가 연맹. 당시 나는 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과학의 대부분이 사회과학과 심리학과 인류학과 역사학 쪽이 될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쪽 측면으로 매진한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 모든 과학을 사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알아내려 애쓰며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도.

 

르귄은 자신의 첫 작품에 대해 자신이 만든 세계의 한계는 물론 또다른 가능성까지 짚어주고 있다. 르귄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보면, 마치 이미 존재하는 듯한 어법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르귄은 다른 글에서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설계하는 것도, 조각을 모아 구성하는 것도, 분류해서 보관해 놓는 것도 아니다. 찾아낸 것이다.”(36) 르귄은 창작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행위 또는 창조에 대한 이런 태도는, 내 대부분의 책들의 근간이 되는 『역경』이나 도가 철학에 대한 관심과 같은 근원을 가지는 근본적인 것이다. 도가 철학의 세계는 혼돈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구성된 세계지만, 그 질서를 구성하는 법칙은 인류나 특정 개인이나 인격신이 강제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도덕적 법칙, 심미적 법칙, 그리고 당연하게도 과학의 법칙은 권위자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속에 깃들어 있어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 바로 꽂힌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내 공부의 근간에 동양사유가 있고, 더구나 양생과 관련 도가철학을 탐구하고 있는 이력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르귄의 SF에서 다루어지는 과학이 “사회과학과 심리학과 인류학과 역사학”이라는 부분에 이르니 르귄의 작품에 담긴 의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와 닿았다. 첫 작품에서 소심함의 결과라고 언급한 소재들이 그 후의 작품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남성 영웅 서사에서 벗어난 소재, 기존의 성별을 벗어난 인물, 힘의 대결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간의 갈등에 축을 두는 서사 등을 가리킨다. 그런 이야기들의 밑바탕으로 나열되어 있는 과학들은 그간 내가 해왔던 공부와도 연결지점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기대감, 오랜만이다.

 

르귄은 SF소설이 자신의 당대에 어떤 과정을 거쳐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직접 경험하면서 느낀 바를 에세이 주제로 많이 다루었다. 그러면서 동료 작가들의 작품을 언급하는데 그중에 필립 K. 딕 이라는 작가가 있다. 「겸허한 사람」이란 에세이는 이 작가의 작품에 대한 극찬이다. 카프카와 비교되기도 한다는 이 작가, “딕은 회피주의자도, ‘미래주의자’도 아니다. 예언자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는 『역경』이 예언서인 방식으로, 시인이 예언서인 방식으로 예언자다.” 라고 르귄은 평했다. 더 이상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도서관에 가서 그의 작품 『높은 성의 사내』를 빌렸다. 첫 장을 읽을 때부터 오잉? 했는데, 몇 쪽을 안 넘기고(27쪽) 등장인물이 주역(周易)을 꺼내 산가지로 점을 치는 것이 아닌가. 점괘는 15번괘 겸(謙)괘였다! 이렇게 주역을 다루는 소설을 만나다니~~, 올해의 덕질 세미나가 어떤 연결을 지어나갈지~ 알 수 없음, 그로인한 기대로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에 미세한 떨림? ㅋㅋ

 

덧붙임: <르귄의 말들>에서 찾은 1953년의 르귄의 사진,

자고로 덕질은 반하기부터 시작한다면, 참으로 반할만한 미모일세~~

 

댓글 3
  • 2024-02-24 08:49

    와, 반할만한 미모군요^^
    (음, 근데, 젊었을 때 한 미모 안 한 사람 없지 않아? 흣칫뿡!!)

  • 2024-02-24 20:59

    저도 르귄 읽고 있는데... 영감을 주네요 ㅎㅎ

  • 2024-02-27 22:52

    켄 리우의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를 읽고 있는데 르귄과 연결되어요. 역경이 인용되고 모티브로 쓰이고 흥미롭네요~ 나중에 나눌 이야기들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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